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 수신사 박영효의 공식사명은 국서전달에 있었다. 또 이와 함께 조일수호조규속약의 비준과 배상금 지불조건 협상을 위한 전권이 부여되 었다. 게다가 김옥균은 고종에게서 차관을 얻어오라는 밀유(密諭)를 받 고 일본에 건너왔다.
그런데 김옥균과 박영효는 이러한 사명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외교교 섭을 진행했다. 그 목적은 조선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승인받는 데 있었 다. 기존연구에서는 이 또한 고종의 밀명에서 나온 것으로 전제했지만, 실제로 고종의 밀명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여러 가 지 정황을 볼 때 이들의 독자적인 활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마치 1880년에 이동인이 김홍집의 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면서도, 비밀리 에 영국공사관 및 일본 외무성과의 교섭을 진행했던 것과 유사하다.
김옥균과 박영효에 따르면, 국가의 독립이란 다른 독립국의 승인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며, 그 승인은 독립국가들 간에 대등하게 조약을 체 결하는 행위로 구체화되는 것으로 정의된다.239) 이는 국가지위
以及我國財政之困却無以振作之由諸君均以爲若有朝鮮政府謀國債委任狀 事可以成矣 余遂決意歸 國)”
239) 예컨대 어윤중이 주복(周馥)과의 회견(1882.5.19)에서 “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가리켜 독립이라고 하기에, 제가 큰 소리로 물리치면서 ‘자주라고 하는 것은 괜찮 지만 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대청(大淸)이 있어서 예로부터 정삭을 받들고 제후의 법도를 지키는데, 어떻게 독립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말이 없었습니다.”
라고 했을 때의 독립 또한 서구국제법적 의미에서 주권국가(sovereign state)로 승인받는 것을 의미한다.(『中日韓』第2卷, 문서번호 417의 부건1, pp.589~595) 어윤중에게 있어 ‘자주’와
‘독립’의 의미를 다룬 연구로는 秋月望, “魚允中における「自主」と「獨立」”, 『年報 朝鮮學』
創刊號, 1990을 참조할 것.
그에 반해 1882년 10월 16일(음력 9월 5일)에 출신(出身) 정영조(鄭暎朝)가 올린 상소에서 는, 독립은 국제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국력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각국이 우호를 맺는 것은 사시(四時)와 같이 정확하며 그 정의(情誼)는 일가(一家)와 같습니 다. 만약 한 나라가 약속을 어기면 힘을 합쳐 그것을 공격하고, 한 나라가 불우의 사태를 당하
(statehood)의 인정문제와 관련해서 19세기에 유행한 국제법 학설인 승 인설(constitutive theory)을 답습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또 이는 그들이 일본에 갔을 때 현지에서 유행하고 있던 담 론이기도 했다.240)
그런데 당시 김옥균과 박영효의 발언기록을 살펴보면, 그들의 독립론 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이들은 조선이 반드시 서양열강으로 부터 독립을 승인받아야 하는 당위적 이유로서 국제법의 보호(protection of international law)를 내세웠다.
(수신사 박영효는-인용자) 약한 나라인 조선은 지금까지 청국의 강한 힘에 굴복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서양 국가들과의 관계에 들어간다면 국제법의 보호를 요구 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최근까지 외국과의 모든 관계를 거부하고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나라가, 그 동방의 종주국(Oriental Suzerain)에 대해 유지하 길 원하는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바로 그 국제법에 이렇게 빨리 호소하는 것은 저 면 힘을 모아 구원해주니, 이는 참으로 천하의 이해(利害)와 안위(安危)가 달린 기틀입니다. 우 리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서, 예의(禮義)는 만국 가운데 으뜸이지만, 땅덩이가 좁아서 나 라 곳간이 충실치 않고 군대와 무기가 많지 않으므로 이 세상에서 독립(獨立)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득이한 일(각국과의 체약-인용자)을 행하는 것입니다.(出身鄭暎朝疎略曰 各國講 好 信如四時 誼同一家 若一有背約 則合力功之 一有不虞 則倂力救之 此誠天下之利鈍危安之機也 我國僻在海隅 禮義冠於萬國 然而地方偏小 府庫不實 兵甲不多 不可獨立於此世 行此不得已之事)”
(『承政院日記』고종19년 9월 5일)
240) “대체로 나라의 성쇠강약(盛衰强弱) 여하에 무관하게 그 내치외교(內治外交)의 주권(主權)에 있어 결손(缺損)이 없는 이상, 비록 약하기 때문에 강국의 보호를 청하고, 작기 때문에 대국에 뇌물을 바쳐서 그 박서양탈(搏噬攘奪)을 막더라도 여전히 조금도 그 독립국의 자격을 잃지 않 는다. 또 아무리 그 나라가 부귀하고 또 강하더라도 내치외교의 주권에 조금이라도 결손이 있 으면, 가령 견고한 군함과 예리한 대포가 스스로 그 나라를 지키기에 충분하고, 비옥한 토양이 그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기에 족하더라도, 아직 그 부강을 이유로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내치외교의 주권에 결손이 있는 나라, 즉 독립의 체면을 보존하지 못하는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보면, 대체로 보호자(保護者)의 윤가(允可)를 받지 않고서는 외국에 대해 직접 조약을 체결하거나, 혹은 선전강화(宣戰講和)의 권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나라로서, 그 종 류를 대별(大別)하면 그 첫 번째를 반독립국(半獨立國, semi-sovereign state)라고 하고, 그 두 번째를 예속국(隸屬國, dependency)이라고 할 것이다. 그밖에 피보호국(被保護國, protectorate)과 조공국(朝貢國, tributary) 같은 것은 이와 조금 차이가 있다.” {「朝鮮獨立論 第一」, 『東京日日新聞』1882년 9월 27일(『資料 新聞社說に見る朝鮮』第2卷, p.197에서 재 인용)}
에겐 다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241)
우리는 이제 청국이 우리가 경험이 부족한 것을 이용해서, 온전히 그 자신의 국 익의 관점에서, 그리고 조선에는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행동해왔으며, 이제는 조 선을 완전히 종속시키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서구열강과의 조약관계 에 진입함으로써 그러한 결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서구열 강은 우리에게 지지를 보내줄 것으로 아직 믿고 있습니다.242)
하지만 서양열강으로부터 독립국으로 승인받는 것과 현실적으로 조 선이 청국군대를 축출하고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가 의 여부는 엄연히 별개의 문제이다. 국제법의 보호라는 것이 당시의 제 국주의 국제질서에서 단지 허상에 불과함은, 이미 1879년에 보수 관료 인 이유원조차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논파(論破)하고 있었다.
또 태서의 공법이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국가를 빼앗거나 멸망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도 터키에서 군대를 철수했다고 하는데, 그 렇다면 폐방이 무고한데 혹 타국에 의해 병탄당하는 독을 당하게 된다면 그 때도 여러 나라들이 함께 이를 막아주겠습니까? 이것이 유독 확실치 않아 회의(懷疑)하 면서 해소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일본이 류큐 왕을 폐하고 그 강토를 병탄한 것은 바로 걸송(桀宋)의 행실과 같습니다.(중략)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른 터키를 구원할 때는 공법에 의지할 수 있지만, 이미 멸망한 류큐를 부흥시키는 데는 공법이 시행 되기 어려워서입니까? 아니면 일본인들이 사납고 약아서 각국을 경시해서 제멋대 로 사리를 취하더라도 공법이 시행될 수 없기 때문입니까? 벨기에와 덴마크는 약소 국으로서 대국 사이에 끼어있음에도 강약상유(强弱相維)에 의지하지만 류큐 왕은 수백 년의 오래된 나라인데도 상유(相維)하지 못한 것은 고립된 처지에 놓여 각국 과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공법이 미처 시행될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243)
241) FO 46/288, No.153. Parkes to Granville, 1882.10.24;『외교문서』제7권 문서번호 60.
242) Dec.29, FO 405/33, No.19. Parkes to Granville, Tokio;『외교문서』제7권 문서번호 60.
243) 번역문은 장인성·김현철·김종학 공편(2012), p.49에서 인용함. 원문 출전은 「橘山答書」『龍 湖閒錄』제4권, pp.440~405; “答肅毅伯書”, 「書」『嘉梧藁略』제1권; 『中日韓』第2卷, 문서 번호 329의 부건(1).
이 글은 이유원이 이홍장의 개국권고를 거부한 서한에서 인용한 것 이다. 이 서한은 1880년에 이동인도 일본에서 갖고 다녔으므로 김옥균 이 이 내용을 몰랐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이동인 또한 대영제국의 흉 포함과 서양의 위험에 대해선 누구보다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 서 김옥균이 진실로 국제법의 보호를 기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창했다 면,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적 속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이동인, 심지어 이 유원보다 훨씬 더 나이브했다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은 결론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가 조선의 독립을 주창한 이면에 잠복된 정치적 동기를 해명 해야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김옥균·박영효의 독립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 독립론과도 차이가 있었다. 임오군란 전후 후쿠자와의 조선관련 논설을 보면, 일본 국내정책에 있어서는 군비 증강을, 대외정책으로는 청국과의 개전 준비를 주장했다.244) 다시 말해서, 그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는 하였으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실력을 전제로 한 것으로, 국제법 의 보호나 열강의 보장을 통한 조선중립화론 같은 것은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김옥균이 후쿠자와의 영향으로 국가와 민족의 ‘독립’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이 결국 갑신정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 다는 해석은, ‘독립’이라는 말의 동일성에만 착목한 것으로 그 실질적 내 용이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한 소치라고 할 수 있다.245)
김옥균의 독립론의 두 번째 특징은, 조약체결을 통해 국가의 독립을 승인받으려면 반드시 제3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당사국 간에 직접 조약 을 체결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 데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박영효의 발 언은, 당시 이들이 조약체결의 형식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 잘 보 여준다.
겉으로만 봐서는 귀하가 최근 청국과 조선 사이의 협정(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244) 최덕수,『개항과 朝日관계-상호인식과 정책』(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pp.157~168.
245) 아오키 교이치(靑木功一)는 개화파의 이른바 변법개화론(變法開化論)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 작을 매개로 서구근대사상을 접한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靑木功一, “朝鮮開化 派と福澤諭吉の著作”,『朝鮮學報』第52輯,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