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은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이라면 누구나 익혀야 했던 기본 경서에 속했 다. 따라서 시경에 대한 독서기록을 남기고, 나름의 해석을 개진했다는 것 자 체가 그리 특별한 일이라 하기는 어렵다. 본고의 주제인 삼연일록 의 시경 관련 조목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를 조선시대 여느 儒者가 남긴 경학 저술로 보고 접근하면 뚜렷한 변별성을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학의 근 본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이 남긴 ‘시 비평’ 내지는 ‘시학이론 저술’이라는 法門宗旨. 其法有流來東土者, 筠也得之, 乃演其旨曰: ‘男女情慾, 天也; 倫紀分明, 聖人 敎也. 天高聖人一等, 我則從天而不敢從聖人.’ 若作這般見解, 則亦難以口舌爭.”
시각으로 접근하면, 그 위상은 다소 달라진다. 실제로 삼연에게 시경은 단순 한 유가경전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시경에 대한 삼연의 관심은 청년시절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그의 문집에 수록된 四言體 한시의 분포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언체는 시경의 가장 두드러지는 형식적 특징으로, 후대에 보 편화된 五·七言體에 비해 한층 고풍스럽고 질박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시를 지 으며 굳이 4언 형식을 택했다면, 이는 시경이 주는 표현효과를 의도한 擬作행 위였다고 봄이 온당하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삼연집 原集 및 拾遺에 수록된 사언체 한시들은 대개 1670~1680년대 및 1710년대 후반~1720년대 초반에 집 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80) 이는 삼연의 생애에서 30세를 전후한 청년 기와 60대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시경에 대한 삼연의 관심이 청년 시절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擬作의 형태로 표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연의 청년기 詩作에 나타나는 시경에 대한 관심은 1680년대 이루어진 洛 誦樓詩社 활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81) 낙송루시사는 1682년 결성되어 1689년까지 지속된 同人들 간의 시 학습 창작 모임이었는데, 시사의 주요 구성 원으로는 삼연 이외에도 洪世泰(1653~1725)·李奎明(1653~1686) 兪命岳(1667
~1718) 金昌業(1658~1722)·金昌立(1666~1683)등이 있었다.82) 유명악의 아들 兪拓基(1691~1767)는 부친이 참여했던 시사활동을 追書하며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선친이 삼연선생께 배우러 나아간 것은 실로 임술년(1682)의 일이었다. 이 때에 선생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개괄하자면, “장차 風雅를 고취하고 漢魏를 추종하여 후 세의 천박함과 비루함을 일거에 씻어버리고, 시경의 뒤로 곧장 치달려 나아가자”
는 것이었다.83)
유척기에 의하면 낙송루시사를 이끌던 무렵 삼연의 시정신은 ‘한위 고악부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시경에 도달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당시 삼연이 지향했 던 學詩와 창작의 방향이 뚜렷이 古를 향하고 있었으며, 그 古의 궁극에는 시 경이 놓여 있었음을 분명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이처럼 1680년대 전반기 삼연 80) 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1, 38-39면.
81) 낙송루시사 활동에 대해서는 이승수, 앞의 논문, 88-92면; 김남기, 위의 논문, 25-29 면; 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13, 21-25면 등이 참조된다.
82) 김남기, 위의 논문, 같은 곳; 김형술, 위의 논문, 같은 곳.
83) 兪拓基, 知守齋集권15, <題沛筑散響後>: “我先君子之就學于三淵先生, 實在壬戌.
(…) 是時先生之所設敎, 盖將以皷發風雅, 追蹤漢 魏, 一洗後世之膚陋, 而掉鞅直造于三 百篇之後也.”
과 그 주변 문인들의 창작활동이 復古를 지향하고 있었음은 다음 자료들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84)
계축년(1673) 진사시에 급제한 이래로 과거시험과는 연을 끊고 詩道에 매진하였 다. 시경·초사·고악부에서부터 성당의 여러 시인들에 미치기까지, 정밀하게 연구 하고 익숙히 학습하여 여러 전범들을 절충함으로써 一家의 法을 이루었다.85)
어려서부터 여러 형들을 종유하였으니, 風雅의 源流에 대해 일찌감치 들은 바가 있어 古今聲律의 높고 낮음을 분별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잘 알았는데, 그 이해력이 탁월하여 스스로 터득한 바가 많았다. 이에 평소의 잡다한 취미들을 일절 끊어버리고 문학에만 오로지 힘썼다. 셋째 형 창흡 자익을 스승으로 모신 뒤 마을의 同志 5~6인을 이끌어 밤낮으로 어울리며 절차탁마하기를 일삼았다. 시경·초사·
문선·고악부로부터 盛唐의 여러 대가에 미치기까지 깊이 음미하고 익히지 않음이 없어, 歌詩에서 큰 성취를 이루었다.86)
은 삼연의 從孫인 金亮行(1715~1779)이 지은 삼연의 행장에서 발췌한 것 이고, 는 仲兄 김창협이 쓴 막내아우 김창립의 묘지명에서 발췌한 것이다. 두 인용문 모두에서 學詩의 전범이 공통적으로 시경, 초사, 한위 고악부, 盛唐 諸家 등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몽양의 <시집자서> 후반부에 나타난 ‘探源的 復古’의 과정과 그 대상이 겹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는 삼연의 시경에 대한 관심이 시경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기보다는, ‘시의 원류’에 대 한 포괄적 관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실제로 이 시기 삼연의 문집에는 앞서 언급했던 사언체 한시뿐 아니라 漢魏 고악부나 盛唐 시 인들의 歌行體를 의작한 작품들 또한 다수 실려 있는데,87) 양자는 모두 시에 대한 探源的 관심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몽양과 삼연 사이에 발견되는 유사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주지하다시피 17세기 조선에서는 명대 문학유파들의 서적이 상당수 유입되어 널리 읽히고 있었다.88) 더구나 경화 벌열가문의 자제로서 중국 쪽 사정에 누구 84) 낙송루시사의 ‘고악부 창도’에 대한 내용은 김동준, 가집 형성기의 악부와 가곡의
상관성에 대한 일고 , 한국고전연구38, 한국고전연구학회, 2017, 12-16면 참조.
85) 三淵集拾遺권32, <行狀>: “癸丑中進士, 自是絶跡公車, 大肆力於詩道. 自三百篇 楚 騷 古樂府, 以及乎盛唐諸家, 精治熟習, 折衷模範, 用成一家之則.”
86) 金昌協, 農巖集권27, <六弟墓誌銘>: “少從諸兄學, 則已聞風雅源流, 古今聲律高下之 辨, 知所取舍, 而其識解透悟, 所自得者多矣. 於是, 悉棄去平日狗馬博雜之好, 專用力於文 辭. 旣壹以叔兄昌翕 子益爲師, 而倡率里中同志五六人, 日夜游處, 相切劘爲事. 蓋自三百 篇 楚辭 文選 古樂府, 以及盛唐諸家, 無不沈浸酣飫, 以放於歌詩.”
87) 김남기, 앞의 논문, 60-63면.
88) 전후칠자에 대한 수용양상은 강명관, 16세기 말 17세기 초 의고문파의 수용과 진한
보다 밝았을 삼연은 전후칠자는 물론 공안파·경릉파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삼연이 명대 문학유파들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을 것 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전후칠자/공안 파’의 대립을 ‘의고/창신’의 구도로 치환한 뒤, 이를 17·18세기 조선 문단을 설명 하는 키워드로 삼아왔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조선의 17세기는 ‘의고의 시대’
로 18세기는 ‘창신의 시대’로 규정되며, 전자는 명나라 의고파(전후칠자)의 영향 으로 후자는 공안파의 영향으로 설명된다. 그 결과 18세기 조선 시단의 특징으 로 거론되어 온 ‘天機論’·‘眞詩’ 등의 비평용어들 역시 공안파의 성령설이나 이탁 오의 동심설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처럼 설명되기도 했다.89)
그러나 문제는 명대 문단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의 틀을 조선 문단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다소의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의고/창신’이라는 틀을 삼연에게 적용할 경우, 삼연은 청년기에는 ‘의고파’에 경도되어 擬作에 매진했으 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한계를 절감한 끝에 ‘反의고’(=창신)로 돌아섰다고 해 석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삼연 스스로가 <觀 復稿序>(1709)·<何山集序>(1714) 등에서 ‘의고에서 창신으로의 전향’을 고백하 는 듯한 발언을 남겼기 때문이다.90) 그러나 두 편의 글에 나타난 삼연의 입론 전부를 ‘의고/창신’의 이분법으로만 포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관복고서>
의 해당 대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나는 우활하고 엉성하여 온갖 일 중 능한 것이 없었으나, 유독 詩道만은 30여 년 간 마음을 써왔다. 처음에는 格을 세워 반드시 높게[高]하고, 法을 취하여 반드시 예스럽게[古]함으로써 준칙을 삼아, 조선의 비루한 습속을 교정하고자 힘썼다. 스스 로 기치를 내걸거나 남을 인도하면서 매번 말하기를, “漢의 古詩와 唐의 律詩는 구 름위로 솟아 우뚝하다.”라고 했다. 주장은 그렇게 했으나, 스스로 운용해나가다 보니 하나같이 모두 古人의 그림자나 메아리만 좇는 격이었다. 이른바 ‘漢’이라는 것도 진 짜 ‘漢’이 아니었고, ‘唐’이라는 것도 진짜 ‘唐’이 아니었으니, 자기 자신의 漢과 唐이 었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에 가던 길을 돌아왔으며, 어려움으로 인해 싫증이 나서, 다시는 聲病을 궁극의 法으로 삼지는 않게 되었다.91)
고문파의 성립 , 한국한문학연구18, 한국한문학회, 1995; 공안파·경릉파에 대한 수 용양상은 강명관,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소명출판, 2005, 65-257면 참조.
89) 강명관, 위의 책, 116-168면에서는 農淵 형제의 비평과 공안파 비평 사이에 나타나 는 유사성에 주목하여 農淵 형제의 문학론에 끼친 양명좌파의 영향력을 특별히 강조 하는 논의를 펼쳤다.
90) 이 두 편의 글은 삼연의 문학론을 다룬 선행연구들에서 삼연의 ‘반의고적 비평론’을 증명해주는 근거로서 빠지지 않고 거론된 글이다. 비단 현대 연구자들뿐 아니라 이덕 무 역시 耳目口心書 에서 맹목적 의고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관복고서>와 <하산집 서>를 인용하기도 했다.(靑莊館全書권51, 耳目口心書 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