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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자의 주변 인물

문서에서 순원왕후 언간의 국어학적 연구 (페이지 31-35)

Ⅱ. 순원왕후 언간의 현황과 특징

2. 발‧수신자의 관계 양상

2.2. 수신자의 주변 인물

언간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반드시 존재하는 문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데 가장 근간이 되는 언간의 주체는 발·수신자다. 이 언간의 국어학적 고찰을 위해서는 발신자인 순원왕후와 수신자들과의 관련 양상을 검토할 필요가

34) 헌종실록 권1, 憲宗 卽位年 11月 18日 己卯.

있다. 특히 경어법의 변화 양상인 경우 수신자들과의 관계와 수신자들의 사회적 위치 등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지는 양상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왕실과 사대부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언어적 특징의 변화 양상을 검토하기 위해서도 발신자와 수 신자의 관련 양상은 연구의 기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리는 이후 진 행되는 국어학적 분석의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발신자는 당연히 순원왕후(1789∼1857년)35)이다. 순원왕후는 1789년(정조 13 년) 5월 15일 생으로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36)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주로 혈연과 혼맥을 기본으로 형성되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계도가 필요해 보인다. 가계도는 아래 표와 같다.

위의 가계도 상에 등장하는 인물 중 <순원왕후언간>의 수신인으로 밝혀진 사 람은 바로 셋째 딸인 덕온공주와 둘째 사위 김병주 그리고 셋째 사위 윤의선이

35) 列聖王妃世譜 권9, 「순조대왕비 순원왕후」253,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妃이다. 1834년(순조 3 4년) 11월 13일 순조가 승하하고, 1834년(헌종 원년) 11월 18일 헌종이 즉위하고, 7년(74개월) 동안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모두 66회의 차대를 열었다. 또, 순원왕후는 1849년(철종 즉위)부터 1851년(철종 2년) 12월까지 3년(31개월)간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1857년(철종 8년) 8월 4일 68 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36) 지두환(2009), 앞의 책, 256∼258쪽. (1남은 효명세자(孝明世子)로 풍양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과 혼인하였다. 효명세자는 아들인 헌종(憲宗)이 즉위한 뒤에 왕(익종)으로 추존되었고, 먼 훗 날 어머니 풍양조씨는 신정왕후가 된다. 2남은 어려서 죽었으며, 1녀 明溫公主)는 안동인 동녕 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과 혼인하였고, 2녀 복온공주는 안동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 疇)와 혼인, 3녀는 덕온공주로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과 혼인하였다.)

<표-9> 순원왕후의 가계도

다. 총 96건의 언간 중 이 세 사람이 수신자로 남아 있는 자료는 총 38건이다.

막내딸 덕온공주(1822〜1844년)37)는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셋째 딸로, 헌종의 재위 시기인 1837년(헌종 3년)에 생원 윤치승(尹致承)의 아들 윤의 선과 혼인을 하였다. 이후 덕온공주가 13살 되던 해인 1834년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고 3년 후(삼년상을 치름) 16살에 혼례를 치러 궁을 떠나 시댁인 저동(현재 서울 중구)에서 지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혼인 7년 후인 1844년(헌종 10년)년 에 2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38) 따라서 순원왕후가 덕온공주에게 보낸 언간은 덕온공주가 혼인 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가 전부이다.

부마 창녕위 김병주(金炳疇, 1819〜1853년 2월 19일 본관 安東, 봉호 昌寧 尉)39)는 부사과 김연근의 아들로 순조 34년 갑오(1834년, 도광) 11월 15일(병자) 빈전 향관,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별입직과 당상직을 지냈다.

남녕위 윤의선(1823〜1887년, 순조 23∼고종 24년)40)은 순원왕후의 셋째 사위 로 윤두수의 10대 손이다. 생원 윤치승(1708〜1786년)과 안동김씨 김이상의 딸 사이의 둘째 아들로41) 태어났다. 1866년 가례도감 당상,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872년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1874년 판의금부사 를 거쳐서, 1837년(헌종 3년) 6월 25일에 부마가 되었다. 순원왕후가 보낸 언간 중에 총 30건이 윤의선에게 보낸 것이다. 이는 김흥근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사 례에 해당한다.

37) 1844년(헌종 10년)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를 간택하는 날에 만삭의 몸으로 참석하였다가 먹은 음식의 급체로 사망하였다. 죽기 직전 아이를 낳았으나 바로 죽었다. 이후 부마인 남녕위 윤의 선은 윤용구(1853∼1939년)를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았다. (고궁박물관(2017), 국역 덕온공주가 례등록, 민속원, 45쪽.)

38) 고궁박물관(2017), 위의 책, 40쪽.

39) 1830년 3월 28일(순조 30년)에 복온 공주(福溫公主)의 부마(駙馬)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복온 공주의 부마를 부사과(副司果) 김연근(金淵根)의 아들 김병주(金炳疇)로 정하 였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고 창녕위로 봉작하였다.

40) 1864년(고종1년) 국장도감(國葬都監) 하현궁명정서사관(下玄宮銘旌書寫官)과 영건도감(營建都 監) 제조(提調), 대왕대비전 서사관(書寫官)이 되어 일을 했으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 다. 이후에 상호도감(上號都監) 옥보전문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을 거쳐 1866년 가례도감(嘉禮都 監) 당상(堂上)으로서 일했다. 1875년(고종 12년) 주로 왕실관련 일인 왕세자책례도감(王世子冊 禮都監) 서사관, 상호도감익종대왕추상존호(上號都監翼宗大王追上尊號) 서사관, 빈전향관(殯殿享 官), 추상가상존호도감(追上加上尊號都監) 서사관, 추상존호금보전문서사관(追上尊號金寶篆文書 寫官)으로서 일을 보았다.

41) 해평윤씨대동보간행위원회(2005), 해평윤씨대동보.

그 외에 남아 있는 언간들은 주로 조카들에게 보낸 것들이다. 가장 많은 언간 이 남아 있는 수신자는 바로 김병덕(金炳德, 1825〜1892년)이다. 김병덕은 김흥근 의 아들이자 순원왕후의 조카이다. 1847년(헌종 13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1860년(철종 11년)에 이조판서를 거쳐 1880년(고종 17년)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 하였다. 그후, 1884년에 우의정을 거쳐서 1885년(고종 22년)에는 좌의정에 올랐 다. 김병덕은 심성이 청렴결백해서 고종 때에 세도가 안동 김씨 가문이 퇴출되었 을 때에도 대신들의 신임을 받아서 건재하였다.

마지막 수신자는 조카 김병주(金炳㴤, 1818〜1875년)42)이다. 김병주는 김홍근 (金弘根)의 아들이고 동시에 김좌근(金左根)의 양자이다. 그는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철종 9년(1858년, 함풍) 10월 24일 판의금부사·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고종 1년 3월 26일 판돈녕부사, 고종 3년 형조 판서, 고종 20년 이조 참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어 고종 15년 5월 22일에는 남녕위 윤의선, 금릉위 박영효, 이재원 등과 함께 빈전향관(殯殿享官)으로 임명되었다. 고종 22년 판돈녕 부사를 마지막으로 관료의 생활을 마무리한 인물이다. 이를 표로 제시하면 다음 과 같다.

<표-10> 발·수신 연도와 언간 수

42) 철종 10년(1859, 함풍) 성균관 대사성, 철종 11년(1860년, 함풍)평안도 관찰사, 철종 12년(1861 년, 함풍)형조 판서, 철종 13년(1862년, 동치)형조 판서, 철종 13년(1862년, 동치), 철종 14년(186 3년, 동치) 한성부 판윤, 고종실록 7권, 고종 7년 윤10월 23일 을유 2번째기사/김병주를 예조 판 서, 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1월 17일 기유 1번째 기사/김병주를 한성부 판윤에 임명하였다.

철종 10년 기미(1859년, 함풍) 7월 5일(계유) 김병주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다.

수신자 수신자와 관계 발·수신 연도 언간 수

김흥근 <재종동생> 1834∼1851.1 31건 1851.2.∼1857 21건 김병덕 <7촌 조카> 1847∼1849 5건

김병주 <7촌 조카> 1848 1건

김병주 <둘째 사위> 1789∼1857 3건 윤의선 <셋째 사위> 1834∼1850 30건 덕온공주43) <셋째 딸> 1837∼1844 5건

계 96건

이러한 순원왕후의 언간들은 역대 왕비의 언간과 비교하여 내용에 있어서 명 확한 차별성을 갖는다. 순원왕후가 헌종, 철종 2대에 걸쳐서 수렴청정을 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면서 처리해야 하는 정치적인 사안들 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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