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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전승놀이의 수용과 문학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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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연암문학에 나타난 풍속

1. 세시풍속․전승놀이의 수용과 문학적 역할

연암의 소설,시,일반산문,기행문을 통틀어 민속학적 입장에서 가장 관 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할 것은 風俗이라 할 수 있다.이미 앞 장을 통해 풍 속의 의미를 밝힌 바 있는 만큼 그에 따라 풍속의 종류를 세시풍속과 전승 놀이,그리고 각종 의례를 중심으로 다루되 여기에서는 연암의 시각에서 살 펴본 조선과 청나라 풍속의 대조적 모습까지를 비교 고찰하려 한다.

먼저 연암 자신의 풍속에 대한 인식을 파악해 보기로 하겠다.연암은 일 찍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오래된 습관은 성품이 되는 것이 세속의 습성임을 깨닫고,풍속은 변화시키기 어려운 민족의 성품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

연암이 소유하고 있던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들은 풍속과 관련된 비유로 서 세상에 알려진 것들이 많다.그는 우리나라의 문장에 관해 그 융성함을 알려 한다면 미천한 역관들에게서 그것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 기 위해 <自笑集序>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복식에 관한 풍속을 예로 들 어 보였다.

습관이 오래되면 성품이 된다 하는데,시속의 습관을 변화시킬 수야 있으 랴?우리나라 아낙네의 복식만 해도 자못 이 일과 서로 비슷하다.옛 제도에 는 허리띠가 있었고,모두 넓은 소매에 긴 치마를 입었었다.그러던 것이 고 려 말에 임금들이 원나라 공주에게 많이 장가들면서부터 궁중의 머리 모양

과 복식이 모두 몽고의 오랑캐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당시 사대부들이 다투 어 궁중의 모양을 사모하여 드디어 풍속을 이루고 말았다.지금에 3,4백 년 이 되도록 그 제도를 고치지 않아,저고리는 겨우 어깨를 덮고 소매는 마치 감아 놓은 것처럼 좁아서,요망하고 창피하여 참으로 한심스럽다.그러나 여 러 고을 기생들의 복식에는 도리어 아름다운 제도가 남아있어,쪽을 지어 비 녀를 꽂고 원삼에는 동임이 있다.이제 그 넓은 소매가 넉넉하고 긴 허리띠 를 드리운 것을 보면 맵시가 있어 기뻐할 만하다.지금에 비록 예법을 아는 집이 있어 그 요망하고 경망스런 습속을 변화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려고 해 도,습속이 오래되매 넓은 소매와 긴 띠는 기생의 복식과 흡사하다고 여길 터이니 소매를 찢고 띠를 끊어버리며 그 남편을 욕하지 않겠는가?1)

연암은 禮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해야 하듯이,부인 옷의 고아함을 보려 면 오히려 고을 기생들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수백 년 전에 궁궐을 중 심으로 퍼졌던 몽골풍의 습관이 이미 오래되어 일종의 성품처럼 되어 버렸 고 오히려 고아한 옛 풍속은 궁중에서 멀리 떨어진 기방의 복식에만 남아있 음을 지적하였다.이와 같은 경우에 비추어 볼 때,문장의 융성함을 찾기 위 해 미천한 관리인 역관의 글을 보아야 하는 것처럼 비근한 풍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연암은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연암의 문학 속에는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주로 전승되어온 풍속과 설화 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당시의 계급적 사회제도와 현상을 생각한 다면 사대부 출신의 문인이 이런 풍속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 1) 習久則成性 俗之習矣 其可變乎哉 東方婦人之服 頗與此事相類 舊制有帶 而皆濶袖長裙 及 勝國末 多尙元公主 宮中髻服 皆蒙古胡制 于時士大夫爭慕宮樣 遂以成風 至今三四百載 不 變其制 衫纔覆肩 袖窄如纏 妖佻猖披 足爲寒心 而列邑妓服 反存雅制 束釵爲髻 圓衫有純 今觀其廣袖容與 長紳委蛇 褎然可喜 今雖有知禮之家 欲變其妖佻之習 以復其舊制 而俗習久 矣 廣袖長紳 爲其似妓服也 則其有不決裂而罵其夫子者耶. 燕巖集 , 卷之三 孔雀館文稿

<自笑集序>. 여기서는 정민 번역, 비슷한 것은 가짜다 , 태학사, 2000, p.150을 인용하 였음.

운 일이다.또한 한문으로 기록한 글에서 풍속을 언급하기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한문은 유학의 이념을 재도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 이다.일찍이 이와 같은 점을 깨달은 일제 말기의 한 학자는 연암의 저작이 다른 古文家의 저작과 비교하여 적어도 세 가지의 특색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했다.

官號地方을 되도록 朝鮮서 通用되는 그대로 써서 決코 中國式으로 고치거 나 古號로 대신하지 않는 것,朝鮮 傳來의 風俗 習慣을 많이 記錄하고 또 그 固有의 古諺 俚語를 많이 使用한 것,朝鮮서 傳해 오는 野談史話 等을 많이 探取한 것,以上의 세 가지가 交響되는 곳에만도 朝鮮의 鄕土色이 相當히 높 지 안할 수 없으려니와 그래도 그 세 가지는 종시 조그만 形式에 지나지 못 하고 있다.그의 글을 보다가는 무엇이라고 꼭 指摘하기는 어렵지마는 漢土 의 그네들과는 자못 같지 안한 呼吸과 脈搏이 들리어지고 있는 것같이 느끼 어진다.2)

중국과 다른 진정한 조선의 것을 살리기 위하여 연암이 사용한 방식이 바 로 고유한 풍속을 기록하고 발현시키는 일이었다.위에서 제기한 세 가지 특색이 바로 이런 것들이어서 글 속에 나오는 이름들을 중국식으로 고치지 않은 것,조선의 풍속과 속어를 많이 사용한 것,전래의 야담류를 글 속에 다수 취한 것 등을 예리하게 적시했다.

연암의 글 속에는 풍속과 세시,그리고 민속에 포함시킬 각종 요소들이 풍부하다.전래의 습관을 비롯하여 속담과 같은 時俗語,야담류 등이 가장 적합한 자리에 사용된 것은 민족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의 결과라 평가할 수 있다.풍속은 생활문화의 거짓 없는 반영인데,유학정신에만 철저하던 학자

2) 洪起文, 「朴燕巖의 藝術과 思想」, 朝鮮日報 1937.7.27~8.1 사이에 연재된 것을 한국한 문학연구 11, 한국한문학회, 1988, pp.184~185에 전재하고 있음.

나 문인들은 이 민족문화에 대해 우활하고 냉담하였던 것이 사실이다.3)연 암은 그런 고루한 의식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민간의 풍속을 모든 글의 바탕 에 둠으로써 민중적이고 향토적이며 민족적인 문학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민간의 풍속 가운데 먼저 주목을 받을 만한 분야는 세시풍속과 전승놀이 라고 할 수 있다.유득공의 경도잡지 에서는 세시와 풍속을 독립적이면서 도 연결되는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그 내용 가운데 여러 전승놀이가 자연스럽게 뒤를 따르고 있는 형국이다.4)이 풍속들을 즐기는 사람은 많았 지만 정작 세시와 놀이를 글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 다.

연암은 이 점에서 다른 문인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그의 글 속에서는 세시풍속과 전승놀이가 자주 소재로 사용되고 있으며,그것을 지키고 즐기 는 행위가 민간에서 대단히 가치 있는 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애쓴 흔적을 남겼다.연암의 초기소설인 <예덕선생전>은 주인공을 소개하는 자 리에 설날의 풍속을 보여주면서 사람과 풍속을 결부시켜 독특한 효과를 얻 어내고 있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 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 로 갈아입고,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5)

3) 양재연 외 3인, 한국풍속지 , 을유문화사, p.3.

4) 京都雜志 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風俗, 歲時라는 제목 아래 각종 행사와 놀이 등이 기록되었다.

5) 歲元日朝 始笠帶衣屨 遍拜其隣里 還乃衣故衣 復荷畚入里中. 燕巖集 , 卷之八 放璚閣外傳

<穢德先生傳>.

<예덕선생전>에서는 주인공 엄 행수의 인물됨을 표현하면서 그가 특수한 때를 당하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만,평소에는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산다고 하였다.여기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도리에 관하여 설날의 세시풍속을 예로 든다.특수한 생활행위이며 의 례적인 명절의 행사를 언급하고 이를 잘 지키는 것이 민간의 행동임을 말하 고 있는 것이다.

연암과 그의 동류들,이른바 ‘연암그룹’도 명절이면 함께 모여 거리에 나 가 세시풍속을 즐겼던 것 같다.연암은 어느 달 밝은 밤에 청계천 雲從橋에 나갔다가 6년 전에 있었던 추억을 회고한다.그는 회고의 시점이 정월 대보 름날이었음을 밝혔다.연암 일행은 대보름의 풍속에 따라 그것을 한창 즐기 며 음주가무를 했고,흥이 더하자 마치 奇行이라 할 만한 퍼포먼스까지 펼 쳤던 일이 있다.

드디어 현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이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혜풍 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 강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한지 모르겠다.6)

그날 대보름에 즐겼던 추억으로 연암은 세 가지를 꼽았다.연옥이 운종교 위에서 춤을 춘 것,백석의 집에 가서 차를 마신 것,그리고 혜풍이 매우 우 스운 퍼포먼스를 펼친 것 등이다.연옥은 柳璉(1741∼1788)이라는 사람으로

6) 遂歷叩玄玄 益飮大醉 踏雲從橋 倚闌干 語曩時 上元夜 連玉舞此橋上 飮茗白石家 惠風戲曳 鵝頸數匝 分付如僕隸狀 以爲笑樂 今已六年 惠風南遊錦江 連玉西出關西 俱能無恙否. 燕巖 集 , 卷之十 別集 罨畵溪蒐逸 <醉踏雲從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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