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삼연의 문예 중심적 시경론

문서에서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페이지 63-79)

삼연의 시경론은 엄밀한 체계를 갖추어 집필된 단일저작의 형태가 아니라, 그 날그날 독서하고 사색한 내용을 단편적으로 메모해 놓은 일기체 기록의 일부로 존재한다. 삼연집의 편집자들은 이러한 기록들을 日錄 이라는 제목 아래에 편집해 놓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시경론 이외에도 周易·書經·春秋左 傳 등 經史에 대한 해석, 象數易學1) 및 性理說에 대한 논의, 그리고 날씨나 신 변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다. 집필 시기는 1719년에서 1720년 무렵으로 삼연의 最晩年 저술에 해당되는데, 비록 엄밀한 체계를 갖추진 못했으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삼연의 만년 정론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삼연일록 의 시경 관련 조목들은 총91칙으로 전체 기사들 중 대략 1/5 정 도를 차지한다. 삼연일록 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이 매우 다양함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인데, 만년의 삼연에게 시경이 유일한 관심사였던 것은 아니지만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던 것만은 분명했다고 할 수 있다. 시경 관련 조목들을 조감해보면, (a)1719년 3월에 집필된 11칙과 (b)1720년 3월에 집필된 80칙은 그 성격이 다소 다른데, (a)가 시경에 대한 일반론을 개진한 총론적 성격이 강하다면, (b)는 시경을 처음부터 한편한편 읽어나가면서 떠오르는 단 상들을 기록한 작품론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20년 3월에 집필 된 80칙에서 다루어지는 시편의 비율을 살펴보면 국풍 의 비중이 압도적인 데,2) 이는 雅·頌에 비해 순수 서정시의 성격이 강한 국풍 으로부터 시의 본질 에 대한 논의의 단서들을 더 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 시경론 이외에 삼연일록 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또 다른 주제가 바로 象數易學 이다. 시경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詩學이 청년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삼연의 평생에 걸친 화두였다면, 象數易學은 중년 이후 삼연의 정신세계에서 중요한 화두로 급부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연의 상수역학에 대한 이해 방식은 邵雍-朱子로 이어지는 중국 宋代 상수역의 계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는 단순히 易學연구 뿐 아니라 사물인식이나 시 창작에까지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삼연은 후기로 갈수록 자연현상의 이면에 깃든 철학적 이치를 관조하는 哲 理詩·觀物詩 계열의 시를 대량으로 창작했는데, 이는 伊川擊壤集에서 철학적 시세 계를 펼쳤던 邵雍의 영향력을 짙게 암시한다. 이처럼 삼연의 만년 시세계를 연구하는 데 소옹과 상수역학이 매우 중요한 주제임은 분명하나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고 시경 론에 집중하기로 한다. 삼연의 시세계에 미친 소옹과 상수역학의 영향에 대해서는 최 유진, 삼연 김창흡의 상수학 이해와 시적 형상화 , 한자한문연구11, 고려대 한자한 문연구소, 2016에 자세하다.

2) 국풍 은 총160편 중 50편(약31%)이, 소아 는 총80편 중 5편(약6%)이, 대아 는 총31편 중 5편(약16%)이, 송 은 총40편 중 단 1편(약2.5%)만이 언급되었다.

본 장에서는 삼연 시경론의 특징적 면모들을 (1)‘詩人 朱子’에 대한 적극적 평가 (2)‘俗文學’으로서의 국풍 인식 (3)시의 문예미에 대한 관심 세 절로 나 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제1절에서는 ‘시경 해석자’로서의 주자에 대한 평가를 검토함으로써 주자 시경학을 수용하는 삼연의 기본 관점이 경학적 관심보다는 문학적 관심 쪽에 맞춰져 있음을 해명할 것이다. 제2절에서는 국풍민요설·음시 설에 대한 견해, 風·雅의 구분에 대한 견해를 중심으로 삼연이 국풍 의 ‘속문 학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제3절에서는 삼연이 내용적·

주제적 측면 뿐 아니라 표현적·형식적 측면에도 주목하여 시경을 읽고자 했 음을 比興에 대한 논의 및 개별 시편 해석의 실례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1. ‘시적 소양’에 따른 程 朱 시경론 비교

성리학을 ‘程朱學’이라고도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程子3)는 朱子와 함께 성리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자는 大學章句 中庸章句 서문에서 맹자 이후 오래도록 끊어졌던 道統이 정자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천명함으로써, 성리학의 발흥이 정자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주자는

대학장구 중용장구에 정자의 설을 대폭 수용하여 漢唐 儒學과 구별되는 ‘신 유학’으로서의 성리학을 집대성해냈다. 이렇듯 대학 중용을 禮記로부터 독립시켜 논어 맹자와 동렬에 놓고 四書라는 개념을 창안한 程 朱의 작업 은 경학사의 일대전환을 불러왔고, 새롭게 등장한 사서 중심의 경학이 기존의 五經 중심의 경학을 대체하게 되었다.

성리학이 국시로 여겨지던 조선에서는 위와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고, 많 은 경우 정자와 주자는 따로 논해지기보다는 程朱로 병칭되어 함께 논의되었다.

조선후기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새로운 경학적 흐름들은 대부분 程朱 로 상징되는 사서 중심의 경학체계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하였는데, 예기에 속 해 있던 古本大學에 주목하는 등 오경 중심의 경학을 복원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조선 경학의 주류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는 사서 중심의 경 학은 정자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道統의 계승관계를 토대로 성립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서 중심의 경학체계에서 빗겨나 있던 시경학의 경우 정자와 주자가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양자의 입장차를 간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漢 宋 시경학의 핵심 쟁점이라 할 수 있는 모시서의 신빙성에

3) 이하에서 언급되는 程子에 대한 기술은 程顥(明道)보다는 程頤(伊川)를 위주로 했음 을 밝혀둔다.

대한 문제였다. 주자가 모시서의 정치 역사주의적 시 해석을 회의 비판하고, 以 詩解詩의 원칙에 따라 국풍민요설과 음시설을 주장했음은 앞 장에서 확인한 바 와 같다. 그런데 정자는 주자와 달리 기본적으로 모시서의 설을 신뢰하는 입장 을 취했다. 정자는 자신의 시경 관련 저술인 詩解에서 시경에 대한 총론 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자께서 후대인들이 시를 알지 못할까 걱정하셨다. 그래서 <관저>편에 序를 붙여 서 후대인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시경을 학습하면서 詩序를 탐구하지 않는 것은 방에 들어가고자 하면서 문을 거치지 않는 것과 같다.(…) 정치적 잘잘못의 자취 나 풍자 찬미한 뜻은 國史가 밝혀 놓았다. 사관이 시를 얻으면 반드시 시와 관련된 사건을 기재하였고, 그런 뒤에야 시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小序의 首句 가 이것이다. 首句 아래로는 시를 해설한 자들이 덧붙인 말이다.4)

정자는 시경의 총론을 해설한 大序를 공자가 지은 것으로 보았고, 개별 시 편에 대한 작품해제인 小序는 춘추시대 당시의 사관이 지은 것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시경한학에서는 대서 소서를 막론하고 모시서의 작자를 공자의 직 전제자였던 자하로 보았는데, 정자는 그 작자를 공자(大序)와 춘추시대 사관(小 序)으로 상향 조정함으로써 모시서의 권위를 더 높여준 셈이었다. 이는 정자가 모시서의 미자설을 의심 없이 수용하는 한편, 小序에서 개진한 정치 역사주의적 해설을 실제 시의 창작 배경으로 믿었음을 의미한다. 정자의 이러한 태도는 주 자가 시 본문과 시서 사이의 괴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시서의 신빙성 자체를 의심하기에 이른 것과는 상반되는 면모였다.5) 시경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정자 는 여전히 모시서를 신뢰하는 詩經漢學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4) 程頤, 程氏經說권3, <關雎>: “夫子慮後世之不知詩也. 故序<關雎>以示之. 學詩而不 求序, 猶欲入室而不由戶也.(…) 得失之迹 刺美之義, 則國史明之矣. 史氏得詩, 必載其 事, 然後其義可知. 今小序之首是也. 其下則說詩者之辭也.”

5) 朱子語類, 詩 1, 綱領 : “질문하기를, ‘시집전에서 詩序대로 풀이하지 않은 곳 이 많음은 어째서입니까?’라 하니, 선생이 대답했다. ‘내가 20세 무렵 시경을 읽을 때부터 毛詩 小序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小序를 제거하고 단지 시 본문의 언 어만 음미해보니, 도리어 맥락이 관통됨을 느꼈다. 당초에 마을의 여러 선생들께 질문 드려 봐도 모두가 詩序는 폐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나의 의심은 끝내 해소될 수 없 었다. 후에 50세(이재훈, 주자 시경학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1994, 168면에 근거하 여 50세로 수정) 무렵이 되어, 小序가 漢儒의 작에서 나와 그 오류가 이루 말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問: “詩傳多不解 詩序 , 何也?” 曰: “某自二十歲時 讀詩, 便覺 小序 無意義. 及去了 小序 ,只玩味詩詞, 卻又覺得道理貫徹. 當初亦嘗質 問諸鄉先生, 皆云: ‘ 序 不可廢’,而某之疑終不能釋. 後到三十歲, 斷然知 小序 之出於 漢儒所作, 其為繆戾, 有不可勝言.”] 주자는 정자와 달리 시서의 작자를 춘추시대 사관 이 아닌 漢代 유생들로 보았다. 따라서 시서의 詩解가 시의 本意와는 무관하다고 보 았으며, 시서에 의지하지 않고 시 본문에 즉하여 독자적으로 시를 해석했다.

문서에서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페이지 6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