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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김옥균의 대일교섭(對日交涉)

조정에서는 제물포조약 제6관에 따라 9월 7일(음력 7월 25일)에 박 영효와 부사 김만식(金晩植)을 각각 수신 정·부사에 임명했다.190) 정·부 사를 비롯해서 종사관 서광범(徐光範)과 수원(隨員)·종자(從者)들로 구성 된 수신사 일행은191) 9월 20일(8월 9일)에 인천 제물포에서 하나부사

受脅制 游移未決 花房繼又代籌開鑛 扣還償款之憑 幸金宏集等力持不可 而轉瞬設關雇員及一切創 擧經費 實無所措 趙寧夏等乞助於我 自係出於萬不得已” (『中日韓』문서번호 554)

190) 『承政院日記』·『日省錄』·『高宗實錄』·『備邊司謄錄』·『政治日記』고종 19년 7월 25일.

191) 『使和記略』에 따르면, 수원(隨員)으로 유혁로(柳赫魯)·박제경(朴齊絅)·이복환(李福煥)·김유정 (金裕定)·변수(邊燧)·변석윤(邊錫胤)·김용현(金龍鉉) 등 7명, 종자(從者)로 김봉균(金鳳均)·조한승 (曺漢承)·박영준(朴永俊) 등 3명이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使和記略』고종 19년 壬午 8월 1일, p.195) 그런데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는 수행원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日外』

문서번호 162의 附記 “接伴掛日記抄錄”) ·정사: 박영효,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공사와 함께 일본 공부성(工部省) 소속 기선 메 이지마루(明治丸)에 올라 9월 25일에 고베(神戶)에 입항했다.

이 수신사행에는 김옥균과 민영익이 동행했다. 이들은 공식직함이 없었지만 일본현지에서는 오히려 수신사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됐고, 일본천황을 알현할 때도 특별히 배석을 요청받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옥균은 『甲申日錄』에서 원래 고종은 자신을 사신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굳이 사양하고 박영 효를 보거(保擧)했다고 기록했지만,192) 당시 김옥균은 종5품 홍문관 부 교리에 불과했으므로 특별히 고사하지 않았더라도 수신사 정사(正使)로 지명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제물포조약 제6관은 ‘대관(大官)’의 특파를 규정하고 있었다.)193) 한편, 민영익의 동행은 이동인과 김옥균 등에게서 들은 일본의 실상을 직접 견문하려는 호기심에서 나온 것으로, 이를 근 거로 민영익이 개화당의 일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194)

·수원(隨員):유혁로(柳赫魯)·이복환(李福煥)·박제경(朴齊絅)·김용현(金龍鉉)·변석윤(邊錫胤)·김우 정(金祐定)·박우정(朴祐定)·박명화(朴命和)·김봉균(金鳳均)·박영준(朴泳俊) 등 10명 ·국정(國情) 시찰을 위해 동행한 자: 민영익, 김옥균

·그 수원(隨員): 박의병(朴義秉)·이수정(李樹廷)·이고골(李古矻) 등 3명

여기서 김우정(金祐定)은 김유정(金裕定), 박우정(朴祐定)은 박유굉(朴裕宏)의 오기인 것으로 보 인다. 이고골(李古矻) 또한 오기일 것이다.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전자의 변수(邊燧)와 조한승 (曺漢承)이 후자에 누락되어 있는 반면, 후자에는 전자에 없는 박유굉과 박명화가 포함되어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박유굉과 박명화는 수원(隨員)이 아니라 박영효·김옥균이 일본에서 유 학시킬 목적으로 데려간 소년들이었다. 이밖에도 윤치호(尹致昊)와 김화원(金華元)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어학교(語學敎, 윤치호, 18세), 육군사관학교(박유굉, 16세), 영어학교(박명화, 12 세), 제피소(製皮所, 김화원, 18세)에 입학했다.(『使和記略』고종 19년 壬午 9월 22일, p.231) 한편, 변수와 조한승이 수원(隨員) 명단에서 누락된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당시 김옥균은 수신사 의 공식일정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외교교섭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그를 수행했 던 까닭에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192) “亂稍平 當使使日本政府 欲充余以是任 余苦辭 因保擧錦陵尉朴泳孝 上命我爲暫遊日本 稍知情 況 期同朴君偕往 以作顧問 余又不堪辭”

193) 고베주재 영국영사 애스턴(W.G.Aston)은 김옥균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조선 사절단 가운 데 가장 유능하고 교활한(the ablest and shrewdest man)이지만, 조선에서 매우 인기가 없기 때문에 배후에 있어야만 하며, 다른 이들을 통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기록했 다.(FO 46/288, No.140; 『외교문서』제7권 문서번호 55.)

194) 민영익은 1882년 3월에 김옥균이 처음 일본에 건너갔을 때도 동행하려고 했으나 모친상을 당해 무산된 일이 있었다.{이광린, 『김옥균: 삼일천하로 끝난 개혁 풍운아』(서울: 동아일보사,

고베에 도착한 수신사 일행은 10월 10일에 도쿄를 향하기 전까지 약 보름간 그곳에 체재했다. 박영효는 효고현령(兵庫縣令) 모리오카 마 사즈미(森岡昌純)를 비롯하여 고베주재 영국·미국·독일·벨기에 영사 등과 회견을 갖고 10월 4일부터 7일까지 오쓰(大津)·교토(京都)·오사카(大阪) 등지를 유람하기도 했다.195) 당시 김옥균은 고베 인근의 온천에서 따로 머물고 있었다.196) 이는 10월 2일에 김옥균이 당시 일본 외무대보(外務 大輔)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알 수 있다.197)

귀국할 때 바칸(馬關)에서 쓴 편지는 아마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삼가 아후(雅侯) 를 송축 드리오며 아울러 백복(百福)을 기원합니다. 시국이 매우 불안하니, 제가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은 한 마디로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이제 또 고베에 입항했습 니다. 서력(西曆) 10일에 우편선[飛脚船]에 편승해서 요코하마로 향할 것입니다.

인사를 드리고 손을 다시 맞잡을 날이 머지않으니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겠습 니다. 그러나 숙환이 아직도 고통스러워서 막 온천실(溫泉室)에 와서 머물고 있습 니다. 마에다 영사는 아직 부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매우 안타깝습니 다. 그가 돌아올 방편을 서두를 수는 없습니까? 천만가지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직 접 뵙고서 상의 드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0월 2일 김옥균 올림 요시다 대보(大輔) 선생 합하 대인198)

1994) p.29} 민영익은 도쿄까지 박영효·김옥균 일행과 동행했으나, 도쿄에 도착한 뒤로는 거처 를 따로 하다가 박영효보다 한 달 정도 앞서 11월 29일에 도쿄를 떠났다. 일본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12월 23일에 고베에서 출범하는 시료마루(社寮丸)에 편승하여 귀국할 예정이었다고 한 다.{Cook(1972), p.66; 琴秉洞(1991), p.97} 하지만 1883년 1월 1일에 바칸(馬關)에 있는 민 영익에게서 내일 출범(出帆)한다는 소식이 윤치호에게 도착한 것으로 볼 때, 결국 수신사 일행 과 함께 귀국했던 것으로 보인다.(『윤치호일기』고종19년 11월 22일)

195) 『使和記略』고종 19년 壬午 8월 14일~29일, pp.197~202.

196) 또한 『使和記略』8월 22일에 따르면, 이날 정사 박영효와 부사 김만식은 온정욕실(溫井浴 室)로 김옥균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온정(溫井)은 온천과 같은 말이다.

197) 井上馨候傳記編纂會,『世外井上公傳』(東京: 井上馨候傳記編纂會, 1933~34) 제3권, p.491;

Cook(1972), p.58.

198) 아래 인용한 서한의 출처는 京都大學文學部日本史硏究室, 『吉田淸成關係文書』第三卷 書翰 篇3(京都: 思文閣出版, 2000) p.294와 금병동(1991) p.958이다. 그런데 양자 모두 잘못된 구 두표기와 오자로 추정되는 글자가 많이 발견된다. 아래 인용문 가운데 꺾쇠 안의 글자는 오자 로 추정되는 글자를 문맥으로 미루어 바로 잡은 것이다. 이하 인용문도 모두 같다.

“臨歸 在馬關 修函 想已台覽矣 敬頌雅夭[侯] 尊祺百福 時切懸係 玉均間來所經歷 殆一言難盡

이 서한을 통해 김옥균은 이미 첫 번째 방일(訪日) 당시부터 요시다 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며, 또 이번의 용무-고종의 밀유-가 요시다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무대보는 오늘날 외교부 차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으며, 요시다는 1872년에 영국 런던에서 1,170만 엔의 공채 를 모집한 일이 있었다.199)

김옥균은 고베주재 영국영사 애스턴(W.G.Aston)도 방문했다. 김옥균 이 일본에 온 목적에 관해 애스턴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저는 김옥 균이 국왕에게서 모종의 비밀임무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일본에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을 위한 100만 달러의 차관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일본에 세관 수입을 넘겨주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영국공사 파크스는 애스턴의 기록을 외무경 얼 그랜빌 (Earl Granville)에게 전달하면서 “조선 정부는 그 수요를 충족하고, 일 본에 대한 배상금 지불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대단히 많은 자금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관세수입은 그들이 자금을 기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재 원입니다.”라고 덧붙였다.200)

이 기록은 김옥균이 고종에게서 받은 밀유(密諭)의 내용을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김옥균의 비밀임무는 차관을 얻어오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는 청국에 파견된 진주겸사은사(陳奏兼謝恩使) 조영하와 김홍 집의 실질적 임무가 세관설치와 새로운 사업을 위해 원조를 얻어오는 데 있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애스턴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 김옥균은 세관수입을 담보 로 일본에서 차관을 얻기보다는, 영국 등에서 차관을 얻는 방법을 모색

而今又航到神戶 西曆初十日 飛脚船便可投載 向橫濱 拜握在辺[近] 不勝親[歡]欣 而宿痾尙号[苦]

方來住溫泉室耳 聞前田領事 在釜山未歸云 極切憫然 得無促其歸來之方便否 千萬緖蘊 自可面恙 [商] 草草不宣 十月二日 金玉均上 吉田大輔先生閣下大人”

199) 금병동(1991) p.129.

200) 애스턴의 기록(memorandum)은 10월 3일에 작성한 것인데, 실제로 김옥균이 애스턴을 찾아 온 날짜는 분명치 않다. 『使和記略』에서도 이 방문에 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본 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옥균은 고베에서 수신사 일행과 따로 거처했고, 이날도 홀로 애스턴을 찾아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