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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군대의 개입으로 임오군란이 진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2년 9월 7일(7월 25일)에 고종은 기무처(機務處)를 합문 내에 설치하고, 조영 하·김병시·김홍집·김윤식·홍영식·어윤중·신기선(申箕善)에게 날마다 기무처 에 모여서 사안에 따라 영의정에게 가서 논의하여 품결(稟決)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171) 기무처는 불과 5개월 정도의 단명으로 폐지되었 고,172) 또 이 기간 동안 이렇다 할 개혁정책도 시행한 것이 없었으므 로173) 지금까지 많은 학문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기무처는 임오군란의 와중에 대원군에 의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폐지된 후 통리아문 (統理衙門)과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신설될 때까지 고종이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 이었다. 하지만 기무처의 설치과정과 그 운영은, 임오군란 직후의 조선의 정세와 외교에 관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는 『井上馨關係文書』 가운데는

“明治一五年朝鮮関係書類綴”이라는 문서철이 있는데, 그 안에 「機務處節 目」이라는 문헌이 있다. 「機務處節目」은 당시 곤도 마스키(近藤眞鋤) 일본 대리공사가 조보(朝報) 등을 정리해서 외무성에 보고한 것으로 생각 된다. 관견에 따르면 이 문서는 아직 학계에 소개된 바가 없으므로 아래 그 전문을 인용한다.

171) 『承政院日記』·『日省錄』고종 19년 7월 25일;『高宗實錄』 19년 7월 25일; 『靑又日錄』

고종 19년 7월 26일.

172) 기무처는 1883년 1월 30일에 삼군부와 함께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통폐합되었다.(『承政院日 記』고종19년 12월 22일)

173) 관찬사료에 따르면, 내정개혁과 관련해서 기무처가 언급된 것은 단 3차례에 불과하다. 조관 (朝官)의 근수(跟隨)를 간략하게 정하라는 전교(1882년 9월 14일), 강화도에서 새로 주전(鑄錢) 하는 일을 기무처에서 주관케 하라는 의정부의 계언(10월 30일), 국가 비용을 절감하는 문제 [減省]를 기무처에서 의논하라는 전교(11월 23일)가 그것이다.(『承政院日記』고종 19년 8월 3일·9월 19일·10월 13일)

기무처 절목(機務處節目)

하나, 기무처는 중국의 군기처에 따라 설치함.(機務處 以中朝軍機處 設置)

하나, 공사의 출납은 모두 기무처에서 품지하여 시행함.(出納公事 皆自本處 稟旨施行)공사에

관한 명령을 내릴 때는, 기무처에 내려서 여러 신하들이 서명한 후 의정부에 내어 줌. 공사에 관한 사안을 들일 때는, 의정 부에서 기무처에 보내서 주상께 상주함.(出公事 下于本處 諸臣署名 出給政院 納公事 自政院 呈于本處 以爲入啓)

하나, 출납하는 정령 중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기무처에서 의논해서 타당하게 만들 수 있 음.(出納政令 有不便者 本處得以爭執 務臻妥當)

하나, 모든 기무와 관련된 사안은 기무처에서 미리 상의해서, 반드시 여러 의론들이 일치된 후에 대신에게 가서 상의하고, 주상께 상주하여 재결을 받음.(凡係機務 自本處 預爲 對商 必得僉議協同後 往議于大臣而稟裁)

하나, 공사와 관련된 사안은 기무처에서 경외각처에 지시할 수 있음.(有關公事者 本處得以 知委於京外各處)

하나, 인신은 기무처인으로 주조함.(印信 以機務處印 鑄成)

하나, 업무에 관계없는 관원은 공사가 아니면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고, 업무에 관계없는 아전과 하인은 더욱 엄금함.(間員 非公事 不得擅入 間雜吏隸 尤爲嚴禁)

하나, 이곳에 모이는 신하들은 매일 손시(巽時: 오전 8시 반에서 9시 반)에 출근해서 유시 (酉時: 오후 4시 경)에 퇴근함. 관원 1명이 돌아가면서 입직함.(來會諸臣 逐日巽進酉 退 一員輪回入直)

하나, 이곳에 모이는 신하들 가운데 궐내에 실직이 있는 자들은 직각을 겸하며, 궐외에 있 는 자들은 직각을 면하고 문안(問安)·종폐(從陛) 등 모든 궁중 행사에 참여하지 않 음.(來會諸臣 有實職者 闕內則 兼直閣 外則 免直而問安從陛等公故 幷置之)

하나, 행하예목(行下禮木)·계병(稧屛)·필채(筆債)·직수패(直囚牌) 등 각사의 폐규는 모두 거 론하지 않음.(各司弊規 如行下禮木稧屛筆債直囚牌等事 幷勿擧論)

하나, 서리는 6인, 조례는 10인으로 정함.(書吏六人 皂隷十人爲定) 하나, 비용은 관세청에서 마련해서 지급함.(經用 取給於管稅廳)174)

이 절목(節目)에 따르면, 기무처는 왕명(王命)을 출납하고, 정령을 입안·심의하고, 지방에 직접 명령을 내리는 등 초법적 권한을 갖는 일 종의 비상대책기구로 구상되었다. 게다가 기무처는 합문(閤門), 즉 국

174) 「井上馨關係文書」書類の部, 朝鮮關係1. “明治十五年朝鮮關係書類綴”.

왕이 거처하는 편전(便殿) 내에 설치하고 기무처 당상은 매일 이곳에 출근하게 했다. 따라서 처음 구상대로라면 기무처 당상들은 국왕의 지 근거리에 상주하면서 품계와 직책에 구애받지 않는 막강한 권능을 행 사할 수 있었다.

중국의 군기처(軍機處)를 모방해서 설치한다는 제1관의 규정은 기무 처의 설치의도를 잘 드러낸다. 군기처는 청 황제의 최고자문기관으로서, 1729년 옹정제가 몽고의 일파인 준가얼(准噶尔·准噶尔部, Dzungar)을 원정했을 때 군사(軍事)에 관한 결정을 신속히 내리기 위해 설치했던 군 기방(軍機房)에 그 연원을 둔다. 즉, 옹정제는 당시까지 최고정무기관인 내각(內閣)의 인원이 많고 의사결정절차가 복잡한 것을 싫어하여, 자신 의 뜻을 신속하게 집행하기 위해 이와 같은 임시기구를 설치했던 것이 다.175) 기무처가 군기처를 모범으로 하고 있었음은 『陰晴史』의 기록으 로도 확인된다.176)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내정 개혁에 관한 한 기무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陰晴史』에 따르면, 음력 9월 즈음엔 기무처 당상들이 다른 일들이 많아서 김윤식과 신기선만 번갈아가며 입직(入直)했다고 한 다. 다시 말해서 기무처는 거의 비어있을 때가 많았다. 그 이유는 조영 하·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 기무처의 주축들이 청국에 자주 파견돼서 부 재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무처의 파격적인 권한과 소장관 료의 중용이 다른 신하들, 특히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원로대신들의 동 의와 협조를 얻지 못했던 탓도-기무처 당상들은 대부분 의정부 등의 관 직을 겸직하고 있었다-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기무처는 유명무실한 기관에 불과했던 것일까. 기무

175) 군기방은 1732년 변리군기처(辨理軍機處)로 개칭되었다. 1735년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乾隆帝)의 명으로 변리군기처는 폐지되고 군사뿐만이 아닌 정무 일반을 다루는 총리사무처(總 理事務處)가 신설되었으나, 1738년에 다시 변리군기처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군기처에 참여하는 관리들을 군기대신이라고 불렀다. 처음 군기방의 인원은 3명이었는데, 나중에는 3~6 명 정도의 군기대신(軍機大臣)이 참여했다.『淸史稿』第114卷,「職官一」.

176) “新設機務處于禁中 以時事艱虞 四郊多壘 不可如前汗漫 各官在家辦事 故依中國軍機處例 設機 務處 常直禁中 隨事入達 俾無遲悞之患 上護軍金炳始趙寧夏護軍金宏集及余校理魚允中申箕善 與 焉” (『陰晴史』, 高宗19年 7월 12일)

처를 설치해서 소장관료들을 중용하고, 또 그들에게 기존의 관제에 구애 받지 않는 초법적 권한을 부여한 것은, 내정개혁보다는 근대적 외교를 원활히 수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 1882년 초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이 해 4월 에 고종은 대청통상(對淸通商)·조선사절의 베이징 주재·대미수교 등의 현 안을 협의하기 위해 어윤중과 이조연을 문의관(問議官)에 임명해서 청국 에 파견했다. 당시 고종은 최초로 서구식 관례에 따라 어윤중에게 훈령 (訓令)을 내리고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에게 서명을 명했다. 그런데 홍순목·한계원·이최응·김병국·서당보 등 묘당의 원로대신들은 그 훈령의 내용이 사대(事大)의 전례에 위배될 뿐 아니라, 조신(朝臣)에게 문서로 칙유(勅諭)하는 형식이 옳지 않다고 주장해서 결국 그것을 철회하게 했 다. 이에 고종이 문의관의 입시연설(入侍筵說) 기록을 고쳐서 훈령의 초 본(草本)을 그 안에 덧붙이는 편법을 동원하자, 홍순목 등 원로대신은 재차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리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결국 고종은 원 로대신들의 위세에 밀려서 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177)

이 사건은 근대적 외교를 행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했지 만,178) 의정부의 정승이 총리대신을 겸임하게 되어 있는 이 기구로 는179) 대청관계(對淸關係)의 혁신이나 새로운 외교형식의 도입이 불가능 함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고종은 대원군의 손에 통리기무아문 이 혁파된 것을 기회로 초법적 권한을 갖는 기무처를 설치하고, 근대외 교에 익숙하며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일군의 소장관료들을 그 당상에 임 명해서 당면한 외교과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180)

기무처의 설치는 박영효·김옥균의 일본 활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수신

177) 『承政院日記』고종19년 3월 8일;『日省錄』고종19년 3월 8일;『高宗實錄』19년 3월 8일;

『政治日記』고종19년 3월 11일.

178) 전해종, 「統理機務衙門 設置의 經緯에 대하여」,『역사학보』제17·18집, 역사학회, 1962.

179)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이후 총리대신을 역임한 인물은 이최응·김병국·서당보·송근수·홍순목 등 이었다. 김수암, 『한국의 근대외교제도연구: 외교관서와 상주사절을 중심으로』서울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2000. pp.86~87.

180) 이는 청국·일본의 사신 및 장령(將領)이 입궐할 때 기무처 당상들이 어김없이 배석한 사실 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日省錄』고종 19년 11월 17일·18일·12월 1일·12월 5일·12 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