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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사 김홍집(金弘集)과의 만남

트 서한의 접수를 거절한 이유는, ‘조선’이 아닌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쓰고, 또 수신자를 지 방관이나 예조판서가 아닌 국왕으로 특정한 것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AADM.

pp.901~902; 「大淸欽使筆談」『金弘集遺稿』p.319; 『외교문서』제4권 문서번호 61. “조선 의 서한 접수거부 사유 통보”.

92)『瓛齋先生集』제7권 「咨文」, “擬黃海道觀察使答美國人照會”; 또 김윤식에 따르면, 박규수는 1866년 슈펠트의 자문을 거부한 조선의 대응을 개탄하며 “내 듣기에, 미국은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공평해서 난리를 없애고 분쟁을 해결하기를 잘 한다고 했다. 또 부(富)가 여섯 대륙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강토를 넓히려는 욕심이 없으니, 저들이 비록 말이 없더라도 우리가 마땅히 사전에 교분을 맺고 맹약을 두텁게 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혹 고립되는 근심 을 면할 수도 있었으나 도리어 밀쳐서 물리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도모하는 방법 이겠는가?”(吾聞美國在地球諸國中最號公平 善排難解紛 且富甲六洲 無啓疆之慾 彼雖無言 我當先 事結交締固盟約 庶免孤立之患 乃反推而却之 豈謀國之道乎)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瓛齋先生 集』제7권 「咨文」)

93) Ian Ruxton(2010), p.453.

이동인이 일본에서 비밀외교 공작을 펼치는 동안 조선정부에서는 일 본공사 왕림에 대한 회사(回謝)의 의미로 수신사 파견을 결정하고,94) 김 홍집을 임명했다.95) 하지만 그의 실제 사명(使命)은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관세징수·인천개항·공사주경(公使駐京) 등의 문제가 현안으로 부상 하면서 갈수록 파측(叵測)해지는 일본의 정상(情狀)을 탐지하는 한편, 현 지에서 무역 관세에 관한 교섭을 행하는 데 있었다.96)

수신사 김홍집은 1880년 8월 7일에 도쿄에 도착해서 9월 8일까지 약 한달 간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에 수신사는 숙소로 마련된 혼간지의 아사쿠사 별원에서 처음 이동인을 만났다. 김홍집과 이동인의 첫 만남에 관해서는 「朝鮮國布敎日誌」에 이동인이 1880년 9월 28일에 원산에서 오쿠무라 엔신에게 직접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회고담은 두 사람 의 극적인 해후에 관해 가장 상세하고, 또 많이 인용되는 자료이므로 아 래 그 전문을 인용한다.

동인(東仁)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이는 특필(特筆)할만한 일로, 원래 소생(오쿠무라 엔신을 가리킴-인용자)이 주선 해서 일본 혼간지에 도항시킨 승려 동인(東仁)[당시 淺野東仁이라고 했음-원문]이 몰래 귀한(歸韓)해서 나에게 말했다.

“귀승(歸僧)의 배려로 일본 혼간지에 체재하면서 교법(敎法)과 국정(國政)·어학(語 學) 등을 대략 배웠고, 그 뒤로 도쿄 혼간지[아사쿠사 별원]에 가서 스즈키(鈴木) 소장(所長)의 주선으로 유명한 조야(朝野)의 인사들을 만나서 한국(韓國)의 현재 국 운(國運)을 말하니 모두 한국(韓國)을 부식(扶植)하려는 후의를 보였소. 마침 그 때 수신사 김굉집(金宏集)이 귀국에 들어와서 아사쿠사 혼간지에 머물렀소. 스즈키 교 정(敎正)의 접대는 김 수신사와 이조연(李祖淵)을 감동시켰소. 하나부사 공사는 김

94) 『備邊司謄錄』고종 17년 2월 9일.

95) 『高宗實錄』17년 3월 23일; 수신사로 김홍집이 임명된 것은 민영익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용희(1973) pp.30~32.

96) 수신사 김홍집이 사폐(辭陛)하는 자리에서 고종은 “개항(開港)·정세(定稅) 등의 일은 정부에서 필시 말을 했으리라. 이밖에 혹시 난처한 일이 있으면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오직 나라에 이롭게 할 것만을 생각하라.”라고 했다.(『承政院日記』고종 17년 5월 28일; 『金弘集遺稿』

p.261)

씨에게 인천개항 건을 말했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임무가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부 사 공사의 뜻에 응하지 않았소. 하나부사는 이 일을 스즈키에게 말했고, 스즈키는 나에게 왔소. 그래서 나는 스즈키 씨에게, ‘내가 일본인이 되어 김 수신사를 만나 일본정부의 후정(厚情)부터 재야 유지자(有志者)의 참뜻을 전한다면, 김 수신사도 안심해서 하나부사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하였소. 스즈키 씨는 이 일을 하나부사에 게 말했소. 하나부사는, ‘동인(東仁)은 밀행(密行)한 자이다. 수신사를 만나면 저 나 라의 폭정(暴政)에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계책이다.’

라고 했소. 스즈키는 그 뜻을 나에게 전했소. 나는 ‘내가 일본에 와서 국은(國恩)에 보답하고 불은(佛恩)을 갚기로 결심했으니, 나라를 위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다시 근심하지 않소. 김 수신사를 알현하고 싶소.’라고 했소. 하나부사와 스즈키는 감탄했고, 결국 김 수신사를 만났소. 나는 일본 옷을 입고 조선어를 말했소. 김씨는 괴이하게 여겨서 자세히 물었소. 나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 ‘나라를 위해 작년 이래 로 교토와 도쿄 사이에서 고위관리는 물론 재야 유지(有志)의 선비를 만나 그 의도 를 탐지하니, 조선에 대해 다른 뜻이 없고, 단지 우리나라를 개명(開明)으로 인도하 려는 한 가지 일 뿐이었습니다. 그대는 이번에 하나부사의 말을 받아들여서, 귀국하 신 후에 반드시 주선하십시오.’라고 온갖 말로 설득하니, 김 수신사는 무릎을 치며

‘아하! 여기 기남아(奇男兒)가 있어 국은(國恩)에 보답하는구나!’라고 하며 감격해 마지않았소. 그로부터 친밀해져서 만사가 술술 풀리게 되었소. 그 뒤로 하나부사가 크게 나를 신임했소. 우리 신사의 뒤를 쫓아 귀한(歸韓)했소.”

일본어로 자세히 말하는 것이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하여, 미처 깨닫지 못하는 새 한밤중이 되었다.

이 회고담에 따르면, 이동인이 김홍집을 만난 계기는 인천개항 문제 에 관한 김홍집과 하나부사 간의 교섭이 교착된 데 있었다. 즉, 이동인 은 이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김홍집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이용희는 이동인과 김홍집은 8월 25일에서 31일 사이에 처음 만났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97)

97)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가 『日本の韓國倂合』에서 처음으로 그 전문을 수록한 미간사료

「明治十三年八月朝鮮國修信使談判始末」는 당시 김홍집과 하나부사 공사, 이노우에 외무경 사 이의 회담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山邊健太郞, 『日本の韓國倂合』(東京: 太平出版社, 1966) pp.48~60} 이용희의 근거는, 「明治十三年八月朝鮮國修信使談判始末」의 기록에서 김 홍집은 8월 25일의 하나부사 공사와의 회견에서는 현안인 미곡수출 및 관세율 책정 건에 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반면, 8월 31일의 이노우에 외무경과의 회견에서는 그 태도가 크게 유화

그런데 당시 사토우가 고베주재 영국영사 애스턴(W.G.Aston)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이동인은 수신사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그를 만날 기회를 치밀하게 엿보고 있었던 정황이 간취된다. 즉, 7월 1일자 서한에 서는 이동인은 원래 잠시 조선에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수신사의 입국으 로 인해 그 계획이 잠시 늦춰질지도 모르겠다고 했다.98) 7월 19일자 서 한에서는 이동인은 이번 달 안으로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다.99) 그런데 7월 28일자 서한에서 이동인은 원래 이번 주에 고베에 가려고 했으나 마음을 바꿔서 김홍집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전보가 올 때까지 기다 리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100) 그리고 8월 4일자 서한에서는 애스턴에게 이동인의 일본 가명 아사노(朝野)를 처음 밝히면서 이동인이 고베에 도 착하면 잘 주선해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그의 이동은 지금 애스턴과 함 께 있을 수신사의 이동경로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하였다.(김홍집은 8 월 4일 오전 10시경 고베에 입항함)101) 또 8월 11일자 서한에서는, “아 사노(朝野)는 오늘 아침에 도착한 조선 수신사와 면담할 수 있을지 여부 를 확인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다음 주 이 번 요일쯤에는 증기선을 타고 출항할 것으로 생각한다.”102)라고 했다.

따라서 이동인은 7월 19일부터 28일 사이에 수신사를 만나기로 결심하 고, 8월 4일을 전후한 시점부터는 수신사의 이동경로를 뒤쫓아 다니면서 그를 만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앞에서 인 용한 이동인의 회고담은, 김홍집을 만나기로 한 참된 동기를 은폐하고

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추정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되나, 정작 8월 25일의 회견 기록에서는 인천개항 문제가 논의된 흔적이 없어서 미심쩍은 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당시 수 신사의 향서기(鄕書記) 박상식(朴祥植)이 기록한 『東渡日史』에 따르면, 8월 15일에 하나부사 가 수신사의 관소(館所)를 찾아와서 문답하던 중 인천개항 문제를 언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朴祥植, 『東渡日史』(이성주 역,『동도일사』, 부산박물관, 2012) 7월 9일} 한편,「明治十三 年八月朝鮮國修信使談判始末」에는 8월 15일에 수신사가 외무경의 저택을 방문해서 세계 각국 의 근일형세 등을 논하고, 관세 징수 등의 문제는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기 록되어 있다.

98) Ian Ruxton(2008), p.27.

99) Ian Ruxton(2008), p.28.

100) Ian Ruxton(2008), p.29.

101)『金弘集遺稿』「修信使金弘集復命書」, p.297.

102) Ian Ruxton(2008), pp.31~32.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기 위한 말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103)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미 1880년 3월에 일본 외무성에서는 조선 에서 수신사를 파견한다는 풍문을 듣고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고, 그 대 책의 일환으로 이동인을 도쿄로 소환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동인에게 수 신사를 만나볼 것을 종용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일본인이 되어 김 수 신사를 만나 일본정부의 후정(厚情)부터 재야유지자(在野有志者)의 참뜻 을 전한다면, 김 수신사도 안심해서 하나부사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한 이동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수신사를 기다린 것은 비단 일본 외무당국 뿐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재야유지자란 주로 흥아회(興亞會) 인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흥아회에서는 이미 8월 17일에 조 선 수신사가 도착하면 그를 초대해서 간친회(懇親會)를 열어 흥아회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흥아회의 취지와 목적 등을 적어서 수신사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그 초안은 고마키 마사나리(小牧昌業)와 데에네(鄭 永寧)가 기초했다. 이동인 또한 흥아회의 회원이었으므로 흥아회에서는 이러한 뜻을 수신사에게 전하기 위해 이동인을 부추겼을 것이다. 실제로 수신사는 도쿄를 떠나기 직전인 9월 5일에 이조연·윤웅렬(尹雄烈)·강위

103) 「朝鮮國布敎日誌」pp.284~285. 그런데 『朝野新聞』1881년 5월 8일자에도 이동인과 김홍 집의 첫 만남을 묘사한 기사가 있다. 이 기사 또한 이동인이 『朝野新聞』의 편집장 스에히로 시게야스(末廣重恭)에게 직접 전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인용한 「朝鮮國布敎 日誌」의 내용과 상이한 것으로 봐서, 이동인이 오쿠무라 엔신에게 한 말은 다소 과장이 있는 것 같다.

“작년에 수신사 김굉집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이동인은 그가 일본의 사정에 익숙지 못해서 담 판의 목적을 그르칠 것을 우려하여, 하루는 양복을 입고 일본 상인이라고 자칭하며 많은 시계 를 갖고 통역과 함께 수신사의 숙소로 갔다. 그리고는 수행원 아무개를 만나서 시계 이야기를 빌미로 개항의 필요성을 설득했는데, 의론이 격앙된 와중에 실수로 조선어 두세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의심을 받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결심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 히고 함께 별실로 들어가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후로 종종 수신사도 면회했다. 통 신사(원문) 일행이 갑자기 개항론(開港論)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이동인의 힘이었다.(昨年修信使 金宏集の東京に來るや李東仁は其の日本の事情に通せず談判の目的を誤まるを憂へ一日洋服を着し 自ら日本の商人と稱し許多の時計を携へ通辨官與に修信使の旅館に至り附屬官某に逢ひ時計の談に 托して開港の必要なるを說き勸めしが議論激昻の際に至り誤つて二三の朝鮮語を吐き之が爲めに深 く怪まれし故遂に決心して其の朝鮮人なる事を示めし與に別室に入りて何が談する所ありしが夫れ より度度修信使にも面會し通信使が一行の俄然と開港論となりしは全く李東仁の力なり)” 『朝野 新聞』1881년 5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