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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갑신정변 수기(手記)인 『甲申日錄』에서 개화당과 집권세 력인 민씨 일족이 결정적으로 분열한 계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 다.

하루는 당오전·당십전(當十錢)을 주조하는 일로 청국 장령 오장경(吳長慶)이 처음 그 단서를 열고, 민태호(閔台鎬)·윤태준(尹泰駿) 무리가 그 일을 주장하여 임금님을 기망하여 그 계획이 거의 행해지게 되었으므로, 나는 민씨들 및 윤태준과 어전에서 여러 차례 면쟁(面爭)하였다. 글로 건백(建白)한 것이 수십 번이요, 대신 이하 재보 (宰補, 즉 민씨)들과 수없이 논쟁해서 입술이 거의 헤질 정도였다. 결국 민영익은

“묄렌도르프는 외국인이니 필시 정치학문에 뛰어날 것입니다. 화폐에 관한 일을 질 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했다. 임금님께서는 “김옥균과 함께 의논해서 아뢰어라”라고 명하셨다. 민영익은 나와 함께 묄렌도르프를 민씨 집으로 불러서 결 국 화폐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 말이 매우 길었다. 묄렌도르프가 말했다. “금은화폐 를 모두 주조할 수 있으나, 우선 시급한 경비를 위해 당오전·당십전 내지 당백전을 주조해서 목전의 위기를 해결해야 합니다. 조금도 폐해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반박했다. “그대는 유럽인이니 재정에 대해 응당 견문이 있을 것이오. 이제 그 대의 논의를 들으니 아혹(訝惑)이 극심하오. 만약 그대가 그런 편의적인 화폐정책 이 국가의 해독이 됨을 알지 못한다면 학식이 없는 것이요, 만약 그대가 그 폐해를 알면서도 한갓 다른 사람의 말을 구차하게 따르는 것을 중시여기는 것이라면 심술 (心術)이 바르지 못한 것이오.” 한나절이나 논쟁하다가 돌아갔다. 나는 즉시 어전에 나아가서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님께서는 마침내 나의 상주를 윤허 하셔서, 삼백만 엔 국채 위임장을 하사하시고 중한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민씨 무리는 묄렌도르프와 부화뇌동해서 백방으로 이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임 금님의 마음은 굳게 정해져서 그 무리가 틈을 노릴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일본에 건 너가기로 결심했다.(중략)

이른바 당오전은 폐단에 폐단을 낳아서,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형편은 곤궁해지 고, 나라의 세력은 위축돼서 거의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금님께서는 이를 깊이 심려하셔서 때때로 나와 상의하셨다. 민씨 무리와 당초에 이 일을 주장 한 자들은 그 실책을 부끄러워하고, 그 폐단을 구제할 방도를 생각했다. 묄렌도르프 에게 그 대책을 묻자, [내가 귀국한 뒤에 묄렌도르프와 외아문에서 양립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 때때로 논의가 합치하지 않아서 쟁론을 그치지 않았다. 묄렌도르프 는 또 세관 일로 실책이 매우 컸기 때문에 내가 가끔 따져서 면박을 주자, 그 또한 부끄러워하며 나를 미워하였고, 마침내 협판직에서 사임했다. 그 뒤로 나를 원수처 럼 여기는 마음을 품었다.] 묄렌도르프는 곧 한 가지 계책을 내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씨들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길, “이제 조선의 폐해를 없애는 방법 은 당오전이 아니라, 마땅히 먼저 김옥균을 제거해야 합니다. 온갖 일로 군상(君上) 을 기만해서 그대들에게 해독을 입히는 것은 바로 김옥균일 따름입니다. 그대들은 어째서 그 해독의 근본을 생각하지 않고, 그 말단만 다스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또 그대들은 같은 일족인데도 때때로 서로 정의(情誼)가 틀어지니 나라의 복이 아닙니 다. 부디 그대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나라의 제일가는 폐해를 제거하는 것이 득책 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민씨들은 마침내 공모했다. 민영익은 곧 청당(淸黨)의 괴수가 되어 밖으로는 우리 당(黨)을 배책하는 계책을 꾸미고, 안으로는 민태호·민 영목이 우리 당을 무함하는 계책을 꾸며서,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이로부터 갑자기 두 당(黨)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328)

328) “一日以叩鑄當五當十錢一事 淸將吳長慶肇其端 如閔台鎬尹泰駿輩主其事 欺謊君上 其計幾行 余 與諸閔及尹泰駿面爭於前席屢矣 以書建白幾十度 自大臣以下乃至宰輔(卽諸閔)之間 苦口角爭 幾獘 唇舌 閔泳翊竟奏言 穆麟德卽外國人 必優於政治學問 今將貨幣事 可以質問 上命與金玉均同議合謀 以奏 泳翊同我招穆於閔家 遂論貨幣一事 其說甚長 穆言 金銀貨幣 均可造鑄 爲先爲經用之急 當五 當十乃至當百 宜叩鑄 以叙目前之急 小無爲獘 余乃駁之曰 若旣爲歐洲人 於財政上應有所見所聞 今聞君論 訝惑極矣 若如不知造次貨政爲國酖毒 此無學無識 若如知其爲獘 徒以苟循人言爲重 此心 術不正 辨爭半日而歸 余卽詣上前 具以寔狀聞之 上遂允可余奏 以三百萬圓國債委任狀授與 奉托持 重 然諸閔輩與穆符同 百方沮戱 無所不至 惟上心堅定 彼輩無以伺間 余決再渡日本之計(中略) 所 謂當五錢 獘下生獘 民情日困 國勢日縮 殆不可支矣 上甚憂之 時有及議於余 諸閔輩及當初主其事 者 自愧其失策 屢思其救獘之方 問策於穆 [吾歸後 與穆勢不能兩立於外衙門 時有議不合 爭辨不已 穆又以稅關一事 失著杜大 余時辨論而面駁之 穆亦愧而惡之 竟至許遞協辦之職 從此含我如仇讐]

穆乃生一計 卽仲裁於諸閔之間 其言曰 今爲朝鮮除害 不在於當五之錢 宜急先除去金玉均也 百事 誣謊君上 爲害諸君 卽一金玉均而已 諸君何故不思爲害之本 欲治其末耶 且諸君 以同門同種 時相 乖誼 非國之福也 請諸君互相付合 以除國之第一爲獘者 非計之得者耶 諸閔遂與合謀 閔泳翊卽爲淸 黨之魁 外作功斥吾黨之計 內而閔台鎬閔泳穆誣陷吾黨之計 日甚一日 自此奄成兩黨不相能之勢”

이 기록에 따르면, 개화당과 민씨 일족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 킨 사건은 바로 당오전(當五錢)의 주전(鑄錢)이었다. 즉, 임오군란 이후 재정난이 극심해지자, 이를 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묄렌도르프와 민씨 일족은 악화(惡貨)인 당오전의 주조를 제시한 반면, 김옥균 자신은 외국 에서 차관을 도입하는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김옥균이 예언한 대로 당오전의 폐해가 심하여 민생이 곤궁해지고 나라 형편이 위축되는 지경 에 이르자, 평소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묄렌도르프는 오히려 민씨 일 족과 결탁해서 개화당을 배척하고 무함하기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개화 당과 민씨 일족의 관계는 양립 불가능하게 되어 결국 부득이 정변을 일 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주일영국공사 플런킷(F.R.Plunkett)329)의 기록에 따르면, 갑신정 변의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서 잠복해 있던 김옥균은 1885년 2월 15일 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집을 방문해서 정변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김옥균은 약속한 대로 어제 제 집을 찾아와서 최근 조선의 변란으로 이어진 사건들 의 전말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국외자(局外者)들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각 각 청당(淸黨)과 일본당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완전히 초점에서 벗어난 것이며, 두 당파의 격렬한 반감은 원래 그들의 외국인과의 관계와는 상관이 없으며 재정문제로 인한 분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중략) 그동안 김옥균은 국왕에게 거듭 재 정문제를 대담하게 처리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는 보수그룹을 분개하게 했으며, 심지어 이들은 김옥균을 제주도로 유배할 것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획은 나중에 김옥균과 다른 진보그룹의 지도자들을 살해한다는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들이 분열된 것은 단지 거창한 통화문제만은 아니었 습니다. (중략) 또한 김옥균의 말에 따르면, 묄렌도르프의 영향력은 언제나 공공의

329) 플런킷(Francis Richard Plunkett, 1835~1907)은 1858년 일본과 서양제국 간에 체결된 불 평등조약개정 교섭을 위해 1884년 3월 15일에 전권공사(Minister Plenipotentiary) 자격으로 도쿄에 파견되었다. 1883년 8월 말에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가 주청(駐淸)공사로 전임(轉任)함 에 따라 케네디(J.G.Kennedy) 서기관이 임시대리공사로 근무하다가 1884년 3월 21일자로 메 이지 천황에게 신임장을 봉정하고 주일 영국공사가 되었다. 플런킷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간략 한 소개로는 다음을 참조할 것. Hugh Cortazzi(ed.), Britain&Japan: Biographical Portraits, Vol.IV. (London: Japan Library, 2002) pp.28~41.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무한한 야심을 위해 발휘되고 있습니다. 왕비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그 친척인 재상들 편에 섰습니다.330)

이상 2개의 기록으로부터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 김옥균은 정변의 원 인을 민씨 척족 및 묄렌도르프에게 돌리고 있었으며, 또 당오전 발행 문 제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옥균이 플런킷 영국공 사에게 한 말이 사실이라면, 갑신정변의 원인을 청국 및 일본과의 관계, 즉 사대(事大)와 독립(獨立)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찾는 것은 완전히 문 제의 초점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 『甲申日錄』이나 플런킷 영국공사와의 대화에서 김옥균은 자신이 당오전의 발행을 반대하고, 그 대안으로서 차관도입을 주장한 이 유에 관해선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또 이들 기록에 따르면, 그가 민씨 척족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부득이 거사를 결심한 것은 1884년 5월에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의 일이 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아래서는 우선 당오전 발행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계속해서 김옥균이 차관도 입을 주장한 이유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1678년(숙종 4년)에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법정화폐로 채택된 이후 로 주전사업(鑄錢事業)은 조선 정부의 만성적 재정난을 타개하는 효과적 인 수단이 되어 왔다. 그 이유는 상평통보는 그 자체가 상품으로서 고유

330) “Kim Ok-kiün came to my house yesterday, as agreed, and gave me a full account of the events which led up to the late troubles in Corea. He said that the designations of Chinese Party and Japanese Party applied by outsiders to the Conservatives and Liberals respectively, fail altogether of hitting the mark,-that the bitter feeling between the two factions has, or had originally nothing to do with their relations with foreigners, but sprang from a quarrel on the financial question. ··· Meanwhile Kim's repeated entreaties to the King to deal manfully with the financial question had, enraged the Conservatives to such a degree that they began to talk of exiling him to the island of Quelpart - a plan afterwards exchanged for the still simpler one of murdering him and the other leading Liberals. Naturally, here again, it was not the one great currency question only on which they had split. ··· Then too there was Möllendorff's influence always, says Kim, exercised on the side, not of the public good, but of his own boundless ambition. The Queen likewise was naturally on the side of the Ministers, who are her relat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