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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식생활의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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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연암문학에 나타난 의식주 생활

2. 서민적 식생활의 반영

연암이 식생활을 주제로 삼아 음식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겨 놓은 일은 거 의 없다.그런데 연암의 일상에서 음식에 대한 기호나 취향을 민속적인 관 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있어 주목된다.그것은 연암의 편지 33편이 실려 있는 燕巖先生 書簡帖 으로서 기존 연암집 에 없는 자료들이 다.19)내용은 주로 연암의 개인사를 담은 것들이어서 문학적 구성이나 수식 과는 거리가 있으나 생활인으로서의 연암을 살펴볼 수 있고 민속적 자료가 될 만한 것이 많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높다.

그는 이 서간첩에서 자신의 의식주 생활 모습을 가식 없이 보여준다.며 느리가 보내준 도포와 버선을 신고 여러 사람 앞에서 뽐내며 누각에 올라 자랑하기도 했다.20)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의 두루마기를 제자와 돌 려 입으며 빨리 가져오라는 글까지 남겼던 것이다.특히 이 편지들에서는 무엇보다도 연암이 살아가면서 직접 경험하는 당시의 식생활이 곳곳에 드러

18) 熱河日記 , 盛京雜識.

19) 燕巖先生 書簡帖 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5년 박희병 교수가 번 역하고 주석을 달아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개, 2005)라는 제목으로 출판하 였다.

20) 新婦所送袍襪 卽地開着於光風樓上 誇示諸人 頗自愛翫. 燕巖先生 書簡帖 , 二 <寄家兒 平書>.

나 있다.다음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긴 음식에 관한 구절들을 모 은 것이다.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푹 익지는 않았다.

보내는 물건 포 세 첩 곶감 두 첩 장볶이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21)

전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조석간에 반찬으로 하니?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무람없다,무람없어.난 그게 포첩이나 장조 림 따위의 반찬보다 나은 것 같더라.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다.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 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을 인편에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22)

장을 담그는 일은 너의 누나 및 작은며느리와 상의하되 만약 (세 글자 빠 졌음)하다면 빚을 내어 담더라도 무방하다.23)

21) 椒醬一小缸覓送 置之斜廊 每飯喫之 可也 此吾手所自沈 而未及爛熟耳 脯參貼

柿餠貳貼 肉熬一箱

椒醬一缸 燕巖先生 書簡帖 , 四 <寄兒輩平書>.

22) 前後所送黃肉熬塊 考納而能爲朝夕供助耶 何不一示其好否 甚泄甚泄 吾則以爲勝於脯貼 肉 醬諸饌矣 苦椒醬 亦吾手所爲之 須詳示其善否 以爲續續兩物隨便繼送之地也. 燕巖先生 書 簡帖 , 七.

23) 沈醬事 與汝妹及次婦相議 如能□□□ 則雖出債沈之 無妨也. 燕巖先生 書簡帖 , 三十二.

당시의 식생활에 대한 보편적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 다.고추장은 신분에 관계없이 예로부터 반찬으로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독 특한 매운 맛과 영양소,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지금도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한국의 맛으로 세계에 소개되고 있 다.연암은 고추장을 자신이 직접 담가 단지에 담은 뒤 다른 밑반찬들과 함 께 자녀들에게 보냈다.그런데 자녀들은 연암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 답이 없다.그는 고추장을 손수 담갔음을 다시금 강조한 후에 맛이 좋다면 또 보내겠다는 뜻을 전했다.일찍 부인과 사별하고 객지에서 관직생활을 하 고 있던 외로운 노인이 고추장을 정성껏 담가 밥상에 올리고 자녀들에게도 보내주는 모습을 통해 따뜻한 정과 함께 식생활의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 다.

고추장의 역사는 고추의 전래 이후 시작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우리나 라에 고추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 서양의 고추가 들어왔다 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지금은 일본 전래설 대신,삼국시대부터 고추 가 존재했고 나아가 우랄 알타이 어족인 헝가리와 터키에서도 재배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우리 어족 계열의 민족이 이동할 때 가지고 다닌 필수 농산물 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24)이 설을 따른다면 고추장의 역사도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식생활의 다양성과 한국의 토착화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고추장도 장의 일종이라 한다면,장 담그는 최초기록은 三國志 <魏志東夷傳>에서 발견되고 구체적으로 고추장에 관 한 것은 세종 15년(1433)에 편찬된 鄕藥集成方 에 고추[椒]와 함께 초장이 나오는 것을 보아 그 시기에 이미 고추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5)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고추장은 가공의 필요 때문에 민간에 널리 보급되기는 어

24) 권대영 외 3인, 고추 이야기 , 효일, 2011, pp.76~77.

25) 위의 책, pp.141~143.

려웠을 것 같다.

그러나 고추장은 임진왜란 이후 왕실이나 권력층의 음식에서 벗어나 백성 들의 음식이 되어간다.연암의 시대 직후에 나온 여러 종류의 <농가월령 가>에서 고추장은 민간의 식생활을 장식하는 노랫말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6)서민의 반찬이 되어 있었던 고추장을 애용하던 연암은 그것을 직접 담그는 법까지를 익혀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볶이는 쇠고기를 재료로 한 반찬인데 연암은 이것도 맛이 좋다고 했다.

거기에 함께 언급된 포는 곧 脯肉으로서 저미고 말린 고기 조각을 가리킨 다.또 말린 반찬과 함께 간식으로 곶감이 나오는 것이 제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곶감 한 첩과 포 한 첩은 연암이 자신의 문학을 잘 이해해 주는 처남 이재성에게 신뢰하는 편지와 함께 보낸 음식이기도 하다.27)그는 스스로 이 런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친지와 벗에게 선물로 즐겨 보내기도 했던 것 같다.연암은 권세 있는 관직을 누린 것은 아니어도 공직에 몸담고 있었 으므로 일반 서민들에 비해 더 나은 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청빈하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품성에 비추어 볼 때 일반 서민들의 음식 수준 을 크게 뛰어넘는 정도의 먹을거리를 탐하지 않았을 것이다.연암이 추구하 는 식생활은 소박한 음식을 정성스럽게 담아 나누어 먹는 민속적 취향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이 경향을 자신의 문학작품 곳곳에 반영시켰다.

연암 개인의 식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정록 의 기록 을 간접적 근거로 삼은 것이다.그는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았다.그러나 아예 고기를 멀리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선비다운 명분이 작용하여 물리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다음의 내용을 보기로 하겠다.

26) 丁學遊(1786~1855)와 李基遠(1809~1890)을 비롯, 작자 미상의 <농가월령> 등에서

‘고쵸쟝’ ‘苦草醬’으로 표기된 가사를 찾을 수 있다.

27) 燕巖先生 書簡帖 , 六 <小安洞 靜案下>.

선군은 사사로이 도살한 고기를 드시지 않으셨는데,“고기 맛도 좋지 않 다”하셨다.연암협에 계실 때 그 고장 습속이 기러기 고기를 잘 먹었다.굽 거나 죽을 끓여 드렸는데 선군은 좋아하지 않으시면서,“사람들이 형제를 일 컬어 안항이라 한다.나는 매번 기러기 나는 것을 보고 매우 사랑스럽게 여 기는데,먹을 수 있겠는가?”하시고,물려서 드시지 않으셨다.일찍이 진지를 올렸는데 마침 두 마리 까마귀가 집안의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너 희들,반포를 하러 왔느냐”하시고,몇 조각 고기 살점을 떼어 뜰아래에 던 져주시자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과연 입에 물고 머금은 채로 있었다.이를 보 시고 한참을 처연히 계셨다.28)

그는 고기반찬을 먹을 만한 처지에 있을 때도 사사로이 도살한 고기를 들 지 않았으며,雁行이나 反哺之孝를 생각하면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없어 상 을 물렸다는 것이다.선비정신에 입각한 식생활의 반영으로서 호사스런 것 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품위 없는 음식도 가까이 하지 않았을 듯하다.연암의 식생활은 이런 점에서 소박하면서도 담박한 성격이 드러나 고 있다 하겠다.

연암이 또 관심을 갖고 빠뜨리지 않았던 것으로 고추장과 더불어 된장, 간장이 나온다.그는 일찍이 자신에게 연암협의 집터를 잡아주었던 절친한 동지 白東修(1743∼1816)가 강원도 인제의 기린협으로 이주할 때 정성을 기 울여 贈序를 지어 주었다.그 글이 <贈白永叔入麒麟峽序>인데 永叔이란 백 동수의 字다.연암은 영숙이 궁벽한 시골로 떠나는 것을 보며 그 뜻을 장하 게 여길망정 궁함을 슬피 여기지 않는다면서 ‘된장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28) 先君 不食私屠肉曰 肉味亦不佳 在燕峽時 鄕俗 慣食雁肉 煮羹以進 先君不悅曰 人稱兄弟 爲雁行 吾每見其飛行 甚愛之 而可食乎 遂却不食 嘗進食 見二鳥 集庭樹曰 爾爲反哺來耶 以數片胾 擲之階下 一鳥 果含而哺焉 見之 悽然久之. 過庭錄 , 卷四.

장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29)고 그의 식생활을 걱정하였다.‘아가위’는 산사 나무 열매로서 산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비록 조악하지만 이 식물로 가난 한 서민들이 소금에 절이고 장을 만들어 반찬으로 사용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은 예로부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구황음식이었다.장이 떨어진다면 식생활의 근원이 위협을 받는 것으로 인식해 왔던 것이 우리 민족이다.그 래서 각 가정마다 맛이 좋은 장을 담가 그것을 기술로 여기며 자랑해왔다.

특유한 장맛을 내는 기술을 가문마다 비법으로 여겨 공개하지 않았으며 그 기술은 대대로 전수되었다.봄철의 담수장,복중의 집장,초가을의 청태장, 엄동의 청국장 등 계절에 따라 담근 장들은 식생활에 변화를 주는 특별한 음식이었다.30)연암의 집에서도 장을 담그는 일에 매우 정성을 들이고 있음 을 보게 된다.딸과 며느리가 벌써 장 담그는 데 상당한 실력을 쌓고 있음 을 알 수 있으며,돈이 좀 들더라도 좋은 재료를 쓰고 충분한 양을 담기 바 라는 연암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연암의 음식에 대한 기호를 살펴본다면 담배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 이다.그가 담배를 즐겼다는 사실은 문학작품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담배를 주제로 한 본격적인 기록은 열하일기 의 太學留館錄 속에 나타난 다.8월 10일 丙辰日에 열하의 태학관에서 곡정 왕민호와 밤늦도록 나눈 대 화를 보면 연암은 담배를 퍽 즐길 뿐만 아니라 그 연혁까지 소상하게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곡정은 담배를 좋아하지 않으며 오히려 입이 당하는 재 액이라고까지 표현했으나,연암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구나 담배를 피우기 는 해도 부형들이나 어른들 앞에서는 그것을 삼간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이어서 그는 담배의 연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그 효력을 과

29) 食無塩豉 沈樝梨而爲醬. 燕巖集 , 卷之一 煙湘閣選本 <贈白永叔入麒麟峽序>.

30) 한국고문서학회, 앞의 책,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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