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변란 체험과 기억의 술회 ‧ 99
1.2. 사회 재건과 구질서의 회복
임진왜란 이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공가>, <고공답주인가>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에 빗대어 전후의 문제적 상황을 다룬다. 여기에서 과거에 대한 기 억은 문제적 상황에 대한 해결법을 모색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한다. <고 공가>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그 시적 화자는 현 상황의 문제를 제시하기에 앞서 과거를 회상한다.
집의 옷밥을 언고 들먹 져 雇工(고공)아 우리집 긔별을 아다 모로다
비오 일 업 면셔 니리라 처음의 한어버이 사롬리 려
仁心(인심)을 만히 쓰니 사이 졀로 모다 플 고 터을 닷가 큰 집을 지어내고
셔리 보십 장기쇼로 田畓(전답)을 긔경(起耕)니 오려논 터밧치 여드레 리로다
子孫(자손)에 傳繼(전계)야 代代(대대)로 나려오니 논밧도 죠커니와 雇工(고공)도 근검터라
작품은 머슴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시적 화자는 선조가 창 업하던 시기를 떠올린다. 그가 회상한 창업 초기는 어진 마음을 베풀어 사람이 절로 모이고 좋은 땅에 근검한 머슴에 힘입어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여
유로움이 이어지던 시절이다. 과거에 대한 이와 같은 회상은 현재의 문제를 진 단하는 기준이 된다. 현재의 문제상을 노래한 부분을 보면 아래와 같다.
저희마다 여름 지어 가여리 사던 것슬 요이 雇工(고공)들은 혬이 어이 아조 업서 밥사발 큰나 쟈그나 동옷시 죠코 즈나
을 호 듯 호슈을 오 듯 무일 걈드러 흘긧할긧 다
너희 일 아니코 時節(시절)좃 오나와
득의 셰간이 플러지게 되야
엇그 火强盜(화강도)에 家産(가산)이 蕩盡(탕진)니 집 나 불타 붓고 먹을 시 전혀 업다
큰나큰 셰을 엇지여 니로려료
위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현재 머슴의 행태를 과거의 머슴과 비교하며 그 문 제점을 지적한다. 근검했던 과거 머슴과 달리 요사이 머슴들은 서로 시샘하고 다투는 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절도 좋지 않아 살 림살이에 적신호가 켜졌는데 강도까지 들어 가산이 탕진되었다고 한다. 문제의 원인으로 몇 가지가 제시되었지만 시적 화자의 초점이 놓여 있는 것은 머슴의 행태이다. 그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적 화자는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와 비교하 여 현 상황의 문제적 지점을 판단한다. 진단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한 모색도 회상을 통해 떠올린 과거의 모습과 관련될 수 밖에 없다.
金哥(김가) 李哥(이가) 雇工(고공)들아 먹어슬라 너희 졀머다 혬혈나 아니다
소 밥 먹으며 매양의 恢恢(회회)랴
으로 티름을 지어스라
집이 가음열면 옷밥을 分別(분별)랴 누고 장기 잡고 누고 쇼을 몰니 밧 갈고 논 살마 벼 셰워 더져두고
됴흔 호로 기음을 야스라 山田(산전)도 것츠럿고 무논도 기워간다
사립피 목나셔 볏겨 셰올셰라
七夕(칠석)의 호 씻고 기음을 다 후의
기 뉘 잘며 셤으란 뉘 엿그랴 너희 조 셰아려 자라자라 맛스라
을 거둔 후면 成造(성조)를 아니랴 집으란 내 지으게 움으란 네 무더라
시적 화자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새 마음’을 제시한다. 이는 이 전에 없었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마음 한뜻으로 풍요를 위해 힘써 일하자는 상부상조의 기치를 다시 확인할 뿐이다. ‘새 마음’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으로 제시된 것을 보면 이러한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쟁기 잡고 소 를 몰며 논밭을 갈고 김매기를 하는 등 농사일에 힘쓰며, 칠석(七夕)이 지나 일 손이 한가해지면 새끼 꼬기 같은 일을 찾아 하자고 독려한다. 그리고 가을걷이 가 끝난 후 성주굿을 하며 원화소복(遠禍召福)을 기원하고 겨울을 대비하여 집 안팎을 손질할 것을 구상한다. 이러한 제안이 제시하는 삶은 세시에 따라 전개 되는 건강한 농가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건대 <고공가>의 시적 화자 가 모색한 해법은 문제적 상황 이전에 영위했던 일상을 복원하여 되살리는 것 이라 하겠다. 이는 조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인 ‘농자천하지대본 (農者天下之大本)’의 재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공답주인가>는 <고공가>와 마찬가지로 창고가 비어 있고 세간살이 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주목하고 있는 지점에는 차이 가 있다.
우리 셰간이야 녜붓터 이러튼가
田民(전민)이 만탄 말리 一國(일국)에 소나데 먹고 입 드난 죵이 百餘口(백여구) 나마시니 므일 노라 터밧츨 무겨고
農莊(농장)이 업다 가 호 연장 못 갓던가 날마다 무려 밥 먹고 단기면셔
열나모 亭子(정자)아 낫만 자다 (···………)
쇼먹이 드리 샹름을 凌辱(능욕)고
進止(진지) 어린 손 한계대를 긔롱다
름 제 급 못고 에에로 제 일 니
집의 수한일을 뉘라셔 심 고
穀食庫(곡식고) 븨엿거든 庫直(고직)인들 어이며 셰간이 흐터지니 딀자힌들 어이고
내 왼 줄 내 몰나도 남 왼 줄 모넌가 플치거니 치거니 할거니 돕거니
로 열두 어수선 핀거이고
밧별감 만하이 外方舍音(외방사음) 都達化(도달화)도 제 소임 다 바리고 몸릴 이로다
비 여 셔근 집을 뉘라셔 곳쳐 이며 옷 버서 문허진 담 뉘라셔 곳쳐 고 불한당 구모도적 아니 멀니 단이거든
화살 誰何上直(수하상직) 뉘라셔 심써 고
위에서 시적 화자는 머슴들이 낮잠을 자면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며, 소먹이는 아이들이 상마름을 능욕하고 어린 사람이 어른을 기롱하는 등 위계 질서가 무 너지고, 재물을 빼돌리고 잔꾀를 부려 제 몫을 챙기는 것이 만연해 있는 문제 를 지적한다. 문제를 해결할 소임을 맡은 자가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비가 새는 집과 무너진 담을 고치는 이가 없고 도적떼가 아직 가까이에 있는데도 누 가 나서서 경계를 설지 알 수 없는 처지라고 한다.
시적 화자가 거론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질서와 규범이 바로 잡혀 있지 않 다는 점이다. 이러한 진단은 질서와 규범이 확실하게 지켜지는 상태를 기준으 로 그것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고공답주인가>에서 그 기준이 되는 것 은 과거이다. “우리 셰간이야 녜붓터 이러튼가”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화자 는 풍요롭던 시절에 대한 상기를 통해 현재를 진단한다. 그의 기억 속의 세계 는 풍요로우면서도 넘치지 않고 분수에 맞는 태도를 지켜나가는 정돈된 모습을 띠고 있다. 문제적 상황에 대해 시적 화자가 제시하는 해결법은 이러한 세계를 되살릴 수 있는 방안이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집일을 곳치거든 죵들을 휘오시고
죵들을 휘오거든 賞罰(상벌)을 키시고 賞罰(상벌)을 발키거든 어른죵을 미드쇼셔 진실노 이리시면 家道(가도)절노 닐니이다
시적 화자는 머슴을 단속하고 상벌을 명확하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어른죵”
을 믿고 그에게 맡길 것을 당부한다. 시적 화자가 제시하는 해결법은 한 마디 로 말해 기강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좋은 시절을 다시 구가할 수 있 는 방법을 그 시절을 지탱하던 질서를 다시 구축하는 데서 찾은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공가>와 <고공답주인가>에서 제시된 해결책은 변화한 환경에 대한 변화된 접근법이 아니다. 이들 작품에서 복구의 모색은 과 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기초한 문제 해결 방안은 과거지향적인 성격을 띤다. 이에 더해 두 작품의 선후 관계는 봉건적 질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복구의 담론이 귀착되었음을 시사한다.
<고공답주인가>는 <고공가>에 대한 답가로 창작된 작품이다. <고공답주인 가>가 이루어진 까닭은 <고공가>에 대해 동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견을 펼 치기 위해서이다. <고공답주인가>의 시적 화자는 <고공가>에서 “너희일
라 며셔 리 다래라”라고 한 것을 “기 마시고 내 말 드로 쇼셔”라고 받아치며, <고공가>에서 제시한 해결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고공 가>의 시적 화자와 다른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해 들어간다.
<고공답주인가>의 시적 화자가 문제를 바라보는 키워드는 ‘질서’이다. 현재의 상황이 문제적인 것은 질서가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이에 위계질서를 명확히 하고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제안한다. ‘마누라-어른종-종’의 수직적 상하 관계 를 복원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이와 같은 해법은 서로서로 도와서 서로의 일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결실을 맺자는 <고공가>의 그것과 다르다. <고공 답주인가>에서 위계질서에 대한 강조는 상부상조를 통해 풍요로운 일상을 이루 어내자고 하는 <고공가>의 원론적인 제안이 모호하게 넘어가고 있는 지점, 이 전과 다른 관계 설정의 여지를 보이고 있는 지점을 차단한다. 종들을 휘어잡고 상벌을 엄정하게 함으로써 주인의 권위를 세우고 ‘주인-어른종-종’의 상명하달 (上命下達) 체계를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는 <고공답주인가>의 시적 화자는
<고공가>에서 “金哥(김가) 李哥(이가) 雇工(고공)들아”라고 하며 친근한 목소리 로 해결책을 권하고, 스스로 새끼를 꼬면서 고공과 일상을 함께 하는 동반자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