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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적 한계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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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민속학적 관점에서 본 연암문학의 의의와 한계

2. 민속학적 한계와 과제

지금까지 연암문학을 민속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면서 그에 따른 문제점들 도 아울러 대두되고 있음을 보았다.필자는 그 문제점들의 근본 원인이 연 암의 출신 성분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양반과 상민의 계층이 사회적으로 엄존하던 시대에 양반 출신 연암이 서민들의 삶을 주제 와 소재로 삼은 문학을 이루어내는 데는 여러 측면에서 분명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속학은 사회 구성원의 한 축인 상류층의 생활을 논외의 것으로 아예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소수 지식인들의 문화에 대한 다수 서민층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민속학인 만큼 소수의 문화도 상대적으로 이해하 지 않으면 학문의 완성을 기할 수 없게 된다.그런 점에서 연암은 출신 성 분상 소수집단에 속해 있지만,그를 통해 다수의 문화를 표현하는 일은 완 전한 결과에 이르게 하는 방편이 된다.무엇보다도 민속학과 구비문학을 기 록문학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선구적 지식인의 문학의식이 작용해야만 한다.

연암은 이 의식을 소유한 선구적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이 다수 서민층을 자신의 문학에 표현하는 데 있어 한계를 드러낸 점 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하나는 작가의 위치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도구의 문제이다.즉 연암이 서 있었던 문학적 삶의 자리가 어 딘가 하는 것과,글을 쓰기 위해 갖고 있었던 표현의 수단이 무엇이었나 하 는 점이다.

첫째,연암은 다수 서민들의 문화를 자신이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거기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시혜적 입장에 서 있었다.서민대중의 문화를 개선하여 실용적인 것으로 고치고,民의 개념을 고양시키려 했던 것이다.그 자체는 매우 긍정적인 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지만,연암 자신의 계급의식은

전혀 요동하지 않았고 오직 선비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선비란 바로 천작이요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라네 그 뜻은 어떠한가

권세와 잇속을 멀리하여 영달해도 선비 본색 안 떠나고 곤궁해도 선비 본색 잃지 않네 이름 절개 닦지 않고

가문 지체 기화 삼아 조상의 덕만을 판다면 장사치와 뭐가 다르랴16)

무릇 선비란 아래로 농·공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위로는 왕공과 벗이 된 다.지위로 말하면 농·공과 다를 바 없지만,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 기는 존재이다.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에 미치고 그 공 은 만세에 남는다. 주역 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온 천하가 빛나고 밝다”고 했으니,이는 글을 읽는 선비를 두고 이름인저!17)

위에 인용한 글은 연암이 20대에 창작한 <양반전>과 40대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원사>의 한 부분이다.모두 양반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내용 들로서 연암이 지니고 있었던 선비의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시대적 실용정신은 적극 추구하되,자신의 의식만은 선비의 위치에 굳건히

16) 士迺天爵 士心爲志 其志如何 弗謀勢利 達不離士 窮不失士 不飭名節 徒貨門地 酤鬻世德 商賈何異. 燕巖集 , 卷之八 別集 放璚閣外傳 <自序>.

17) 夫士下列農工 上友王公 以位則無等也 以德則雅事也 一士讀書 澤及四海 功垂萬世 易曰 見龍在田 天下文明 其謂讀書之士乎. 燕巖集 , 卷之十 別集 罨畵溪蒐逸 <原士>.

세워두고 그것을 과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양반전>의 서문에 해당되는 첫 번째 글에서는 선비란 하늘이 내린 지위 이기에 선비의 마음이 곧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뜻이라 하였다.이것을 버 리게 된다면 장사치와 다름이 없다고 했으니 士農工商의 서열 인식이 그 기 반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두 번째로 인용한 <원사> 역시 이런 인식이 변하지 않은 채 선비는 농·공과 같은 대열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 존재는 왕공에 미칠 바 아니라는 자부심을 드러내었다.40대 이후에도 연암 은 관직에 나아가 사대부로서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실용적인 창작에 매진했다.서민대중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서민을 위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며 민간의 삶과 관계있는 활동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는 자신에게 유리한 신분을 포기하고 계급의 폐지를 부르 짖거나 서민의 삶 속으로 온전히 투신하기 어려운 때였고,또한 연암에게 그런 사회적 운동력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연암은 문학인으로서 자신 이 그 시대에 할 수 있었던 일을 수행하며 서민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표명 함으로써 아직 기운조차 싹트지 않은 민속학의 개념 형성에 접근한 공로가 있다.그런 까닭에 연암의 한계를 현대 민속학 이론과 접맥시켜 비판한다는 것은 무리를 범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단지 연암이 그의 문학 속에 드러낸 민속들을 가리켜 ‘고급 풍속’이라 지 칭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고급 풍속이라 는 용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이것은 최근 논문에서 사용된 용어이 므로 이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그것은 경도잡지 가 주목한 것이 ‘고 급 풍속’이었다고 하는 주장이다.18) 경도잡지 의 체제와 내용상의 특징을 밝히는 자리에서 나온 용어인데,그렇다면 연암과 유득공의 관계나 성향을

18) 김윤조, 「경도잡지 연구 -저술 과정과 이본 검토」, 동양한문학연구 32, 동양한문학회, 2011, p.187.

감안할 때 연암문학에서 중심 대상으로 사용한 풍속들도 성격상 ‘고급 풍속’

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제시하여 논리 전개에 일관 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먼저,풍속을 고급과 저급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의 여부이며 다음으로,어떻게든 분류가 가능하다면 연암문학에서 풍속을 보는 시각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앞의 문제에 대 한 해결을 위해 우선 ‘고급 풍속’을 언급한 학자의 지론을 들어볼 필요가 있 다.그 주장은 이렇게 계속된다.“일반 백성의 풍속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 만,저자는 18세기 후반 문화의 다양한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9)이 내용을 보면 고급 풍속이란 일반 백성의 풍속만이 아니라 시대적 문화의 흐 름을 타고 있는 다양한 풍속들을 포괄하면서 사회적 관습으로의 승화를 의 식하고 있는 용어로 판단된다.

필자는 앞서 풍속의 의미를 규정하면서 사회적 습관,일종의 풍기라고 하 는 관점에서 풍속을 생활문화의 반영으로 보았다.그러므로 풍속이라는 의 미가 민속과 다르다면 사회의 관습으로 세워나갈 만한 풍기가 작용하고 있 는 개념이라는 점 때문이라 할 수 있다.만약 이분법적 사고를 발동시켜 일 반 서민들의 민속은 저급한 풍속이고 사대부들의 습관은 고급 풍속이라 생 각할 여지를 조금이라도 남긴다면 이 용어의 사용은 배제되어야 한다.서민 이든 사대부든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생활문화를 바로 세우려는 건강한 의식 을 갖고 전승하는 것들이라면 모두 고급 풍속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이 런 입장에서 나중의 문제를 대한다면 연암문학에서 언급하는 풍속은 지극히 건강하다.민족적이고 실용적이며,또 자신이 사대부의 위치에 서있지만 서 민과 함께 호흡하려는 의식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그런 점에서 연암문학 에서의 풍속은 고급 풍속이라 할 수 있겠지만 굳이 이와 같은 용어를 써서 19) 위의 논문, p.187.

풍속의 가치와 정도를 재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둘째,연암은 한글을 알지 못하고 한문만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 에 다수 서민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데 괴리가 있다.전형적 사대부의 문자 를 도구로 삼아 민간의 삶을 기록했다는 점이 민속학적 한계로 지적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이미 한글은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널리 쓰이고 있 었고 국문 문학작품도 그 가치가 높았던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연암과 뜻을 함께 한 가까운 벗 洪大容과 대조하여 보면 의 구심이 남는다.홍대용은 연암보다 15년이나 앞서 중국을 다녀와 한문본 湛軒燕記 를 썼다.더불어 국문본 을병연행록 을 남겼는데,작자가 어머니 께 보여드리기 위하여 연행길의 노정마다 꼼꼼하게 기술해 놓았던 것을 귀 국한 후 한문본과는 별도로 정리하였다고 한다.20)담헌 홍대용은 한글로 이 대형 기행문을 기록할 정도로 국문 사용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반면,연암 은 한글을 사용하여 작품을 남긴 사례가 전혀 없고 국문을 배우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그렇다고 해도 연암문학이 민속적이 고 토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연암이 무슨 이유로 한글을 깨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확실히 답 할 근거는 없다.도리어 그가 한글을 알고 있으면서도 국문 작품을 쓰지 않 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문학적 능력이 그처럼 출 중한 연암이 마음만 먹었다면 한글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그리고 그의 글이 의도를 교묘히 숨기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서 연암 자신이 한글을 모른다고 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전제에서 나온 추론이다.그렇지만 이런 논의들을 일소시킬 수 있는 한 줄의 글이 발 견되었다.

20) 홍대용, 소재영 외 3인 주해, 주해 을병연행록 , 태학사, 1997,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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