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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와의 공모(共謀)

곤경에 빠진 김옥균에게 최후의 원조의 손길을 내민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1838~1897)였다. 고토는 원래 도사 번(土佐藩)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에도 큰 공적을 세웠으나, 이른바 메이 지 6년의 정변(1873)으로 메이지 정부에서 하야한 뒤엔 자유민권운동 (自由民權運動)에 투신하여 1874년에는 민선의원설립 건백서를 제출하 고, 1881년에는 자유당(自由黨)을 결성한 유력한 재야정객이었다.

고토는 후쿠자와 유키치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는 1873년에 호라이샤(蓬萊社)라는 상사(商社)를 설립하고, 그 다음해엔 정부로부터 히젠(肥前)의 다카시마(高島) 탄광을 불하받았는데, 경영난으로 외국인들 에게 큰 빚을 지고 소송을 당할 위기에 몰리자 후쿠자와가 나서서 이 탄 광을 미쓰비시(三菱)의 이와자키 야타로(岩崎弥太郎)가 인수하도록 주선 했다. 이 일을 계기로 후쿠자와와 고토의 관계가 친밀해졌다고 한다.420) 고토는 후쿠자와의 제자 이노우에 가쿠고로(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 루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하 ‘가쿠고로’로 칭함)와 후쿠자와가 운영하 던 신문 『時事新報』의 기자 미야케 효조(三宅豹三)를 비서로 두었으 며, 1897년 8월에 고토가 사망했을 때 후쿠자와는 그를 가리켜 정부의 현상을 변혁하고 악폐를 일소할 수 있는 ‘대단히 대담한 호걸’이자 ‘만천 하 유일의 인물’이라고 평한 부고기사를 『時事新報』에 게재했다.421)

419) 『윤치호일기』고종20년 11월 22일.

420) 『福澤諭吉傳』제2권, pp.523~531.

421) 「後藤伯」,『時事新報』1897년 8월 6일.

또한 후술하겠지만, 후쿠자와는 고토에게 조선에 직접 건너가서 그 정권 을 잡고 개혁을 추진할 것을 권유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김옥균은 이미 첫 번째 방일 당시 후쿠자와의 소개로 고토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한편, 고토는 1882년 초가을 무렵 이타가키 타이스케(坂垣 退助)와 함께 유럽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임오수신사 박영효와 김옥 균이 일본에 도착하자 ‘긴급한 개인 용무’로 이를 11월로 연기했다. 그 리고는 도쿄에서 김옥균을 만나서 동해의 포경 사업과 제주도에서 녹나 무(camphor tree)를 벌목하는 구상에 큰 흥미를 표시했다고 한다.422) 차관의 담보로 동해의 포경권과 목재를 설정한다는 김옥균의 구상이 고 토와의 협의를 통해 만들어졌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自由黨史』에 따르면, 김옥균이 다시 고토를 만난 것은 1883년 10월의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고토는 김옥균에게 자금지원을 약속하면 서, 우선 가쿠고로가 조선조정에 고빙(雇聘)된 다음에 자신은 조선에 건 너가 객경(客卿)이 되어 조선개혁의 권병(權柄)을 잡을 뜻을 밝혔다고 한 다.423)

또 고토의 전기 『伯爵後藤象二郞』는 당시 고토가 김옥균에게 한 발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쇼지로가 이미 이를 떠맡은 이상 결코 두 말을 하지 않을 것이나, 오직 이 일에 대한 조선국왕의 신한(宸翰)을 바라오. 즉, 조선개혁의 한 가지 일은, 그것을 일체 이 고토 쇼지로에게 위임한다는 조칙(詔勅)을 받지 않는다면 나중에 여러 소인들이 혹시 내 행동을 방해해서 대사를 그르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각하께서 과연 나를 신뢰한다면 바로 그것을 받아 오시오. 나는 백만 엔의 자금과 뜻을 같이 하는 지사 들을 이끌고 귀국으로 건너가서 일거에 잡배(雜輩)를 일소하여 팔도의 백성들을 편 안히 하고, 귀국을 태산과 같은 안정 위에 올려놓을 것이오.424)

422) Cook(1972), pp.63~64.

423) 宇田友猪·和田三郞 編, 板垣退助 監修,『自由黨史』下卷(東京: 岩波書店, 1957) pp.125~126.

『自由黨史』는 일본의 왕정복고(王政復古, 1868)로부터 제국헌법의 발포(1889)에 이르기까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 및 그 중심정당이었던 자유당(自由黨)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초 판은 1910년에 상·하 2책으로 출간되었다. 『自由黨史』의 편찬 및 출판경위에 관해서는 遠山 茂樹, “『自由黨史』解說”,『遠山茂樹著作集』第3卷(東京: 岩波書店, 1991) pp.110~128을 참 조할 것.

요컨대 고토는 김옥균에게 100만 엔의 자금을 알선하고, 또 일본인 소시(壯士)들을425) 동원해서 조선에서 정변을 일으키는 대가로 ‘조선개 혁’, 즉 내정의 전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토는 김옥균에 대한 국왕의 신임의 증거로, 그 친서를 받아올 것을 주 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김옥균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래 인용한 글은 당시 김옥균이 고토에게 보낸 서한의 전문으로, 김옥균과 고토의 공모(共謀)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서한은 『金玉均全集』에도

「朝鮮內政改革意見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김옥균의 가장 큰 치부가 되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번역은 물론, 그 내용 또한 정밀하게 검토된 바가 없다.426) 이에 그 전문을 번역하여 아래 게재한다.

424) 大町桂月,『伯爵後藤象二郞』(東京: 富山房, 1914) pp.541~543.

425) 소시(壯士)는 우리말로는 힘이 센 사람을 의미하지만, 메이지 일본에서는 일정한 직업 없이 타인의 의뢰를 받아 담판이나 협박을 일삼는 자를 뜻하며, 이들은 종종 자유민권운동의 활동가 나 정당에 고용되어 경비나 선거운동을 담당했다.{福澤諭吉,『福翁自傳』(時事新報社, 1899) 허 호 역,『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서울: 이산, 2006) p.166}

426) 이 서한은 일본 도쿄도립대학(東京道立大學) 도서관에 수장된 「花房文書」에 포함돼 있으며, 山邊健太郞(1966) pp.120~122와 『金玉均全集』(1979) pp.109~119에 전재되어 있다. 그런 데 양자 모두 오탈자가 많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金玉均全集』에서는 김옥균 서한의 원문을 영인해서 수록한 후, 이를 활자체로 바꿔서 다시 수록했는데, 활자체 문서는 山邊健太 郞의 오탈자를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책을 전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山邊 健太郞(1966)와 『金玉均全集』에 수록된 김옥균 서한에서 탈자(脫字)는 □로, 오자(誤字)는 밑 줄로 표시한 후, 그 교정한 글자를 [ ]안에 표기했다.

“擬以朝鮮策略 呈後藤先生閣下證明 更乞垂誨

蓋朝鮮一國 四百年來 無兵革凶荒 上下人心 安逸酷甚 今□[雖]有天下各國 秩次結約 至於改進之 道 實無方向 大君主雖極英明聰斷 以玆[若]四百年積累之頑俗 猝無以化矣 勢不得不一番大更張 改 革政府 然後君權可以尊 民生可以保矣 惟我大君主 肝[旰]憂仲仲[忡忡]時有懇惻之敎 更不無密諭 而力極改革 以玉均之無似 得此知遇之誠 雖滅身抉腹 惟尊王室 以報我大君主之恩 而□[言]乎其圖 報之策 自來淸國之自以爲屬國 誠萬無之恥 亦不無因此 而國無振作之望 此是第一疑 撇[撤]退羈絆 特立爲獨全自主之國 欲獨立則政治外交 不可不自修自强 然彼事 以今政府人物 萬不可得矣 亦不可 不一番掃盡傾危君權貪勢苟息之輩 其掃除之道 有二策 一是得君密勅而平和行事也 一是賴君密意而 以力從事也 又若曰平和 則朝鮮國人皆可用之 若用武力 則勢不得不雇用日本人 或曰 欲改革己國之 事 何用他國之人 此固有說焉 以朝鮮蠢蠕之物 實無以與圖大事 以往年大院君之亂 無一介爲王家 而于[倡]義在[者]于此可見 我國人之無一可用也 欲雇用日人 我雖有財 實無威權於日人 亟擬與閣 下 共圖大事 此誠世界上大功系[業]萬年不朽之盛名也 我知日本有閣下一人可共大計 □[一]面之契

조선책략을 고안하여 고토 선생 각하께 드려서 증명(證明)하오니,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조선은 지난 400년 동안 병혁(兵革)과 흉황(凶荒)이 없어서 상하 인심이 대단히 안일합니다. 이제 비록 천하각국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했지만 개진지도(改進之道) 에 이르러선 실로 방향이 없습니다. 대군주께선 비록 지극히 영명총단(英明聦斷)하 시나 저처럼 400년 간 누적된 완고한 습속은 갑자기 바뀔 수 없을 것이니, 형편상 부득불 한번 대경장(大更張)을 해서 정부를 개혁한 후에야 군권(君權)을 높이고 민 생(民生)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대군주께선 밤낮으로 근심하셔서 때때로 간절한 전교를 내리시고, 다시 밀유 (密諭)가 없지 않아서 개혁에 온 힘을 쏟으십니다. 그래서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사 람이 이와 같은 지우(知遇)를 입게 되었으니, 설령 몸을 멸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어도 오직 왕실을 높여서 우리 군주의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 그런데 그 보답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예로부터 청국은 우리를 속국으로 여겨 왔으니, 참으로 만세(萬世)의 치욕이 또한 여기에 기인하며, 나라는 진작(振作)할 가망이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굴레를 벗어던지고 특립(特立)하여 독전자주지 국(獨全自主之國)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독립하고자 한다면 정치·외교를 자수자 강(自修自强)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일은 지금 정부의 인물로는 결코 할 수 없으 니, 또한 군권(君權)을 위태롭게 하고 세력을 탐하여 고식(姑息)하는 무리를 한번 싹 쓸어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 소제(掃除)하는 데는 두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군주의 밀칙(密勅)을 받아서 평화롭게 행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밀의(密意)에 기대서 무력으로 행하 는 것입니다. 또 만약 평화롭게 한다면 조선인을 모두 그 일에 쓸 수 있지만, 무력

閣下又慨然相許 此特氣義爲重 其如做事之際 生死二路 均屬常理 □[今]閣下與我所結之義氣 卽是 共生共死四字而已 其如事遂誠[원문, 成?]就 局面一新 以後許多可行之事 便民利國在[者]自不必

□[預]贅 惟面前可行緊要一件 卽有金爲重 所以玉均得君主委任之全權 方有就議者 此事成彼[後]

如購銃砲彈藥汽船等之物 不可不爲急先務 如雇入可使之人 精粗幷蓄 闕一不可 此固閣下全任而相 議者 然其他瑣小節目 今不須言及 乎行事之際 緩急疎密 自有觀機之變 今與閣下有鐵盟 替[誓]無 相誓[替]然惟我二人取[所]言卽私也 玉均將得我君主密勅于閣下 之[今]與共大事 有不得不就閣下 一言而大決在[者]閣下今雖無職事于貴政府 明明[明日再明]不意出脚 亦不可知 若至於此 今與我爲 盟者 卽空虛也 今以義氣相投 我將奉君 不可不一□[質]于閣下 然彼事荒亂 草此而証之 惟於一言 而[之]決 行[小]無回互

後藤象次郞 閣下

請旨[與]福澤諭吉先生 證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