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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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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문학은 실용정신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 민간의 삶에 대 한 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러나 실용과 민간이 라는 두 개념을 동시에 포괄하여 연암문학의 가치를 한 마디로 입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실용정신의 근거를 밝히는 이론도 시대현실에 따라 변화 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민간이라는 용어와 대상층을 포함한 문화적 성격 이해 역시 다양한 논리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암은 18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변환기를 살아가면서 사대부 출 신 문인으로 민간의 삶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백성이 역사의 중심 에 서는 시대를 의식했던 그는 민간생활 속에서 펼쳐지는 민속에 대한 관심 을 소설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글을 통해 세상에 표명하였다.따라서 연암 문학을 민속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에 접근하는 중요한 작업이 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문학을 민속학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그 까닭은 민속학이라는 학문의 성립이 연암보다 늦은 시기에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시간적 문제와,작가의 실용 추구적 노력을 민속적 연구 대상과 구별되는 것으로 보는 인식의 문제 때문이라 할 수 있다.이 논문에서는 시간적 문제의 경우,조선후기의 실학이 한국민속학의 태동에 바탕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을 수용하고 서구와 일본의 민속학 발전과 관련지

어 연결시켰고,인식의 문제는 민간을 위한 실용의 추구가 민속성의 반영이 란 입장에 서서 해결을 도모하였다.

구체적으로 연암문학의 민속학적인 분석은 풍속과 구비전승을 포함한 민 속예술,그리고 의식주라는 세 가지의 큰 분야로 나누어 이루어졌다.풍속의 경우,연암이 단순히 어떤 풍속을 작품 속에 다루었다는 소개에 그치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의 수용과 비판을 통해 민속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을 사용 한 것이다.풍속은 사회적 습관이며 일종의 풍기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민속 보다 변화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연암은 특히 중국 의 문화에 치우친 우리 고유의 풍속을 기록하고 발현시켜 진정한 조선의 풍 속을 살리기 위해 문학적 노력을 기울여 큰 성과를 얻었다.

연암이 풍속에 대하여 적극적 사고를 가졌다는 사실은 그의 글을 통해 입 증된다.세시풍속을 즐기며 음주가무와 퍼포먼스를 펼쳤다는 산문이 있고, 광대놀음의 민속적 전승을 알려주는 소설도 있다.또 그가 중국에 갔을 때, 혼례와 상례 등 민간의 의례를 세세히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그러면서 연암은 국가적 풍속에 대하여 결 코 우열을 논하려 하지 않는다.그에게는 우열의 판가름보다도 실용성 여부 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기 때문이다.문인은 풍속의 상대성을 자각하고 있 어야 하며,그것을 기준으로 백성들이 실제 생활에서 풍속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명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반면에,그릇된 풍속이라고 판단한 대상에 대하여는 비판을 가하는 합리 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대표적인 사례로 <열녀함양박씨전>을 통해 여인 의 순절 풍습을 비판한 경우를 들 수 있다.연암은 당시 사대부 가정의 전 통적인 윤리관을 존중하면서 과부가 수절하는 풍속은 자랑거리라고 여긴 반 면,남다른 절개를 보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순절은 과도한 행위로서 풍 속으로 정착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내면적 주장을 펼쳤다.그리고 <영사암

기>에서는 우리 민족 사이에 뿌리 깊이 퍼진 풍수지리설을 비난하였다.조 상의 덕을 기리며 화목하는 풍속을 파괴하고 자손들을 분열시키는 풍수지리 설이야말로 가문과 세대를 속이는 나쁜 풍속이라고 결론지었다.이 두 가지 는 각각 비인도적 풍속과 비과학적 풍속이라 할 수 있는데,연암은 비인도 적 풍속의 경우 사회적 인식을 감안하여 신중한 방식을 사용했고,비과학적 풍속의 경우에는 직접 비난을 가하는 적극적 자세를 취하였다.

구비전승에 관한 연암의 태도는 시속어,설화,민요들에 대한 관심에서 적 극성을 보여준다.당시 민간에서 두루 사용하는 언어인 시속어를 본격적으 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연암은 속담과 쇄담,그리고 우언 등에 가치를 부 여하였다.가장 눈에 띄는 것이 속담으로서 초기의 소설들에 다수 등장하고 있으며,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 에서도 조선식 한자어 속담들을 구사하여 해학적인 효과를 고조시키고 있다.자질구레한 은어들이 포함된 쇄담은 서 민 생활의 토속적인 분위기 묘사에 사용되었고,허구적 이야기를 빌어 자신 의 견해를 주장하는 우언은 <호질>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적절히 구사되어 구비문학의 영역을 확대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민간설화의 중요성을 인식한 연암은 초기의 소설에서부터 이를 적극 활용 하여 작품의 효과를 높이는 장치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그리고 열하일기 에서는 중국의 설화를 수집하여 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특히 설화 중에 중국의 사찰 연기담을 차용하기도 했던 연암은,훗날 자신의 대 표적 장편시에서까지 설화를 동원하여 민속적 성격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시대적으로 판소리가 생성되던 무렵,설화의 변용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점이라는 대목에서도 실험적 의의를 갖는다.

연암은 민요에 관심을 가져 서도민요 <배따라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그런데 그 내용을 분석하면 민간에서 구연되었던 민요라기보다는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공연되었던 <배따라기 극>과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

다.연암은 공연예술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조선의 傳 奇叟,중국의 說書人들의 활동을 매우 인상적으로 기록하였다.심지어 열하 에서의 환술 연희 관람 정경까지 상세하게 글로 남겨 놓았다.사람들이 허 황한 눈속임이라고 생각하던 환술도 중요한 기능을 가진 공연예술로 파악하 여 사회적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그리고 음악은 연암이 무척 사랑했던 예술로서 직접 연주하고 노랫말을 지어 부르기도 했으나,그것은 어디까지 나 전문 음악인들과의 교유 속에 이루어진 행위로서 민중예술과는 직접적 연결을 맺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음악과 달리 회화의 영역에서 연암은 시와 그림이 하나라는 ‘시·화일치’의 개념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며 민속예술의 경지에 들어선다.그가 시에서 보 여준 寫意的 분위기의 표출이나,沒骨이라는 회화기법을 추구하려 했던 일 들은 일종의 문인화풍의 구현일 뿐 민속적 성격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전원 풍경을 풍속화적으로 형상화하며 그 속에 서민의식을 함축시 키고 있는 점은 민속에 기반을 둔 예술적 작업이라 하겠다.연암의 한시 가 운데 상당수의 작품들이 소박한 농가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생생히 보 여주면서 그 당시에 활기를 띠고 나타난 金弘道 식의 풍속화를 연상하게 만 들었다.그리고 그의 산문에서는 동양화의 화법과 정확히 일치하는 묘사를 함으로써 연암문학 전반에 걸쳐 회화적 풍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특징을 확인시켜 주었다.

연암문학에는 의식주 생활의 양상이 도처에 표현되고 있다.연암 자신이 그리 높지 않은 지방 관직을 맡아 서민들과 가까이 호흡하게 됨으로써 계층 을 초월한 의식주 생활 표현에 유리한 조건을 얻었다고 하겠다.의생활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의관제도의 현황과 개선책의 제시라 할 수 있 다.연암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생활이 실용화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중 국의 의생활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주자가례의 법식을 따라 품위 있

게 보이려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으면서 청나라의 옷을 볼품없다고 무시하 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하였다.그런 정신을 갖고서 연암은 관복을 대신하 여 평상복을 입고 근무하기도 했다.일반 백성이나 하인 계층에 속한 사람 들의 의생활은 연암의 글 속에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매우 열악한 형편이 었음을 느낄 수 있고 신발도 없이 거의 맨발로 다녔다는 사실은 간접적으로 밝혀져 있다.연암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개선책 제시에 적극성 을 보여주었다.그 방편의 하나로 비단을 대신하여 면포에 염색을 해서 실 용적으로 민간에 널리 보급하도록 힘쓴 기록이 있다.

연암의 편지 33편이 실려 있는 연암선생 서간첩 에서는 여러 종류의 식 생활 모습을 여과 없이 공개하였다.대표적으로 연암 자신이 고추장을 직접 담가 단지에 담아서 다른 밑반찬들과 함께 자녀들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 다.거기에는 저미고 말린 포육,장볶이,곶감 등이 첨부되었다고 하였다.더 불어 된장과 간장을 매우 중시하여 다루고 있다.이 모든 것이 서민들의 식 생활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었음이 밝혀졌다.또한 애연가였던 연 암은 담배를 여러 글에서 긍정적으로 다루었으며,담배와 함께 짝을 이루는 술을 식생활의 한 축으로 삼았다.그러나 술을 무조건 찬양한 적은 없고 그 것을 사랑하되 경계를 늦추지 않는 분별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식생활에 서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는 민간에서 쓰이는 약재로서 연암은 그것을 적극 개발하며 권장하고 있다.민간의 삶을 염두에 두고 인도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식생활의 문학적 특징이라 하겠다.

주거 환경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담겨져 있는 것도 연암문학의 강점이 된 다.연암의 실용주의 정신을 실생활에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이 곧 주생활의 개선이라 할 수 있다.그는 특히 중국 기행 중에 서민들이 살고 있는 번듯 한 집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주거 환경의 변화를 다각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방식은 글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실용적인 건축물들을 직접 짓는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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