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이 농암과 함께 18세기 노론, 특히 낙론계에서 학문과 문학의 宗匠으로 존숭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문집 역시 후배 문인들에게 널리 읽혔을 것 으로 추정된다. 삼연일록 에 수록된 시경론에 대한 후대인들의 독서 실태를 점 검해보면, 金鍾厚(1721~1780) 金鍾正(1722~1787) 홍대용 정조 등이 시경을 논하며 삼연의 설을 참조한 것으로 확인된다.1) 김종후는 정조 때 정승을 지낸 金鍾秀(1728~1799)의 형으로 18세기 노론을 대표하는 산림학자였고, 김종정과 홍대용 역시 노론 명문가의 일원들로 각기 나름의 학문적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호학군주였던 정조까지 더하면, 삼연의 시경론은 18세기 조선 지성계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에게 읽혔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사실을 고려하면, 삼연의 시경론이 조선후기 시경학사에서 차지하는 중 요성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정조가 주도했던 시경강의 에서 삼연의 시경론이 비중 있게 참조되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노론 낙 론계 후배들의 테두리를 넘어, 서유구나 정약용처럼 삼연과는 다른 당파적 학문 적 성향을 지녔던 이들이 참여하여 삼연 시경론의 타당성을 검토 평가하는 자 리가 마련된 셈이기 때문이다. 본 절에서는 18세기 후반 정조의 시경강의에서 정점에 달했던 조선후기 시경학사의 맥락과 구도를 짚어가며, 삼연 시경론이 차 지하는 시경학사적 위상과 그 의의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17 18세기 중국에서는 고증학이 발흥하여 경학 연구의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 되었다. 원 명대에 이어 청대에도 관학으로서 주자학의 지위가 유지되기는 하였 으나, 강남을 중심으로 한 많은 학자들이 의리의 발명보다는 문자학 훈고학 교 감학 등에 치중했고, 오경 중심의 경학과 漢儒의 經說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2) 시경학 분야에서 이는 주자에 의해 그 신빙성이 의심되었던 모 시서의 부활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欽 定詩經傳說彙纂(1727)의 편찬이었다. 이는 詩傳大全을 대신하여 새롭게 편찬 1) 이병찬, 한국의 시경론 연구: 국풍론을 중심으로, 단국대 박사논문, 2001, 34-35면 참조. 김종정은 雲溪漫稿권13의 箚錄 詩傳 에서, 김종후는 本庵集권12의 箚錄 詩傳 에서 자신의 시경론을 개진하는 중간 중간 삼연의 설을 인용하며 그에 대한 평 을 남기고 있다.
2) 청대 고증학의 발흥과 관련해서는 벤자민 엘먼, 양휘웅 역,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예문서원, 2004 참조.
된 국가공인 시경 텍스트로, 주자 주를 위주로 하긴 했으나 주자의 해석과 배 치되는 漢唐 제가의 주석들 또한 함께 수록해놓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흠정시경집설휘찬은 漢宋折衷의 성격을 띤 것이긴 하나, 宋學 의 비중이 줄고 漢學의 비중이 늘어가는 학술사적 변화의 추이를 잘 보여준다 고 할 만하다.3)
반면 조선에서는 선초에 수입된 시전대전이 공인 텍스트로서의 지위를 변 함없이 누렸으며, 청나라에서와 같은 새로운 관찬 텍스트의 편찬은 시도되지 않 았다. 다만 정조에 의해 시경강의가 진행됨으로써 군신간의 토론을 통해 역대의 이설과 의문들을 검토하고 정설을 확정지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18세기 후 반 이루어진 시경강의는 대외적으로는 청대 고증학의 영향에 따른 주자학의 상 대화를 의식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17세기부터 꾸준히 축적되어 온 조선 시경 학 내부의 논란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또한 초계문신으로 시경강의에 참여 했던 서유구 정약용이 답변의 내용을 정리하여 시경학 저술로 엮어냈다는 점에 서 그 자체가 새로운 시경론을 파생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시경강의의 총론 부분에서 정조는 시경 이해의 최대 난점으로 美刺說의 타 당성 및 모시서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을 거론하고 있다.4) 이는 시경학사의 핵 심쟁점으로 부각되었던 漢宋之爭의 문제, 즉 모시서의 미자설과 주자의 음시설 사이의 논쟁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가 시경강의의 총론에서 언급할 만큼 미자설-음시설의 대립이 조선 시경학계에서도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 음을 짐작 가능하다. 실제로 제Ⅱ장에서 윤휴 장유 김만중의 예를 통해 확인했 던 것처럼, 17세기에 이미 주자의 음시설에 대한 이견들이 단편적이게 나마 제 기되고 있었고,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 시경학사에서 하 나의 계열을 이루게 된다.
3) 흠정시경전설휘찬에 대한 내용은 소잠, 欽定詩經傳說彙纂이 서형수와 서유구의
시경 해석에 끼친 영향 , 한문학논집38, 근역한문학회, 2014를 참조했다.
4) 弘齋全書권88, 經史講義 25, 詩 5: “시경은 난해한 것인가? 난해한 것이다. 주 자의 시집전에 訓釋이 갖추어져 있는데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째서인가? 風雅 의 體가 난해한 것이 아니고, 興比의 義가 난해한 것이 아니고, 正變의 調가 난해한 것이 아니고, 자구와 음운이 난해한 것이 아니고, 鳥獸草木의 이름이 난해한 것이 아 니다. 오직 시경 중의 美刺한 일의 同異와 是非가 난해하다. 舊說 중에 근거할 만한 것으로는 小序가 있는데, 先儒들의 취하고 버림, 따르고 따르지 않음이 서로 다르다.
의당 어디에서 절충하고 무엇을 믿어야 하겠는가? 이것이 가장 난해한 것이다.”[詩 其難解乎? 曰:難解也. 朱子集傳訓釋備矣, 而猶有難解者何也? 非風雅之體之難解也, 非興比之義之難解也, 非正變之調之難解也, 非字句音韻之難解也, 非鳥獸草木之名之難解 也. 惟詩中美刺之事有異同是非爲難解. 舊說之可考據者有 小序 , 而先儒之取捨從違不 同, 當何所折衷而憑信歟? 此其最難解者也..]
17 18세기 조선에서 ‘反朱的 시경론’5)을 개진한 인물들로는 윤휴(1617~1680) 이익(1681~1763) 서유구(1764~1845) 정약용(1762~1836)등이 주목된다.6) 물 론 이들 간에도 개별적인 시경론 상의 차이가 존재하긴 하나, 공통적으로 주자 의 음시설에 반대하며 시의 정치 사회 비판 기능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계열로 묶일 수 있다. 그 대척점에는 ‘從朱的 시경론’이 놓인다 고 할 수 있는데, 모시서의 미자설을 비판하고 주자의 음시설을 적극 수용하는 입장이었던 삼연의 경우 이 계열에 포함될 것이다. 요컨대 삼연의 시경론은 남 인 소론계 학자들 위주로 전개되었던 反朱的 시경론의 흐름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주자의 학문적 권위가 절대적이었고, 시집전이 시경 이해의 준거로 작용 했던 조선의 사정을 감안할 때, 삼연 시경론의 從朱的 경향은 어느 정도 ‘보수 적 성격’을 띠는 것이 사실이다. 고증학 서학 등 외래사조의 위협으로부터 주자 학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정조가 시경강의에서 삼연의 시경론을 비중 있게 참조했던 것도 그러한 사실과 무관치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삼연 시경론의 경학사적 의의를 흔들리는 주자학의 권위 수호에서만 찾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제Ⅲ장 제1절에서 논했듯이, 주자 시경학을 수용하는 삼연의 기본 태도는 주자의 道統보다는 시적 소양과 문예 비평적 탁월성을 중 시하는 쪽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연 시경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가적 義理를 발명해내는 문제보다 는, 시의 내재적 문맥을 따지거나 표현 형식을 분석하는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 이 관찰된다. 삼연이 시경학 총론과 관련해서는 주자의 국풍민요설 음시설을 수 용하면서도, 개별 시편 해석 및 부비흥 판정과 관련해서는 주자와 다른 견해를 보인 것은, 일견 상충되는 현상으로 보이지만, 결국 以詩解詩라는 주자의 독시 원칙을 실천한 결과였다는 점에서 한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17 18세기 서인 노론 계열을 중심으로 삼연처럼 시경학 총론에서는 음시설을 지 지하는 등 從朱的 성격을 띠면서, 유가적 의리를 발명하는 일보다는 以詩解詩의 5) 편의상 음시설을 인정하는 계열을 ‘從朱的 시경론’으로, 음시설을 반대하는 계열을 ‘反
朱的 시경론’으로 명명하기로 한다.
6) 이익의 시경학에 대한 연구로는 최석기, 성호 이익의 시경학,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3이 참조되며, 서유구의 시경학에 대한 연구로는 강민구, 풍석 서유구의 시경학 연구 서설 , 반교어문연구9, 반교어문학회 1998 강민구, 서유구의 시경 辨釋에 대한 연구: ‘주자 시서 배척론'의 반박을 중심으로 , 한국시가연구4, 한국시가학회, 1998; 소잠, 서유구의 모시강의연구와 역주, 성균관대 고전번역협동과정 박사논 문, 2014 등이 있다. 정약용의 시경학과 관련된 연구는 조선 시경학사를 통사적으로 다룬 선행연구들에서 자세히 이루어진바 있기에 따로 거론하지 않는다.
원칙에 입각해 시의 내재적 문맥과 표현 형식을 따지는 일에 주력한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시경론을 펼친 인물로는 林泳(1649~1696)과 李顯 益(1678~1717)을 꼽을 수 있다.
임영은 삼연보다 4세 연상인데, 李端相(1628~1669) 문하에서 삼연과 동문수 학한 사이였다. 임영의 문집에 농암 삼연 형제와 함께 지은 시가 남아 있고,7) 그가 외숙 뻘 되는 조성기에게 보낸 편지 중 삼연과의 시도논쟁을 언급한 내용 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연과 교류가 있었음이 확인된다.8) 이현익은 농암의 문 인으로 삼연과도 수차례 서신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9) 삼연과 임영, 삼 연과 이현익은 서인 노론 계열의 비슷한 당파에 속한 인물들로서 학연으로도 얽혀 있었으며, 생전에도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 從朱的 시경론의 양상을 논한 선행연구에서는 以詩解詩의 원칙을 실천하며 시경을 문학적 각도에서 읽어나간 시경론자의 대표적 예로 임영과 이현익을 거론했는데,10) 마찬가지로 문예 중심적 시경론을 펼쳤던 삼연이 그들 과 인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들 간에 시경론 상의 영향관계를 뒷받침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발견 되지 않아 속단하기에는 조심스러우나, 주자학을 존숭하면서도 도학이념의 경직 된 틀로만 일관하지는 않았던 낙론계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풍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그렇다면 삼연과 임영 이현익이 동일한 시편을 대상으로 전개한 시경론의 일 단을 비교해보며 그 특징을 파악해보도록 하겠다.
鄭風 의 <風雨>편부터 <揚之水>편까지를 淫奔詩라고 단정해버릴 수는 없다.
<양지수>편의 ‘終鮮兄弟’과 관련하여 형제를 부부로 본 것은 억지로 끼워 맞춘 혐의 가 있다. 모시서에서 홀을 풍자했다고 본 설이 情理에 맞지 않아서 이를 바로잡으려 다가 너무 지나쳐 다른 작품들까지 음분시로 여겼으니, 아마도 공평함을 잃은 처사 인 듯하다.11)
7) 林泳, 滄溪集권2, <玉流洞, 與金仲和【昌協】 子益【昌翕】同賦>
8) 林泳, 滄溪集권10, <與趙叔成卿> 참조. 조성기와 임영의 모친은 6촌 남매사이이다.
9) 金昌翕, 三淵集권21에 <答李顯益>이라는 제목의 서신 3통이 실려 있고, 李顯益, 正 菴集권3에 <上三淵>이라는 제목의 서신 2통이 실려 있다.
10) 김수경, 조선시대 시경학 속의 주희 시경학 , 한문고전연구27, 한국한문고전학회, 2013, 214-221면.
11) 金昌翕, 三淵集권35, 日錄·庚子3月16日 : “ 鄭風 自<風雨>至<揚之水>, 未可斷爲淫 奔. <揚之水>‘終鮮兄弟’, 以兄弟爲夫妻, 似涉牽强. 詩序之刺忽, 旣無情理, 矯之之過, 以 他題爲淫奔, 恐亦失其平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