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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전혜림**

목 차

1. 들어가기 2. 루소의 연극비판 3. 자유의 근원, 유희 4. 나가기

<국문초록>

본고는 랑시에르의 미학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쉴러의 ‘유희’ 개념을 쉴러의 대표 저작인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를 중심으로 면밀하게 살펴보 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칸트와 쉴러로 대표되는 근대미학의 핵심 개념인 ‘유희’는 일종의 ‘거리두기’이며, 의지와 성향의 중지(거리두기)인 쉴러의 유희는 총체적 인간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다. 랑시에르가 미적 실천을 통해 기존의 감각 적인 질서와 단절함으로써 자기 해방의 가능성을 타진하듯이, 쉴러는 미적 실천으 로서의 유희를 통해 새로운 집단적 삶의 방식을 구성하고자 했다. 새로운 공동체 의 건설에 있어서 국가 제도에 의한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주장하며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을 역설한 쉴러는 ‘미적 교육’에 의한 개인의 해방과 새로운 인간성 의 형성을,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변화를 꿈꾸었다. 미적 교육론에 있어서 쉴러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국가의 개혁은 제도에 의한 변혁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개인 의 감성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미적 교육을 통한 감각의 총체적 혁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정치 질서 수립을 위한 혁

* 이 논문은 필자의 학위논문 일부를 발전시킨 것이다.

**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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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들을 완수하기 위해선 감각적 공동체가 조건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랑시에르의 주장과도 공명한다.

주제어 : 쉴러, 유희, 미적 가상, 미적 중지, 루소, 미적 국가

1. 들어가기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자크 랑시에르(J. Rancière)는 미학 을 예술 작품을 다루는 분과 학문이 아닌, ‘지각 및 사유의 체제’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 하에서 예술의 세 가지 커다란 식별 체제를 구별하는데, 그 세 가지 체제는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 ‘예술의 재현적 체제’, 그리고 ‘예 술의 미학적 체제’이다. 우선,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에선 예술 개념이 아직 그 자체로 개별화되지 못하고, 대신 ‘이미지들’의 가치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 된다. 즉 이미지들이 어떤 도덕적 효과를 낳는가, 이미지가 원본에 충실하게 재현되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시가 훌륭한 시민을 양 성할 수 없는 신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를 지각하는 이들의 도덕성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 작품은 신들의 이미지로 환원되는 것이 다. 두 번째 ‘예술의 재현적 체제’에선 예술이 자신의 고유한 지위를 부여받 지만, 예술은 일정한 질서(위계) 아래 포섭된다. 즉 특정 인물은 특정한 행동 양식을 가지며, 특정한 포이에시스(작품의 제작 방식)는 그에 상응하는 특정 한 아이스테시스(작품이 지각되는 감각 양식)를 갖는다. 포이에시스와 아이 스테시스의 관계가 내적 일관성이라는 규칙 하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연결됨 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엇이 예술작품에 포함될 수 있는지, 어떤 주제가 재현 될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주제가 재현될 수 없는 것인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반면 이와는 정 반대로, 세 번째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포이에시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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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테시스 사이의 정해진 질서가 무너지면서 주제들과 장르들의 위계 역시 붕괴될 뿐만 아니라 재현할 만한 대상과 그렇지 않는 대상을 나누는 경계마저 허물어진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은 특정한 질서에 의해 식별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 무엇이든 재현 가능해진다.1) 랑시에르는 이렇듯 예술이 자율성을 획득한 미학적 체제에서 경험의 자율성 에 기인한 감성적 경험의 전복을 통해 우리의 신체를 새롭게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이때 랑시에르가 중요하게 다루는 사상가가 18세기 독일의 미학자인 프리드리히 쉴러(F. Schiller)다.

랑시에르는 쉴러의 ‘유희(Spiel)’와 ‘가상(Schein)’ 개념의 정치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감각적 나눔의 문제로, 즉 우리의 신체를 새 롭게 조직하는 정치(의 발생)의 문제로 사유한다. 랑시에르에게 쉴러는 ‘유 희’라는 ‘쓸데없는’ 활동을 미적 실천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예술을 통해 새 로운 집단적 삶의 형식을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쉴러의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에서 특별히 열다섯 번 째 편지에 주목한다.2)열다섯 번째 편지에는 ‘인간은 유희하는 경우에만 완 전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명제가 등장한다. 쉴러는 미적 경험이 “미적인 예 술의 전체 건물과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삶의 예술의 전체 건물을 지탱하 게 될 것”3)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주노 루도비시」라는 그리스 조각상의 분석을 통해 부연 설명한다. 쉴러가 주노 루도비시에서 발견한 것은 감성적 경향성과 의지의 흔적을 제거한, 더 정확하게는 이 둘을 내밀히 결합한 유 희충동이다. 즉 주노 루도비시가 보여주는 것은 최고의 정지 상태이며 동시

1) 자크 랑시에르, 「미학적 전복」, 뺷해방된 관객뺸, 양창렬 역, 현실문화, 2016, 194~198면 참조.

2) Jaques Rancière, “The Aesthetic Revolution and Its Outcomes”, Dissensus, trans., Steven Corcoran, Bloomsbury, 2010 참조.

3) 프리드리히 쉴러, 뺷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 교육론뺸, 윤선구 외 역, 대화문화아카데미 대화출판사, 2015, 1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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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최고의 운동 상태인 유희이며, 이러한 유희가 예술과 삶을 동시에 재구 성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지 상태이며 동시에 운동 상태인 유희가 어떻게 예술과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일까? 또한 예술과 삶을 재구성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랑시에르는 쉴러가 주노 루도비시에서 발견한 것을 예술과 삶의 상호침투로 파악한다. 즉 예술은 예술이 아닌 한에서 예 술이 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예술은 언제나 삶의 형식으로 정립된다는 것 이다.4)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인들은 여신상의 얼굴 표정에서 감성적 경향성 과 함께 의지의 모든 흔적을 정지시킴으로써 그 두 가지를 운동하게 만들 었고, 그럼으로써 결국엔 그 모두를 인지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의 정지, 또는 이중의 운동으로 인해 여신상은 기존 예술에 부 합하지 않는, 감각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들에 대해 이질적인 무엇, 즉 예술 이 된다. 바꿔 말하면, 예술작품이 되기를 멈춤으로써 예술작품이 되는 것 이다. 관객 역시 주노 루도비시의 ‘자유로운 가상’ 앞에서 유희를 경험하게 되는데, 유희를 통해 지성과 감성의 일상적인 연결이 중지되면서 ‘경험의 자율성’을 영위하게 된다. 이를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보자. 아무것도 하 지 않는 여신상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객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 지의 순간에 기존의 감각적 질서와 단절된 새로운 삶, 새로운 형태의 공동 체가 만들어진다. 그 공동체는 예술과 삶을 분리된 영역으로 알지 않는 자 유로운 공동체이다. 여신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생각, 욕망, 목적에 접근 불가능하며, 이러한 이용 불가능함을 통해 충만한 인간성의 흔적을 담 는다. 다른 한편, 미적 경험의 주체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조각상에 의해 새로운 세계의 소유를 약속 받는다.5)

본 논문은 랑시에르가 주목한 쉴러의 유희 개념을 쉴러의 대표 저작인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를 중심으로 면밀하게 독해함으로써 쉴러의

4) Jaques Rancière, “The Aesthetic Revolution and Its Outcomes”, Dissensus, p.118.

5) 자크 랑시에르, 뺷미학 안의 불편함뺸, 주형일 역, 인간사랑, 2012, 68~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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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자율성 이론이 가진 정치성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쉴러의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는 예술의 자율성 이론을 대표하는 저작으 로, 수많은 지지와 더불어 비판의 대상이 된 작품이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쉴러의 예술론은 예술을 현실 사회와 분리해 독자적인 영역에 위치시킨 후 예술 속에서만 조화로운 인간성을 실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존 체제를 옹호하는 효과를 산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 가 사회에 대한 비판 속에서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정초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쉴러의 기획을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예술 옹호론으로 그렇게 간단히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6) 쉴러의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는 모더니티의 문제로 간주되는 자연과 자유, 개인과 집단,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등의 사이에 놓인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로 저술되었다. 그리고 그 기저엔 근대의 기계적 국가관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평가가 놓여있다. 이는 쉴러가 낭만주의자들과 공유한 문제의 식이기도 한데, 초기 낭만주의자들과 쉴러는 똑같이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동의했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환영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지속적인 불안 정과 자코뱅의 독재는 그들을 실망시켰고, 낭만주의자들이 내린 결론은 사 고방식, 믿음, 관습의 변화 없는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6) 18세기 중엽에 하위 인식 능력의 논리학으로 성립된 미학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수많은 사상가들을 매료시켰다. 그들은 모두 철학자들이면서 동시에 미학자들이었다.

“우리 시대는 오로지 미학자들로 우글거리고 있다”는 장 파울의 언급은 그 시대의 학문 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증언해준다. 오타베 다네히사에 따르면 18세기 말의 미학의 관심 은 근대 국가에서 인간 존재를 어떻게 구상하고 혁신할 것인가 하는 당시의 (넓은 의미 에서) 정치적 관심과 일치했고, 이러한 정치적 관심에 따라 배후에서 움직여졌다. 즉 미학이란 형체를 바꾼 국가론이었다. 쉴러의 미적 교육론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 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예술론은 당대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일종의 개혁안이었 다. 예술은 분열과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예술이 그러 한 도구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술과 학문 둘 다 인간의 자의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치외법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즉 예술은 국가 속에서 하나의 자유공 간을 형성한다는 게 쉴러의 생각이었다. (오타베 다네히사, 뺷예술의 조건뺸, 신나경 역, 돌베개, 2012, 1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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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해결책도 아니었다. 바 이저(F. Beiser)에 따르면, 이러한 위기에서 낭만주의자들이 해결책으로 내 세운 것은 교육(Bildung)이었다.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혼돈이 가르쳐준 것 은 민중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공화국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공화국이 기능하기 위해선 덕을 갖춘 시민(Citoyen/Bürger) 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쉴러의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는 낭만주의자들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는데, 그들에게 예술은 인간 의 교육을 위한 주요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술일 까? 왜 예술을 교육의 열쇠로 보았을까? 바이저에 따르면, 계몽주의자들은 교육을 지성을 계발하는 문제로 여겨 대중에게 지식을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질풍노도 운동의 주도적 사상가들인 헤르더와 뫼저는 지성 에 중점을 둔 교육 프로그램이 사유의 자발성을 권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아크라시아(akrasia)’7)의 문제를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우리 의 앎은 곧바로 행동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선을 알더라도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쉴러는 계몽의 실패와 혁명의 혼돈에 서 지성의 교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쉴러와 낭만주의 자들은 예술이 민중을 고무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상상력을 일깨우고, 그들이 더 높은 이상을 따라 살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과거에 종교가 맡았던 기능이지만, 이성을 확신시킬 수 없었던 종교와는 달리 예술

7) 아크라시아는 자제력이 없거나 의지력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데, 소크라테스는 주지주의 적 입장에서 아크라테시아를 부정했다. 누구든지 좋은 것인 줄 알면 행하며, 행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인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의지가 약하거나 자제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뺷니코마코스 윤리학뺸에서 앎을 ‘학문적인 인식(episteme)/기술적인 지식(techne)’

과 ‘실천을 위한 지혜(phronesis)’로 구분해,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가 없다면 아크라시 아에 빠져 위선을 행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뺷니코마코스 윤리학뺸, 이창 우․김재홍․강상진 역, 이제이북스, 2008, 제7권, 233~276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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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성에 따라 살도록 고무하는 힘을 갖는다고 그들은 주장했다.8)이성과 감성의 통일, 또는 감성의 계발을 통해 이성의 원리에 따라 행동할 성향을 갖게 만드는 것은, 쉴러에겐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고 쉴러가 국가의 개혁 시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쉴러는 국가를 존속시 키면서 국가를 개혁할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그 방법을 ‘미적 교육’에서 찾은 것이다. 쉴러는 아름다움(미)을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시켜줄 수단으로 간주 했고,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가 자유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쉴러와 낭만주의 자들에게 미학은 곧 정치학이었다. 하지만 물론 예술의 사회적 폐해를 주장 하는 반론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게 존재했고, 쉴러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중 루소의 연극 비판은 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다루었다는 데서 오늘날 에도 여전히 중요한 논의거리를 던져준다.

본 논문은 루소의 예술 비판에서 시작해 쉴러의 유희 개념이 어떻게 이 러한 비판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쉴러의 유희 개념의 핵심은 ‘자유’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 유희할 때 기존의 현 실과는 전혀 다른 자유의 상태에 놓이며, 이는 모든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규정가능성의 상태이다. 쉴러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인간을 곧바로 도덕적 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만들지 않는다. 유희로서의 예술은 어떤 메시지도 전 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희를 통해 도달되는 미적 상태는 인간이 이성적이 고 도덕적으로 되기 위한 조건이다.

2. 루소의 연극 비판

루소가 예술에 대한 비판을 전면적으로 개진한 것은 뺷달랑베르에게 보내 는 연극에 관한 편지뺸에서이다. 수학자이자 백과사전파였던 달랑베르는 뺷백

8) 프레더릭 바이저, 뺷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뺸, 김주휘 역, 그린비, 2011, 167

~19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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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사전뺸 7권에 「제네바」 항목을 집필했는데, 이 항목은 시민들의 지적 성장 과 관광객들의 오락을 위해 제네바에 극장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이를 읽은 루소는 달랑베르의 제안에 반대하며 한 편의 글을 쓰게 되는데, 그 글이 바로 뺷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뺸이다. 일찍이 루소는 학문과 예술을 ‘문명’의 표상으로 간주했으며, 학문과 예술의 영향 아래서 인간은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이 되고자 한다며 그 부정적 영향력을 비판한 바 있다. 문명에 대한 비판은 뺷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 지뺸 이전에 쓰인 뺷인간 불평등 기원론뺸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는데, 루소는 문명을 사유재산과 동일시하며 이를 모든 인간 고통의 기원으로 파악한다.

원시상태라는 가설적 상황을 상정해, “일도 언어도 집도 전쟁도 서로 간의 교류도 없이 숲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미개인은 다른 동료 인간의 필요 를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고”9), 소유 및 소유관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한 인 간을 노예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사회의 설 립은 인간 실존의 문제와 연관된다. 미개인은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지 않기 에 그 자신으로 살 수 있지만, 문명인은 타인들의 심판에 얽매여 자기 자신 으로부터 소외된다. 문명은 소외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문명의 표상인 예술 역시 인간의 소외를 불러온다. 루소는 뺷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뺸에서 예술이 불러온 소외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루소는 연극의 기능을 ‘오락’으로 정의한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얻 기 위해 함께 극장에 간다. 그리고 극장 안에서 홀로 현실로부터 고립된다.

그들은 “친구들, 이웃들, 그리고 가족들을 잊고, 꾸며낸 이야기에 열중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불행에 눈물 흘리기 위해, 또는 산 사람들은 잊은 채 즐 겁게 웃기 위해 극장에 간다.”10)즉 극장에서 사람들은 현실을 망각하거나,

9) 장 자크 루소, 뺷인간 불평등 기원론뺸, 김중현 역, 펭귄 클래식 코리아, 2015, 73면.

10) Jean-Jacques Rousseau, Politics and the Arts : Letter to M. d’Alembert on the

Theater, trans, Allan Bloom, Cornell Univ. Press, 1960,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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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극장에 간다. 그런데 이때 연극은 관객들을 즐 겁게 하기 위해 그들의 성향(취향)에 맞는 오락을 제공해야만 한다. “일반 적으로 무대는 인간의 정념들을 그린 한 점의 그림이다.”11)연극은 관객의 열정(정념)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정념에서 비롯된 편견과 미신을 조장한 다. 만약 화가가 이러한 정념들을 긍정하기를 도외시한다면 관객들은 연극 을 외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단지 관객들의 정서를 따라갈 뿐이지 이를 교정하거나 개선하려하지 않는다. 루소는 이로부터 연극의 사회적 기 능이 기존의 도덕과 관습을 고수하는 데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연극은 오락뿐만 아니라 도덕적 기능 또한 갖고 있지 않은가? 아리 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비극이 ‘연민/비탄(Eleos)’과 ‘공포(Phobos)’

를 고양시킴으로써 우리를 우리가 사로잡힌 정념들로부터 해방시킨다고 말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루소는 이에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가 절제되고 현명 해지기 위해서, 그 전에 무절제하고 미친 듯이 화나있어야만 하는가?”12)루 소는 정념을 정화시킬 유일한 도구는 이성이며, 이성이 아닌 비극적 감정들과 정념을 생산해내는 연극은 관객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말한다.13)

11) Ibid., p.18.

12) Ibid., p.20.

13) 스피노자의 경우 루소와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원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정념(혹은 상상)이 삭제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성은 정념을 완화시킬 순 있어도 삭제할 순 없다. 한 정념을 다스리려면 그보다 더 강한 다른 정념이 필요하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장이다. 뺷윤리학뺸, 2부 정리 35의 주석은 이를 설명해주는 한 예로 자주 인용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태양이 아주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태양을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정서에 의한 인식)’한다. 즉 원인을 알게 되더라도 그 렇게 보이는 것이 달라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실제 거리를 몰라서가 아니 라, 우리의 신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념을 정념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정념이 삭제되진 않는 다.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주장에 입각해 이데올로기(상상)와 정서를 생산하는 물질적 메커니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을 파괴 또는 교정하는 것을 통해 상상과 정서를 제어 할 길을 모색했다.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뺷아미엥에 서의 주장뺸, 김동수 역, 솔 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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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연극을 보는 동안에는 물론이고 연극이 끝난 후에도 지속되는 변화된 감정들, 격정, 연민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관객이 자신을 사로잡은 정념들 을 극복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연극을 보며 정념의 변화를 겪었다고 해서 현실의 인간이 변화할까? 이것이 루소가 던지는 질문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루소가 보다 심각하게 문제시하는 것은 주인공 과의 동일시다. 루소가 보기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연극의 인물들에 자신 을 동일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슬픔은 그 인물들이 비현실적인 것만큼이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슬픔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궁극 적으로 실제 현실의 삶에서 부과되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루소는 홉스와 달리 인간이 선천적으로 악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도의심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다만 문명이 인간을 악하게 만든 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논리로 인간의 도의심과 미적 감각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 예술로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연극 작품들이 쓰이기 이전엔 선인들이 사랑받지 못하고, 악인들은 증오의 대 상이 아니었나? 연극이 상연되지 않는 곳에선 이러한 정서들이 더 미미했나? 연 극이 선인을 사랑받게 만든다. … 연극은 정말 자연과 이성이 이전엔 행하지 못 한 기적을 행하는구나!14)

인간은 연극(예술)을 통해 도의심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지 니고 있는 도의심을 연극을 관람하며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서 관객들은 허구적인 연민의 대상에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순전히 상상 적인 차원에서 자신들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다. 루소는 이런 상상적인 수 행이 관객들에게 거짓된 만족감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실제 도덕적 의무들 과 현실 세계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사회의 문제들은 여

14) Ibid.,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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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존재하지만, 관객들은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자신들 에게 지워진 도덕적 짐을 덜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동일시의 이면은 언제나 분리 효과다. 현실 세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순수하게 극 속의 대상에 동일시함으로써 무관심한 관조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동일시와 분리라는 이중의 효과에 대해 루소와 유사한 주장을 펼친 이는 알튀세르다. 하지만 루소가 극중 대상에의 동일시와 현실의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분리를 통한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이야기한다면, 알튀세르는 극중 대상에의 동일시와 극중 대상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한 이데올로기의 재생 산을 논한다. 알튀세르는 연극에 관한 짧은 에세이인 「브레히트와 마르크 스에 대하여」에서 브레히트 이전의 기존 연극을 비판하면서 연극의 즐거움 을 ‘화재의 위험’에 빗댄다. 우선 알튀세르는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연극적 재현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배우와 관객 양쪽 모두에게서 연극 적 재현이 발생할 수 있게 해주는 문제(재료)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 가? 이에 대한 답은, 연극이 존재한다는 자명한 사실에서 출발해, 연극이 존재하기 위해선 관객과 무대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연극적 소통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뭔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브레히트는 그 무언가, 연극이 자신의 대상으로 갖고 있는 것을 사람들의 ‘의견들’과 ‘행 위들’이라고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알튀세르는 이를 ‘이데올로기’라는 용어 로 지칭한다. “이데올로기는 단지 생각들이나 생각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 람시가 이미 완벽하게 이해했듯이, 이데올로기는 생각들이자 행위들이며,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는 행위들 속의 생각들이다.”15)관객들은 생각들과 행위들을 지닌 채로 극장을 찾으며, 무대 위에서 보이는 것은 그러한 생각 들과 행위들, 행위들 속의 생각들이다. 즉 어떤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이 것이 연극의 존재를 승인한다.

15) Louis Althusser, “On Brecht and Marx”, trans. Max Statkiewicz in Warren Montag,

Louis Althusser, Palgrave Macmillan, 1988, p.146. (강조는 저자)

(12)

틀린 말은 결코 아닌 어떤 오래된 문구를 인용하면, 관객들이 연극에서 찾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연극은 거울과 같아서, 관객들은 그들의 머리와 몸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해 극장에 온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재인하기(recognize) 위해서 극장에 온다.16)

이 오래된 문구가 중요한 것은, 알다시피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재인 (recognition)’에 있기 때문이다. 재인은 지식도 아니고 인식(cognition)도 아 니다. 우리는 매끄럽게 연출된(편집된) 이야기나 극중 인물들을 보며 “맞아!

바로 저거야!”라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관객들은 마지막에 그러한 감탄 사를 내뱉을 것을 희망하며, 자신의 감정의 정당성을 입증 받을 것을 기대하 며, 극장으로 향한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보는 것은 그들 자신이며, 그들이 스스로를 재인할 때, 그리고 재인을 다시 한 번 공고히 할 때 첫 번째 만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알튀세르에 따르면, 진정한 즐거움은 단순한 이데올로기 적 재인에 있지 않다. 이데올로기적 재인의 즐거움이 어떤 위험, 또는 위험에 맞닥뜨린 위기를 포함할 때 그 즐거움은 배가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 리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또는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바, 옳다고 믿는 바를 재확인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 리 자신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는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의 구심을 인정하진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대하 는 즐거움에는 이러한 의구심이 포함되어 있다. 연극은 위험, 의구심, 위기를 쫒아버리기 위해 그것들과 불장난을 벌이며, 관객들이 침묵 속에서 생각만 하고 있던 것들을 큰 소리로 대신 떠벌려준다. 이러한 연극의 메커니즘은 관객들에게 이중의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우선, 우리는 공포와 의혹의 감정 을 느끼는 이는 항상 내가 아닌 타자라고 믿으며 연극은 이러한 믿음을 확신 시켜 준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 속에서 우리는 안도한다. 그러고 나서 극

16) Ibid., p.146. (강조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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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위험을 피해 어떻게든 해결되고 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재인하고 정당화한다. “맞아!”,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재인과 정당화이다. 관객들이 극장을 찾을 때 그들은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 인다. 배우는 관객들의 생각들과 행위들을 대상으로 연기하며, 이는 관객들 의 생각들과 행위들이 어떤 위험에도 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 이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은 ‘카타르시스’라고 말했고, 프로이트는 예술을 ‘허구적 승리(fictive triumph)’라 일컬었다. 허구적 승리 는 다름 아닌 ‘허구적 위험(fictive risk)’이다.17)연극을 관람하며 관객은 불 구경을 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단지 불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 기 위해서. 또는 불이 난 집은 그들의 집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집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 우리가 왜 연극이 오락을 제공하는지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연 극이 주는) 즐거움의 특수한 형태를 고려해야만 한다 - 아무 위험 없이 불장난하 기-여기엔 이중의 조건이 있다. 1. 이는 아무 위험이 없는 불장난인데, 왜냐하면 이는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불장난이며, 극은 항상 화재를 진화하기 때문이다.

2. 불이 나면, 그것은 언제나 이웃집에서 난 불이다.18)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이웃’으로서의 관객을 강조하는데, 이는 연극과 영 화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연극을 관람할 때 관객들은 극장 내부의 다른 관 객들을 인지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계급을 인지할 수 있다. 객 석은 가격에 따라 등급이 매겨져 있으며, 중간 휴식 시간이 있고, 휴식 시간 에 대화가 오간다. 즉 극장은 “사회적 관계들과 그들의 차이들이 재생산되 는 하나의 작은 사회이다.”19)극장에서 사람들은 객석의 다른 ‘이웃들’을 봄

17) Ibid., p.147.

18) Ibid., p.147.

19) Ibid.,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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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동시에 무대 위의 또 다른 ‘이웃들’을 본다. 객석의 하층 계급들은 객석 의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부러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지만, 무대 위의 그들의 집에 불이 났을 때는 그들을 조롱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무대 위에 서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그려지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도 한다. 연극이 상연되는 공간 은 사회적 관계와 차이와 계급이 재생산되는 공간인 것이다. 알튀세르가 기 존의 연극과 다른 새로운 실천으로서의 연극을 발견한 것은 브레히트를 통 해서이다. 알튀세르의 유일한 연극 평론인 「피콜로 극장 : 베르톨라치와 브 레히트」는 연극의 새로운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20)

20) 알튀세르는 1962년 7월 밀라노의 극단 피콜로 테아트로가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한 편의 연극을 관람한 후 이에 대한 평론을 쓴다. 그 연극은 스트렐러가 연출하고 베르톨라 치가 희곡을 쓴 뺷우리 밀라노뺸이다. 당대 비평가들은 뺷우리 밀라노뺸를 싸구려 멜로드라마 로 평가했지만, 알튀세르는 이 작품을 이데올로기로서의 멜로드라마라는 형식을 비판하 고 새로운 의식(관객)을 생산해낸 유물론적 연극의 한 예로 평가한다. 알튀세르가 뺷우리 밀라노뺸에서 주목한 것은 내적 분열(internal dissociation)로 특징지어지는 독특한 작품 구조이다. 하나의 극 안에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며 두 개의 의식의 공존한다. 하나의 시간은 룸펜프롤레타리아들의 길고도 느린 텅 빈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세 등장인물들이 드라마를 이루는 짧고 충만한 시간이다. 드라마의 시간, 즉 연극의 멜로드라마적 서사는 무대 주변으로 물러나고 대중들 자신, 그들의 텅 빈 삶과 존재의 조건들이 무대 중앙에 배치된다. 이때 극 내부의 간격(분열) 속에서 관객과 연극 사이에 어떤 거리가 만들어진 다. ‘무의식적 동일시(정체화)’ 또는 ‘감정이입’에의 실패로 인해 생성되는 그 거리는 멜로 드라마적인 의식의 환상을 비판하고, 현실적 조건을 드러내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을 생산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새로운 인식의 생산은 전적으로 ‘극의 내부에서’ 진행된다고 강조할 때, 이는 단순히 주인공(주체)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관객과 극 사이에 거리가 생겨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극에서는 하나의 시간성, 주인공의 시간성만이 존재한다. 극의 모든 인물들은 주인공의 시간성에 종속되어 있다. 주인공의 적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의 적이 되기 위해선 주인공의 시간, 주인공의 리듬을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주인공에 종속되어 있고, 적은 단지 주인공의 적일뿐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역시 적이 주인공에게 속해 있는 것만큼이나 적에게 속해 있다. 즉 적은 주인공의 적일 뿐, 주인공과 적이라는 대립 구도 자체가 허구라는 것이 무대 위의 다른 시간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내적 분열과 비관계의 구조에서 멜로드라마의 변증법적인 구조는 삭제되어선 안 된다. 이 구조는 유물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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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쉴러로 돌아와, 그렇다면 쉴러는 루소 식의 예술 비판론에 어떻게 응답했을까? 뺷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뺸는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보여주는 논리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이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하 며, 미적 교육이 혁명 이념의 영속성을 위한 수단일 수 있다는 견해를 철학 적으로 밝힌 글이다.

3. 자유의 근원, 유희

우선 쉴러는 예술의 사회적 폐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자신도 그 점을 모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페리클레스와 알렉산더 치하에서 예술 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취향의 지배가 더욱 일반적으로 확대되었을 때, 그 리스의 힘과 자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21)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자유 가 축소될 때 예술이 오히려 번성한 예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쉴러는 경험이 미의 문제를 판결할 심판관 이 될 수 없으며, 미의 영향에 관한 경험적 접근에 의거하기 보다는 미의 순수 이성 개념을 연역적으로 도출해내고자 시도한다. 여기엔 현실에서 폐 해로서 경험되는 미는 개념으로서 파악된 미가 아니라는 주장이 내재해 있 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경험적 차원의 미의 정당성을 판단해줄 미의 순수 한 이성 개념을 정립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 인간의 본래적인 인간성인 총체성을 회복시켜주고 인간 이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 다. 그리고 이를 위한 첫걸음을 ‘인간성’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왜냐하

연극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며, 이데올로기적 연극 내에서 끊임없는 비판의 운동을 행하기 위해 단지 가장가지로 배치되는 것이다. (Louis Althusser, “The ‘Piccolo Teatro’ : Bertolazzi and Brecht”, For Marx, trans. Ben Brewster, Verso, 1982 참조.)

21) 프리드리히 쉴러, 앞의 책, 10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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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쉴러는 아름다움(미)을 (감각적이며 동시에 이성적인) 인간의 본성에서 추론해내며, 미를 “인간성의 필연적인 조건”22)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런데 어떤 논리로 쉴러는 미가 인간성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걸까? 이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쉴러가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1) ‘인격’과 ‘상태’로서의 인간

쉴러는 인간성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를 ‘인격(Person)’과 ‘상태(Zustand)’

라고 명명한다. ‘인격’은 변화하지 않은 채 자기동일성을 보존하는, 즉 항상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 인간성의 한 측면이며, ‘상태’는 외부 조건들에 의해 항상 변화하는, 변화 속에 있는 인간성의 다른 한 측면이다.23)그리고 이

22) 프리드리히 쉴러, 앞의 책, 102면.

23) 쉴러의 ‘인격’과 ‘상태’의 구분은 칸트의 ‘순수 통각’과 ‘경험적 통각’을 연상시킨다. 통각 (Apperzeption)이란 지각(perzeption)된 표상에 덧붙여진(Ap)것으로서, 모든 표상에 동 반하는 나라는 의식, 즉 ‘-라고 생각한다’라는 자기의식이다. 직관의 다양한 질료들을 여러 개념 아래 모으는 통일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통일작용이 바로 순수한 활동 성으로서의 통각이다. 나는 일주일 전 장미를 보았고, 이틀 전 다시 장미를 보았으며, 오늘 또 장미를 보았다. 내가 본 장미들이 같은 장미임을 확인해 주는 것은 경험적 통각, 즉 경험 속의 수많은 ‘나’이다. 하지만 일주일 전에 장미를 본 나와 이틀 전의 장미를 본 나, 그리고 오늘 장미를 보고 있는 나가 동일한 나임을 경험적 통각은 확인해줄 수 없다. 즉 경험적 통각의 차원에서는 아무런 필연성을 얻을 수 없다. 무수히 존재하는 경험적인 나를 통일하는, 그 수많은 나를 묶어주는 순수 통각이 있을 때만 재인작업은 성공할 수 있다. 칸트는 경험적 통각과 순수 통각의 변증법을 ‘통각의 분석적 종합적 통일’이라 부른다. 통각의 종합적 통일(수많은 나)은 분석적 통일(하나의 나)에 시간적으 로 선행하며, 분석적 통일(하나의 나)은 종합적 통일(수많은 나)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 다. 통각의 분석적이고 종합적 통일은 곧 ‘행위(Aktus)로서의 자아’를 의미하며, 행위 (Aktus)는 끊임없이 종합하는, 즉 시간적 계기속의 수많은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능력 에 다름 아니다. 경험 속에서 출현하는 수많은 나(특수한 나)에 의해 하나의 ‘나’라는 의식이 출현하며, 하나의 ‘나’에 의해 경험 속의 ‘수많은 나’가 ‘하나의 나’로 엮어진다.

이러한 통각의 분석적 종합적 통일 속에서 그 ‘하나의 나’는 ‘수많은 나’에 의해 변화한다.

그렇기에 ‘나’는 고정되고 꽉 찬 실체(res cogito)일 수 없으며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 가는 ‘나(Aktus)’이다. 차이를 포함한 동일자는 바로 차이에 의해 변화하는 동일자인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뺷순수이성비판 1뺸, 백종현 역, 아카넷, 2008, 344~349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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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요소는 한 인간 안에서 통일체를 이룬다. 즉 인간은 변화함으로써만 존재하며, 또한 변함없이 지속함으로써만 존재한다. 인간은 “‘특정한 상태’에 있는 ‘인격’”24)이며, “불변하는 자아는 오직 그의 표상의 연속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에게 나타난다.”25)그런데 인격과 상태라는 요소들 각각에 상응하 여 대립적인 힘이 발생하는데, 그 대립적인 힘을 일컫는 말이 ‘충동(Trieb)’이 다. 충동은 인간 내부에서 솟아나는 추동적인 힘으로서, 자신이 욕구하는 바를 현실화하고자 하는 추진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쉴러가 인간성에서 충동을 도출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으로는 우리 내부에 있는 필연적인 것을 현실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 리 외부에 있는 현실적인 것을 필연성의 법칙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이중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대립된 힘에 의해 추동됩니다. 이 대립된 힘은 그들의 대상을 실현하도록 우리를 추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충동(Trieb)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 것입니다.26)

쉴러가 충동 개념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인간성이 실현(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인격과 상태, 이성과 감성은 인간의 선험적 조건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선험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 정태적 존재가 아니라 충동이라는 추동적 힘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현실화하는 역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선

‘상태’에 상응하는 ‘감각적 충동(der sinnliche Trieb)’은 인간의 물리적 존재, 인간의 감각적인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인간을 시간의 한계 속에서 시간을 채우는 변화나 실재성으로 만든다. 달리 말하면, 감각적 충동은 인간을 ‘시간 의 한계’ 속에 위치시켜 ‘특정한(제한된)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충동은 인간성의 소질을 일깨우고 발전시키기는 하지만 더

24) 같은 책, 107면.

25) 같은 책, 107면.

26) 같은 책, 111면. (강조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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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비상하려는 정신을 감각의 세계에 묶어둠으로써 인간성의 완성을 불가 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반면 ‘인격’에 상응하는 ‘형식충동(Formtrieb)’은 인간 의 이성적 본성에서 나오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고, 외부의 사물에 규정되 지 않으며, 상태의 변화에 상관없이 자기동일성을 보존한다. 즉 형식충동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법칙을 만들어내며, 형식충동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전체 종(Gattung)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충동은 서로 다른 근거에서 비롯되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하지 않는다. 즉 인격과 상태, 이성과 감성은 인간 안에 양립하 는 서로 다른 두 측면이기에 감각적 충동과 형식충동 역시 본성적으로 대립하 지 않는 것이다. 이 두 충동이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느 한 쪽이 자기 본성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본성 자체가 대립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회역사적 조건이 대립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즉 이 두 충동이 본성상 대립 관계에 놓여있는 게 아니라면, 쉴러는 평행하는 이 두 충동을 어떻게 관계 짓고 있을까? 사회역사적 조건 속에서 항상 분열되 어 대립하는 두 충동을 본래의 관계로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쉴러는 두 충동을 ‘상관개념(Wechselbegriffe)’으로 파악하며, “한 충동의 활동이 다른 충동의 활동 근거가 되는 동시에 서로 제한하기도 하며, 각각의 충동은 다른 충동의 활동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는”27) ‘상호작용(Wechsel- wirkung)’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두 충동은 서로 엄격히 구분되어 평행적으로 존재하지만 또한 상호의존적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제한하며, 각각의 충동은 다른 충동의 활동에 의해 자신의 활동 성을 획득한다. 만약 감각적 충동(소재충동)이 우세하면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형식충동이 감각적 충동을 침해하면 인간은 결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호의존 관계에 있으면서도, 현실의 조건 속에서는 대립되어 있는 두 충동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27) 같은 책, 1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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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희충동과 미적 가상

쉴러는 두 충동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조화를 불러올 하나의 매개를 상정하 는데, 그것은 바로 ‘유희충동(Spieltrieb)’이다. 유희충동은 다른 충돌들처럼 인간 본성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름다움(미)’ 혹은 아름다운 예술작 품을 볼 때 두 충동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충동이다. 유희충동은 유희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감각적 충동과 형식충동을 동시에 현실화하고, 감성과 이성은 ‘유희’에서 서로 매개되어 조화를 달성한다. 바꿔 말하면, 인간 은 미를 통해 유희할 때 기존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그 상태란 바로 ‘자유’의 상태, 즉 “모든 규정으로부터 해방된 단순한 규정가 능성의 상태”28)이다. 쉴러는 유희에 의해 감성과 이성이 동시에 활동함으로 써 생겨나는 규정가능성의 상태를 ‘미적 상태(ästhetischer Zustand)’ 또는

‘중간적인 정조(Stimmung)’라 부르며, 이런 상태에서 감각에서 사유로의 이 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감각에서 사유로 직접 이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규정(Determination)이 지양됨으로써만 그것과 반대되는 규정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수용성을 자발성과 바꾸고, 수동적인 규정을 능동적인 규정과 바꾸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모든 규정 으로부터 해방되고 단순한 규정가능성의 상태를 통과해야 합니다.29)

그런데 여기에서 감각에서 사유로의 이행이 뜻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 까? 이는 이성의 우위, 형식충동의 우위를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닌가?

인간은 실재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규정을 확 고하게 붙잡아야 하지만, 동시에 무제한적인 규정가능성이 나타나기 위해 선 규정이 지양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상태의 규정을 파기하면서 동시에 보

28) 같은 책, 171면. (강조는 저자) 29) 같은 책, 171면. (강조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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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그런데 인간이 미를 경험할 때 이성과 감성이 조 화를 이루고 이로부터 ‘자유’가 발생하는데, 쉴러는 이 ‘미적인 자유’를 “도 덕적인 자유의 자연적 가능성”30)이라고 설명한다. 즉 미적인 자유를 통해 도덕적인 자유가 ‘강제’로서 나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미 적인 자유를 통해 인식과 도덕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활성화되고 이 성의 자율성은 감성의 영역에서 열리게 된다. 미가 인간에게 감각에서 사유 로 이행하는 길을 열어준다고 할 때, 이는 미가 감각을 사유와 분리시키고 수동과 활동을 분리시키는 심연을 메워준다거나 사유에 도움을 준다는 것 이 아니라, 사고력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마련해준다는 의미이다. 미적 자유는 감각적 인간이 이성적 인간으로 바뀌 기 위한 ‘조건’이다. 즉 “감각적 인간을 이성적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먼저 미적으로 만들어야만 한다.”31)왜냐하면 미적 자유의 상태 에서 인간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자연에 의해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유희는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기에 미적 상태에서 인간은 특정 능력만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능력을 활성화함으로써 총 체적 인간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쉴러에 따르면 “인간은 완전한 의미에 서 인간인 경우에만 유희하고, 인간은 유희하는 경우에만 완전한 인간”32) 이다. 미를 통한 유희는 총체적 인간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다. 아름 다움은 지성이나 의지를 위한 그 어떤 개별적인 결과도 낳지 않을뿐더러 개별적인 목적, 도덕적인 목적도 수행하지 않는다. 또한 아름다움은 인격의 형성에도, 그리고 계몽에도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미적 상태에서 자연에 의해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다.

한편, 이러한 언설은 쉴러가 인간성의 고유한 특성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30) 같은 책, 168면.

31) 같은 책, 191면.

32) 같은 책, 138면. (강조는 저자)

(21)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쉴러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성을 추구하는 단계로 들 어섰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는 인간이 “가상에 대한 즐거움과 장식과 유 희를 추구하는 경향”33)을 가진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쉴러는 최고의 어리 석음과 최고의 지성은 실재적인 것만을 찾고 단순한 가상에 대해서는 무감 각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지적하며, 가상에 대한 관심을 인간성의 진정 한 확장이자 문화를 향해 가는 결정적인 걸음으로 이해한다.

서구 전통 형이상학에서 가상은 본질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부정적으 로 해석되었고,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이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예술가는 참된 존재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수공업자의 모방물을 다시 모방 하는 자이며, 이데아가 아닌 현상(모방)을 모방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가상 적인 것’으로서 폄하된다. 하지만 예술적 모방을 가능성과 필연성의 개념과 연결시킨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부터 미적 가상은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 적으로 격상되고34), 자신을 숨기면서 드러내는 존재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정립되는 것을 예술로 정의한 하이데거나, 신마르크스주의 미학으로 분류 되는 아도르노, 블로흐, 마르쿠제와 같은 비판이론가들은 가상의 위상을 완 전히 전도시킨다. 유토피아의 철학자인 블로흐는 ‘선현(Vor-Schein)’개념 을 통해 미적 가상이 단순한 기만적 허구가 아니라 진리를 미리 가리켜 주 는 미래 연관적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아도르노는 동일성의 가상에 맞 선 가상의 구원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그런데 이러한 미적 가상 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이가 바로 쉴러다. 쉴러에게서 미적 가상 은 현실과 유리된 기만이 아니라 현실화된 자유를 미적인 차원에서 예비해

33) 같은 책, 227면. (강조는 저자)

34)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시인이 행하는 모방은 사태의 본질을 담은 진지한 행위이며,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허구적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일어난 일’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가들의 행위보다 심오하다. 예술에서 생산되는 가상은 경험적 현실을 능가하 기에 역사의 영역인 개별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담지한다. (권대중, 「미적 가상」, 뺷미 학의 문제와 방법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454~45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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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으로 제시된다.35)

쉴러는 우선 ‘논리적 가상’과 ‘미적 가상’을 구분한다. 논리적 가상은 순수 이성이 경험적 직관 없이 사변적인 추리를 통해 어떤 대상이 실재라고 간 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논리적 가상은 기만 혹은 속임수로 간주 된다. 반면 미적 가상은 “오직 정직할 때에만(실재에 대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한), 그리고 오직 자립적일 때에만(실재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은 채로)”36)미적 가상이라 불릴 수 있다. ‘정직’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을 가장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자립’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의 도구가 되지 않 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상이 자신의 작용을 위해 실재인 척 하며, 물질적 인 목적을 위해 저급한 수단이 되어버리면 가상은 정신의 자유를 증명할 수 없다. 유희로서의 예술은 어떤 메시지 전달의 목적도 갖고 있지 않으며 현실과의 단절을 통해 자율성을 획득할 뿐이다. 인간은 유희할 때 자유로우 며, 유희할 때 세계는 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미적 가상은 그 자율적 성격으로 인해 이후의 미학적 논의들에서 이데올로기의 은폐로 간주되거 나, 정반대로, 현실 부정을 통한 저항의 계기로 간주된다.

3) 쉴러의 ‘순환’

마르쿠제는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 비판 이론가이다.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철학의 과제로 삼은 마르쿠제는 자본의 전면 통제라 는 현실에 직면해 미적 가상에서 현실 해방의 가능성을 찾았다. 쉴러와 마 찬가지로 마르쿠제에게도 예술은 “비인간적인 현존재의 조건으로부터 인 간을 해방시키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37)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리

35) 서구의 미학적 사유에 있어서 ‘미적 가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최문규, 「자율적 예술과 가상」, 뺷문학이론과 현실 인식뺸, 문학동네, 2000과 민형원, 「아도르노」, 뺷미학의 문제와 방법뺸, 777~791면 참조.

36) 프리드리히 쉴러, 앞의 책, 234~235면. (강조는 저자)

37) 허버트 마르쿠제, 「미학적 차원」, 뺷에로스와 문명뺸, 김인환 역, 나남, 2012, 2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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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예술이 현실을 변혁하는 해방의 수단일 수 있는 이유는 예술적 진리가 가진 ‘가상’의 힘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예술의 언어는 일상성과의 단절을 의미”38)하며, “일상적 경험의 파괴”39)를 꾀한다고 선언한다. 예술은 삶 속 으로 해체되어선 안 되며 가상은 가상으로 남아야 한다. 쉴러가 순수 가상 의 자율성을 고집했듯이 먼 훗날 마르쿠제도 예술은 결코 탈승화되어 삶으 로 옮겨가선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버마스는 쉴러와 마르쿠제를 ‘예술적 유토피아’라는 키워드로 함께 묶 으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쉴러가 훗날 초현실주의자들의 강령이 된 예술의 생활화, 삶의 예술화에 반대해 가상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이유는

“예술적 가상에 대한 기쁨에서 전체 지각방식의 혁명을 기대”40)했기 때문 이다. 즉 예술이 가상으로서 작용하며 현실과 분리되었을 때 지각방식의 혁 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르쿠제 역시 “사회는 인간의 의식에서 뿐만 아 니라 감각에서도 재생산되기 때문에, 의식의 해방은 감각의 해방에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41)고 주장한다. 즉 “주어진 객관세계와의 억압적 친숙성이 해체되어야만 한다”42)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체가 예술의 탈승화, 즉 예술과 삶의 일치가 되어선 안 된다. 예술의 가상의 그릇이 파괴되면 그 내 용물은 사라질 것이고, 탈승화된 감각과 형식으로부터는 어떤 해방적 효과 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쿠제는 미학적 승화가 현실 긍정적이고 타협적인 예술요소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긍정적 부르주아 문화가 인간적인 가치들 을 상상력의 영역으로 몰아내고, 가상을 매개로 해서 그러한 가치들을 현실 로부터 분리해 실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적 가상은 예술이 저항

38) 위르겐 하버마스 외, 뺷마르쿠제와의 대화뺸, 백승균․서광일 역, 이문출판사, 1984, 44면.

39) 같은 책, 44면.

40) 위르겐 하버마스, 뺷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뺸,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1995, 72면.

41) 같은 책, 73면.

42) 같은 책, 7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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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했던 현실의 사회적 조건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 르크스가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안에 내재된 어떤 비판적인 요소(비참의 표현)를 감지해내듯이 마르쿠제는 예술 에서 저항과 비판의 요소를 간취한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이중적이다. 그것 은 하나의 환상이면서 동시에 진리의 요소를 담고 있다. 즉 미학적 승화는 부정하는(비판적인) 예술적 기능의 도구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쿠제는 가상을 만들어내는 쉴러의 유희충동에 주 목한다. 쉴러는 “실재[현실]에 대한 욕구와 실제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결 핍의 결과이며, 실재에 대한 무관심과 가상에 대한 관심은 인간성의 진정한 확장”43)이라 주장한다. 즉 현실에 대한 집착은 단지 결핍의 결과일 뿐, 그 것은 자유로운 상태라 일컬어질 수 없다. 쉴러에게 자유는 항상 ‘기존 현실 로부터의 자유’이며, 이는 실재에 대한 무관심과 가상에 대한 관심으로 나 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선험적이고 내적이고 단순히 지적인 자유 가 아니라 현실적 자유”44)이다. 마르쿠제는 쉴러가 말하는 ‘현실적인 자유’

를 “유희할 수 있는 자유”45)로 파악한다. 유희할 수 있는 자유란 가상을 즐 길 수 있는 자유이며, “인간이 자기의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유희”46)할 수 있는 자유이다. 유희는 자유의 실현이며, 유희를 통한 미적 경험은 경험 의 대상 자체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경험의 주체의 세계 또한 변형시킨다. 한마디로 “미적인 경험은 인간을 노동의 도구로 만드는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생산성을 저지시킨다.”47)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마르쿠제가 유희와 현실의 관계를 논하면 서 일종의 순환론에 빠진다는 것이다. 유희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지만,

43) 프리드리히 쉴러, 앞의 책, 228면. (대괄호([ ])는 인용자가 추가) 44) 허버트 마르쿠제, 앞의 책, 231면.

45) 같은 책, 232면.

46) 같은 책, 231면.

47) 같은 책, 233면.

(25)

그러한 유희는 비인간적인 현실이 제거되었을 때, 즉 소외된 노동이 발생하 지 않을 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핍과 부족의 비인간적인 현실은 진지함을 상실한다. 결핍과 부족이 소외된 노동 없이 충족될 수 있을 때에만 현실의 완강함이 상실된다. 그때에 인간은 자 기의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유희하며, 자연의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 고 자유롭게 유희한다.48)

마르쿠제가 빠진 이러한 순환은 일찍이 피히테가 쉴러에게 가한 비판의 내용이기도 하다. 즉 피히테는 인간이 자유롭기 전에는 미적 감각을 발전시 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쉴러에게서는 미적 가상과 실재, 예술과 현실은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미적 감각의 발전은 현실의 인간이 자유롭기 이전에는, 즉 현실의 사회적 조건이 변혁되기 이전에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노제의 시대와 지역은 또한 몰취미의 시대와 지역이기도 하다. 한편 으로 인간의 미적 감각이 발전되기 전에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다면,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자유롭기 전에는 미적 감각을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미적 교육을 통해 자유를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인간을 자유 자체로 이끌어낸다는 사상은, 만약 우리가 어느 누구의 주인도, 노예도 아니기 위해 대다수 대중으로부터 빠져나온 몇몇 개인에게 용기를 일깨우는 앞선 수단 을 찾지 못한다면, 또다시 우리를 악순환에 빠뜨릴 것이다.49)

그렇다면 쉴러는 가상과 실재, 예술과 현실을 절대적으로 분리시키고, 인 간의 자유를 가상 속에서만 실현시킴으로써 사회 구조의 변혁이라는 문제

48) 같은 책, 231면.

49) Fichte, Gesamtausgabe I(Stuttgart : Frommann, 1981), vol.6, p.348 (카이 함머마이스 터, 뺷독일 미학 전통뺸, 신혜경 역, 이학사, 2014, 112면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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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애써 무시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쉴러는 ‘아름다움(미)’을 “현상 안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자유의 표현”50)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유를 초감각 적 세계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쉴러의 예술론은 근대의 기계 적 국가관에 대한 비판이자 계몽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며 노동 분업에 따른 인간의 총체성의 상실에 대한 비판이다. 쉴러의 미적 교육론은 본래 어떤 ‘순환’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그 순환이란, “정치적인 영역의 개선은 성격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데, 야만적인 국가 체제 영향 아래서는 성격이 고귀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51)는 데서 발생하는 순 환이다. 즉 국가의 개혁은 개인의 감성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한데, 개혁되어야 할 타락한 국가가 개인의 감성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떠맡는다 면 이는 일종의 순환이라는 것이다. 오타베 다네히사에 따르면, 쉴러가 해 결하려 했던 순환은 보다 근본적으로 루소의 순환, 혹은 루소의 아포리아와 연관된다. 루소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본질을 인공성에서 찾고 국가 의 성립을 일반의지에 기초한 사회계약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국가의 성립 을 위한 사회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대중은 누구인가라는 질 문 앞에서 루소는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사회계약을 맺기 위해서 는 ‘사회적 정신’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해야하는데, 그러한 사회적 정신이 란 사회계약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52) 쉴러에게서 ‘미적 교 육’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놓인 이러한 순환을 해소하는 수단이었다. 아름 다움은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원리이며, 사람들 간의 미적 전달이 이루어지 는 미적 향유 속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의 상태를 이루기 때문이다.

의사 전달의 모든 다른 형식은 사회를 분리시킵니다. 왜냐하면 그 형식이 구 성원 개인의 사적감수성이나 사적 능력에만 배타적으로 관계하고, 인간과 인간

50) 프리드리히 쉴러, 앞의 책, 199면. (강조는 인용자) 51) 같은 책, 85면.

52) 오타베 다네히사, 앞의 책, 119~1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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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구별하는 것에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의사 전달(die schöne Mitteilung)만 사회를 통합시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것에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적 존재로서 감각의 즐거움에 관여하지 않고 단지 개인으 로서 감각의 즐거움을 향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보편적 인 것으로 확장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체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중략] … 우리는 오직 아름다움만 개체이면서 동시에 종 적 존재로서, 즉 종 전체의 대변자로 향유합니다.53)

그런데 쉴러 역시, ‘순환’을 해결하기 위해 예술을 그 도구로 사용하지만, 또 다른 ‘순환’에 빠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 순환이란, 쉴러가 “동물은 결핍 이 행동의 추동력이 되면 일을 하고, 힘의 풍부함이 행동력의 추동력이 되거 나 남아도는 삶의 여유가 행동하도록 자극하면 유희를”54)한다고 말하는 데 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노동은 결핍에서 나오지만 유희는 잉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마르쿠제가 유희와 현실의 관계를 논하면서 빠진 순환과 유사하 다. 자연적인 욕망이 충족되어 목적 없는 활동인 유희를 할 때 인간은 총체적 인 인간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유희는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55)그렇다면 어떻게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쉴러 가 빠진 순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쉴러는 개인의 자유는 “분류화를 통해 시민들의 다양성을 축소시키고 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성을 받아 들일 것을 강력히 요구”56)하는 국가가 아닌 ‘개인 스스로에게서’ 나와야 하며, 사회 구조의 변혁은 개개인의 미적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53) 프리드리히 쉴러, 앞의 책, 255면. (강조는 저자) 54) 같은 책, 243면.

55) 루카치는 쉴러가 유희와 노동을 엄밀하고도 배타적으로 대립시킨 이유를, 그것이 자본주 의적 노동에 대한 항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노동의 수단과 생산물에서 소외되었 을 뿐만 아니라, 생산물이 적대적인 힘으로 노동자에게 대립하는 현실의 노동 형태에 대한 항거라는 것이다. (죄르지 루카치, 뺷루카치 미학사 연구뺸, 김윤상 역, 이론과실천, 1992, 97면.)

56) 프리드리히 쉴러, 앞의 책, 6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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