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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지대에 숨어있는 돌발변수를 기억하라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61-68)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돌발변수를 기억하라

ReSEAT 전문연구위원 성기웅

백년을 연구 인생으로 보낸 삶의 공간은 다양한 실험실들이 었다. 실험실은 늘 같은 형태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대학시 절 머물렀던 실험실은 단순한 일반화학 기초실험 공간이었다. 교육 을 하며 지낸 사관학교 실험실도 마찬가지였다. 좀 특별했던 공간 은 연구소의 전문 실험실이었다. 각각 고분자화학, 방사선화학, 방 사화학, 원자력수화학, 부식방식화학을 연구했던 실험 공간이었으며 모든 실험실들이 나름대로 특별하였다. 긴 세월동안 머물렀던 다양 한 실험실 공간들에 대한 당시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고 있다.

문득 떠오른 추억 하나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나라 월성에 두 번째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되면서 수소원자의 동위원소인 삼중수소 (tritium)가 발생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삼중수소는 원자로 계통으로부터 제거되어야할 방사성 쓰레기로만 취급되었다. 이에 대비하여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는 삼중수소 제거공정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었다. 삼중수소에 관련된 과학기술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다. 그러던 중에 삼중수소가 쓰레기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산업적 이용성이 매우 커서 예상보다 엄청난 부가가치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이 원소에 대한 흥미와 관심도가 점점 높아졌다.

삼중수소는 자체에서 튀어나오는 전자가 인(phosphorus)을 발광시켜서 형광등보다 약 5배 정도나 수명이 긴 자발광체의 원료로 쓰인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도 전천후 비상구 표지판이나 야광시계 등에 사용된다.

군사용 조준경에도 쓰인다. 공항에서도 널리 쓰이는데, 활주로 유도등과 감지기가 없는 액체폭탄을 검색대에서 걸러내는 역할도 한다. 일상 속이 아닌 여러 가지 전문 분야에서도 삼중수소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하수나 바닷물이 시간에 따라 어디로 이동했거나 얼마나 섞이는가를 추적하는 수문학(hydrology)이나 백혈구 검사나 호르몬 분석 또는 독성 영향 연구에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DNA 성분과 결합하여 증식하는 세포의 양을 분석해주기도 한다. 이들로 인해 삼중수소의 부가가치가 순금의 약 700배에 해당됨을 알게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삼중수소는 중수소의 원자핵과 융합되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 인류가 오랫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돌발변수를 기억하라 59 동안 꿈꾸었던 에너지 공급원인 핵융합 발전의 훌륭한 소재인 것이다.

이 에너지원은 온실가스뿐만 아니라 방사성물질이 발생하지 않는 친환경 무공해 에너지를 무한대로 제공해줄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다. 삼중수소에 관련된 더 많은 선진 과학지식과 기술을 알고 싶은 욕구가 점점 더 커졌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고 했던가! 삼중수소 연구개발 현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을 순 없었다. 이리저리 방법을 찾기 시작한 뒤에 시간이 꽤 흘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랬다! 마침 일본 과학기술청 과학자교환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 신청하면서부터 앓던 이가 빠지는 속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1980년대 중반에 바다 건너 도착한 곳은 일본원자력연구소 삼중수소 화학 실험실이었다. 삼중수소 전문가가 핵융합장치 내의 삼중수소를 담는 용기와 배관이 삼중수소를 흡입하여 변화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당시에 첨단적인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있는 실험실 이었다. 모방연구 단계에 있던 우리나라 연구자에게 뜻밖의 좋은 기회가 찾아와준 것이었다. 이런 행운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었다. 삼중수소 취급 시설과 실험 장치들을 직접 다루어보았다. 삼중수소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가급적 많이 습득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공동연구 결과들은 핵융합 학술지인 Journal of Fusion Engineering and Design에 논문 1편 및 원자력 재료 학술지인 Journal of Nuclear Materials에 3편이 게재되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에서도 삼중수소 화학 실험실을 구축해보려는 꿈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실험하는 도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삼중수소 화학에 대한 기초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삼중수소의 물리학과 화학, 그 중에서도 특히 분석화학에 초점을 두었다. 삼중수소 기본실험 시스템과 분리·농축·저장 시스템 및 회수·오염제거 장치기술들과 폐기물 처리방법 등에 대한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국내에서 일일이 수집하고 정리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을 텐데, 다행히도 필요한 상세기술 정보들을 짧은 기간에 확보할 수 있었다.

과학자 교환 프로그램 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동안 모은 학술자료와 기술정보들을 떠올리면서 신바람이 절로 났다. 연구소에 돌아와서 삼중수소 화학 실험연구를 혼자라도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심감과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삼중수소 화학 실험실을 꾸며 나가겠다는 꿈도 생겼다.

연구소에 돌아온 후, 이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가장 먼저, 삼중수소를 취급하기 위해 방사선 장애방어 감독자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다. 6주간의 교육기간 내내 맨 앞자리가 늘 나의 지정석이 되었다. 그만큼 의욕을 갖고 열정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이걸로 삼중 수소 화학 실험실 구축을 위한 첫 번째 준비가 끝났다. 다음으로 삼중 수소 실험실을 갖추기 위한 연구 과제를 기획하였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및 핵융합 장치에 요구되는 삼중수소 화학 연구에 대한 과제기획서도 차질 없이 완성되었다.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돌발변수를 기억하라 61 삼중수소 화학 연구과제와 실험실 구축에 대한 기획안을 발표하고, 이에 대해 연구팀 동료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일단 동료들 모두 삼중 수소가 앞으로 쓸모가 많은 물질이라서 삼중수소 화학분야의 연구를 해볼만하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직접 삼중수소 화학 연구에 동참 하겠냐는 질문에는 소극적인 반응이었다. 삼중수소라는 방사성 물질을 다뤄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도 방사성 물질 취급을 위한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뜻 연구에 나설 자신감이 없었을 것이다. 앞길이 구만리였다.

결국 의논 상대를 바꾸었다. 삼중수소 화학 연구과제에 동의만 하면 힘을 실어줄만한 선배 연구자들에게 찾아갔다. 그 중 한 선배가 과학 기술부의 연구개발 담당관을 찾아가 볼 것을 제안했다. 해당 담당관을 만났는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삼중수소가 국제원자력 위원회의 규제대상 물질이라는 것! 맙소사! 중성자탄 원료와도 관계가 있어 매우 민감한 문제라고 한다. 향후에 기회가 생기면 다시 논의해 보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따로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모은 삼중수소 자료는 평화적 이용에 대한 내용만 담겨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첩첩 산중이었다.

다시 선배 연구자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이번엔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개발 성장단계에서는 월성 삼중수소 제거기술 개발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이 당시의 현실적인

상황과 타협하는 유일한 방향일 것이란다. 그러면서 삼중수소 화학 연구과제와 삼중수소 실험실 구축은 일단 다음 기회로 미뤄두는 게 낫지 않겠냐며 조심스레 조언해 주었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삼중수소 화학 연구과제와 실험실을 확보하려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연구과제 추진과정에서 오판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되짚어봤다. 나의 계획에 대한 설득력이 모자랐던 걸까? 아니면 의사소통 채널이 미흡했던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떠올 랐다.

삼중수소 화학 실험실을 구축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는 관련연구 과제와 연구비 및 방사성물질 취급 관련 교육 이수자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은 연구개발을 둘러싼 예상치 못한 외적인 돌발변수들을 미리 고려하는 것이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부분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원자력, 특히 삼중수소를 둘러싼 국제사회 환경과 잠재된 규제요소들을 충분히 고찰했어야 했다. 다시 말하면, 연구개발의 외적인 인문·사회학적 환경이나 상황들에 내재된 돌발변수들이 사전에 심사숙고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시지탄이었다.

거의 다 도착해서 문지방을 넘지 못한 것이다.

삼중수소 화학 연구과제와 실험실 구축의 꿈이 무산된 경험은 그 이후에 나의 실험실 인생에 큰 귀감이 되었다. 연구개발 과제와 실험실을 확보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두뇌공간으로 드론을 띄웠다.

그리고 연구-외적 특성을 포함해 3차원적 사고가 필요한 상황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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