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다음은 1926년에 발간된 『新民』제14호의 「甲申政變」이라는 글 에 수록된 박영효의 회고담 중 일부이다.

이러케 不如意한 開化黨 中에도 나는 幸히 宗戚의 一人임으로 主上의 命敎를 밧자 와 漢城判尹이 되야 都下의 地方行政을 掌握하고 兼하야 警巡局을 設하야 警察制 度를 開始하고 治道局을 主理하야 全國土木事務를 管掌하고 次에 博文局을 新設하 야 新式敎育을 始作하랴할제 治道事에 關하야 閔妃의 私囑을 不聽한 私嫌으로 廣 州留守로 轉任되엿다 向隅之歎을 不禁하면서 섭섭히 廣州 南漢山城으로 출발하랴 할제 맛참 同志 金玉均은 捕鯨使가 되야 東海의 고래를 잡아 이것을 日本에 放賣하 기兼得債運動次로 日本을 向하야 나는 판이라 나는 幸히 廣州留守가 守禦使兼職 으로 兵權을 가지게 된 것을 多幸으로 後日之計를 爲하야 養兵을 할터이니 金玉均 은 得債中 數萬金을 軍資로 密送하여주기를 斷斷相約하고 나는 廣州로 金은 日本 으로 各散하얏섯다 기다리는 軍資金은 아니오고 困窮한 中에 겨우 千餘의 兵을 敎 鍊하니(중략) 그렁저렁 一年이 지남에 廣州留守의 精兵養成이 異常히도 閔一派에게 危險視하게되야 閔妃의 一言으로 나는 곳 免官되고 내가 養成한 日本式軍兵은 곳 京城으로 徵上되야 前後御營에 속하야 前營使 韓圭稷 後營使 尹泰駿의 領率下에 도라가고 말앗다355)

박영효가 한성판윤(漢城判尹)에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전임(轉任) 된 것은 4월 23일(음력 3월 17일),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 拓使)라는 관직에 임명된 것은 그 하루 전인 4월 22일(음력 3월 16일) 의 일이었다.356) 이 회고담에 따르면, 당시 박영효는 광주유수가 수어사 (守禦使) 겸직으로 병권(兵權)을 갖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서, 자신은 훗 날을 위해 양병(養兵)을 하고, 곧 차관교섭을 위해 일본에 건너갈 김옥

355) 박영효, 「甲申政變」,『新民』제14호, 1926.6. 단, 여기서 박영효는 1천 여명의 군사를 양성 했다고 회고했으나, 『윤치호일기』1883년 11월 7일자 및 『漢城旬報』계미년 10월 21일자에 는 1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항섭은 훗날 이 부대와 남한산성의 병력까지 합쳐서 신설한 친군전영의 병력이 500여 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100명이 정확할 것으로 추정했다. 배항 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서울: 국학자료원, 2002) p.198.

356) 『承政院日記』고종20년 3월 16일·17일.

균은 그 차관 가운데 수만 금을 군자금으로 비밀리에 보내주기로 단단히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 회고담에 따르면, 김옥균과 박영효가 군대 양성에 착수한 것은 1883년 4월 이후의 일이 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박영효와 김옥균은 임오군란 직후 수신사로서 일본에 건너갔다가 귀국했을 때부터 이미 군 대 양성을 준비하고 있었던 정황이 간취된다. 박영효는 1883년 1월 귀 국 당시 7명의 일본인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노우에 가쿠고 로(井上角五郞)·우시바 다쿠조(牛場卓造)·다카하시 마사노부(高橋正信) 등 과 같이 서양학문의 수입 및 근대적 신문 발간(『漢城旬報』)을 위해 데 려온 자들도 있었지만, 전(前) 육군대위 마츠오 미요지(松尾三代治)와 같 이 군사적 목적으로 고빙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 케조에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1883년 1월 12일자 보고를 참조할 만하다.

별지 갑호(甲號)와 마찬가지로 인천에서 박영효가 조회(照會)한 이상 7명 가운데 우시바 다쿠조·이노우에 가쿠고로·다카하시 마사노부 3명은 후쿠자와의 문하로서 영학(英學)을 열기 위해, 마에다 마츠쿠라(眞田謙藏)·미노와 고죠(牛場卓造)는 인쇄 를 위해, 그리고 혼다 세타로(本多淸太郞)는 목공으로서, 이상의 자들은 제가 도쿄 에서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츠오 미요지는 바칸(馬關)의 선상에서 윤웅 렬이 처음 은밀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메이지 4년 경에 대위를 사직하고, 그 후 10년의 역{十年ノ役: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을 가리킴-인용자}에서 다시 대위에 임용되었다가 같은 해 사직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됨이 영리해 보이 진 않았습니다. 승선해 있을 때도 저희 일행에게 한 마디 인사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동이 조포(粗暴)해서 유감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에게 일 본식의 병식(兵式)을 교련시키는 것은 실로 좋지 않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박영효 에게 충고했지만, 이 일은 박영효가 상당히 고심해서 계획한 것으로, 미츠오를 조선 인으로 분장시켜서[지나(支那)에는 물론 조선인에게도 알려지지 않음] 원산(元山) 근방에 보내어[예로부터 함경도 군대는 강용(强勇)하다는 소문이 있음] 새로 모집 한 병사들을 교련(敎鍊)시키고, 조만간 형편을 봐서 일본에서 능숙한 교사(敎師)를 고용할 계획이니 부디 비밀에 부쳐달라고 극력 간청했으므로 우선 그대로 놓아두 었습니다.357)

357) “別紙甲號ノ通リ仁川ニテ朴泳孝ヨリ照會ニ及候右七人ノ內牛場卓造井上角五郞高橋正信ノ三名

이와 함께 다케조에 일본공사는, 임오군란 당시 성난 민중에게 피살 당한 호리모토 레죠(堀本禮造) 일본 육군소위가 교련한 별기군 100명을 윤웅렬이 귀국할 때까지 그대로 놓아두라는 어명이 있었으며, 이는 윤웅 렬에게 위임하여 교련시키려는 고종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소문을 보고 하고 있다.358) 즉, 개화당은 박영효가 광주유수 겸 수어사에 임명되기 전부터 윤웅렬의 책임 하에 함경도 원산에서 군대를 양성했으며, 그 계 획은 이미 일본에 있을 때부터 구상되었던 것이다.359)

또 『유길준전서』에 수록된 「書趙忠定公」라는 글 중에 다음과 같 은 구절이 있다.

ハ福澤門下ノ者ニテ英學ヲ開候爲メ眞田謙藏三輪廣藏ハ印刷ノ爲メ本多淸太郞ハ大工職以上ノ者雇 入候趣ハ小官東京ニテ前ニ承知致シ候處松尾三代治ハ馬關ノ船中ニテ尹雄烈ヨリ初メ內話ニ及ヒ右 ハ明治四年頃ニ大尉ヲ辭シ其後十年ノ役再ヒ大尉ニ任シ同年辭職セシ者ト□出候處其人ト爲リ伶俐 トモ見受ケ不申乘船中小官一行ニ一言ノ會釋セザル而已ナラス擧動粗暴ニテ氣之毒御思ニ付右樣ノ 者ヲシテ日本流ノ兵式ヲ敎鍊セシムルハ實ニ不都合ノ旨ヲ以テ再三朴泳孝ニ忠致シ候ヘ共此儀ハ朴 泳孝餘程苦心ヲ用ヒ組立テタル趣向ニテ右松尾ヲ朝鮮人ニ扮裝シ[支那ニハ勿論朝鮮人ニモ知ラシ メズ]テ元山近傍ニ遣シ[昔ヨリ咸鏡道ノ兵ハ强勇ノ聞ヘアリ]新ニ募集スル所ノ兵ヲ敎鍊セシメ其 內ニ都合ヲ見計ヒ日本ヨリ精熟ノ敎師ヲ雇入ルルノ計劃ニ付何卒密ニ含置呉レ樣精精懇請致シ候間 先ツ其儘ニシテ擱キ候”(『明治十五年 朝鮮事變始末』七(公文別錄), 「機密信第二號」) 한편, 이 인용문에서 언급된 박영효가 다케조에에게 보냈다는 별지 갑호(甲號)의 조회문은 『使和記略』

11월 27일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조회문에는 牛場卓造·井上角五郞·高僑正信·松尾三代太郞·眞 田謙藏·三輪廣藏·本多淸太郞 등 7명이 언급되어 있는데, 松尾三代太郞는 松尾三代治와 동일인 물일 것이다. 또 다보하시 기요시, 김종학 역(2013) p.808과 『井上角五郞先生傳』p.34에는 박 영효가 군사 조련 목적으로 마츠오 미요지 외에도 하라다 하지메(原田一)를 고빙했다고 기록되 어 있다.

358) 같은 문서.

359)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기록에 따르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에 입국하는 이노우에 가쿠고로 에게 “그러나 적어도 조선을 우리 세력범위 하에 두어 긴밀히 제휴해서, 만에 하나라도 지나 (支那)와 동일한 운명에 빠지게 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선 무력이 가장 필요하다. 하지만 무력 의 일은 그 당국자에게 맡기더라도, 문력(文力) 또한 크게 필요하다. 조선인이 문명의 지식을 길러서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는 한, 도저히 완전한 제휴는 불가능하다. 그 문력(文力)은 우 리 일본인들이 인도상(人道上) 맡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이며, 나는 이를 솔선해서 주장하는 천직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井上角五郞, 「福澤先生の朝鮮御經營と現 代朝鮮の文化とについて」) 여기서 무력(武力)을 그 당국자들에게 맡겼다는 말은, 곧 김옥균·박 영효 등 개화당에게 군대의 양성을 조언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얼마 후 나는 유학을 위해 장차 북미(北美)의 미국으로 향하려고 할 때, 홍영식 공 과 김옥균 공을 일본 도쿄에서 만나서 개혁의 대의(大議)를 의정했으니, 김 공은 외 국에서 군대 양성을 주관하고, 홍 공은 국내에서 경성에 주둔한 두 나라(청국과 일 본을 가리킴-인용자) 군대의 철군을 권고하는 일을 주관하되, 5년 후에 거사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일개 서생으로 계획을 도울 순 없었고, 단지 청임(聽任)에 참여하고 만국의 정형(情形)을 구찰(究察)하는 일 만을 허락받았다.360)

유길준은 1883년 7월에 미국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잠시 일본에 머 문 일이 있었다. 당시 그는 조선정부에서 미국에 파견하는 보빙사(報聘 使)의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는데, 이 서한에 따르면 보빙사(報聘使) 부 전권 홍영식과 유길준은 이미 그전에 차관교섭을 위해 도일(渡日)한 김 옥균을 도쿄에서 만나서, 김옥균은 외국에서 군대를 양성할 자금을 마련 하고, 홍영식은 국내에서 청·일 양국군대의 철수를 권고하는 일을 담당 하되 5년 뒤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361)

1883년 5월에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것 또한 개화당의 군사양성 계획과 관계가 있었다. 이와 관

360) “未幾余以遊學 將向北美之合衆國 與洪公英植 會金公于日本之東京 議定改革大議[원문] 金公在國外 主 養主[원문]兵人 洪公在國內 主勸撤都下二國兵 約五年後擧事 余一書生 不能有所贊劃 只許參聽任究察萬 國情形” {『兪吉濬全書』제5권(서울: 일조각, 1971),「書趙忠定公」, pp.263~265}

361) 조선 정부에서 새로 수교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 전권대신에 민 영익, 부대신에 홍영식을 차하한 것은 1883년 7월 8일(6월 5일)의 일이었다. 당시 유길준은 보빙사의 수행원 자격으로 함께 일본을 경유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이들은 9월 2일 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기차로 대륙을 횡단하여 9월 18일 아서(Chester A. Arther) 미 국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보스턴과 뉴욕 등 여러 도시를 시찰한 후 11월 10일에 귀국길 에 올랐다. 전권대신 민영익 등은 해군무관 포크(George C. Foulk)와 함께 유럽 각국을 순방 하는 세계일주 항행 길에 나서고, 전권부대신 홍영식은 로웰(Percival Lowell)과 함께 샌프란 시스코를 경유해서 11월 14일에 일본 도쿄로 귀환했다. 홍영식 일행은 12월 20일(음력 11월 21일)에 귀국해서 당일 복명했다. 당시 보빙사행에 관한 기록 및 연구로는 Percival Lowell,

"A Korean coup d'état", The Atlantic Monthly, Vol.58. Issue 349. Nov. 1886.

pp.599~618 및 김원모, 「朝鮮 報聘使의 美國使行(1883) 硏究(上·下)」『동방학지』

Vol.49·50, 1985·1986; ――――― ,「遣美使節 洪英植 硏究」,『史學志』Vol.28, No.1, 1995를 참조 할 것. 한편, 포크는 홍영식이 보빙사행에서 돌아온 직후 개화당에 가담했다고 기록한 바 있는 데,(KAR, p.106) 본문에서 인용한 유길준의 서한이나 홍영식을 일본당(日本黨)으로 분류한 다 케조에 공사의 보고로 볼 때,{『明治十五年 朝鮮事變始末』七(公文別錄), 「機密信第十八號」, 1883년 3월 5일} 홍영식이 개화당에 가담한 것은 그 전의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