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나의 작품은‘기억의 보관’을 주제로 두고 있으며 이는 나의 삶과 정체를 알기 위함, 기억을 지키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 좋았던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키고 싶은 욕구가 내포되어 있다.

역사 속에 기록된 기억과 시간은 현재에 다른 형태로 발현되고 반복되며 매 순간 끊임없이 그 기록이 쌓여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개인으로 축소 시켜 보면 우리는 최초의 기억을 시작으로 하여 수 많은

기억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마다 기억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순 간은 다를 것이다. 나의 친구는 자신의 팔 다리가 각각 2개씩 있고 그 끝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다고 처음 의식한 순간이 기억난다고 한다.

나에게는 친구만큼의 오랜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4, 5세 때의 기억들 은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다. 예를 들면 유치원 때 어떤 반이었고 반 친 구들은 누가 있었는지, 선생님 성함까지 전부 기억이 난다. 오히려 시간 이 흘러 청소년이 되고 난 후에는 내가 몇 반이었는지 담임선생님은 누 구셨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나의 정신적 여유와 감정의 상태가 기억에 영향을 많이 줬기 때문인 것 같다. 학업과 입시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청소년 시기보다 상대적으 로 여유롭고 행복한 일이 가득했던 유아기 시절에는 주변 사물과 상황에 항상 호기심을 갖고 관심 있게 관찰했다.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고 공감하고 즐기며 살아갔던 것이 그 당시 기억력에 도움을 줬던 것이다.

반면에 당장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암기해야 하고 ‘그림을 어떻게 하 면 잘 그릴까’,‘무슨 붓을 사용해야 하고 붓은 어떻게 쥐어야 하 나’,‘이렇게 그리면 그림 점수가 오를까’등으로 고민하고 힘들었던 청소년 시기에는 주변에 재미있는 상황들이 내 관심 밖이었으며 다양한 자극을 받아들이기에도 심적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을 생 각해 보면서 내가 행복했던 시기의 기억들이 특히 더 오랫동안 지속된다 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상황을 맞이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감정 을 느끼게 된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기억은 행복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 이거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인상 깊은 순간이다.

나에게는 한가지 습관이 있다. 작은 물건에 의미를 담고 쉽게 버 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습관으로 나의 보물서랍 안에 기억하고 싶은 각종 물건들을 담아왔다. 유치를 뽑고 모아놓은 치 아 케이스, 7살 때 문방구에서 산 조개껍질이 붙어있는 반지, 예술중학 교 입학 실기고사 문제지, 중학교 때 처음 썼던 첫 번째 안경과 시력이 점점 나빠지면서 바꾼 두 번째 안경, 세 번째 안경 등이 있다. 나와 같 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검색해보다가 정신학 용어로‘호더 증후군’이라 는 것을 발견했다. 이 증후군에 대해 알아보니 나의 깊은 내면의 일부분 을 대신 설명해주고 있었다. 특정 기억과 관련된 물건이 없어지면 나의 기억도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미 래의 나의 작품세계를 위해 이러한 준비를 해왔던 것처럼 나는 과거에 겪었던 기억이나 작은 물건들에 의미를 두고 그 대상과 상황을 그리는 것으로 작품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작품도판 1】

<첫 니>, 2020, 도화지 에 색연필, 21×21cm

【작품도판 2】<아나스타 샤와 만든 팔찌>, 2020, 장 지에 연필 채색, 30×30cm

【작품도판 3】<소중한 머 리카락>, 2020, 디지털드로 잉, 정방형

위의 작품도판들은 기억 속 순간이나 물건을 보물서랍에서 꺼내

거나 마음속으로 다시 떠올려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재는 그때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 당시 남겨둔 물체가 행복 했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 물체들을 마치 기념품처럼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첫 니>(【작품도판 1】)는 흔들리던 유치를 빼고 플라스틱 상자에 넣어놓았던 어린 시절의 흔적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발견하고 그린 것이다. 작은 치아모양의 뼛 조각을 관찰하다가 신기하고 오묘한 마음이 들어 그림으로 다시 기록 하였다. <아나스타샤와 만든 팔찌>(【작품도판 2】)는 11살 때 뉴질랜드 에서 4일간 아나스타샤라는 친구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비즈를 꿰어 팔찌를 같이 만들었다. 이후 아나스타샤와 연락은 두절 되었고 현 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함께 만든 팔찌를 통해 과 거 속 공통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쁜 마음으로 다가온다.

물건 자체의 값어치는 저렴할 수 있지만 그 물건 안에 담긴 기억과 의미 가 나에게는 큰 가치로 다가온다. 이런 식으로 시간과 사건의 흔적을 남 겨 놓는 나의 습관이 점점 확대되어 본격적인 작업을 하게 되었으며 더 불어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토대로 작업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기억이란 살아온 자취를 돌아봄과 동시에 현재의 가치관과 감각 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나타난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재생하였을 때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모두 반영하고 아울러 미래에 나아가는 방향까지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겪은 주변 환경과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떠한 자극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야 하며 그 방법은 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일

어나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다. 연효숙의 논문에 따르면 관념 철학을 연구한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의 경우“기억에 대한‘상기’에서 ‘상상력’을 거쳐‘기억’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심상이 상징으로 또 상징에서 기호로 기호에서 언어로 발전 하는 과정을 주목”34)하였는데 나의 경우‘기억’에 대한‘상기’에서

‘상상력’을 지나 또 다른‘기억’이 되어‘상징’과‘기호’그리고

‘조형언어’로 기억과 심상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이 조형언어의 대상은 행복한 감정을 느꼈던 그때의 공간이나 시간이다. 그때의 시·공간으로 직접 이동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조형적 으로 기록함으로써 기억을 보관하고 그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 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알고자 함의 욕구와 행복했던 시간으로 돌아가 고자 하는 욕구가 함께 작용하여 기억을 보관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행복함을 느꼈던 시간들은 나의 일상생활 곳곳에 숨어 있지만 살아온 시간들을 전체적으로 돌이켜 봤을 때 행복함의 농도가 가장 짙거 나 빈번했던 시기가 따로 있다. 이 시기에 대하여 다음 항에서 그 내용 을 고찰해보도록 한다.

34) 연효숙 「로고스인가 사튀로스인가? : 1부 헤겔에 대한 새로운 이해 ; 헤겔과 들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