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양식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말을 풀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매 력적인 장르이다. 17세기 전반기 거듭되는 변란 속에서 경험한 사건과 사태에 대해 큰 제약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표출하는 데 가사 양식이 소용되었다. 앞 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기 작품에서 서술의 주안점은 사실이나 상황 자체보다는 사실이나 상황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해석에 놓여 있다. 이는 사실이나 상황을 다루는 의의를 그에 대한 논평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는 것에서 찾았음 을 말해준다.
가사가 시적 화자가 자신의 인격으로 말하는 1인칭 서술에 의존한다는 관 습110)에 기대어, 당대 가사 담당층은 가사 양식을 전후 사회상의 문제와 당대 주요한 사건에 대해 대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는 매개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을 기록했다.
경험과 사실을 다루면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담론 의 형성과 그 공론화였다. 최현의 <용사음> 중 의병장이 올린 성과를 언급하는 부분을 예로 들어 살펴보도록 하자.
조초난 뎌 손야 權應銖(권응수) 웃지 마라 永川賊(영천적) 아니 티면 더옥이 일 업다
110) 조세형, 「가사의 시적 담화 양식」, 가사의 언어와 의식, 보고사, 2008, 162면.
먼 듸 軍功(군공)은 듯기록 귀예 차
갓기온 賊勢(적세) 볼록 눈의 다 뒤조쳐 굿보더니 의 덕의 첫 잔 잡고 燋頭(초두) 爛額(난액)은 셔도던 功(공)이 업다
위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군공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을 암암리에 드러낸다.
영천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운 권응수를 두고 웃지 말라고 하고 영천에 주둔 하고 있던 적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권응수의 공을 치켜세운다. 먼 곳에서 이룬 군공은 들을수록 귀에 차되 가까운 적세는 볼수록 눈에 찬다는 표 현에서는 직접 적과 대치하지 않으면서 전선의 상황을 예단하는 것에 대한 불 만을 헤아릴 수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권응수처럼 눈앞에 있는 적과 직접 맞서 싸우는 장수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시적 화자는 뒤를 좇아 구경하다가 남의 덕에 첫 잔을 잡는다는 노랫 말을 통해서도 비슷한 속마음을 내비친다. 이것이 직접 나서지 않았으면서 공 을 가로챈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비꼬는 말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눈앞에 닥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애쓰고 있 는 이들의 공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개탄의 심정을 드러 낸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전장과 멀리 떨어 진 곳에서 소식만 들으면서 쉽게 논단하는 경우나 남의 공을 가로채는 이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사안의 시비를 가린 자신의 판단을 언급할 뿐이다. 시적 화자는 사실을 그대 로 전달하는 객관적인 태도를 띠기보다는 한 편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가치 평 가에 개입한다. 기왕의 평가를 문제 삼는 그의 목소리는 부당한 평가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이 목소리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의 이야기로 만드는 사회적 작용111)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작품에 제시되어 있는 가치 판단은 그 작품을 수용하는 이로 하여금 작품에 거론된 사실을 곱씹게 한다. 작품의 시선에 비추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돌 아보게 한다. 이를 통해 담론이 공유되면 이는 보편화·객관화를 꾀할 수 있는
111) Charlotte Linde, The Acquisition of a Speaker by a Story: How History Becomes Memory and Identity, Ethos, Volume 28, Issue 4, American Anthropological Association, December 2000, p.613.
계기가 될 수 있다. 세간의 시각에 대한 쓴 소리를 내뱉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 는 권응수의 행위에 대한 긍정적인 논의를 불러일으켜 그 의미를 격상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는 것이다.
<용사음>에서 시적 화자는 권응수의 일에 대해 비교적 길게 언급하고 있는 데, 이는 전란 중 행적을 두고 벌어진 공과(功過)에 대한 논의가 조정에서든 세 간에서든 주요한 화두였기 때문일 것이다. 강복중의 <위군위친통곡가>에서도 그러한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아래는 병자호란 때 이시방(李時芳, 1594~1660) 과 심연(沈演, 1587~1646)의 행적과 관련된 일을 노래한 부분이다.
忠孝兼全(충효겸전) 延平君(연평군) 李貴(이귀) 子弟(자제) 全羅監司(전라감사) 李時芳(이시방) 侯門子弟(후문자제) 慶尙監司(경상감사) 沈演(심연)은 赴戰(부전)의 드쟈니타 臺諫疏啓(대간소계)로 卽爲定配(즉시정배)니
이 아니 職任(직임)이며 이 아니 忠臣(충신)이랴
世上(세상)의 벗님는 兩道監司(양도감사) 주기지 아나 건마다 平生不敏(평생불민) 姜復中(강복중)은
콩 즨 듸 콩 고 진 듸 나니
名家將種(명가장종)이 燈盞(등잔)불의 나븨가치 戰場(전장)의 드러 一時(일시)에 쥬그면 當如後患(당여후환) 씨 업거든 엇지리
聖人(성인)이 復起(복기)도 不易吾言矣(불역오언의)시리라
이시방과 심연은 병자호란 당시 각각 전라감사와 경상감사를 맡고 있었는데 대응의 미비함이 지적되었다. 이후 전시 상황에서 취한 행동이 문제시되어 탄 핵을 받고 유배에 처해졌다. 이에 대해 <위군위친통곡가>의 시적 화자는 사건 의 전말은 간추려 서술하고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사건에 대한 논평을 담고 있 다. 작품에 간략히 요약되어 있는 사건의 면면을 실록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사가 합계하였다. “(…)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포 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 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
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 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 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 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성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112)
이는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 2월 11일 기사이다. 이를 보면 이시방과 심연에 대한 논핵을 확인할 수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임금이 남한산성 에 포위된 상황에서 군사를 거느린 신하 가운데 달려와 죽기로 싸우는 이가 없 었다고 하면서 군신(君臣) 간의 의리를 저버린 각 도의 감사와 병사를 추포하여 국문하고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용서할 만한 이유가 있 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고 하며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에 처벌하지 않았을 경우 생길 수 있는 곤란함을 들어 처벌의 필요성을 논 하고 처벌의 형평성을 문제 삼은 논의가 재차 일어난다. 같은 해 3월 11일의 실록 기사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헌부가 아뢰었다. “신들이 삼가 살펴 보건대, 여러 도의 모든 감사에게 율을 어기고 머뭇거린 죄가 있는데 혹 버려두고 논핵하지 않는 것은, 비국의 뜻이 내용을 아는 자로 하여금 수습하여 안집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죄지은 자를 다스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시키고 안집시키려는 실효도 보 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도의 병사도 마찬가지로 머뭇거려 군율을 잃은 잘못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최선을 다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김준룡(金俊龍)은 이미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니, 그 밖에 사세를 관망하던 자가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평안 병사 유림(柳琳),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은 비록 명을 받아 서쪽으로 내려갔다는 핑계라도 있지마는, 북 병사 이항(李沆), 남 병사 서 우신(徐佑申)은 함부로 교전을 하여 이미 강화한 후에 많은 사졸을 전사하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시방(李時昉)·심연(沈演)·이항·서우신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고, 민성휘(閔聖徽)·이석달·정세규(鄭世規)도 묘당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113)
사헌부에서는 모든 도의 감사에게 군율을 어기고 전장으로 급히 나서지 않은
112)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 2월 11일 기사.
113)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 3월 11일 기사.
죄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원래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보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상황 수습하 고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계속 일을 맡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서 비롯된 것인지 확인한다. 그러한 의도로 처벌하지 않는 것이 실효성이 있다 고 하더라도 국가의 법집행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판단이라고 한다. 그리고 처벌을 면한 자들에 의해 수습과 안정을 꾀할 수 있을지도 의심 스럽다고 한다. 게다가 최선을 다하여 싸운 자도 먼 곳에 유배되는데 사세를 관망하던 자들이 처벌되지 않는다면 형평성의 문제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각 도의 감사에 대한 처벌을 다시 주장한다. 명분도 없고 형 평성에도 어긋나는 처분에 대한 재고 요청은 부당하게 비호를 받고 있는 이시 방과 심연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조는 묘당에서 이미 참작하 여 조처하였으니 굳이 번잡하게 거론할 필요 없다고 답한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약 3개월 뒤인 6월 13일 실록 기사에 다시 보인다. 거듭된 논의 끝에 이들에 대한 처벌이 결정된 것이다.
헌부가 아뢰었다. “국가의 벌 주고 상 주는 법은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데 서 나와야 왕법이 반드시 행해지고 인심이 복종할 수 있는데, 지금은 막중한 군율을 처음부터 상세히 살펴 명백히 결단하지 않으므로 중간에 사사로운 뜻 이 끼어 가감하니 합당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아서 인심이 불평하고 국론 이 그치지 않아 갈수록 심합니다. (…) 군율의 큰 죄를 지어 죽음을 면하고 귀 양 가는 자에게는 공으로 감면해주는 예가 전부터 전혀 없었는데, 이제는 죽음 을 면한 뒤에 또 다시 공으로 감면해주니, 이러한 처결들이 뒤죽박죽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묘당과 금부를 시켜 다시 함께 살펴서 요행히 면한 무리가 형벌을 바로 받게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따랐다.
대신이 회계하였다. “헌부가 아뢴 사연을 보건대, 주의(主意)가 군율을 더욱 엄하게 하려는 데에 있어 죄인의 성명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각 조목에 논한 것을 보면 각각 가리킨 것이 있는 듯합니다. 유림(柳琳)·김준룡(金俊龍)은 이미 비국의 의계를 거쳤으므로 따로 의논할 필요가 없지만 조정호(趙廷虎)·심 연(深演)은 죄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가장 가벼운데 정배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물정이 불평하니, 적당히 감면받지 못한다면 이시방(李時昉)도 마찬가지로 정 배해야 할 듯합니다. (…) 사형을 감면하여 조율한 자는 본디 공으로 감면하는 일이 없으나, 유 삼천리(流三千里) 이하는 공의(功議)를 현록(顯錄)하는 것이 본디 유래된 법례(法例)이니, 이제 반드시 뒤미처 살필 것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