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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재숙은 그의 저서에서 곽희의 말을 인용하였 다.“인간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근원적 향수 가 있다.”35) 곽희(郭熙, 1023-1085)의 <산수훈>에서는 잠깐 스치고 지나 가거나 한 번쯤 관광해보는 것에서 그치는 산수에서는 본성을 기르고 은 일한 해방감을 주는 정신적 고양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소요유 할 수 있고(可遊), 거주할 만한(可居) 산수공간에서 인간의 본성이 길러질 수 있고 세속의 때를 제거 할 수 있다36) 고 말하고 있다.

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양감을 고취시키기 위한 공간으로 산수공 간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산수공간은 세속의 일상공간과 거리가 있는 데 세속의 것을 전부 다 버리고 산수공간으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곽희는 “어찌 내 한 몸 깨끗이 하자고 세속을 떠나는 행동을 하겠는 가.”37)

인용된 구절을 통해 몸은 세속에 속해 있으나 마음은 산수 은일 의 공간을 그리워하는 사대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 대한 근 원적 그리움을 만족시켜 주면서도 현실에 충실할 수 있는 매개38)는 그 당시 산수화였던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현실에서의 한계를 극복 하기 위하여 그림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인데 그림 안에서는 화가가 원 하는 세계를 무한히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표현하면

35) 김재숙, 「삼원법에 나타난 산수공간의 미학적 의미,『대한철학회』(2013.03), 90.

36) 김재숙, 위 논문 ,91.

37) 김재숙, 위 논문 ,91.

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화가의 오묘한 솜씨를 얻어서 그 손으로 성대하게 그것을 그려내 게 한다면 집안의 방석을 내려가지 않고서도 앉아서 골짜기를 다 훓어 낼 수 있고, 원숭이 소리와 새 소리도 실제처럼 내 귀에 들리게 할 수 있다. 산 빛과 물 새고 넘치게 내 눈을 빼앗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 람의 감성적 뜻에 미적 쾌를 주는게 아니겠으며 실로 내 마음을 사로 잡는 게 아니겠는가39)

이렇듯 문인 사대부들은 속세에 위치하여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 서도 즐거움과 평안을 누리고자 했고 그 결과 산수화를 통해 미와 예술 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었다.

송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은일의 공간과 정치적 의무를 이행 하기 위한 세속의 공간 사이에서의 갈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은 나의 작품에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여행을 하며 맞이한 공간은 이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공간이며 은일을 향하고 있다. 은일의 공간에서 보고 먹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큰 자극과 에너지가 되었고 다시 또 평범한 하 루하루를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꿈꾸는 이 상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했으며 여행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힘든 나날들을 버틸 수 있는 희망이기도 했다. 이렇게 여행은 살고 있는 속세에서 잠시 벗어나 나에게 자유를 주는 시간과 장소라고 생각한 다. 그때의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인 사대부의 산수화처럼

현실세계에서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그림에 는 어떠한 내용의 기억이 담겨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인 여행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①프랑스여행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미술을 하며 항상 비슷한 환경과 인간관 계를 가지고 살아오던 나는 삶에 변화를 갈구하게 되었고 내가 낯선 장 소에 툭 떨어졌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스스로 궁금했다. 그 방법으 로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였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 우며 프랑스의 문화와 음식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교과서 에서만 봤던 세계적인 명화들이 가득한 미술관을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 를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여행을 하며 당시에 겪었 던 다양한 기분들과 상황들을 글과 사진을 통해 기록으로 남겼다. 다음 은 프랑스 여행 중에 보고 느꼈던 것들을 그린 내용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틈>(【작품도판 4】)은 프랑스 도착 첫날 저녁 개선문 뒤로 크 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낸 거리의 점포들을 둘러보며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피자집을 찾으러 가는 길에 찍은 사진들에서 나온 작업이 다. 개선문 거리를 걷는 중 어느 순간부터 덩치 큰 외국인들이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고 내 시야를 막았다. 그들 사이를 비집으며 길을 찾는 것은 힘들었다. 이러한 나의 고통을 모르는지 개선문 거리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아름답게 감싸져 있었다. 길을 찾는 과정에서 내 앞을 막는 사람들의 검은 무리와 그 틈으로 반짝이는 노란 크리스마스 불빛들이 반복적으로 보였다. 찬란한 불빛을 향해 검은 무리를 비집고 나와 걸으면 금세 또 다른 북적이는 무리들 사이에 치이고 밀려 시야가 가려지게 된다. 내 눈앞에 어둠과 빛이 계속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내 몸 은 사람들 틈에서 갈 곳을 잃었다. 그 순간 ‘여기는 어디이고, 키 작고 힘 없는 나는 지금 혼자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 갔다. 그렇게 겨우 무리를 빠져나왔을 때 나는 비로소 크리스마스를 맞 이하는 화려한 상점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고 차갑고 시원한 공 기를 마실 수 있었다. 이 과정 중에서 나는 두려움과 황홀함 사이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 때 거리는 캐롤 음악으로 가득 찼다.

또 가족과 함께 트리를 꾸며놓고 선물을 기대하며 일찍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개선문 앞 거리는 그 시절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두려움과 걱정, 황홀함, 포근함의 복합적인 감정 은 5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동시에 언젠간 이 기억이 흐 려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림으로 남겨진다면 나에게 완전히 새겨져 지울 수 없는 기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틈>이라는 작업 을 했다.

【작품도판 4】<틈>, 2019, 장지에 연필 수묵, 100×80cm

<틈>에는 거리 상점에서 봤던 물건들이 서로 엉켜있는 모습으로 반 구상적인 형식을 띄고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엉켜있는 형상 속 구체적인 사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화면 중심부에 솔방울 주위로 금속

질감의 곡선들, 별 모양 장신구, 건물과 기둥에 꾸며놓은 스티커와 낙서 들 가녀린 나뭇가지와 그 위에 쌓인 눈, 오나먼트, 드림캐처 등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사물들은 전부 그 당시 풍경 속에서 봤던 것으로 사진 기록과 기억의 기록을 통해 새롭게 조합하여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재현 한 것이다.

다음은 <지하철>(【작품도판 5】)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 다. 이 그림은 두 가지의 장소와 시간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 하나 는 지하철의 공간이며 다른 하나는 야외 계단을 오르다 본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 둘은 프랑스라는 공통된 장소 안에서도 다른 위치에 있는 풍 경이며 다른 시간 때에 겪은 일이다.

프랑스에서 지하철을 타는 것도 큰 도전이었다. 프랑스 지하철은 열차 문에 달린 문고리를 직접 돌려야 문이 열린다. 처음 보는 모양의 문고리였다. 사람들이 문고리를 돌리는 모양을 관찰해보니 평소 익숙하 게 알고 있는 문고리의 형태가 아니었고 요령이 있어야만 문이 열릴 것 같은 구조였다. ‘문고리를 잘못 돌려서 내리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 정과 ‘소매치기 또는 특이한 행색과 눈빛을 가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 지 말자’라는 각오로 가방을 온몸으로 감싸고 움츠러든 채 사람들이 문 고리를 여는 모양을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꽝스럽 고 가엽게 느껴졌다. 여행 중반 즈음에는 지하철 이용에 익숙해져 내 마 음은 한결 여유로워졌고 그 이후에 프랑스 지하철의 모습을 기억에 남기 고자 사진으로 담았다.

<지하철>과 관련된 두 번째 이야기는 그림 속 주제 위치에 배치 된 인물과 관련되어 있다. 파리18구를 돌아다니다가 높은 계단을 오르게

됐다. 계단 옆 건물 벽을 보았는데 사람 크기의 소년 전신사진이 붙어있 었다. 청바지만 입은 채로 낡은 인형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있었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왠지 그 모습이 내 모습 같다는 생각에 사진 으로 찍어왔다. 아마 지하철을 탔을 때의 내 모습이 저렇지 않았을까.

잔뜩 긴장한 채로 내 물건만 끌어안은 채 홀로 서 있는 모습에 나를 이 입하게 되었다. 그 앞에서 소년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니 사진이었지만 계속 눈을 바라보니 무언가 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인상 깊은 소년의 모습과 지하철 사진을 다시 조합하고 배치하여 <지하철>이라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지하철>에는 소년의 모습이 정면으로 크게 나와 있고 그 뒤로 지하철이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소년 뒤에는 열차 통 로 벽의 타일과 맥머핀을 광고하는 간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또 화면 왼쪽에는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열차를 기다리는 듯한 뒷모습 이 그려져 있다. 지하철의 창문과 벽에 붙어있는 네모난 배너광고, 벽의 네모난 타일문양은 화면을 계속해서 작은 사각형으로 분할 하고 있다.

지하철이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일렁이는 가로 방향의 연필 선으로 표 현되어 있으며 소년으로부터 밖으로 뻗어 나가는 방향이기 때문에 소년 에게 시선이 더 집중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 <지하철> 작업도 앞서

<틈>작업과 마찬가지로 그때 당시의 나의 모습과 상황 속 감정들을 현재 에 다시 재현하고자 새로 구상하여 그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