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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에 이동인을 일본에 밀파한 이후로 개화당은 외세를 이용해 서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1882년 9월 11일자 『時事新 報』의 「朝鮮開化黨の一人たる金玉均」라는 기사에서 발췌한 것으로, 비록 이 기사의 취지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이른바 완고당(頑固黨)을 중 심으로 김옥균에 대한 유언비어가 널리 퍼지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데 있 지만, 김옥균과 개화당의 비밀외교의 동기와 관련해서 정곡을 찌르는 통 찰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완고당(頑固黨)의 말에, 김옥균은 집권대신도 아니면서 개국(開國)의 대사(大事)를 자임하고, 교린(交隣)의 고관(高官)[외교를 담당하는 대신이라는 뜻-인용자]도 아 니면서 매번 외교의 이익을 입에 올린다. 그는 오직 외국인에게서 명성을 얻어서 국내에서 과시하려는 자이니, 그를 빨리 죽이지 않으면 조선에는 필시 큰 변고가 생길 것이다.273)

김옥균과 개화당의 비밀외교는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적 접촉 을 시작했으나, 아직 그 제도나 의식의 변화는 수반되지 않은 과도기적 혼란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1882년 말에 이르러 이들의 계 획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의 외교통상 업무를 전 담시키기 위해 청국에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빙(雇聘)하고, 그와 동 시에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외교 사무를 처리할 관서(官署)로서 통리아 문이 창설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개화당이 비밀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직접수단을 통한 정변(政變)을 모색하게 된 원인(遠因)이라고 생각되므

273)「朝鮮開化黨の一人たる金玉均」,『時事新報』1882.9.11.

로, 아래서는 묄렌도르프의 고빙 경과 및 외교정책 등에 관해 살펴보고 자 한다.

조선정부에서 외국인 고빙의 첫 번째 단서가 열린 것은 1880년이었 다.274) 이 해 10월, 행(行)부사직(副司直) 변원규(卞元圭)는 텐진 기기창 (機器廠)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수용해서 근대기술을 학습시켜줄 것을 청 원하는 자문을 청국정부에 전달하기 위한 재자관(齎咨官)으로서 베이징 에 파견되었다.275) 이 공식 사명(使命)을 마친 변원규는 이홍장(李鴻章) 을 만나기 위해 다시 텐진(天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회견은 10월 25 일에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변원규는 이홍장에게서 조일수호조규(1876) 의 체결 이래로 5년간 무관세로 이뤄졌던 대일무역(對日貿易) 및 향후 서양각국과의 통상에서 관세수입을 거두기 위해 해관(海關) 설치 및 수 출입 상품의 관세율에 관한 조언을 얻었다.276)

제Ⅱ장에서 본 것처럼, 변원규가 이홍장을 만나기 두 달 전에 수신 사 김홍집은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으로부터 미국과 먼저 좋은 조건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서 일본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과의 무역의 선례로 삼으라는 조언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10월 11일에 슈펠트 서한의 접수를 사실상 결정했다. 당시 조선조정의 가장 큰 재정적 관심 사는 해관을 신설해서 관세를 징수함으로써 피폐한 재정에 충용(充用)하 는 일이었으며, 변원규의 파견 또한 그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고려된 것 으로 보인다. 덧붙여 말하자면, 임오군란 이전까지 조선 내에서는 서양 인과의 통상 같은 것은 감히 발설하기 어려운 분위기였고, 자강(自强)과 관련해서는 오직 청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문제 정도만이 논의될 수 있 었다.277) 따라서 서양국가와의 통상을 전제로 하는 해관 신설이나 관세

274) 묄렌도르프를 비롯하여 구한말에 조선조정의 외국인 고문관 고빙 실태에 관한 선구적 연구로 는 이현종, 「舊韓末外國人雇聘考」『韓國史硏究』제8호, 1972를 참조할 것.

275)『李鴻章』第9卷,「奏議(九)」, G6-09-005의 부건3, pp.173~174; 『외교문서』제4권, 문서 번호 119의 관련문서.

276)『李鴻章』第9卷,「奏議(九)」, G6-09-032, pp.191~193; 『中日韓』第2卷, 문서번호 341의 부건 2;『외교문서』제4권, 문서번호 121. 또 이 회견석상에서 이홍장은 주로 그 전년 7월(음 력)에 이유원에게 보낸 사함(私函)의 뜻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및 일본의 위험을 환기시키고, 그 대비책으로서 서양열강과의 수교를 권고했다.

277) 예컨대 1879년 11월에 이유원이 영평지부(永平知府) 유지개(游智開)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율 책정 같은 안건들은 이처럼 비공식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변원규에 이어 이듬해 1881년 2월에는 이용숙(李容肅)이 이홍장을 내방했다. 이용숙 또한 동지사(冬至使)의 수행역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했 다가 사절단 일행과는 별도로 2월 18일에 텐진에 도착해서 이홍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는데, 이홍장은 그를 조선국왕의 위원(委員)으로 규정했 다.278) 이용숙과 이홍장의 회견은 2월 26일(음력 정월 28일)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용숙이 각국의 통상장정 및 세액·세칙의 조관(條款), 그리 고 세관(稅關) 및 그 관직 설치의 범례(凡例) 등이 명시된 문헌을 요청하 자, 이홍장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상략) 이제 조선이 각국과 통상을 고려하는데, 조선이 서양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세무(稅務)에 아직 익숙지 않음을 엿보고 있으니, 관세를 관장하는 직책을 직접 추 천해서 충당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단, 일본과 조선은 겨우 가까운 바다 로 떨어져 있을 뿐이니 상화(商貨)의 왕래가 반드시 많을 것이요, 또 통상을 시작한 지 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수세(收稅)하지 못해서 이미 그 손실이 크다고 들었으 니, 혹시라도 일본인을 고용해서 세무를 처리하게 한다면 아마도 폐단이 클 것이다.

오직 잠시 서양인 중에 세무에 밝고 한문에 능통한 자를 고빙해서, 조선에서 파견 한 세관원을 따라 수세(收稅)를 처리시키는 것이 대체로 타당할 것이다. 또한 한 편 으로 총명한 자제들을 속히 선발해서, 고용한 서양인으로부터 언어와 문제, 세무 등 을 학습하게 한다면, 학습이 끝난 뒤엔 저절로 서양인을 다시 고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279)

당시 조선의 분위기에서 이유원만으로는 서양국가와의 통상을 반대하는 여론을 만회하기는 역 부족이며, 오직 전례에 따라 청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정도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자강책(自强 策)이었음을 알 수 있다. “李裕元信中有要務細細面白者 盖因該國輿論擬仿古外國入學之例 咨請 禮部揀選明干人員在天津等處學習軍器武備 特屬游守轉達請示 鴻章竊思裕元之不能獨主謀議(中略) 均系實情”(『李鴻章』第32卷,「信函(四)」,G-5-11-002, pp.502~503; 『李文』「譯署函稿(

十)」, p.23;『中日韓』第2卷, 문서번호 329, p.397;『외교문서』제4권, 문서번호 115) 278) 『李鴻章』第33卷,「信函(五)」,G-7-12-002, pp.9~10; 『李文』「譯署函稿(十二)」, p.6~7;

『中日韓』第2卷, 문서번호 353, pp.461~462;『외교문서』제4권, 문서번호 129.

279) “今朝鮮擬與各國通商 日本窺知朝鮮未諳西洋語言文字及稅務事宜 難保不以管稅一職自荐充當 但 日本朝鮮僅隔一水 往來商貨必多 且聞通商五年尙未收稅 喫虧已甚 倘僱日人司理稅務 尤恐滋弊 祇 有暫僱西人之明白稅務兼通漢文者 令其隨同朝鮮所派管關官員料理收稅 較爲妥當 並一面速選聰穎 子弟 從所僱西人學習語言文字稅務事宜 學成之後 自無容再用西人矣”(『李鴻章』第9卷,「奏議(

九)」,G-7-02-002, pp.304~306; 『李文』「奏稿(四十)」, pp.13~17;『中日韓』第2卷, 문서

이처럼 이홍장이 세관에 서양인을 고용할 것을 권고한 이유는, 이미 청국의 해관이 서양인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고, 또 전통적인 조청 관계에서는 청국의 관리가 조선에 상주한 전례가 없었으므로 섣불리 청 국 관원을 파견했다가는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의심과 반발을 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Robert Hart)를 비롯한 서양인들을 해관에 고용함으로써 전례 없는 사무의 능률화 및 공정화, 그리고 해관수입의 증대효과를 가져온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었다.280) 그러나 이홍장의 권고가 충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해도, 그때 까지 고빙은커녕 단 1명의 서양인도 공식적으로 입국을 허락한 일이 없 을 정도로 서구문물의 유입을 극도로 경계했던 조선사회의 풍조를 감안 하면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처음으로 미국과 근대적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281) 비록 이 조약은 이홍장의 알선과 조선 현지에 파견된 마건 충(馬建忠)의 도움으로 큰 탈 없이 체결할 수 있었지만,282) 이미 문호가

번호 355의 부건 1, pp.484~490;『외교문서』제4권, 문서번호 127)

280) 고병익, 「穆麟德의 雇聘과 그 背景」『진단학보』제25~27합집(合集), 진단학회, 1964.

pp.228~229.

281) 조미수호조약 제12관에 따르면, “이제 조선국이 처음으로 입약(立約)했으니 약정하는 조관 은 우선 간략하게 하되, 마땅히 조약을 준수하여 여기에 기재된 것들은 우선 처리하고, 아직 기재되지 않은 것들은 5년 후 양국 관민(官民)의 언어가 조금 통한 뒤에 다시 의정한다. 통상 의 상세한 장정(章程)은, 만국공법과 통례를 참조해서 공평하게 의정하여 경중대소의 차별이 없게 한다.(玆朝鮮國初次立約 所訂條款 姑從簡略 應遵條約 已載者 先行辦理 其未載者 俟五年後 兩國官民 彼此言語稍通 再行議定 至通商詳細章程 須酌照萬國公法通例 公平商訂 無有輕重大小之 別; This, being the first Treaty negotiated by Chosen, and hence being general and incomplete, in its provisions, shall in the first instance be put into operation in all things stipulated herein. As to stipulations not contained herein, after an interval of five years, when the officers and people of the two Powers shall have become more familiar with each other’s language, a further negotiation of commercial provisions and regulations in detail, in conformity with international law and without unequal discrimination on either part shall be had.)”라고 규정되었다. 여기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선이 처음 체결하는 조약 이라고 한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를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라고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당시 조선인들이 조일수호조규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증거로 생각된다.

282)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마건충의 역할에 관해선 다음을 참조할 것. 馬建忠 撰, 張豈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