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연암시의 풍속적 성격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17-138)

IV. 연암문학에 나타난 구비전승과 민속예술

3. 연암시의 풍속적 성격

연암이 남긴 창작시는 불과 45수로서,그의 방대한 산문세계에 비해 매우 불균형적 빈곤 현상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그 시들은 비록 과작이라는 약 점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스타일과 특수한 회화성으로 인하여 산문 못지않 은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이 연구에서는 문학 예술적 측면에서 연암 시의 풍속적 성격을 살펴보고,거기서 발견되는 특성을 통해 민속예술과의 관련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유의해야 할 사실은 연암이 남겨놓은 시의 영역이 매우 특수한 성격 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위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선 창작시의 분량이 산 문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점을 들 수 있다.현존하는 연암의 시는 燕巖集

제4권 映帶亭雜咏에 수록되어 있는 32題 42首와 연암의 아들 朴宗采의 過 庭錄 卷四에 실린 13聯의 散句,그리고 근래에 들어 김윤조 교수가 발굴한

<輓趙淑人>,<送李懋官次修入燕 二首>가 전부로서 모두 34題 45首이다.후 세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유실된 것도 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71)그렇지만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연암이 이토록 적은 숫자의 한시 작품만을 남겨놓았 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이에 관해 과정록 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다.

선군의 시고는 몹시 적어서,고체와 금체시 모두 50수뿐이다.고체시는 오 로지 창려를 배웠는데 기이하고 험벽하기는 그보다 더 해서,정경은 핍근하 고 필력이 막힘이 없다.율시와 절구 등의 시는 항상 성률에 구속되어 마음 속에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셨다.그래서 왕 왕 한두 구절만 이룬 채 그만 둔 것이 많다.이무관의 청비록 에,“연암의 문장은 천하에 오묘하다.그러나 시에 있어서만은 삼가고 삼가 쉽게 발표하 려고 하지 아니하여 마치 포룡도의 웃음이 황하 강물이 맑아지기에 비견되 는 것과 같아,많이 얻어 볼 수가 없다”하였다.72)

연암 자신이 한시의 규율이 지닌 폐쇄성에 거부감을 느낀 것은 분명하지 만,규율 자체보다도 시에 관해서 지나칠 정도로 발표를 꺼리고 조심했던 71) 대표적인 예로, 과정록 에서 연암이 부인의 상을 당해 悼亡詩 절구 20수를 지었으나

원고를 잃어버려 볼 수가 없어 애통하다고 했고(先妣喪 有悼亡詩二十絶句 失稿不得承見 嗚呼痛惜. 過庭錄 , 卷一) 또한 연암이 지은 시를 하나하나 수록해 두지 않아서 그때그 때의 작품을 혹 남들이 외워 전해 주어서 얻었고, 흩어져서 얻지 못한 것은 또 몇 편이 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先君爲詩 未嘗一一收錄 逢場之作 或因人誦傳而得 其散 佚未得者 又不知有幾篇. 過庭錄 , 卷四).

72) 先君詩藁甚寡 古今體共五十首 古體則專學昌黎 而奇嶮過之 情境逼造 而筆力不窮 至於律 絶諸體 常病其拘束於聲律之間 不可直寫胸中所欲言 故往往就 一二句而止者 多矣 李懋官淸 脾錄稱 燕巖文章 妙天下 而於詩獨矜愼 不肯輕出 如包龍圖之笑比河淸 不得多見云. 過庭錄 , 卷四.

태도가 과작의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이덕무를 비롯한 주위의 문인 들이 시를 삼가는 연암의 자세를 최대의 희소가치에 비교하여 말하고 있으 므로 그 정도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그러나 연암은 열하일기 속에 시대 를 초월하여 중국의 정통 한시를 포함,무려 180수나 되는 시를 삽입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이런 현상을 감안한다면 그가 단순히 한시에 대한 거부 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연암의 글쓰기 자체가 이전의 틀에 박힌 형태를 뛰어 넘어 자유로운 산문 위주의 스타일을 지향하였던 점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함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연암이 작품 창작에 있어서 장르를 한정하지 않고 산문 속에 액자소 설,한시 등을 접목시켰듯이 시에 설화를 삽입하는 등 자유자재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이렇듯 한시에 대한 그의 과작 태 도와 장르의 파괴는 시의 제한된 방식에 자유를 부여하는 행동으로 인식되 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연암집 의 편집 방식도 시들을 형태별로 모으거나 시대별로 분류하지 않고 42수를 일괄하여 펼쳐 놓고 있다.그리고 시 모음 끝에 연암이 평소 시인으로 자처하지 않아 작품들도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는 점과,사람들 사이에 傳誦하는 것을 수집한 까닭으로 중간에 빠지거나 확정하지 못한 곳이 많다는 사실을 밝혀 두었다.73)이런 일들을 감안할 때 연암의 한시 전체를 분석하고 평가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연암 연구가 진행되어 오는 동안 연암시에 대한 관심이 산문에 비해 현저히 적었던 것은 사실이지만,일부 연구자들이 연암시의 사실적 표 현 기법과 회화성에 우선 주목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이를 근거로 하여 연암을 포함한 그 일파의 회화론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조 73) 燕巖集 , 卷之四 映帶亭雜咏.

금 더 폭을 넓혀 화법이나 기법을 중심으로 회화관 전체를 다루려는 움직임 도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74)

필자는 연암문학을 민속예술과 관련지어 검토하기 위하여 연암시의 풍속 성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이를 위하여 연암시 전반에 드러나는 회화적 성 격을 살펴본 다음,시에서 그려지는 시적 이미지가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으 며,민속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닌 풍속화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고찰 하려 한다.또 시와 더불어 연암의 산문 가운데 색채의식이 잘 나타난 연 암집 제7권의 鍾北小選에도 관심을 두기로 하겠다.그런데 종북소선 이라 는 별도의 필사본 책은 연암이 자찬한 것이 아니라 李德懋(1741∼1793)가 연암의 산문 10편을 뽑아 평점을 붙인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75)어찌된 연유로 연암집 속에 편집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연구에서 논하 기로 하고,여기서는 다른 연암의 자찬 산문과 동일한 대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76)

74) 이 방면의 연구 성과로 다음과 같은 논문들을 들 수 있다.

송재소, 「연암의 시에 대하여」, 연암연구 , 계명대학교출판부, 1984.

______, 「연암시 <해인사>에 대하여」, 한국한문학연구 11, 한국한문학연구회, 1988.

최숙인, 「조선후기 문학에 나타난 회화성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고연희, 「연암일파의 회화론」, 미술사학보 17, 미술사학회, 2002.

박수밀, 「18세기 회화론과 문학론의 접점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연행록연구총서 2, 학고방, 2006.

강혜선, 「법고창신과 박지원의 연행시」, 한국한시연구 3, 한국한시학회, 1995.

이종문, 「연암 박지원의 한시에 관한 한 고찰」, 한국한문학연구 39, 한국한문학회, 2007.

75) 박희병,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종북소선의 평점비평 연구 , 돌베개, 2010, p.13.

76) 이덕무가 엮은 원래의 책 종북소선 에는 연암의 산문 10편이 비평 대상으로 실려 있 으나, 박영철본 연암집 제7권 종북소선에는 <自序>를 포함하여 30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비록 편수는 많지만 원래의 종북소선 에 있던 글은 5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다 른 곳에 있던 글을 묶어 편집한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부친의 글에 대해 엄밀한 검토 없이 편집했던 연유이며, 그 불찰이 훗날 박영철본에 그대로 남게 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박희병, 위의 책, pp.261~262.

전통적으로 동양의 예술은 문학과 회화를 하나로 보는 인식 아래 이루어 졌다.이를 입증하는 것이 ‘詩·畵一致’라는 개념으로서,문인들은 그림을 대 하며 그것이 곧 문학을 형상화하는 이미지의 결집체라고 생각했다.이에 따 라 시와 그림은 하나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정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 개념은 중국 北宋의 郭熙,蘇軾에게서 비롯되었고,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의 李仁老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77)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연암의 시와 그림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이런 전통성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연암은 화가가 아니었지만 스스로 그림을 그릴 만큼 회화에 대하 여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그가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최숙인의 논문에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이 두 점이라고 밝히고 있 다.78)국화와 대나무,草蟲을 소재로 한 <菊花圖>가 그 하나요,매화와 수 선을 그린 <梅花水仙之圖>가 다른 하나인데 이들의 경향은 사실적 形似에 충실하면서 寫意的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고 하였다.79)‘사의’란 대상을 곡 진하게 그리지 않으면서도 그 대상의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장치이다.

시와 회화의 일치성이 깊은 경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개념 이라 하겠다.이와 관련된 회화적 기법으로 ‘沒骨’이라는 용어를 주시할 필 요가 있다.

연암은 자신의 시에 직접 이 회화적 용어를 사용하였고,그러한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썼다.‘몰골’이란 대상의 윤곽선을 처리하지 않고 물

77) 최숙인, 앞의 논문, 1988, pp.1~9.

78) 최숙인은 현전하는 연암의 회화 작품을 두 점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1980년에 출간 된 한국학 23집(중앙대 영신아카데미)에는 연암의 작품으로 <梅花水仙之圖>와 <松下 老仙聽瀑之圖>가 소개된 점으로 볼 때 연암의 현전 회화 작품은 두 점 이상일 것으로 보 인다.

79) 위의 논문, p.32.

상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채색하는 회화적 기법으로서 송나라 초기의 화가 徐熙에 의해 개발된 방식이다.다음에 인용하는 연암의 絶句 한 편을 통해 그가 생각한 몰골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난하의 맑은 모래 외로운 저 섬 속에

신세 좋은 해오라기는 티끌 한 점 안 묻었네 백이 숙제 사당 아래 서글피 섰노라니 서희처럼 몰골도를 그리고 싶어지네

灤水沙晴島嶼孤 鵁鶄身世一塵無 夷齊祠下悄然立 欲寫徐熙沒骨圖80)

열하일기 의 馹迅隨筆 7월 26일 조에는 연암의 일행이 연경으로 가는 길 에 난하를 건너 夷齊廟에 들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이 시는 이때 지은 잡영 으로 추측되며,제목이 없는 네 수의 절구 가운데 마지막 순서를 차지하는 작품이다.연암은 모래 섬 속에 노니는 해오라기를 바라보면서 서희의 몰골 도를 그리고 싶다고 읊었다.몰골의 개념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연암 은 해오라기를 보며 티끌 하나 묻지 않을 만큼 정절을 지켰던 백이 숙제를 떠올리는 寫意를 추구한 것이다.정작 그는 몰골을 직접 회화의 기법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사의적 문인화풍을 지칭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확대시 켜 사용했다.81)이런 점에서 연암은 회화의 기법을 문학적 차원으로 이끌어 오면서 예술적 일치라는 장치를 마련하고 그 경지를 더욱 높였다고 말할 수

80) 燕巖集 , 卷之四 映帶亭雜咏 <絶句四首>.

81) 고연희, 앞의 논문, p.200.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1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