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에도 이동인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언급들이 있었으나,48) 본격적 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70년에 이용희가 일본 교토(京都)의 히가시혼 간지(東本願寺)의 문서 퇴적 중에서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이 기록한
『朝鮮國布敎日誌』(이하 『포교일지』)라는 문헌을 발굴하면서부터였 다.49) 히가시혼간지는 일본불교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일파 진종대곡파 (眞宗大谷派)의 본산이며, 진종대곡파는 부산이 개항된 지 1년 만인 1877년 10월에 일본 불교로는 최초로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한 종 파다. 이 때 조선에 건너온 오쿠무라 엔신이 1877년부터 1897년까지
다. 그런데 그 사람됨이 영리하고 민첩하며 재예(才藝)가 출중하거늘, 조선인이라고 하므로 의 심치 않고 신뢰해서 기무참모관(機務參謀官)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대내(大內)에 출입하고, 심 지어는 어전에서 대좌(對坐)하며 논의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했다. 그런데 4, 5일 전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비로소 그가 왜인(倭人)의 첩자임을 알고 관리들을 보내 잡으려고 했 지만 아직 체포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맹랑한 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宋近洙 編,『龍 湖閒錄』(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80) p.452}
48) 예컨대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이 1930년대 『朝鮮日報』에 연재한 「史外異聞」이라는 칼 럼 가운데 「僧李東仁」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문일평,『湖岩全集』제3권(서울: 조선일보사 출판부, 1939) pp.38~39}
49) 이용희(1973) pp.10~11. 그 후 조동걸은 가시와하라 유센(栢原祐泉)이 편찬한 『眞宗史料集 成』제11권 「維新期の眞宗」에 수록된 『朝鮮國布敎日誌』의 전문을 학술지에 전재하였다.(조 동걸, 「奧村의 『朝鮮國布敎日誌』」, 『한국학논총』 제7집,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85) 본고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조동걸이 전재한 자료와 그 쪽수를 인용한다.
중요한 사건들을 일지형식으로 기록한 문헌이 바로 『포교일지』이다.
『포교일지』에는 이동인을 비롯하여 유대치(劉大致)50)·김옥균·박영효 등 이른바 개화당과의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동인이 일 본에 밀항한 것도 바로 오쿠무라 엔신의 알선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므 로 먼저 오쿠무라와 이 종파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고, 이동인이 일본에 건너가는 과정을 서술하기로 한다.
정토진종은 신란(親鸞, 1173~1262)이 창시한 정토교 교단으로, 진 종대곡파(眞宗大谷派)는 그 여러 종파 가운데서도 니시혼간지(西本願寺) 를 본산으로 하는 혼간지파(本願寺派)와 함께 양대 세력을 구축하고 있 었다. 그런데 조정의 공가(公家)와 가까웠던 혼간지파와는 달리 진종대 곡파는 막부(幕府)의 후원 속에서 급성장하였고, 특히 막부말기의 동란 속에서 혼간지파는 존왕파(尊王派)를 지지했던 반면 진종대곡파는 막부 를 후원해서 그 군사비용을 대주고 직접 승군(僧軍)까지 조직해서 전투 에 참여했다.51) 따라서 끝내 존왕파에 의해 메이지유신이 달성되자 진종 대곡파의 정치적 지위는 대단히 취약해졌다. 더욱이 메이지정부가 고대 천황제에 입각해서 충효일본(忠孝一本)과 제정일치(祭政一致)를 국시(國 是)로 내세우고, 신도(神道)를 국가종교로 채택하면서 불교에 대해 신불 분리정책(神佛分離政策)을 취하자, 불상과 사원을 파괴하는 폐불훼석(廢 佛毁釋) 현상마저 나타났다.52) 이러한 위기 속에서 일본 불교는 ‘신불불
50) 본명은 유홍기(劉鴻基)로 대치(大致, 大癡)는 그의 호(號)다. 개화당의 사상적 지도자로서, 육당 (六堂) 최남선(崔南善)은『故事通』에서 오경석(吳慶錫)이 박규수를 설득해서 개국의 방침을 도 모하려고 할 때, 유대치는 드러나지 않게 『海國圖志』·『瀛環志略』등으로 세계의 사정을 살 피면서 내정의 국면 전환에 뜻을 두고, 은밀하게 귀족 가운데 뛰어난 자제를 규합해서 방략을 가르치고 그들의 뜻을 고무하여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박영효·김옥균·홍 영식·서광범, 그리고 귀족 아닌 사람으로서 백춘배(白春培)·정병하(鄭秉夏) 등 세상에서 개화당 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대개 유대치의 문인이라고 하였다. {崔南善, 『古史通』(류시현 역,『고 사통』, 서울: 경인문화사, 2013) p.242} 뒤에서 서술할 1880년 4월 25일의 하나부사 조선공 사와의 회견에서도, 이동인은 “김옥균도 오경석과 같이 유홍기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우내형세 (宇內形勢)에 뜻을 두었다.”고 하여, 그가 개화당의 사상적 지도자임을 증언하였다. (이광린, 1985, p.6) 유대치의 생애와 활동에 관해선 다음 연구를 참조할 것. 이광린,「숨은 開化思想家 劉大致」『개화당 연구』(서울: 일조각, 1973); 金義煥, “朝鮮開化黨の幕後の指導者劉大致の活 躍とその最後”『朝鮮學報』第98輯, 朝鮮學會, 1981.
51) 栢原祐泉, 『日本佛敎史 近代』(東京: 吉川弘文館, 1990) pp.11~19.
리(神佛不離)’를 주창하면서 국가시책에 적극적으로 부역하는 것으로 자 구책을 모색했다. 정토진종 대곡파는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53)
1877년에 당시 일본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는 히가시혼간지의 법주(法主) 곤뇨(嚴如)에 게 조선 포교를 의뢰했다.54) 히가시혼간지에서는 고토쿠지(高德寺)의 주 지 오쿠무라 엔신을 1877년 9월에 부산에 파견했다. 부산은 조일수호조 규의 체결로 이미 그 전년에 개항되어 있었다. 그런데 『포교일지』에 따르면 오쿠무라 엔신의 선조인 오쿠무라 죠신(奧村淨信)은 이미 1585 년에 부산에 건너와서 1591년까지 포교를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사자의 위령을 위해 종군(從軍)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몇 년 간 조선에 체류한 경험을 활용해서 정보원이나 밀 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55) 고토쿠지(高德寺)는 바로 죠신이 세운 절이 었으니, 엔신에게는 선조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1877년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한 엔신은 옛 왜관(倭館)의 서관(西館) 부지를 임차해서 포교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10명씩 이곳을 찾는 조선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56) 이동인도 그 중 1 명이었다.57) 『포교일지』는 내방한 조선인들의 이름과 신분 등을 상세
52) 정광호, 『근대한일불교관계사연구-일본의 식민지정책과 관련하여』(서울: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4) pp.27~49; 윤기엽, 「廢佛毁釋과 메이지 정부」,『佛敎學報』제46집, 동국대학교 불교 문화연구원, 2007.
53) 한상길, 「일본 근대불교의 韓·中 포교에 대한 연구」, 『韓國禪學』제20호, 한국선학회, 2008.
pp.353~356.
54) 美藤遼, 「日本仏敎の朝鮮布敎」, 『季刊三千里』 第16號, 1978. p.120.
55) 『포교일지』, p.252.
56) 『포교일지』, p.256.
57) 『포교일지』에 따르면 이동인이 처음 오쿠무라를 방문한 것은 1878년 6월 2일이었다. 그 이 후로도 9월 15일과 12월 9일에도 찾아온 기록이 있다. 이듬해인 1879년 6월에는 일본에 건너 가기 위해 부산별원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진종대곡파의 연혁지인 『朝鮮開敎五十年誌』는 이동인이 처음 오쿠무라를 방문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부산별원이 개설된 이듬해인 메이지 11년 12월의 어느 날,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아침이었 다. 통경사(通慶寺)의 승려라고 하는 이동인 씨가 간절히 오쿠무라(奧村) 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별원을 찾아왔다. 품격도 있고 문필도 뛰어나서 오쿠무라 법사가 만났던 승려들과는 대 단히 분위기가 달랐으므로, 오쿠무라 법사도 그를 대단히 정중하게 대했다. 그는 잠시 이야기 를 나누고 떠났다.
히 기록하고 있는데, 신분적·지리적으로 광범위한 부류의 조선인들이 이 곳을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엔신이 순수한 종교적 의미의 포교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조선 사회의 혁신방안 등 현실문제까지 거론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 1877년 11월에 부산에 도착한 하나 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공사가 오쿠무라에게 향후 조선포교계획을 질 문한 일이 있다. 이에 대해 오쿠무라는 『眞宗敎旨』와 『御文』·『和 讚』이라는 책을 꺼내놓으며 ‘진속이체(眞俗二諦)’의 지의(旨意)로 포교 하겠다고 답했다.58) 여기서 진체(眞諦)는 진종(眞宗)의 수행법을 따르는 것이고 속체(俗諦)는 왕법(王法)에 대한 순응을 의미하는 바, 진속이체론 은 진체와 속체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완전한 교의가 성립한다는 의 미를 담고 있다.59) 오쿠무라의 조선포교가 단순히 교의의 설법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현실에 관한 문제까지도 포괄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 이다. 이동인도 오쿠무라를 찾아와서, ‘조선이 고립되어 정강(政綱)이 부 진한 것과 또 종교가 패퇴(敗頹)한 것’60)이나 ‘호국부종(護國扶宗)’61)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오쿠무라의 진속이체론에 크게
그 후 그는 오쿠무라 법사의 후의에 감사하며 여러 차례 내방했고, 어떨 때는 별원에 며칠 간 머물면서 항상 시사(時事)와 국제간의 정세를 말할 뿐 굳이 불교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 다. 오쿠무라 법사는 더욱 그가 심상한 승려가 아님을 알고, 넌지시 그의 진면목을 간파하려고 했지만, 그는 쉽게 심사를 털어놓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이나 지났을 것이다. 12년 초여름 경 부터 경성에 간다고 하면서 일시 소식이 두절되었다. 8월 중순에 이르러 갑자기 경성에서 찾아 와서는 사람을 멀리하더니, 이제까지는 충심(衷心)을 털어놓기를 꺼렸지만 이제 그 시기에 도 달했다, 부디 나를 위해 일비(一臂)의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전제하면서 그는 박영효·김옥균 두 사람의 의촉(依囑)을 받아 일본의 정세시찰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을 말하고, 차제에 일본의 태 도를 시찰하고 문물을 연구해서 조선의 문화개혁(文化改革)에 공언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앞으로는 조금도 숨김없이 모든 일을 귀 법사에게 맡길 테니 내 뜻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참된 진심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또 박영효·김옥균 두 사람에게서 그 여비로 받은 길 이 2촌 남짓의 순금 막대 4자루를 보여주면서 여행준비를 상담했다.” 大谷派本願寺朝鮮開敎監 督部 編, 『朝鮮開敎五十年誌』(京城: 大谷派本願寺朝鮮開敎監督部, 1927), pp.137~138.
58)『포교일지』, p.256.
59) 한상길, 2008, p.378. 한편, 『眞宗敎旨』는 오쿠무라보다 1년 앞선 1876년에 중국 상해에서 포교를 시작한 진종대곡파 승려 오구루스 고쵸(小栗栖香頂)가 순한문으로 저술한 교리서로 진 속이체론을 해설한 것이다. 실제로 엔신은 조선인들이 찾아올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眞宗敎 旨』를 선물하였다.
60)『포교일지』, p.266.
61)『포교일지』,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