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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도판 31】<진흙에 찍어 둔 기 억>, 2020, 스케치북에 수채 드로잉

【작품도판 32】<바위 밑에 숨겨둔 기 억>, 2020, 스케치북에 수채 드로잉

이렇게 제시한 포장 방법은 A4사이즈의 캔트지에 연필, 색연필, 수채화, 볼펜 등의 재료로 가볍게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으로 기억 형상 의 면적인 요소와 포장재의 선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통제받고 스스로 조절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서 시·공간은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따르면“시간과 공간은 경험 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가능케 해주며 경험 이전에 이미 있 어야 하는 조건이며 직관형식이다.”56)라고 말했다. 경험이란 언제나 특 정 시간이나 공간 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경험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조건과 같은 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인 것이다. 반면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은 근대과학에서 정의된 시·공간의 개념을 철학적으 로 사유하고 그 현상에 대한 성과를 주관 내부로 해석하였다. 우리는 시 간에 맞춰 살기 위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시계를 보며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약속에 늦었다고 인지하는 순간 천천히 걷던 걸 음걸이는 빨라지며 늦은 정도가 심할수록 걸음걸이의 빠르기도 더해지고 심장박동 수도 증가할 것이다. 반면에 약속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면 좀 더 여유를 부리며 카페에 들렀다 가거나 골목을 돌고 돌아 거리를 구 경하며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정체성 을 바꾸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내 방에 있을 때의 편안한 차림의 나 의 모습과 외출할 때의 나의 모습은 또 다르며 그 공간이 어떤 기능을 하는 공간이냐에 따라 나의 말투와 행동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코로나19로 나라 간 물리적 이동이 불가능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 전례 없던 현상을 마주하고 있다. 초, 중, 고, 대학의 모든 교 육시스템은 마비가 왔고 회사 회의나 면접 또한 대면으로 이루어지지 못 하기 때문에 화상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우리는 컴퓨터 속 가상 공간에서

만남을 갖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만남의 폭이 넓어지기도 했다. 각각 개 인이 속해 있는 장소와 시간은 다르지만 우리는 실제의 시·공간을 무시 한 채 가상의 시·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시간보다 15시간 느린 미국에 사는 친구와 화면을 공유하며 이야 기 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진작에 사용되었던 기술이기도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하여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만 머물게 되 면서 이러한 화상 서비스 기술을 사용하는 계층의 폭이 전방위적으로 확 대된 것이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공 간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시·공간의 개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시간은 흐 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과거 와 현재, 미래가 뒤죽박죽 엉켜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현 상은 기억이 조각으로 해체되고 잘못된 짝을 찾아 다시 조합되는 매커니 즘으로 파악된다. 분명히 사건들이 일어난 정확한 시간과 공간이 있지만 머릿속에서 엉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의 이유는 무엇이며 어 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에 대해 시·공간의 이미지 해체와 조합의 원리를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

어떠한 사건을 겪고 나면 중요하지 않은 기억은 삭제되며 중요 하게 느꼈던 기억은 확대되거나 더 강한 색을 띄게 되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 때문에 같은 사건을 겪고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거나 다른 한 명만 기억하게 되는 상황에 항상 안타 까움을 느낀다. 이 가공과 왜곡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떠

한 방식으로 나타날지에 대해 이미지의 해체와 조합 원리를 설명하며 조 형적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먼저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기억은 어떤 모습으로 움직이 고 변형되는지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나는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 리고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기억을 더듬어보는 과정에서 작업을 시 작한다.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은 나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조각조각 해체되고 다른 모습으로 다시 조합되어 왜곡된 시·공간 속 기억으로 자 리 잡는다. 여행을 하며 본 낯선 거리 또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어린 시 절 가지고 놀았던 반짝이는 플라스틱 장난감들의 질감과 형태들은 나의 머릿속에서 짝을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유영하다가 새로운 기억 이미 지를 만나 콜라주를 한 듯 새롭게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 정은 나에게 ‘기억을 보관하는 방법’이다. 사건을 경험하고 이를 다시 기억을 하면서 기억 이미지들은 해체와 조합을 반복하는데 이러한 과정 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기억이 왜곡된다. 선택된 이미지가 왜곡이 일어나 는 방식에는 형태를 변형시키기, 크기를 변형시키기, 대상을 중첩시키기 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화면 속 대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익숙 한 것이 아닌 낯선 모습으로 바뀌게 되며 이를 괴이함 또는 언캐니적 성 격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앞서 언캐니과 괴의 개념과 내용에 대해 알아본 바가 있다.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낯설음이 어떻게 표현 되는지 고찰해보도록 한다.

앞에 소개한 나의 작업은 온전한 풍경이나 대상이 아닌 변형의 과정을 거친 모습이 보여지는데 예를 들면 <Wallowing in Purple>은 이

불이 꼬이면서 악어로 바뀌고 있는 모습을 다루고 있고 <Memories>는 식탁 위의 접시들과 벽에 걸린 액자가 합성되어 공간도 정물도 아닌 추 상적인 이미지 요소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실존하는 것이 아닌 창조된 형상이기에 괴이하거나 낯설다고 느껴질 수 있다. 이렇게 언캐니 란 친근하지만 낯선 느낌을 주는 것, 기괴함, 두려움을 말한다. 이세희의 연구논문에서는 언캐니한 장르의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로 제인스 하켄워 드를 예로 들었다. 그 내용을 참고하여 제인스 하켄워드의 작품을 살펴 보겠다. 그는 풍선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풍선은 시간이 지남 에 따라 바람이 빠지고 그 형상이 지속되지 않기에 결국에는 사진을 통 해서 온전한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의 소재인 풍선은 행사 장, 파티 혹은 어린이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에서 접하기 쉬운 재료로 우리에게 낯선 소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풍선 하나하나가 모 여 거대한 덩어리를 만들어내고 서로 괴기스럽게 엮여있어 우리에게 이 상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꿈틀거릴 것만 같이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하며 벌레나, 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익숙한 소재를 이용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이상하고 낯선 기분이 들게끔 유도하였으며 가공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가공되기 전 처음의 인상이 지워질 만큼 강렬하다.57)

【참고도판 15】하켄워드,

<steeplechase>, 2006 풍선, 가변크기

【참고도판 16】하켄워드, <crown of thorns>, 2006, 풍선, 가변크기

나의 작업 또한 익숙한 소재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왜곡이 되 어 새로운 화면 구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하켄워드의 작품 속 언캐니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신 나의 작업에서는 소재가 풍선이 아닌 기억 조각들이며 그것들이 새롭게 배치되고 편집되어 실제 와는 다른 형태와 이질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틈>(【작품도판 4】)에 등장하는 각 요소들은 솔방울, 나뭇가지, 거울, 건물 등으로 사람들에게 익숙한 소재이지만 기억이 버무려지듯 해체와 조합의 과정을 거치고 나 면 낯선 모양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벌꿀집과 식물집>(【작 품도판 6】)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소재인 캐릭 터 스티커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분들이다. 하지만 각 요소들이 중첩되고 새롭게 조합되며 만들어진 새로운 모습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익 숙한 소재가 아닌 괴기한 것 또는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화면 속에서 익숙한 소재들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찾아볼 수 있지만 그림의 전체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공간과 구성들을 띄고 있으며 추상 과 구상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익숙함이 낯설고 이상하게 다가오는 순간 이것을 언캐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변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원리와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