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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연과 17세기 조선 시경학의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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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代에는 元代에 국가의 공인을 받았던 주자학이 관학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경학사적으로 볼 때 이는 漢宋之爭이 宋學의 승리로 귀결된 것에 해당 되었다. 특히 永樂 연간 胡廣(1370~1418)에 의해 新注를 집대성한 五經大全·

四書大全이 편찬된 뒤부터는, 이것이 과거시험의 공식 텍스트로 채택되어 독 점적 지위를 누렸다. 조선의 경우도 세종 때 ‘大全本’이 전래된 이래 조선 후기 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54) 오경대전의 편찬자들은 주자의 시집전 에 劉瑾의 詩傳通釋에서 취한 注疏들을 小注의 형태로 달아 詩傳大全을 편 찬했고, 시전대전은 명나라와 조선의 과거 준비생이라면 누구나 필독해야 할

시경 교재로 자리매김했다.

52) 조성진, 가집편찬에서 淫辭 수록의 논리: 詩敎와 情敎 -김천택과 풍몽룡의 경우- ,

고전문학연구41, 한국고전문학회, 2012, 128-129면 참조.

53) 顧炎武, 日知錄集釋권18, <鐘惺>條·原注: “전씨(전겸익)가 말했다. ‘옛사람들은 경 전을 신명처럼 공경했고, 스승처럼 존숭했으니, 누가 감히 참람되게 평점을 가했겠는 가? 평점이 성행한 것은 근래에 시작되었는데, 월 땅의 손씨(손광)와 초 땅의 종씨 (종성)가 가장 심하였다.’”[錢氏謂: “古人之于經傳, 敬之如神明, 尊之如師保, 誰敢僭而 加之評騭? 評騭之多, 自近代始, 而莫甚于越之孫氏 楚之鍾氏.”] 고염무는 전겸익의 말 을 인용하며 손광·종성 등이 춘추좌전·시경 등에 평점을 가한 행위를 경전에 대 한 참람된 태도로 간주하여 비판하고 있다. 전겸익의 해당 발언은 牧齋初學集권29 에 수록된 <葛端調編次諸家文集序>에 나오는 말인데, 고염무가 이를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종성의 시경에 대한 평점비평 행위가 명말청초의 지식인들에게 경전을 대 하는 일반적 태도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54) 심경호,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일지사, 1999, 436-439면.

‘大全本’의 전래와 함께 본격화된 조선의 주자학 수용은, 15·16세기 주자 주를 중심으로 경서의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던 초기 단계를 거쳐, 17세기부터는 일방 적 학습의 단계에서 벗어나 주자학을 내면화·자기화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러한 내면화·자기화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학문 내적인 동인에 의한 결과였겠 으나, 조선의 정치·외교·사회적 여건 등 학문 외적인 요인들도 적지 않은 영향 을 주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이를 테면, 임병양란 이후 지배층이 느낀 위기의식, 명·청 교체에 의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붕당정치의 격화에 따른 정치논 쟁의 이념화 등은 조선 주자학이 중국과 구별되는 조선만의 색채를 띠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중기 학계에서는 한편으로 주자의 경전 해석을 절대화하는 흐름이 나타 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의 경전해석을 상대화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전자가 宋時烈(1607~1689)로 대표되는 서인·노론 측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후자와 관 련해서는 尹鑴(1617~1680)·朴世堂(1629~1703) 등 남인·소론 측 인물들이 주로 언급된다. 양자의 충돌 과정에서 전자가 후자를 공격하며 사용한 ‘斯文亂賊’이라 는 ‘프레임’은 조선 중기 정치사·사상사·학술사의 특징을 규정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상징적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충돌은 당파/학파가 긴밀하게 결합되 고, 정치논리·학문논리·이념논리가 구분되지 않은 채 특정 학파(당파)가 주자의 도통을 독점하여 다른 학파(당파)를 공격하던 조선적 특수성이 반영된 사건이 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자학의 상대화’가 학문 내적인 동인에 의해 이루어진 異說 제기의 성격이 강했던 것에 비하여, ‘주자학의 절대화’는 정치논리와 결합되어 상대 당 파를 탄압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의 혐의가 짙었다고 판단된다. 예컨대, 張維 (1588~1638)는 谿谷漫筆에서 程·朱만을 칭송하는 조선의 편협한 학풍을 비 판했고55)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송시열은 그가 程·朱의 의리를 잘 따랐다고 평가했다.56) 金萬重(1637~1692)은 송시열과 당파적 입장을 함께한 55) 張維, 谿谷漫筆권1: “중국의 학술은 여러 갈래이다. 정학도 있고, 선학도 있고, 단 학도 있다. 程·朱를 배우는 이도 있고, 육상산을 배우는 이도 있으니 학문의 경로가 한 갈래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을 막론하고 독서한다는 자들이 모두 程·朱를 칭송하니, 다른 학문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중국의 인재들은 志趣가 자못 활달하여, 때때로 뜻 있는 선비들이 나와 實心으로 학문을 추구하니, 그 기호에 따라 배우는 바가 다르지만, 왕왕 저마다 實得하는 바가 있다. 우리나라는 그 렇지 못하다. 편협하고 구속되어 도무지 志氣가 없으니, 단지 程 朱의 학문을 세상에 서 귀중히 여긴다는 것만 듣고는 입으로 말하고 겉으로 존숭하는 척 할 따름이다.”

[中國學術多岐: 有正學焉, 有禪學焉, 有丹學焉; 有學程 朱者, 學陸氏者, 門徑不一. 而 我國則無論有識無識, 挾筴讀書者皆稱誦程 朱, 未聞有他學焉.(…)蓋中國人材志趣頗不碌 碌, 時有有志之士, 以實心向學, 故隨其所好而所學不同, 然往往各有實得. 我國則不然. 齷 齪拘束, 都無志氣, 但聞程 朱之學世所貴重, 口道而貌尊之而已.]

서인·노론 측의 대표 정객으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西浦漫筆을 보면 주자의 설에 대한 회의·비판이 곳곳에 표명되어 있 다.57) 이렇듯 自黨 내부에도 장유 김만중처럼 주자학의 권위를 상대화한 인물 들이 있었음에도, 서인·노론 측 논객들은 굳이 윤휴·박세당 등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그들이 표방한 ‘주자학절대주 의’가 순수하게 학문적 동인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붕당 간 알력 관계가 개 입된 정치공세로서의 성격이 짙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상에서 논의된 내용을 염두에 두며, 삼연 시경론의 형성과 관련하 여 주목할 만한 사항들 몇 가지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윤휴 와 박세당이 모두 시경학 저술을 남겼다는 점이다. 윤휴의 讀書記와 박세당의

思辨錄은 두 사람의 독자적 경전 해석이 담긴 경학 연구서로, 그들이 사문난 적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 저술들이었다.58) 윤휴와 박세당의 시경 학 저술은 각각 독서기와 사변록의 일부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56) 宋時烈, 宋子大全권156, <谿谷張公神道碑銘>: “공(장유-인용자)이 중용을 논한 것 중에 주자의 장구와 약간 다른 곳이 있다. 그러나 공은 해당 부분에 대해 우연히 의심나는 바가 있었음에도 감히 억지스럽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답답한 마음 이 생겨남을 금할 수 없었음에도, 그 말이 겸손하고 그 예는 공손하였다. 이는 실제로 주자가 일찍이 허여했던 바이니, 어찌 溫陵·象山의 무리처럼 억지로 이설을 세워 시 비를 겨루고자 했던 자들에 비하겠는가?(…) 위로는 한유·구양수를 넘보고, 의리는 정자·주자를 위주로 하였으니, 그러므로 상하 5·6백년 사이에 공과 경중을 다툴만한 자가 없었다.”[惟公所論中庸, 略異於朱子章句. 然此則公於此偶有所疑而不敢強, 故不 免有所憤悱, 而其辭遜其禮恭. 此實朱子之所嘗許者, 豈若溫陵 象山輩強立異說, 求與爭衡 者之比哉?(…)上窺韓 歐, 而義理則主於程 朱, 故上下五六百年間, 無可與軒輊者矣.] 이 글에서 확인되듯이, 송시열은 장유가 주자의 중용장구에 이설을 제기한 것도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주자의 경전 해석은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주자를 절대 존신했 던 것으로 알려진 송시열에 대한 통념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이다.

57) 김만중은 승지로 봉직하던 당시 윤휴가 경연 석상에서 논어의 주자 주를 굳이 읽 을 필요 없다고 한 것을 트집 잡아 그의 파직을 주청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이 듣자하니, 윤휴가 상께 논어 주석은 읽을 필요가 없고 大文 또한 많이 읽을 필요 없이 수십 번 읽기만 하면 된다고 청했다고 하니, 그 말이 부당합니다. (…)논 어는 주자 주를 폐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육 왕의 別學이 있어 주자 주를 취하 지 않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는 祖宗朝로부터 주자 주를 한결같이 따라 수백 년간 경 연에서 사용하였거늘 지금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臣聞, 尹鑴請上‘無讀論 語註, 大文亦不須多讀, 只可讀數十遍’云, 其言不當. 大文則聖人之經, 註則賢人之傳, 聖 賢所爲, 俱無所間. 且註乃釋經之文, 不讀註, 何以尋知經義?(…)論語則朱子註, 不可廢.

中原有陸 王別學, 不取朱子註, 而我國自祖宗朝, 一從朱註, 數百年用於經筵, 今何可不 用?](숙종실록, 숙종 1년(1675) 윤5월 26일 기사) 윤휴가 주자 주를 중시하지 않았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양명학과 같은 이단으로 몰아 공세를 펼치고 있는데, 김 만중 스스로가 서포만필에서 보여준 개방적 태도에 비춰보면 상당히 경직되고 편 협한 태도로 보인다.

58) 독서기에서는 사서 삼경 및 주례 예기 춘추 효경 등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사변록에서는 사서와 서경 시경만이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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