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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의 미래지향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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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민속학적 관점에서 본 연암문학의 의의와 한계

1. 민속의 미래지향적 의미

지금까지 이 연구는 연암문학을 대상으로 삼아 그 속에 풍속과 구비전승 을 포함한 민속예술,그리고 의식주 생활이 어떤 양상으로 표현되었는가 하 는 점을 상세히 살펴보았다.이제 마지막 장에서는 표현된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고찰하도록 하겠다.이 의미에 관한 이해는 다양한 방향의 입장을 생산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필자의 태도를 먼저 밝 히기로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풍속과 넓은 의미의 민속예술,의식주 생활과 같은 목록은 민속학의 연구 대상이다.그리고 그 목록들은 민속학이 발생하기 이 전부터 존속되어온 ‘殘存文化’였던 것이다.따라서 연암이 자신의 문학에서 직접 다루거나 관심을 보였던 민속은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는 과거적인 잔 존문화일 수 있다.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연암문학의 민속도 과거의 민간전 승체 속에 있던 잔존 정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민속은 과거적이고 정체적인 잔존물이 아니라 ‘민간인’또는 ‘서 민’의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그들의 생활과 함께 무한히 생동해가고 있는 생활의 전체적 현상이다.1)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민속학 역시 지난날의 회 고 대상에 머무는 過去學이 아니라 현재를 거쳐 미래를 지향하는 現在學 이

1) 김태곤 편, 한국민속학 , 원광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73, p.41.

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민속학이 과학으로서의 비중이 강해질 수 있으려면 민속이 민간인들의 생활 내부에서 어떻게 작용하여 왔는지,그리고 일반 사 회와 문화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이미 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2)이에 따라 연암의 문학 이 제공해주는 민속을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현재와 미래의 관점으로 정리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이에 따라 필자는 이 연구를 통해 제시한 연암 문학에서의 민속이 단순한 잔존의 차원에서 벗어나 현재와 미래지향적 의미 를 띨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민속이 미래지향적 성격을 지닌 개념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위하여 風俗이 라는 유사 용어의 의미 확정이 중요하다.이 용어의 개념은 민속과는 달리 뚜렷한 현실 대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정작 풍속에 관한 본격적인 저작은 연암 자신이 아니라 그의 제자 이며 학문적 동지인 泠齋 柳得恭(1748∼1807)을 통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 냈다.영재 유득공이 편찬한 京都雜志 는 ‘風俗’과 ‘歲時’를 주제로 한양의 문물제도를 조사한 글이다.이 내용들은 민간과 사대부,또는 남녀노소를 가 리지 않고 소개한 것이어서 풍속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이후에 나온 열양세시기 와 동국세시기 의 모태가 되었을 정도로 높은 평판을 얻었다.그러므로 여기에 제시된 풍속의 목록들은 당시 풍속의 범위와 내용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서 연암의 풍속 인식과도 간접 적으로 연결될 자료가 될 수 있다 하겠다.

연암 일파의 풍속에 대한 관점은 자신들이 사대부 출신으로서 사회적 습 관을 이해하려는 입장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3)예컨대,‘건복’의 경우 “사대 2) 위의 책, p.44.

3) 여기서 경도잡지 가 서울의 풍속이라고 제시해 놓은 항목들은 하층민인 민중의 생활에 서 발견되는 습속이 아니라 상류층인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사례들이 주를 이루고 있 기 때문에 현대 민속학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풍속이다. 나경수, 「영재 유득공 경도

부들은 평상시 거처할 때 흔히 복건,방관,정자관,동파관을 쓰고,조관은 당건을 쓴다.그러나 노상에서는 모두 갓을 쓰고 당혜,운혜를 신는다”4)로 시작하여 “여염집의 부녀들은 녹색의 규의를 입는다.그러나 길에 나갈 때 에는 따로 하나의 옷으로 머리를 가린다”5)라는 내용으로 마쳤다.사대부를 중심으로 다루면서도 서민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보여 이른바 계층을 망라해 모든 습관을 살핌으로써 풍속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고 볼 수 있다.

연암의 글에서 풍속을 다루는 것은 단순한 소재의 사용이 아니라 연암그 룹이 지향하는 공통된 창조를 위한 방편이다.곧 중국과 같지 않은 우리 민 족의 삶을 묘사하고자 하는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이런 점에 서 풍속에 관한 근거의 상당 부분을 연암과 영재가 공유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경도잡지 의 내용을 연암문학의 민속적 기반으로 활용하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본다.그리고 민간의 풍속과 의식행사는 민속의 연총이라 할 만한 것이어서 이 부분의 정리를 시도한 것은 민속 전반에 관한 학적 영역 이 넓어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하겠다.6)

풍속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분야는 세시풍속이다.해마다 민간에 공통적으로 전승되는 의식과 행사들을 통틀어 일컫는 세시풍속은 비단 연암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경험하며 살았던 시대적 관행이었다.농경사회였 던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은 농사력에 따라 한 달도 빼지 않고 각종 행사가 계속하여 열렸다.그러나 근대사회로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농경 위주의 세시풍속은 현저하게 쇠퇴하여 지금은 설날과 추석이라는 양대 명절을 중심

잡지의 민속문화론적 가치」, 대동한문학 27, 대동한문학회, 2007, p.134 참고.

4) 士夫平居多戴 幅巾方冠程子冠東坡冠 朝士唐巾 街上俱用笠子 穿唐鞋雲鞋. 京都雜志 , 卷 之一 風俗 <巾服>.

5) 閭巷婦女 綠袿衣在 街上吊用 一衣羃首. 京都雜志 , 卷之一 風俗 <巾服>.

6) 인권환, 한국민속학사 , 열화당, 1978, p.30.

으로 재편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미 근대로의 전환기를 시작한 시대에 살고 있었던 선각자 연암은 자신 의 문학에서 세시풍속을 과도하게 늘어놓지 않는다.그러면서도 대보름날,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청계천 운종교에 나가서 다리밟기 풍속 행사를 함께 하고 퍼포먼스까지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지금은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당시의 사람들은 다리(橋)를 밟았으므로 다리(脚) 에 병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풍속을 즐겼을 뿐이지만,연암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친구의 건강을 생각하는 문학적인 의미를 담아 이런 풍 속의 소재를 사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민간의 의례도 연암문학의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통과의례 가운데 연암이 가장 관심을 갖고 비중 있게 사용한 것은 喪禮였다.특히 열하일기 에는 그가 중국에 갔던 길에 자주 상여 행렬을 보았고,어느 때는 조문객이 되기도 하여 중국의 풍속을 살펴보았다는 기록 이 남아있다.7)연암은 중국 사람들이 행하는 조문 때의 의례를 해학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풍습의 차이를 감안하면서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상여 행렬의 허례허식을 대하고서는 비판의 강도를 높인다.실용정 신에 입각하여 결코 미래지향적 풍속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것이다.

연암은 민간풍속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연암의 이러한 의식은 옳지 못한 풍속을 비판하는 글에서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그릇된 풍속으로 제기하고자 한 것은 여성의 순절이었다.연암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뇌와 함께 문학적 표현 전략을 사용하였다.자신이 직접 쓴 烈婦 事狀들과 <열녀함양박씨전>은 표면적으로 순절한 사람을 미 화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연암이 체제 안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면

7) 열하일기 의 성경잡지와 일신수필에 이 내용들이 나오는데, 연암은 상례의 행렬이나 상 갓집의 정황을 세세하게 묘사하였다. 이 논문의 III장을 참고할 것.

서 전통적 선비의 관념을 지켜온 사람이라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그런 해석 이 가능한 것이지,그의 의도와 글의 구조를 보면 순절 풍속에 대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연암은 인간으로서 스스로 지켜야 할 자발적 烈과,가문의 명 예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서의 烈을 구분하여,강요된 열을 거부하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다.8)풍속의 과거형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연암의 비판의식이 작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속이 새로운 미래지향성을 지니기 위한 방편 가운데 하나로는 예술적 승화를 이루는 길을 들 수 있다.연암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사례들로서 는 시속어와 설화 같은 구비전승들이 기록문학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든 지,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여러 종류의 기예들이 공연예술로 체계화하는 모 습 등이 보인다.연암문학은 이런 측면에서 민속예술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고 할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독특한 예술적 가치성의 문제 하나에 접근하려 한다.이것 은 연암이 평소의 일상을 통하여 보여주었던 생활 모습이 당시 풍속화의 대 상과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이는 과정록 의 기록과 김홍도의 풍속화 <포의풍류도>와의 연결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먼저 글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지계공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나는 화림(안의현 의 별칭)에 도착해 40일 동안 하풍죽로당에 거처했다오.당시 풍년이 든 데 다가 관아에 일이 없어 한가했으므로 사또(연암)께서는 일찍 업무를 끝내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객이 묵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오.그곳에는 예 스러운 거문고와 운치 있는 술동이,잘 정돈된 책들과 아담한 칼이 비치되어

8) 김수중, 「<열녀함양박씨전>에 나타난 정절의식 분석」, 한국언어문학 76, 한국언어문학 회, 2011,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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