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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그림자가 뒤를 돌아보다

문서에서 제4차 산업혁명과 국토발전 (페이지 47-55)

사시사철 어느 때나 가면 좋은 곳이 있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가을이면 가을, 겨울이면 겨 울. 그곳에 가면 마음이 서늘해지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곳. 보령의 성주사지와 부여군 외산 면의 무량사라는 절이다.

쌀 씻은 물이 10리나 흘렀던 성주사의 성쇠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사찰 성주사는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聖住 山) 아래에 있다.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바로 성주사라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1960년에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확인되었다.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 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며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 주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가 김양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였고 주 지가 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의 기록에 따르면 성주사는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한 다. 미루어 짐작하면 성주사의 규모는 천여 칸에 이르렀을 것이다. 성주산파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은 한때 약 2500명의 승려들이 모여 도를 닦았을 정도로 번창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피해

성주사지 전경

를 입은 뒤 중건하지 못한 채 폐사지만이 사적 제307호

김시습과 한명회의 일화

만수산 입구에 서 있는 나무장승은 여전히 변함없다. 하나둘씩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세워지는 장승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김시습(金時習)을 만나러 갔다. 김시습은 500여 년의 세월 저편 에서 부도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시습은 자 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으로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고, ‘한 번 배우면 곧 익힌다’라고 하여 이름도 시습이 되었다. 당 시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장래에 크게 쓰겠다”라는 전지도 받았다. 그는 13세까지 수찬 이 재전과 성균관 대사성 김반, 그리고 윤상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해 예기와 제자백가 등을 배 우다가 그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 에 태운 뒤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관동지방과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과 전 주,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전주에서도 그가 한겨울을 보냈 다는 연유 탓인지 전주객사 동익헌 쪽에 매월당이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채 흔적이 없다.

김시습은 31세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 집의 당호를 매월당이라 이름을 붙인 후 그곳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여러 책들 을 지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여러 절들을 전전하던 김시습은 47세가 되던 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기도 했으나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 의 길에 나선다.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 폐위 사건을 일으킨 한명회와 김시습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서울의 압 구정동에 남아있다. 압구정(鴨鷗亭)은 당시 세도가였던 한명회가 한강에 화려한 정자를 지은 뒤 명나라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인 예겸에게 청해 받은 이름이다. 그곳을 찾아온 시인묵객들이 경 치를 감탄하는 현판들을 걸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自首臥江湖”

압구정에 놀러가 이 현판을 들여다보던 김시습이 이 글을 다음과 같이 고쳐놓았다.

“청춘에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靑春危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自首汚江湖”

김시습이 扶를 危로, 臥를 汚자로 고치자 그 글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럴듯하다고 하였다. 나중 에 이 현판을 본 한명회는 결국 현판을 떼어내고 말았다.

시대의 방랑객 김시습

시대와 불화 속에서 한세상을 초개처럼 보낸 김시습을 위하여 선조는 율곡 이이에게 ‘김시습 전’

을 짓게 했다. 이이는 김시습을 일컬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 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 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서 스스 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경청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기 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융통하 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남음이

있다.”

다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 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라면서 불우했던 그의 한 평생을 애석해 했다. 김시습은 50대에 이르러서 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가 구석 구석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 든 곳이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 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 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버릴 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였다.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 는 없지만 불만이 가득한 김시습의 초상화가 지나 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59세에 무량사 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므 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 두었다가 3년 후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 시습의 안색은 생시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 식으로 다비를 하였다. 이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 웠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은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 를 사모하여 학궁 곁에 사당을 지은 뒤 청일사라

이름을 짓고 그의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김시습 부도

김시습 초상화

오래된 인연이 닿는 곳, 무량사

무량사 부도밭에서 무량사로 가는 길은 나무가 총총히 우거져 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는 당 간지주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무량사가 보인다. 그윽하고도 기품이 넘친다. 무량이란 셀 수 없 다는 표현으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것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무량사다. 내가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순간마저도 셀 수 없는, 지극히 오래인 그 인연 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수산 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사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고승인 무염국사가 머물렀다고 하지만 범일국사(810~889)는 문무왕 재위기간(661~680)과 훨씬 동떨어진 후대의 인물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명주 굴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기 때 문에 그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때 크게 중창한 것으 로 보인다.

조선시대엔 선승으로 이름이 높은 김제 출신의 진묵대사가 이 절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였고, 만수산 기슭에서 나는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며 몇 수의 시를 남겼다.

무량사 일주문

“하늘을 이불 땅을 요 삼아 산을 베개 하여 누웠으니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서쪽바다는 술항아리가 되도다.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내 장삼을 천하곤륜산에 걸어두도다.”

그러나 진묵대사는 당시 조선에 휘몰아쳤던 기축옥사로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을 때 그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았던 정여립과의 관계가 있을 법한데 아무런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산대사 휴정이나 사명당 유정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온몸을 다 바쳐 나라 를 위해 일어났을 때에도 진묵대사는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 대해서만 은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던 것을 우리들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진묵대사는 이 절과 완 주 서방산의 봉서사 그리고 모악산의 수왕사를 비롯, 전라도 일대의 절들에 기행과 술에 얽힌 일 화들을 많이 남겼다.

무량사 부도군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뿐이고

무량사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화재를 입었으며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다. 천왕문 을 들어서면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뒤 에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보물 185호)은 창건 당시부터 이 절을 지켜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완만한 지붕돌과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룬 채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주는 모습의 처 마선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장하리 삼층석탑, 은선리 삼층 석탑과 같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 탑의 제1층 몸돌에서는 금동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발견되었고, 5층 몸돌에서는 청동 합 속에 들어 있는 다라니경과 자단목 등 여러 점의 사리장치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 린 것을 인조 때에 중건한 무량사의 대웅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

또한 이 탑의 제1층 몸돌에서는 금동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발견되었고, 5층 몸돌에서는 청동 합 속에 들어 있는 다라니경과 자단목 등 여러 점의 사리장치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 린 것을 인조 때에 중건한 무량사의 대웅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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