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풍민요설 및 음시설은 毛詩序로 대표되는 시경한학과 詩集傳으로 대표되 는 시경송학이 가장 치열하게 대립해온 핵심 쟁점이었다. 시경의 모든 시편을 정치적 찬미·풍자의 목적을 위해 지어진 美·刺詩로 간주함으로써 淫詩의 존재 가능성을 원천 부정했던 毛詩序와 달리, 주자는 시경 국풍 은 일반 민중들이 일상적인 喜怒哀樂을 노래한 민간가요이며, 그 속에 淫詩가 존재하는 것은 자연 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주자의 견해야말로 국 풍 의 문학적 본질을 예리하게 간파한 탁견이었지만, 전통사회 지식인의 한 사 람으로서 聖經賢傳의 권위를 의식할 수밖에 없던 주자는 시경의 경전적 가치 를 수호하기 위해 ‘讀詩者의 思無邪’라는 궁색한 논리를 덧붙여야 했다.
삼연은 기본적으로 모시서의 美刺說을 배격하고 주자의 국풍민요설 및 음시 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먼저 국풍민요설에 대한 삼연의 입장부터 검토해 보기로 한다.
毛詩序가 사람을 오도한 폐해가 적지 않다. 程子처럼 高明한 분도 그 장애를 입었 으며, 呂伯恭(呂祖謙) 같은 분은 더욱 심하였다. 사람에게는 情志가 있는데, 저마다
34) 이재훈, 주자 시경학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1994, 245-246면에서는 주자의 음시 설이 당시로서 얼마나 파격적인 주장이었는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경에 淫詩가 있다는 주자의 견해는 예교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충 만하던 당시에 있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고 대담한 주장이었기 때 문에 詩序說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던 呂祖謙의 반대를 받았고, 그와 절친하던 陳傅良 같은 도학자는 이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주자와 변론하기를 회피하였을 정도였으며, 일반 학자들 역시 감히 이에 찬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주자 시 집전의 설이 정설로 인정되던 원·명·청대의 학자들 사이에 있어서도 주자의 음시설 이 찬반논의의 대상이 되어 시경학사에 있어서 하나의 ‘朱子公案’이 되었다.”
그 不平함에 울게[鳴] 되면, 절로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원 망스럽기도 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읊조리는 말소리로 나타나게 되니, 이것이 이 른바 ‘風’이다. 어찌 美刺로만 일괄하여 모두가 國史의 붓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 는가? 국풍 의 興 중에는 민간의 아이나 여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많으니, 실로 美 刺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록 대아 · 소아 라 할지라도, <鹿鳴>이나 <行葦>편 과 같은 시들은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興情에서 나온 것들이니 어찌 美刺의 목 적으로 지은 것이겠는가?35)
삼연은 국풍 을 ‘國史의 붓’에서 나온 美·刺詩로 본 모시서의 견해를 비판하 고, 민간가요로 파악한 주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삼연이 美刺說을 배격한 이 유는 그것이 국풍 이 갖는 서정문학으로서의 본질을 읽어내는 데 효과적인 틀 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작품에 표현된 시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 내려 하지 않은 채 외재적 맥락들을 섣불리 개입시켜 美刺說로 일괄하려는 태 도는 시를 ‘시답게’ 읽는 것을 중시했던 삼연의 평소 입장과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삼연이 여느 儒者들과 달리 주자 시경학의 문학적 성취에도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의 본질에 대한 평소의 문제의식이나 시 본문에 즉하여 작품을 음미해보는 내재적 讀詩觀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국풍 의 시편들을 직접 읽어보면, 청춘남녀의 연애감정이나 征役에 동원된 고충과 같이 하층민중들의 소박한 정서를 노래한 작품들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주자가 국풍민요설을 고수했던 결정적 이유는 그의 평소 지론 이던 ‘以詩解詩’의 讀詩法 때문이었는데,36) 그는 시경을 읽으면서 일체의 외 재적 선입견을 배제하고 작품 그 자체에만 충실하여 시인의 本旨를 파악해나갈 것을 주장한 바 있다.37) 주자가 보기에 국풍 시를 美·刺詩로 풀이하는 방식은 35) 金昌翕, 三淵集권33, 日錄·己亥3月初3日 : “詩序誤人, 其害不少. 以程子之高明, 被 其障礙, 至呂伯恭則尤甚. 人有情志, 各鳴其不平, 自哀自樂, 自怒自怨, 不覺其形諸吟哦, 是 所謂‘風’也. 豈可專以美刺蔽之, 謂盡出於國史筆乎? 國風 之興, 多出街童巷女之口, 固不 暇於美刺. 雖 大 小雅 如<鹿鳴> <行葦>之類, 皆出於懽忻興情, 豈以美刺而爲之哉?”
36) 이재훈은 주자의 독시법과 관련하여 “주자의 以詩解詩의 讀詩法 주장은 그의 反詩 序논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타의 논거가 다 이 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재훈, 앞의 논 문, 223면 참조.
37) 주자어류에는 詩序에 얽매여 작품 본문에 즉한 ‘내재적 독해’가 제대로 이루어지 지 않는 풍조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 표출되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시를 시로써 해석하지 않고 詩序를 가지고 시를 해석한다. 이 때문에 왜곡과 견강부회를 일삼아 기필코 詩序를 지은 자의 뜻에 부합하려고 하며, 정작 시인의 본의를 상실한 것은 아 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이것이 詩序를 지은 자가 끼친 큰 폐해이다.”[今人不以詩說詩, 卻以序解詩, 是以委曲牽合, 必欲如序者之意, 寧失詩人之本意不恤也. 此是序者大害處!]
(朱子語類권80, 詩 1, 綱領 ); “시는 본디 쉽고 분명한데, 다만 앞에 놓인 詩序로 인해 차질이 빚어질 뿐이다. 詩序는 漢나라 때 학자들에게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시
작품의 서정시적 본질을 무시한 처사였으며, 시의 맛을 반감시킬 뿐만 아니라 작품의 本意를 왜곡하는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다. 시의 본질이라는 문제에 오랫 동안 관심을 가져 온 시인으로서 삼연은 주자의 문제제기에 깊이 공감했고, 국 풍민요설 또한 수용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국풍민요설을 수용했던 만큼 삼연은 자연스럽게 淫詩說 또한 수용하는 태도 를 보였다. 음시설에 대한 삼연의 견해는 주자가 음시로 판정했던 시편들이 집 중되어 있는 鄭風 을 논하는 조목들에서 확인된다.
정나라 공자 忽이 두 차례 제나라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의리상 올바른 것이었 으니 거절함이 마땅했다. 祭仲이 후원세력을 두라고 권했지만 따르지 않은 데 이르 러서는, 더욱 확고하였으니 군자가 마땅히 찬미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춘추를 해설한 자는 成敗를 是非로 여겨 “정나라 사람들이 그를 천시했다.”고 했으며,38) 또
“공자가 ‘君’이라고 칭하지 않고 ‘世子’라고 칭하여서 그를 깊이 꾸짖었다.”고 했다.
毛詩序의 작자는 허다한 淫奔詩들이 모두 홀을 풍자한 것이라고 단정지어버렸다. 呂 東萊(呂祖謙)는 그 설을 그대로 이어받아 鄭忽의 죄는 죽음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꾸며놓았다. 이에 주자는 “홀이 가장 불쌍하다.”39)라고 했다. 대개 시경과
춘추를 연결시킨 경우, 춘추를 잘못 해석하면 시경 해설 또한 따라서 이상해 지게 된다. 또 모시서로 인해 춘추를 잘못 해석했다고 말하여도 가할 것이다.40)
의 본의를 어지럽히고 있다. 4글자로 한 구를 이루어 읽어나가기만 하면, 오히려 뜻이 절로 분명해질 것이다.”[詩本易明, 只被前面序作梗. 序出於漢儒, 反亂詩本意. 且只將四 字成句底詩讀, 卻自分曉.](朱子語類, 같은 곳) 이상은 모두 이재훈, 위의 논문, 206-207면에서 재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38) 杜預(222~285)는 春秋 桓公·11年 의 “정나라 홀이 위나라로 달아났다.”[鄭忽出奔 衛]는 經文에 “홀은 정 소공이다. 선군인 莊公을 이미 장사지냈음에도 鄭伯이라는 작 위로 칭하지 않은 것은 정나라 사람들이 그를 천시하여 그의 이름으로 莊公의 부고를 알려왔기 때문이다.”[忽, 昭公也. 莊公旣葬, 不稱爵者, 鄭人賤之, 以名赴.]라는 주를 달 았다.
39) 朱子語類권80, 詩 1, 解詩 8: “산동의 村學究 같은 자가 춘추좌전·사기 등에 서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 군주들을 취해다가 그 시호의 좋고 나쁨을 따져서, 나쁜 시호를 받았는데 傳文 중 그 사적이 기록되어 있는 자가 있으면, 한 시기의 나쁜 시 들을 죄다 그 사람에게 귀속시켜 버렸다. 그 중에서도 鄭忽이 가장 불쌍하니, 鄭風 의 나쁜 시들은 모두 그를 풍자하는 것이라고 해놓았기 때문이다.”[如山東學究者, 皆 是取之左傳 史記中所不取之君, 隨其謚之美惡, 有得惡謚及傳中載其人之事者, 凡一 時惡詩, 盡以歸之. 最是鄭忽可憐, 凡 鄭風 中惡詩皆以為刺之.] 주자는 모시서의 작자 를 ‘산동의 촌학구’라고 불러가며, 그가 역사기록을 견강부회하여 시의 본지를 왜곡시 킨 일을 극력 비판하고 있다.
40) 金昌翕, 三淵集권33, 日錄·己亥3月初3日 : “鄭公子忽再辭齊婚, 義正而辭當. 至祭仲 勸以樹援而不從, 則尤爲堅確, 君子之所宜褒美, 而解春秋者, 以成敗爲是非, 乃謂‘鄭人 賤之’, 又謂‘孔子稱世子而不稱君, 乃深刺之也.’ 作詩序者, 以許多淫奔之詩, 皆斷爲刺忽.
呂東萊仍襲其說, 鍛鍊得鄭忽罪不容誅. 朱子曰: ‘最是忽可憐.’ 蓋詩與春秋相牽連, 春秋旣錯解, 則說詩者從而鶻突矣. 又可曰: ‘因詩序而錯解春秋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