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역사적 고찰
2.5. 우리나라 영어교육사에 대한 재해석
초기 영어교육의 동기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해야 하는 데 역관이 필요했 다는 점에 착안한 역관 양성이라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영어교육은 관에서 주도하는 관주도형과 미국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선교사 주도형 등 두 갈래로 발전했다. 전자는 정치적인 변화가 너무 극심했다는 점, 근대식 학교에 대한 경험부족, 입학자격의 제한, 학생 과 주도관청모두 역관양성이라는 실용적인 목표에만 치중했던 점등의 이유 로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고 학교자체가 영속성을 지니지 못했다. 반면에 선교계 학교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입학생의 신분적인 차별이나 제한을 두지 않았고, 학교교육에 대한 경험과 사전지식이 충분했으며 선교에 대한 분명한 목적과 인내와 희생정신도 충분한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교사라기 보다는 신앙심에 투철한 선교사로서 조선에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띠고 신의 명을 받고 왔다고 생각 하여 삶의 질이나 봉급보다도 학생들을 사랑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계 학교가 잘 운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즉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떨어져 나서 자라면 가지에 새 떼가 앉는다”는 말과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으면 온 가루가 다 퍼진다”란 경전의 교훈을 믿고서 그들 은 벼슬군을 가르친 것도 아니고 장사군을 가르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인간이 먼저 인간되라”는 교육이었다.15)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고는 좋은 국민도 좋은 교사도 없고 좋은 관리도 없다는 교육사상을 가르침의 근본으 로 하고 있으니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보다 성공할 수밖에
15) 이만규(1989), 조선 교육사, 을유 문화사, p.77
없었던 것이다. 또한 참 교육에 대한 초창기의 근대화 계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게다가 한국 영어교육사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 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본래 조선에 기독교 전파라는 임무의 한 수단으로 교육을 택했던 것이지 진정으로 조선을 위한 교육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들의 교육사상만큼은 현 시대의 교사들에게도 충분한 귀감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곧 역사적 사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닌가 생각 한다. 교사의 가치관이나 교육관이 무엇이고 얼마나 확고한지는 지식 전달 에 앞서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거 선교사들의 정신 은 지금의 교사들이 인정하고 배워야 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시기의 학교들은 모두 직접 교수법(Direct Method)을 택하고 있 다.16) 이러한 직접 교수법은 구두훈련을 강조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전 제조건이 요구된다. 첫째, 교사는 외국어를 유창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 다. 둘째, 학생 각자가 충분히 구두연습을 하기 위해 학급당 학생수가 적어 야 한다. 셋째, 구두연습 때문에 교실활동이 많아야 하며 교실활동의 원활 을 위해 적어도 주당 5시간의 수업이 필요하다.17) 직접 교수법의 전제조건 첫 번째는 교사가 결국 학생과 동일한 국적 즉 학생과 교사가 모두 모국어 가 동일하다는 의미를 갖는데, 당시의 교사들은 외국인(미국인)들로서 영어 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간에 의사소통이 매우 어려웠
16) 이것은 학습자의 모국어 사용은 전혀 없고 배우고자하는 외국어를 직접 사용 함으로써 어린이가 말을 배울 때 이용하는 과정과 같다고 하여 자연 교수법 (Natural Method)이라고도 칭한다.
17) 신용진(1984), 영어교수 학습이론의 실제, 한신 문화사, p. 43
을 것이고 교수-학습진행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두 번째 전제조건은 학급당 학생 수에 관한 문제인데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유추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아 펜셀러가 1886년 6월 8일에 배재학당을 개원하면서 당시의 사정을 기술한 것이다.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 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 버리고 또 한 학생은 6월은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버렸 으며, 또 다른 학생은 가족의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18)
우선 6명이 전교생인 것으로 보아 전제조건 두 번째는 충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조건 즉 주당 5시간의 수업 필요성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전교생 6명중의 3명이 개교 직후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에 나 오지 않았다는 점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영어를 배우겠다는 강한 동기가 부여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초창기 영어교육사를 보면 양반집의 자녀 라면 당연히 보수성향이 짙었을 것이고 때문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 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넉넉한 집안의 아이들이 아니라 숙식이 당장 어려운 가난한 집 아이나 고아들이 그 해결을 위해 입 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영어를 배우겠다는 목적과 동 기가 뚜렷하거나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다음 자료에서 확인될 수 있다.
18) 손인수 외(1993), 교육사 신강-교육의 역사적 기초, pp.106-107
언더우드가 접촉하게 된 일부의 남아(男兒)들이 처해 있는 실정으로 보아 그는 고아원설치의 필요를 느꼈다. …처음에 들어 온 것은 모두 남아(男兒)였고, 얼 마 지나지 않아 이 기관에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게 된 아이들의 수가 40명 이상이 되었다.19)
따라서 이 당시는 영어 독해력이 있는 한국인이 없어서 미국인 교사가 그것도 영어공부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동기가 없는 외국 학생을 상대로 직접 교수법을 사용한 것이 결론적으로는 수업의 어려움과 많은 시간낭비 를 초래했던 것으로 짐작되어 이 교수법은 당시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영어교육 초창기에는 이런 교수법이 불가피한 선택이었 고 교수법의 조건에 합당한 점도 있었음이 인정된다.
이 직접 교수법은 소규모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모국어인 영어로 자연 스럽게 구두학습이 이뤄지는 미국 학교의 수업 광경을 떠오르게 한다. 다 시 말해 직접 교수법은 모국어 수업시간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적절한 교수법인 것이고 따라서 영어가 외국어인 우리나라에서 영어수업이 직접교 수법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따르게 되는 셈이다. 지금도 이 와 비슷한 상황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선진 외 국의 교수법이나 교육여건을 똑같이 소화할 만한 수준이 못되는데도 불구 하고 많은 모방으로 부작용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결국 이러한 방법들이 실제로 우리에게는 맞지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19) 손인수, 앞의 책, p.109 선교사들의 구호는 “teaching, preaching, and healing"
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활동의 주된 동기는 포교활동을 위한 전초전으로 교 육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순수 한국적인 것, 즉 내 것을 영어로 써서 세계에 알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하고, 내 제품을 영어로 알리며,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는데 영어란 우리에게 도구적 차원에서 실용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구에 대 한 모방만이, 또한 그들의 충고를 경청하는 것만이 방법이 아닌 것이다. 우 리나라 환경에 맞고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목표에 부합된 교수방법이나 교 재, 수업시간 수 등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초창기의 영어교육이 그 태동기를 겨우 넘긴 상태에서 조선은 일제의 식 민지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영어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한국어마저 도 허용하지 않고 일본어만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어교육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암흑기에 빠지면서 초기의 영어교육은 계속성을 잃고 중단되고 말았다.
1901년에서 1907년 사이에 한 동안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는데…당시 영어를 가르치지 못한 이유로 영어를 배운 신여성들이 서양사람들과 통해서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세론이 있었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인 관리들이 한국을 통 치하면서 눈에 가시 같던 선교사들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라고도 한다.20)
위의 사료로 볼 때 선교사들은 그들 본래의 목적인 선교사업에 한해 일 본과의 충돌 혹은 절충의 길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에 영어교육은 상당히 등한시될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정규학교 교육에서는 교수언어가 일어였 기 때문에 당연히 영어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20) 이화 80년사, 앞의 책, p. 67
그러나 식민지 한국에서의 일본의 정책은 이렇게 혹독하게 한국어는 물 론 영어도 말살하면서도 일본본토에서는 1922년 영국인 Harold E.
Palmer(1877-1949)를 문부성 언어학 자문관으로 초빙하여 1923년 영어교육 연구소(Institute for Research in English Teaching)를 창설하고 그를 본 연구소 소장직에 위임시켰다. 그는 어휘선택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1930년 중학교 교과서용 영어어휘 3,000개를 초안으로 제시하였고 이듬해 The First and Second 500 most frequently used words를 제안했다.21) 이 것이 바로 영어 교과서에 어휘수를 학년별로 제한하는 해방 이후의 한국
Palmer(1877-1949)를 문부성 언어학 자문관으로 초빙하여 1923년 영어교육 연구소(Institute for Research in English Teaching)를 창설하고 그를 본 연구소 소장직에 위임시켰다. 그는 어휘선택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1930년 중학교 교과서용 영어어휘 3,000개를 초안으로 제시하였고 이듬해 The First and Second 500 most frequently used words를 제안했다.21) 이 것이 바로 영어 교과서에 어휘수를 학년별로 제한하는 해방 이후의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