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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문학의 민속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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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연암문학에 대한 민속학적 접근

2. 연암문학의 민속적 성격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연암은 계층의 구분이 엄격하 던 봉건사회에 서민이 아닌 사대부로 태어났고,또한 국문이 아닌 한문을 수단으로 삼아 문학적 업적을 쌓았던 사실로 보아 民과 거리감이 크다고 말 할 수 있다.그가 비록 소품체 문장을 사용하면서 문체혁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어디까지나 한문학 내부 세계의 사건이지 백성의 삶과 직관되는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民을 중심으로 한 입장에서 연암을 바라보면,그는 한문을 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사대부에 속한 사람이기는 해도 국가 지배층 으로 군림했던 봉건적 문화의 향유자라고 할 순 없다.또한 그는 특수한 귀 족생활을 누린 적이 없고 도리어 민간의 이용후생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 이었다.연암의 문학은 민간의 생활과 풍속을 소재로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민중의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그의 글은 民을 이해 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고 民을 떠나서는 생명력을 상실 하고 말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民을 지칭할 용어의 선택에도 분석적 개념을 부여할 수 있다.‘민간’,‘서 민’,‘민중’등이 특별한 기준 없이 두루 쓰이기도 하며,‘서민대중’,‘기층민 중’,또는 ‘민간백성’같은 복합적 의미가 배인 말들이 학술용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이 문제에 관하여는 민속학 정립을 위한 초기 단계에서도 다 각적으로 거론된 바 있다.16)용어의 의미를 분석하면 대체로 민속학의 대상 이 되는 개인은 ‘서민’으로 사용하고 집단을 지칭할 때는 ‘민간’,나아가 이 것이 사회지배적 세력이라는 개념으로 성장된 명칭이 ‘민중’이라고 할 수 있 다.그러나 이와 같은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민속학의 대상층을 가리키 는 용어에 특별히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결론이다.이 논문 16) 김태곤 편, 한국민속학 , 원광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73, pp.179~230 참고.

에서도 개념상의 문제에 따라 여러 용어들을 굳이 통일시키지 않고 사용할 것이다.물론 연암도 그의 글에서 ‘人’이나 ‘民’외에 특정 단어를 집중하여 쓰지 않았다.

민생에 대한 관심을 문학의 주제로 부각시켰던 연암은 민속학이 추구하는 다수인들의 생활 문화에 접근하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다.비록 연암이 소 수 지식인 출신이었다 할지라도 다수 서민들의 삶과 문화를 자신의 문학에 여러 방식으로 반영시키고 있으며 그것이 문학의 중심주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그런 까닭에 연암을 민속학적 시각에서 관찰한다면 단순히 그가 사용한 문학 형태인 소설이나 傳만을 대 상으로 삼아 논리를 전개하기보다 실학적 총체로서 민중과의 접촉을 시도했 던 전반적인 사고와 표현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한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연암이 과거 응시를 완전히 포기하고 한 사람의 민간인이 되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던 삼십대에 썼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아래 두 글은 <酬素玩亭夏夜訪友記> 속에 함께 나오는 대목인데,연암 자신이 삼인칭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그의 제 자 李書九가 쓴 記 가운데 한 구절을 연암이 다시 인용한 것이고,나머지는 연암이 스스로 사대부의 체통을 내버린 채 살아가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 현해 놓은 것이다.

내가 연암 어른을 방문한즉,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17)

17) 余訪燕巖丈人 丈人不食三朝 脫巾跣足 加股房櫳而臥 與廊曲賤隸相問答. 燕巖集 , 卷之三 孔雀館文稿 <酬素玩亭夏夜訪友記>.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 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갈수록 등한하고 게으 른 것이 버릇이 되어,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 버렸다.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손님이 오 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과 예의염치에 대해 이야기 하였는데 간곡하게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 를,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 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그럴수록 더욱 느긋해 하며,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18)

그가 자발적으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어떤 예속에도 구애됨이 없이 서민 들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추구했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모든 예법에서 벗어나 일종의 기인처럼 사회제도에 저항하는 모습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은 것도 놀라운 일이려니와,당시 반상의 구별이 뚜렷했던 시대의 벽을 뚫고 행랑 사람들이나 땔나무 장수와 참외 장수 등 서민들을 직접 찾아가거 나 불러들여 먼저 이야기를 건네면서 그들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점은 대단히 파격적이다.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의 연암은 곤핍한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민중과의 접촉면을 넓혀 가고 있었던 것으 로 이해될 수 있다.19)이는 연암문학의 중요한 기틀로 작용할 요인이 된다.

연암이 서민대중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점은

18) 靜居無一念在意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益習疎懶 廢絶慶弔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客至 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人或讓其迂濶 無當 支離可厭 而亦不知止也 又有譏其在家爲客 有妻如僧者 益晏然 方以無一事爲自得. 燕 巖集 , 卷之三 孔雀館文稿 <酬素玩亭夏夜訪友記>.

19)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 돌베개, 2006, p.102.

이미 이십대의 청년 시절에 창작한 작품을 통해 밝혀져 있다.이른바 ‘初期 九傳’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소설들에서는 서민 군상들에 대한 애호와 긍 정적 인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20)구체적으로 초기 작품 의 인물로서 대표격이 될 만한 사람을 들어보면 엄 행수와 같은 부류이다.

그는 <예덕선생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기껏해야 마을에서 똥을 치고 그것을 거름으로 파는 천한 노동자에 불과한 인물이다.그러나 엄 행수가 이렇게 천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태도와 행위는 조금도 부끄러움 이 없고 도리어 글을 읽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연암은 이런 주인공을 가리켜 ‘이른바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위대한 은자’21)라고 찬사를 보낸다.

실존인물이 소설의 소재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작품도 상당수로서 <민 옹전>의 민유신,<김신선전>의 김홍기,<우상전>의 이언진 등이 대표적이 다.그들은 각각 잠시 무관을 지낸 사람,뜻을 펴지 못한 은둔자,요절한 역 관이다.소외된 여항인이었던 이런 인물들은 중세적 질서와 권위주의의 희 생자들이라 할 수 있는데,작품 속에 나타난 그들의 행위는 대개 특별한 체 험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일부로 되어 있다.22)민간에 생활의 터전을 두고 있는 주인공들의 일상이 작품의 주제가 되어 거기에 서민대중적 사회의식이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이 연암문학,특히 초기 소설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특성 가운데 민속학적 기반과 연결되는 중대한 사실은 이 소설들 을 비롯한 연암문학이 서민 중심의 주제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자 신의 작품집을 굳이 外傳이라 스스로 명명하고 正史와는 무관한,공적 삶이 아닌 사적 개인이거나 하잘것없는 사사로운 이웃에 관한 현실적 이야기를 20) 초기 9전은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김신선전> <광문자전> <우

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인데 뒤의 2편은 제목만 전하고 있다.

21) 豈非所謂穢其德而大隱於世者耶. 燕巖集 , 卷之八 別集 放璚閣外傳 <穢德先生傳>.

22) 김일렬, 앞의 책, pp.261~262.

다루었다.공적 인물에서 사사로운 개인으로의 변이를 시도한 것이다.23)작 품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서민대중을 의식한 상징성이 보이기도 하고,그 인물은 양반들의 위선과 대조되는 진실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암은 자신의 위치가 사대부의 반열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통 한 세상의 희망을 서민대중에게서 찾으려 했다.그래서 그는 서민을 주제로 삼아 민속의 세계로 들어갔고,거기서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었다.이는 결국 서민의 삶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민속학의 기본 방향과 태도에 부합하 는 결과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연암문학이 민속적 성격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끼친 두 가지의 학문과 그것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는 다음에 이어 제시할 민속 또는 민속학의 개념에 근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개념이기 때문이다.그 두 가지는 실학과 여항문학이다.

실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각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지만,현재의 명칭과 내용으로 인식이 굳어지게 된 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일반적으로 실학은 현실에 입각하여 실용과 실증을 중시하는 학문의 경향이라고 알려져 있다.특히 권력층의 사고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조선후기 지식인 들에 의해 활용되었기 때문에 성리학과는 일종의 대립적 관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학은 사실상 성리학을 태반으로 하여 발생된 것이다.구체적으 로 李晬光에 이어 실학의 연원을 마련한 柳馨遠의 견해를 압축하면,성리학 적 교양을 바탕으로 시대현실에 대처하려는 새로운 학문방향을 정립하게 된 결과로 인식하고 있다.24)실학은 성리학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바탕 23) 주종연, 「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소설에 대한 일고찰」, 어문학논총 6, 국민대학교 어

문학연구소, 1987, p.60.

24) 이우성, 「초기 실학과 성리학과의 관계」, 동방학지 15,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8,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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