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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이 판매전선에 나서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88-97)

연구원이 판매전선에 나서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허원도

년대는 우리나라 전자산업 분야의 대변혁기였다. 도 입된 기술을 바탕으로 제조된 TV, VTR, 냉장고 등 이 해가 바뀔 때마다 수출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금 빛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전자업계는 불안했다. 머지않아 브라 운관을 사용하는 CRT-TV가 PDP나 LCD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 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TV가 주력제품인 삼성, 엘지, 대우 뿐만 아니라 부품·소재를 제조하는 회사도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 었다. 이것은 사실상 아날로그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 찬가지였다. 내가 30년 간 몸담았던 S전자공업(주)도 예외가 아니었 다. 이 회사는 핵심 전자소재인 페라이트를 생산하는 전문회사이다.

매출의 50% 이상이 CRT-TV용 페라이트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

연구원이 판매전선에 나서다 85 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지 않으면, 회사의 존립 자체 가 흔들릴 위험에 놓여 있었다. 당시 연구소장인 나에게 밀려오는 중압감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디지털 기기는 늘 새로운 기술을 요구한다. 그 중 하나가 ‘제3의 공해’

라고 불리는 전자파 장해(EMI; Electro-Magnetic Interference)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종 전자기기에서 발생한 부수적인 전자파가 그 자체 또는 다른 기기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미국, 유럽 등이 이에 관한 표준 기준을 만들 때만 해도, 우리는 선진국의 수입 규제책 중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라이트 산업을 대표하는 선진 기업들은 카탈로그에 이미 전자파 장해에 대한 평가방법과 대책용 부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우리는 일본의 H사에 관련기술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제 막 개발된 신기술을 우리에게 쉽게 내줄 리가 없었다. 우리는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시장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힘으로 기술을 확보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제조기술을 외국에 의존한다는 것은 남이 잡아준 물고기를 먹기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물고기 잡는 법을 알아야 자력으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과학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원천기술을 가진 연구원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독자적인 개발능력을 갖출 수 있을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장 먼저 연구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연구소 내에 ‘페라이트

아카데미’라는 세미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한글로 된 전문서적이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원문서적을 복사하여 교재로 사용하니 진도가 나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구원들도 금방 싫증을 냈다. 또한 고액의 강의료를 지불하고 대학교수를 초빙했으나 산업체에서 필요한 설계기술을 이해 하고 있는 분은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해외에서 엔지니어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수개월 동안, 우리에게 꼭 맞는 엔지니어를 찾아 여기 저기 수소문 했다. 그 결과, 한 일본인 퇴직기술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서 재료의 화학조성을 찾아가는 기초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것은 재료 연구자라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지식이지만, 학창 시절에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수준이 낮았다는 걸 의미한다.

우여곡절 끝에 기술고문에게 배운 설계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페라이트 조성을 찾는 실험을 시작했다. 원래 조성을 찾는 실험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연구자의 집념과 끈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실험이 진행되는 단계마다 섬세하게 관리하고 지켜보아야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연구원들은 이러한 자세와는 거리가 있었다. 실험에 정성을 쏟지 않았으니 재현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동일한 조성으로 합성한 분말이 만들어질 때마다 매회 다른 측정값이 나왔다. 이때마다 기술고문은 연구 자세를 지적하며, 재실험을 강요했다. 연구원들의 노골적인 불만도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실험해서 어느 세월에 새로운 재료를 개발하겠냐는 것이다. 우리의 구태의연한 실험습관을 바꾸는 데는 많은 저항이 뒤따랐지만, 페라이트 원료를 설계

연구원이 판매전선에 나서다 87 하는 원천기술을 하나씩 익혀나갔다.

마침내 우리가 배운 설계기술로 투자율이 2000 수준의 Ni-Zn 페라이트 분말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페라이트 분말 설계 기술을 배움과 동시에 세계 수준의 EMI 대책용 페라이트 분말을 자력 으로 개발한 것이다.

당시 우리 연구소의 연구개발 성과는 판매실적으로 평가를 받았다.

내부 규정에 따르면, 개발이 완료된 해를 포함해 3년 이내에 판매까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3년은 결코 여유로운 기간이 아니었다.

EMI 대책용 페라이트 중에서 시장이 가장 크게 형성되어 있는 분야는 전자파 흡수체용 페라이트 타일이다. 이것은 전파암실(anechoic chamber)의 내부 벽재에 사용된다. 국제표준인 10m법 전파암실은 그 규모가 얼핏 학교의 강당 크기에 버금갈 정도로 크다. 이곳을 시공 하기 위해서는 100㎜×100㎜ 크기의 페라이트 타일이 대략 4~5만 장이 필요하다. 이 시장은 가전산업처럼 매월 일정 물량을 꾸준히 주문 받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축 산업과 같이 갑작스러운 주문에 신속히 대응해야 했다. 따라서 반복된 습관이 몸에 밴 기존의 영업직원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었다.

페라이트 타일의 주 고객은 전파암실 설계전문회사이다. 이들은 국제 공인기관으로부터 인정받고 전파암실을 주문받아서 설계하고 시공한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전파암실 설계회사는 미국의 IBEX, PANASHIELD, RANTEC, 영국의 CHASE, 독일의 Rohden & Schwarz, 일본의 TDK,

TOKIN,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세계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하여 새로운 설계전문회사가 속속 설립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표준 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전자부품연구원 등의 연구기관과 삼성전자, 엘지전자, 현대자동차, 등의 대기업이 이미 전파암실을 1기씩 보유 하거나 설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파암실에 대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설계회사가 없었다. 이 때문에 설계부터 시공 및 인정심사까지 모든 과정을 해외의 전문업체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된 전파흡수체용 페라이트 타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설계전문회사가 승인하고 구매까지 해줘야 한다.

우리는 한 전파암실 설계회사에 우리가 만든 페라이트 타일을 소개한 카탈로그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회신을 받았다. 회신 내용의 포인트는

‘판매실적이 있으면 알려주세요.’였다. 이 질문은 제품의 품질 신뢰성을 판매 실적으로 평가하겠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암담했다. 누가 우리에게 판매실적을 만들어 줄 것인가!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도입한 300톤 짜리 유압프레스는 현장에서 녹슬어 가고 있었다. 40m 길이의 대형 터널 킬른(tunnel kiln)은 수개월 째 속절없이 공회전만 하고 있었다.

킬른은 설비의 성격상 가동을 완전히 중단하면 재가동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월례회의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대책을 요구 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93년도 봄, 서울의 모 호텔에서 일본의 종합상사인 T사가 전파 암실에 대한 홍보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당시에 일본에서 그리드 (grid)형 페라이트 타일이 발명되어 특허를 획득했다. 이 획기적인

연구원이 판매전선에 나서다 89 형태의 타일은 종래의 타일에 비해서 전자파 흡수 주파수 대역이 넓고, 감쇄특성도 훨씬 개선된 것이었다. T사는 이 제품의 특허 사용권을 확보하여 전파암실 설계·시공 사업에 신규로 참여했다.

일본의 전파암실 전문설계회사는 대부분 페라이트 사업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자재 수습이 매우 원활했다. 반면에 종합무역상사인 T사는 페라이트 타일을 원활히 공급받을 수 있는 소스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침 세미나에서 우리 회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T사의 간부가 세미나에 참석한 우리 직원에게 출국 전 연구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나를 만난 그들은 페라이트 타일을 제조할 수 있는지 물었고, 우리가 허용한다면 수일 내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의 생산라인을 보고 싶다고 했다. 우선 생산라인을 견학하기 전에, 우리가 만든 페라이트 타일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상대로 그들은 돌아가자마자 샘플을 요청했고, 평가가 바로 이루어 졌다.

평가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타일의 직각도와 수평도에 문제가 지적 되었지만, 전자기적 특성은 만족했다. 기구적인 문제는 생산과정에서 개선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전자기적 특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페라이트 분말의 품질이 우수하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주문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기대가 클수록 복병이 있기 마련이다. T상사는 우리에게

하지만, 기대가 클수록 복병이 있기 마련이다. T상사는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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