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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회화에 있어 문인화론의 역할과 의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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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

한 방 임

*

1)

Ⅰ. 들어가는 말

Ⅱ. 북송회화와 관련한 문인화의 성립배경 1. 북송회화와 화론적 전개

2. 북송 문인화론의 성립 - 곽약허의 ‘기운비사론(氣韻非師論)’의 성격

Ⅲ. 북송시대 문인화론에 나타난 회화적 이상 1. 소식의 ‘상리론(常理論)’

2. 문인화론의 역할과 그 의미

Ⅳ. 맺음말

Ⅰ. 들어가는 말

북송시대의 회화는 중국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미술 이 고유한 성격을 갖게 되는 한대나, 위진과 당, 오대와는 다른 회화양식이 형성 되는 획기적인 시기이다. 특히 문인화론이 처음 등장하여 명대 말기 동기창에 의 해 본격적으로 발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북송시대에 형성된 중국의 문인화론 은 이후 남송과 원대를 거쳐 명말 청초에 까지 중국회화의 주요 화론으로서 자리 매김하였다.

그러나 북송 멸망 이후 남송에서 소식 등을 흠모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가

* 조선대 강사

(2)

결성되었으며, 또한 명 말에 이르러 동기창의 남북종론(南北宗論)이 득세함에 따 라 중국 회화사의 획기적인 성과들이 사장(死藏)되는 폐해를 가져왔다. 20세기 초 에는 서비홍이 주도한 중국화에 대한 개혁운동이 벌이는 중국회화사에 대한 재조 명작업이 일어났다. 이 개혁운동은 북송시대 사실주의 회화에 대해 재평가하는 작업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중국화 개량작업이 중국미술의 사실파와 표현파의 다툼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1)

북송시대 회화에 대한 연구는 문인화 연구에 치우치 는 바람에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나아갔다.

게다가 중국의 문인화나 문인화론의 형성과 관련한 연구 성과들조차도 미술 사적 논란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북송시대의 문인화론은 새로운 유형의 회화 를 전개하는 데 있어 이론적 측면에서 반영되기는 했으나, 회화의 양식적인 측면 에서 규정되지는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

명 말기 살았던 동기창은 당 왕유를 이상화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그가 당의 회화는 말할 것도 없이 왕유 화 법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3)

북송 회화사에 대한 심층적이고 전반적 연구를 바탕으로 문인화에 대한 다 양한 시각적 접근이 요구된다. 북송시대는 중국회회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 는 시기이다. 북송 중기이후 회화경향의 급변에 따른 북송회화의 주요 흐름 속에 서 수묵산수화와 문인화의 변화추이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4)

본고에서는 중국회화사 전반에 걸쳐 문인화론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특 히 북송시대 수묵산수화의 발전에 따른 문인화의 성립배경을 북송 중기 이후에 등장한 화론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북송 수묵산수화의 등장에 따른 형호의 산

1) 20세기 초 서비홍이 주도한 중국화 개혁운동이라는 중국회화사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일어 났는데, 이 중국화개량작업은 곧 북송 회화에 대한 재조명작업이었던 것이다. 중국회화사 연구에 있어 다양한 시각적 접근을 저해하고 있는 데에 따른 반성이었다.

2) 수잔 부시, 김기주 역, 중국의 문인화, 학연문화사, 2008, p. 18.

3) 동기창은 당시 왕유에 의해 그려진 그림들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동기창의 글들은 왕유 에 대해 모순된 견해를 가진다. 예컨대 미불이 “왕유의 진적은 거의 각화(刻畵)와 흡사하 다”고 표현하였고, 당의 화법이 미불의 시대에 가서 변화가 시작되었고 북송 말기에는 왕 유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Kohara Hironobu, Tung Ch'i-ch'ang's Connoisseurship in T'ang and Sung Painting, The Century of Tung Ch'i-ch'ang 1555-1636, Vol.1, 1992, p. 84.

4) 북송 말기의 회화의 급변에 관한 논문은 김기주의 북송(北宋)말의 심미의식과 화풍의 변 화 , 미술사학보 제17집(2002), pp. 59-91; 소식의 숭고관(崇古觀)과 북송 말 회화의 급 변 , 미술사학보 제19집(2003), pp. 5-42 등이 있다.

(3)

수화론과 오대의 일격화풍과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북송 문인화론의 성립 근거라 할 수 있는 곽약허의 ‘기운비사론(氣韻非師論)’의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문인화론의 회화적 이상에 관해서는 북송시대 회화의 개념에 관한 문 제에 접근하여, 북송 회화에 있어서 문인화론의 역할과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소식의 상리론(常理論)이 송대 이학사상과의 관계와, 이성을 중심으로 북 송시대 수묵산수화의 세계와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Ⅱ. 북송회화와 관련한 문인화의 성립배경

1. 북송회화와 화론적 전개

북송 회화와 관련한 화론의 본격적인 전개는 중기 이후 유도순의 오대명화 보유(五代名畵補遺), 황휴복의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 등 오대 회화를 다룬 화론서들의 등장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송 초 문학가 구양수는 ‘오대 열풍’이라는 문학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유행풍조에 맞서 오대의 문학풍조에 반발하여 고문운 동을 펼친 바 있는데, 그의 문학개혁운동은 북송시대 회화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5)

유도순의 오대명화보유(五代名畵補遺)에 처음 등장한 산수화가는 형호(荊 浩)이다. 그는 하남에 살고 있었지만 오대 말 변고가 많아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태행산의 홍곡에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의 화론서인 필법기(筆法記)는 비록 진 위문제가 남아있기는 하나, 그 후 한졸의 산수순전집(山水純全集)에 그의 주요 화론이 자주 인용됨으로써 북송 말기에도 유행한 산수화론서이다.

6)

형호가 활동한 시기는 중국 수묵산수화의 시점에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많

5) 구양수는 북송 중기의 오대열풍을 비난하였다.; “宋興且百年,而文章體裁,猶仍五季餘習,鎪刻 騈偶,淟涊弗振,士因陋守舊,論卑氣弱.” 宋史 권 39, 구양수 .

그가 벌인 고문운동은 당시 산수화 풍조와 밀착되어 있다.; 徐復觀, 권덕주 역, 中國藝術 精神, 동문선, 1990, p. 402.

6) 북송 말기에 편찬된 한졸의 산수순전집은 주로 산수화의 주요 경물과 창작이론을 서술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형호의 筆法記와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論山 편과 論林木 편은 형호의 기록과 대부분 중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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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실제 그의 활동 시기는 화론서마다 그 시점이 다르다. 그는 오대명화보유와

 선화화보(宣和畵譜)에서 오대 화가로 분류되어있지만, 곽약허의 도화견문지(圖 畵見聞誌)는 당 말기에 활동했던 화가에 속해 있다. 당 말기는 인물화가 주로 그 려졌던 시기로 형호가 주로 <송석도(松石圖)>를 그렸던 점에서 볼 때, 그의 화론 이 북송시대의 산수개념과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7)

하지만 형호의 화론이 북송 중기 이후에도 줄곧 유행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북송 중기 이후 오대열풍이 일어나 형호에 대해 재평가하는 작업들은 북송시대 수묵산수화풍이 대세를 이루는 당시의 회화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형호가 처음 용묵법을 사용한 수묵산수화를 그린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 필법기에서 장조를 지목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수류부채’는 옛날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수훈묵장’같은 것은 우리 당대(唐代)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장조의 수석 그림에서는) 기와 운이 모 두 왕성하고, 필과 묵이 미묘하게 포개지고, 진(경)과 사가 뛰어났으며, 모 든 채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있 지 않았다.8)

형호의 동시대의 당 시기에 장조로부터 ‘수훈묵장’이 시작되었다. 장조는 당 말기부터 중원지역에서 일어난 환난을 피해 남쪽지방인 촉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장조는 ‘기와 운’, ‘필과 묵’ 등 ‘육요(六要)’ 를 모두 갖춰 그림으로써 그의 수묵화 는 기운과 필묵을 겸비한 수석 그림이다.

그는 원래 장안 근처에 있는 평원리(平原里)에 살고 있었는데, 당 말기에 주 체의 난이 일어나자 촉 지역으로 피난을 가는 바람에 그의 그림이 그 곳에 남겨 졌는데, 촉의 시인이었던 부재(符載)가 장조의 <송석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 술한 바 있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기를 부추기니 신묘한 영감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마치 한 줄기 번개가 하늘에서 내려치고 질풍이 하

7) 偉賓, 唐朝畵論考釋, 天津人民美術出版社, 2007, pp. 234-294.

8) “夫隨類賦彩, 自古有能, 如水暈墨章, 興我唐代. 故張璪員外樹石, 氣韻俱盛, 筆墨積微, 眞思卓 越, 不貴五彩, 曠古絶今, 未之有也.”; 荊浩, 筆法記,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1997,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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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로 휩쓸고 올라가는 것 같았다. (붓을) 꺾고 문지르고 돌리고 재빨리 휘 둘러서 붓이 날리고 먹이 뿜어지며, 박수치는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흩어지고 모이다가 황홀하게도 홀연히 괴상한 형체를 만들어 내었다.9)

그가 <송석도>를 그릴 때, 먼저 붓을 꺾거나 문지르거나 붓을 휘두르면서 먹을 흠뻑 뿌리는 등 용필법과 용묵법을 사용하여 그렸다. 장조가 용묵법을 사용 함으로써 당의 필법위주의 화풍을 변화시킨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형호 가 태행산에 은거하는 한 노인으로부터 촉 지방의 장조의 수묵화법을 전해 들었 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장조가 피신해 살았던 촉 지역의 화가들은 황휴복의 익주명화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황휴복의 익주명화록에서 일격화가 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일격화가로 분류된 손위(孫位)의 경우, 당 광명(廣明)연간 에 희종황제를 따라 촉 땅에 들어가 촉 지방에서 대조(待詔)를 지낸 인물로, 용 수․송석․묵죽에 뛰어나 여러 사찰에 많은 벽화를 남겼다.

10)

황휴복은 그의 화 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송석과 묵죽에서 필법이 정교하고 묵법이 오묘하였으며, 웅장한 기세의 씩 씩함이 기술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천부적으로 재능을 구사하고 품격이 뛰어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11)

손위는 역시 송석과 묵죽그림의 필법과 묵법에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필법이 정교하고 묵법이 오묘하며 웅장한 필세로 씩씩하게 표현하였다. 곽약허의 경우에도 그가 필력이 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하였다.

12)

이들은 송석과 묵죽 그림에서 강한 필력과 필세로 그림을 그리는 특징을 보인다. 그의 그림은 이후

9) “箕坐鼓氣, 神機始發, 其駭人也, 若流電檄空, 驚飄戾天, 摧挫幹挈, 撝藿瞥列, 毫飛墨噴, 捽掌 如裂, 籬合惝恍, 忽生怪狀.”; 符載, 觀張員外畵松圖 , 湖南美術出版社, 1997, p. 70.

10) “孫位者, 東越人也, 僖宗皇帝車駕在蜀, 自京入蜀, 号會稽山人.”; 黃休復, 益州名畵錄, 逸 格一人 ,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1999, p. 122.

11) “松石墨竹, 筆精墨妙, 雄壯氣壯, 莫可記述 (…) 非天縱其能, 情高格逸, 其孰能与于此邪.”; 黃 休復, 逸格一人 , 앞의 책, p. 122.

12) “善畵人物,龍水,松石,墨竹,兼長天王鬼神, 筆力狂怪, 不以傅彩爲功, 長安,蜀川皆有畵壁, 實奇迹 也.”; 郭若虛, 圖畵見聞志, 孫遇 ,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2000, p. 56.

(6)

북송 초기의 화풍을 주도한 황전에 의해 계승되었다.

13)

북송 초기의 회화는 손위, 황전과 같은 촉 화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용묵법으로 그려진 송석과 묵죽그림이 남아있었다. 이는 당 말에서 오대를 걸쳐 살았던 형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형호의 화법에 관해서는 북송 말기의 선화화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날에는 왕흡이 그린 그림의 경우, 먼저 비단바탕 위에 묵을 뿌리고 그런 연후에 높고 낮고 오르고 내리는 자연적인 형세를 취해 그린 것이다. 지금 형호는 이 두 화가(오도자와 항용)의 사이에 놓여 있는데, 사람들은 자연스 런 방법으로 두 화가의 화법을 얻었다고 여겼다.14)

당 왕흡은 발묵(潑墨)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화가이다. 왕흡의 발묵법은, ‘먼 저 비단바탕 위에 묵을 뿌리고 난 후에 자연의 형세를 취하는’ 용묵법에 용필법 을 가미한 화법이었다. 그래서 순식간에 완성하고 나면 (짙게 뿌린) 먹의 흔적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발묵법은 당 왕유의 ‘파묵법(破墨法)’ 즉 필선에 서 분해되는 선을 이용한 용묵법과는 달랐다. 동시대를 살았던 장언원은 이 왕흡 (왕묵)과 같은 발묵화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15)

 선화화보에서는 또한 왕흡의 제자인 항용에 대해 당시에 ‘필법이 마르고 단단하여 따뜻함과 윤기가 적었다’고 비난하는 한편, 오히려 ‘빼어나게 산이 깎아 지른 듯 가파른 모습이 매우 뛰어났다’라고 좋게 평가받았다.

16)

이로 미뤄 항용과 왕흡의 두 화가는 발묵화가이면서도 용필법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형호는 필법기의 ‘용필사세(用筆四勢)’편에서 필과 먹의 상관관계에 의해 그려진 산수화를 설명하였다.

13) “(黃筌)又學孫位畵龍水松石墨竹.”; 黃休復, 妙格中品十人 , 앞의 책, p. 150.

14) “故王洽之所畫者,先潑墨于縑素之上,然后取其高低上下自然之勢而爲之.今浩介二者之間,則 人以爲天成,兩得之矣.”; 宣和畵譜 권 10, 山水 1 荊浩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1999, p.

222.

15) “落筆有奇趣. … 然余不甚覺黙畵有奇.”; 張彦遠, 歷代名畵記, 王墨 , 北京: 湖南美術出版 社, 1999, p. 248.

16) “善畫山水,師事王黙,作<松峰泉石圖>,筆法枯硬,而少溫潤,故昔之評畫者,譏其頑澀,然挺 巉特絶,亦自是一家.”; 宣和畵譜 권 10, 산수 1 항용 , p. 218.

(7)

필법에는 네 가지 세가 있으니, 근․육․골․기 라고 말한다. 필법이 끊어 져 단절되는 것을 근이라 하고, 기복을 이뤄 채워진 것을 육이라 하며, 생 사가 강정한 것을 골이라 하며, 그려진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기라 하 였다. 그러므로 먹(색)이 형질보다 크다면 그림의 본체를 잃게 되고 먹색이 미약하면 바른 기운을 잃으며 근이 죽으면 육이 없고 필적이 단절되면 근 이 없고, 구차히 예쁘면 골이 없음을 알 수 있다.17)

이 ‘용필사세’편에 의하면, 산수화의 네 가지 형세 중 ‘기’가 등장한다. 여기 서 ‘기’는 (그림을 그리고 난 후) ‘그려진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迹畵不敗謂之氣]’

즉 기는 형태를 죽지 않게 하는 것, 형체를 쓰러지지 않게 하는 것 등의 의미이 다. 이는 용필과 용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북송 산수화에서 단독으로 ‘기’를 말할 때는 ‘기세’라는 단어로 기운의 ‘기’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18)

형호의 필묵론이 북송 산수화에 나타난 필세 위주로 화풍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형호의 필세론은 북송 말기에 한졸에 의해 계승되었다.

무릇 그림이라는 것은 필이다. (…) 그러므로 필은 그 (산수의) 형질을 세우 고, 묵은 그 (산수의) 음영을 구분한다. 산수는 모두 필묵으로부터 완성되었 다.19)

그는 필묵개념으로 산수 그림을 정의하였다. 한졸은 산수가 모두 필묵으로 되어있으며, 필은 형질이고 묵은 그 음영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따라서 북송 산수 화의 시원은 형호의 필묵론에서 유래하였으며, 북송시대 말기에 한졸이 산수화론 을 계승하였다.

20)

17) “凡筆有四勢, 謂筋肉骨氣, 筆絶而斷謂之筋, 起伏成實謂之肉, 生死剛正謂之骨, 迹畵不敗謂之 氣. 故知墨大質者失其体, 色微者敗正氣, 筋死者无肉, 迹斷者无筋, 苟媚者无骨.”; 荊浩, 앞의 책, p. 254.

18) 徐復觀, 앞의 책, p. 212 .

19) “夫畵者筆也. … 故筆以立其形質, 墨以分其陰陽, 山水悉從筆墨而成.”; 韓拙, 論用筆墨格法 氣韻之病 , 앞의 책, p. 88.

20) 형호 화론이 주로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일부 견해를 수용한 것이다.

(8)

2. 북송 문인화론의 성립 - 곽약허의 ‘기운비사론(氣韻非師論)’의 성격

당말 오대의 수묵화 등장은 또한 북송시대 중기 이후의 문인화론 성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곽약허가 쓴 도화견문지는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 名畵記)를 뒤이어 당 회창 원년부터 오대를 거쳐 북송 희녕연간까지 활동한 화 가들을 기록하였다. 곽약허는 오대 형호의 화산수결(畵山水訣), 오대 후촉 신현 (辛顯)의 익주화록(益州畵錄)과 황휴복의 총화집(總畵集)등 오대에 관한 여러 화론서를 검토하여 서술하였다.

21)

이 화론서들은 형호의 산수화론이나 촉 지역의 일격화풍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곽약허는 오대의 수묵 화풍에 대해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곽약허는 촉 지역의 화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대체로 강남의 예술은 골기에서 대부분 촉인에 미치지 못하지만 소쇄함에 서는 (촉인을) 뛰어넘는다.22)

그가 당시의 촉 화풍을 강남화풍과 비교하면서 촉 지역의 화풍이 ‘골기(骨 氣)’가 뛰어났다고 평가하였다. 이와 반면에, 강남지역에는 먹이 짙은 수묵산수화 가 유행하였으며, 화조화의 경우에도 당시 황전과 쌍벽을 이루는 서희의 경우 “묵 필로 그렸는데, 매우 쓸쓸한 느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3)

여기서 곽약허가 언급한 촉화풍의 ‘골기’의 개념에 대해서 도화견문지의 기운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논함[論氣韻非師] 편에 등장하는 그의 기운론과 비교해 보았다.

육법의 정론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이론이다. 그러나 골법용필 이하 다섯 가지는 배울 수 있지만, 기운과 같은 것은 반드시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다.

진실로 (형사의) 기교의 정밀함으로써 얻을 수 없고, 또한 세월에 따라 얻 21) 형호의 화산수결은 필법기에 해당하며, 황휴복의 총화집은 이전의 신현의 익주화

록과 중복을 피해 총화집으로 제목을 바꿨다.; 조송식, 도화견문지에 나타난 곽약허 의 회화사상 , 미학 제49집(2007), p. 6.

22) “大抵江南之藝, 骨氣多不及蜀人而瀟洒過之也.”; 郭若虛, 論黃徐体異 , 앞의 책, p. 46.

23) “徐熙以墨筆畵之, 殆草草, 略施丹粉而已.”; 沈括, 夢溪筆談,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2000, p. 236.

(9)

어 질 수도 없다. 묵묵히 (마음에) 일치하고 정신으로 이해하여 그런 줄 모 르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24)

곽약허는 ‘골기’가 아닌 ‘기운’ 개념을 사용하여 ‘골기’와 ‘기운’의 개념을 엄 격히 구별하였다. ‘골기’ 개념은 원래 당 장언원의 기운론에서 유래하였다. 당 장 언원은 항상 ‘기’와 ‘골’의 두 개념을 붙여 사용하였는데, “골기와 형사는 모두 뜻 을 두는 데서 시작하여 용필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25)

그의 기운론은 인물화를 대상으로 ‘골기’ 개념과 ‘용필’ 개념을 상관시켜 사용하였는데, 인물을 묘사함에 있 어서 화가의 주체적 의의의 형성과 용필로 표현하는 데에 있었다.

26)

곽약허가 언 급한 촉 지역의 화풍의 ‘골기’는 장언원의 기운과 약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당 말기의 ‘골기’ 개념은 황휴복에 와서 ‘기운’으로 대체되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모름지기 여러 화론가를 만나면, 예나 지금이나 모두 육법에 관해 언급하는데 육법 안에서 형사와 기운 두 가지가 가장 최우선 이다. 기운이 있고 형사가 없으면 질박함이 화려함보다 성하게 되고, 형사 가 있고 기운이 없으면 즉 화려하나 실질이 없게 된다. 황전의 작품이 두루 겸비했다고 말할 수 있다.27)

황휴복은 ‘형사’와 ‘기운’을 모두 중시하여 “기운이 있고 형사가 없으면 질박 함이 화려함보다 성하게 되고, 형사가 있고 기운이 없으면 즉 화려하나 실질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기운’의 개념은 의미상 ‘형사’개념의 상대어로 등장 하지만, 황휴복의 경우, 화육법의 범주 속에서 ‘기운’과 ‘형사’ 두 가지가 모두 갖 춰져 있는 상태를 강조하였다.

28)

24) “六法精論, 萬古不移. 然而骨法用筆以下五者可學, 如其氣韻, 必在生知, 固不可以巧密得, 復 不可以歲月到, 默契神會, 不知然而然也.”; 郭若虛, 論氣韻非師 , 앞의 책, p. 31.

25) “骨氣形似, 皆本於立意而歸於用筆, 故工畵者多善畵.”; 張彦遠, 論畵六法 , 앞의 책, p. 158.

26) 조송식, 역대명화기 상, 시공아트, 2008, p. 90.

27) “公私雖見于數家, 今古皆言于六法. 六法之內, 惟形似氣韻二者爲善, 有氣韻而無形似則質勝于 文,有形似而無氣韻則華而不實,筌之所作,可謂兼之.”; 黃休復, 妙格上品六人 , 앞의 책, pp.

151-152.

28) “(陳皓, 彭堅) 畵之六法, 一曰氣韻生動是也, 二曰骨法用筆是也, 三曰應物象形是也, 四曰隨類 賦采是也, 五曰經營位置是也, 六曰傳移模寫是也. 斯之六法, 名輩少該.”; 黃休復, 妙格上品六 人 , 앞의 책, p. 128.

(10)

이와 달리, 곽약허는 화육법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기운’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다. 곽약허 기운론의 핵심은 “골법용필 이하 다섯 가지는 배울 수 있 지만, 기운과 같은 것은 반드시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다.” ‘기운’이 ‘태어나면서 아 는 것 [生知]’이며, ‘형사’보다 상위개념이자 ‘형사’ 상대적 개념이다. 이러한 점은 장언원의 “그림에서 기운을 얻으면 그 안에 형사가 있다.”는 견해와 일치한다.

29)

따라서 곽약허의 기운론은 장언원의 용필론을 계승하였다.

그의 기운론은 화가의 창작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그가 화가의 ‘기운과 같은 것은 반드시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다’고 주장한 것은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를 구 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곽약허는 북송 화가를 분류함에 있어 세 부류로 분류하였 다. 하나는 ‘왕공사대부로,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님이 지극한 자(王公士大夫, 依 仁遊藝, 臻乎極至者)’로 정의하였으며, 두 번째는 ‘(그림 그리는) 일을 고상하게 여 기며 그림을 스스로 즐기는 사람(高尙其事, 以畵自娛)’,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業於繪事)’으로 세분하였다. 그의 분류가운데 문 인화가가 화가분류 속에 포함되었던 것은 장언원이 “옛날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관리나 귀족, 은일지사나 고상한 사람이 아닌 자가 없다”

30)

는 주장을 그 대로 답습하였다.

북송 말기에 한졸은 화가에게 있어 기운이 ‘생지(生知)’에 있지 않고 배움을 힘쓰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화가라면 누구나 예술적 실천이 있으면 최고의 경 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한졸의 주장은 곽약허의 기운론이 (화가의) 도덕 적 인격의 ‘생지(生知)’에 중점을 둔 것과 다르다.

“하늘이 나(자신)에게 부여한 것이 성품인데, 성품이 인간에 있어 귀중한 바는 배움이다. 성품은 몽매함과 명민함의 차이가 있으며, 배움은 나날이 나아감과 무궁함의 공부가 있다. 그러므로 그 성품의 깨달은 바에 따라 그 가 배움을 자질로 삼아 추구한다면, 일에서 스스로(자신)에게 정진하지 않 음이 없다.”31)

29) “以氣韻求其畵, 則 形似在其間也”; 張彦遠, 論畵六法 , 앞의 책, p. 158.

30) “自古善畵者, 莫非衣冠貴冑, 逸士高人.”; 張彦遠, 歷代名畵記, 論畵六法 , 北京: 湖南美術 出版社, 1997, p. 159.

31) “天之所賦予我者性也, 性之所貴于人者學也. 性有顓蒙明敏之異, 學有日益無窮之功, 故能因其 性之所悟, 求其學之所資. 未有業不精于己者也.”; 韓拙, 論古今學者 , 앞의 책, p. 99.

(11)

한졸의 필묵론은 후천학습의 중요성에 근거하였다. 그는 “기운을 그 그림에 서 구하면, 형사는 자연히 그 사이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무릇 용필은 먼저 기운을 구하고 다음으로 본체의 긴요함을 캐낸 연후에 (용필의) 구상이 정밀해진다. 만약 (그림의) 형태와 기세가 모두 잡히지 않 았는데도 바로 교묘히 구상한다면 반드시 (그림의) 기운을 잃게 된다. 대개 기운을 그 그림에서 구하면 형사는 자연히 그 사이에서 얻어지는 것이었 다.32)

그는 그림이 먼저 형세가 잘 갖춰진 상태여야만 기운이 생겨난다고 생각했 다. 기운도 형세가 잘 갖춰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운은 먼저 형세(필세)가 잘 갖춰진 상태에서 나왔다. ‘기운’의 표현과 ‘형사’의 달성이 화가의 예술적 구상에 근본을 두는 용필로 귀착되는 것이었다. 한졸은 형세(필세)가 기운을 가진 화가만 이것을 갖출 수 있었다고 여겼다. 한졸은 필묵법을 중시하고 기운의 병폐를 경계 하였다.

33)

이러한 측면에서, 장언원의 형사가 기운의 하위개념으로서 그림의 필법 보다 화가의 입의(立意)를 보다 중시한 용필론에서 보다 진보한 필묵론이라 할 수 있다.

Ⅲ. 북송시대 문인화론에 나타난 회화적 이상

1. 소식의 ‘상리론(常理論)’

북송 말기에 이르러 , 미불(米芾, 1051-1107)의 ‘묵희’ 위주의 미점산수(米點 山水)을 중심으로 한 이상주의 회화가 등장하였다.

34)

이러한 미불의 이상주의 회

32) “凡用筆, 先求氣韻, 次采體要, 然後精思. 若形勢未備, 便用巧密精思, 必失其氣韻也. 大槪以氣 韻求其畵, 則形似自得于其間矣.”; 韓拙, 論用筆墨格法氣韻之病 , 앞의 책, p. 88.

33) “傳其筆墨之法, 講其氣韻之病.”; 韓拙, 后序 , 앞의 책, p. 106.

34) 김기주는 북송 말 소식과 같은 문인들이 휘종 화원의 일단의 변화를 수렴함으로써 관찰을 근거로 한 사실주의의 정세치밀한 화풍의 퇴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였다.; 김기주, 북송 (北宋)말의 심미의식과 화풍의 변화 , 미술사학보 제17집(2002), p. 70.

(12)

화는 형호의 영향을 받은 북송 산수화의 사실주의 회화의 세계와 대비를 이룬다.

곽약허의 문인화 개념이 등장한 후 그림에 있어 형사(形似)와 신사(神似)의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양자관계의 새로운 변화는 소식의 ‘상리론(常理論)’에 의해 전개되었다.

내가 일찍이 그림을 논하면서 人物과 축수, 궁실, 가옥 등은 모두 일정한 형태가 있는데, 山水와 竹木, 水波, 煙雲 등은 모름지기 일정한 형태(常形) 는 없으나 일정한 법칙(常理)은 있다고 생각하였다. (…) 비록 일정한 형태 를 잃는 것은 실수에 그치는 것이지 그(常理)의 온전함을 해칠 수는 없다.

만약 常理에 맞지 않으면 모두 폐기하면 된다.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는 것 은 그 이치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畵工들은 혹자는 그 형태를 곡 진할 수 있어도 常理에 지극하기란 인품이 높은 은일지사가 아니면 (그 常 理를) 판단할 수 없다. 문동은 竹石과 枯木에서 진실로 그 이치를 얻은 자 라고 말할 수 있다.35)

소식은 회화의 묘사하는 대상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 대상 은 ‘일정한 형태[常形]’를 가진 것과 ‘형태가 없는[無形]’ 것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소식은 산수․묵죽․물․연운 등 상형이 없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것들은 다른 사물과 접촉하여도 서로 해치지 않는 이치를 가졌다. 예컨대 물(水)은 일정한 형 태가 없는 사물이지만 ‘일정한 법칙(常理)’이 존재하였다. “‘물은 지극히 부드러우 면서도 사물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니, 힘써 다투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 는”

36)

이치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무상형’의 사물은 형사가 없어도 진실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상리론은 ‘무상형’의 귀신, 연무 등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상형’의 대상에 초점이 맞춰있다. 소식은 ‘유상형’의 사물은 마땅히 이형사신(以形寫神)해 야 한다고 강조한다, 형만 있고 신이 없을 수는 없으며 또한 형을 변형하여 신을 그릴 수는 없다. ‘무상형유상리’의 사물에 관해서는 마땅히 ‘무상형’으로서 ’상리‘를

35) “余嘗論畵, 以爲人禽宮室 器用皆有常形, 至于山石竹木水波煙雲雖無常形, 而有常理. (…) 常 形之失, 雖然常形之失止于所失, 而不能病其全. 若常理之不當, 則擧廢之矣. 其形之無常, 是以 其理不可不謹也. 世之工人, 或能曲盡其形, 而至于常理, 非高人逸才不能辨, 與可之于竹石枯 木, 眞可謂得其理者矣.”; 顔中其, 凈因院畵記 , 앞의 책, p. 198.

36) “故水之所以至柔而能勝物者, 維不以力爭而以心通也.”; 蘇氏易傳 권 3.

(13)

그려야 하며, ‘유상형’으로써 ‘상리’를 그릴 수는 없고 ‘무상형’이면 ‘상리’가 없을 수는 없다.

이러한 소식의 ‘상리(常理)’론이 북송 이학체계의 ‘리(理)’와는 관련이 적을 뿐만 아니라 위진 현학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7)

그는 대상의 본질을 강조 함에 있어 ‘전신(傳神)’의 개념을 도입하고 위진시대 인물화에 나타난 고개지의

‘이형사신(以形寫神)’론을 표방하였다. 소식 등의 문인화론가들이 주창한 것은 ‘음 영성정(吟詠性情)’의 예술사상이다. 여기서 ‘성정(性情)’은 육조현학에서 보편사회 의 사회심태의 함의를 가지지 않고 순수 개체성의 심령을 가리키는 개인의 심태 (心態)를 의미하였다.

38)

소식의 ‘상리론’은 왕유로부터 얻은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

개념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그의 시와 회화창작에서 비흥(比興)의 수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시와 그림은 본래 한 가지 음률로, 천기와 청신한 풍격이 있다. 변란이 꿩 을 사생하고, 조창이 꽃을 전신하였다. 무엇이 이 두 폭 (그림)처럼 소담하 게 정교함을 머금고 있다하겠는가. 누가 한 점 붉은 것이 한 없이 봄빛에 기탁하였다고 말하지 않겠는가.39)

흔히 문학의 수법 가운데 ‘산수비덕(山水比德)’적 요소가 회화로 옮겨왔는데, 당의 예술수법 가운데 하나인 ‘비흥(比興)’는 ‘비’가 (사물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 [比者, 附也]’이며, ‘흥’은 (정감을) 일으킨다[興者, 起也]’는 의미를 가진다. 유협의

 문심조룡에서는 비흥수법으로 ‘경물을 읊는다는 것은 시 가운데서 자연경물을 묘사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시인이 ‘사물을 빌어 정감을 읊는다는 것[借物

37) 안영길, 선화화보에 나타난 미학사상 , 미술사학보 제12집(1999), pp. 73-81; 樊波,  中國書畵美學史綱, 吉林美術出版社, 1998, p. 427.

38) 당에 와서도 육조 현학을 계승하여 개체성의 ‘성정’을 본체로 삼았다. 북송에 이르러, 송학 의 ‘의리지학(義理之學)’과 ‘심성지학(心性之學)’에서는 위진시대의 ‘성정’개념이 ‘의(意)’와

‘리(理)’개념으로 변화되었다. 북송에 이르러 위진 현학의 ‘음유성정’의 개념이 북송 예술사 조의 주류 밖으로 밀려나는 계기가 되었다.; 李春靑, 宋學與宋代文學觀念, 北京師範大學 出版社, 2001, p. 99.

39) “詩畵本一律, 天工與淸新. 邊鸞雀寫生, 趙昌花傳神. 何如此兩幅, 疎淡含精勻. 誰言一點紅, 解 寄無邊春.”; 顔中其, 蘇軾論文藝, 書鄢陵王主簿所畵折枝二首 , 北京出版社, 1985, p. 234.

(14)

吟情]’은 바로 화가가 ‘사물에 대해 의인화[以物喩人]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소 식은 당의 ‘비흥수법’를 통해 시서화의 결합상태로써 회화세계를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소식은 문동의 그림을 좋아하여 주로 묵죽, 고목을 많이 그렸다. 소 식의 <고목괴석도>를 보면, 가지가 구불구불 뻗어있는 대나무, 괴기스러운 바위 등을 분방한 필치로 그렸다.

죽목을 그린 것이 매우 정묘하다. 소식이 그린 고목은 가지가 용이 기어가 듯하며 시작하는 곳이 없다. 바위의 준법은 괴기스러우며 단정함이 없다.

마치 그가 흉중에 서려있는 것이 많은 것 같다.40)

그는 유창하고 소쇄한 ‘필묵’으로 고목과 죽석의 우아한 형상을 그려냈다.

이 그림은 고목과 죽석의 자연속성을 초월한 상외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고목․죽석과 같은 산수자연은 형상과는 다른 것 즉 상외의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문동이 대나무를 그릴 때 (그가) 보았다는 대나무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어찌 유독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는) 망연히 그 자 신을 버리면서 그 자신이 물화하였으니, 무궁무진하고 청신한 풍격을 낳았 다. 장자가 세상에 있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이 그림이 입신할 줄 알았겠는 가.41)

문동의 묵죽화는 대나무의 그 자연원칙을 통해 화가 자신이 조물자가 되려 는 의기(意氣)를 표현한 것으로, ‘그림으로 뜻을 즐겁게 할 뿐이다[畵以適吾意而 已]’하는 인간의 주체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42)

반면에 노장사상은 소식이 장자가 ‘무위’ ‘不作(인위가 아님)’의 ‘자연’을 근본으로 하는, 五色․五聲․

五味가 ‘삶을 해치거나’ ‘본성을 잃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듯이, 인간의 주체성

40) “作成林竹甚精. (…) 子瞻作枯木, 枝干虯屈无端. 石皴硬亦怪怪奇奇无端, 如其胸中盤郁也.”;

米芾, 唐畵 , 앞의 책, p. 160.

41) “与可畵竹時, 見竹不見人. 豈獨不見人, 嗒然遺其身, 其身与物化, 无窮出淸新, 莊周世无有, 誰 知此疑神.”; 顔中其, 書晁補之所藏与可畵竹三首 , 앞의 책, p. 230.

42) 蘇軾, 東坡評畵, 書朱象先畵后 ,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1999, p. 227.

(15)

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자연에 순응하였던 측면이 있다.

43)

2. 문인화론의 역할과 그 의미

북송 초기에는 오대 형호의 산수화론이 북송시대 전반적으로 산수화에 영향 을 주었으며, 이 형호의 화법을 계승한 산수화가 이성(李成, 919~967)과 범관(范 寬, 약 1023~1031 활동) 등이 각각 화파를 형성하였다. 북송시대 회화의 발전은 오대 형호의 수묵산수화법을 계승한 이성화파과 범관화파 산수화가들에 의해 전 개되었으며, 그 중 산수화가 이성을 주축으로 하였던 이성화파가 대세를 이루었 다.

44)

당말 오대의 산수화가인 형호는 육조시기의 인물화의 기운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회화 개념을 정의하였다. 그가 태행산 홍곡에 사는 한 노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그림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기획을 뜻하는 것이다. 물상을 헤아려서 그의 진(眞) 을 취하는 것이다. 물상의 화려함에서는 그 화려함만을 취하고, 물상의 내 실(內實)에서는 그 실만을 취하는 것이므로 화려함을 가지고 그 실이 취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참으로 그 외적인 형태를 근사 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리는 (대상의) 진에 도달할 수 없다. … 사(似)란 그 형을 얻었으나 그 기는 잃는 것이요, 진(眞)이란 기와 질이 모두 성한 것이 다.45)

그림은 그리는 대상의 ‘본질(眞)’을 얻는 데 있다. 그림에서 진정 대상 표현 의 화려함보다는 대상의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는 ‘육요(六要)’를 주장하여 ‘기(氣)’와 ‘질(質)’을 갖춘 ‘진경(眞景)’ 산수화 개념을 처음으로 주창하였 다.

46)

그 후 북송의 이성은 형호의 산수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산수형태를 발전시

43) 鄭喬彬, 앞의 책, p. 63.

44) 북송 중기 이후 형호 계승자로서의 이성과 범관의 화법적 논쟁-미불의 화사와 선화화 보간에 전개되었다.; 졸고, 선화화보(宣和畵譜)에 나타난 북송 회화의 경향과 예술사상

, 미학․예술학연구 제25집(2007), 한국미학예술학회, pp. 237-245.

45) “畵者畵也. 度物象而取其眞, 物之華, 取其華, 物之實, 取其實, 不可執華爲實, 若不知術, 苟似 可也, 圖眞不可及也. … 似者得其形遺其氣, 眞者氣質俱盛.”; 荊浩, 앞의 책, p. 251.

46) 그가 말하는 산수의 ‘진경(眞景)’은 육요 가운데 ‘사’와 ‘경과 일치하였다. ‘思’는 구도와 관

(16)

켰다. 이성의 산수화는 사물 대상 그 자체를 중시하고, 사물대상에 대한 표현에 집중하였다.

북송의 산수화의 대가 이성은 산동지방에서 태어나 그가 사는 곳의 산과 골 짜기, 높은 봉우리를 사랑했다. 어느 날 자기 앞에 펼쳐진 많은 산들을 보았는데, 그 산들은 겹겹이 하나 위에 다른 하나가 쌓여 나타났다. 이성에게는 화가의 내 부에서 천성처럼 분출하는 ‘천기(天機)’가 있었다.

바야흐로 그때 화가가 홀연히 자신의 사지와 형체를 잊고 자신의 ‘천기로 보이는 것은 모두 산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도를 성취할 수 있었다.47)

그의 ‘천기’는 ‘우리 (화가의) 내부에서 천성처럼 분출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48)

그는 아지랑이가 개이면서 산에 가득 낀 안개가 빛나고 하나하나가 위에서 아래까지 그것들이 어울렸다. 그는 “좋아하는 것을 마음에 쌓아두고 오래 되어 (좋아하는 것에) 동화하였던(積好在心, 久而化之)”화가였다. 마음을 놓지 않 고 그것에 생각을 집중하여 기이하고 특이한 것이 선명하게 가슴에 서렸던 것이 다.

이성은 그의 평원산수화에서 안개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자신과 세계와의 격리 가운데 주체적 인식에 도달하고, 자연과의 일체를 통해 우주적 법칙을 직관 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성이 붓을 들면 오직 뜻이 미치는 바, 자연의 법을 따르며, 스스로 경물 을 창조하니 모두가 그 오묘함과 합치하였다.49)

이성은 우주만물의 이치를 가진 존재인 자연의 법칙(=道)을 인식하고자 했 다. 즉 산과 물, 바다와 땅에서의 조화의 신수(神秀)와 음양의 명회(明晦) 등 자연

련이 있는 ‘氣’에 해당하며, ‘景’은 풍속제도와 사계(四季)의 이치를 따르는 ‘質’에 해당한다.

“思者, 刪撥大要, 凝想形物. 景者, 制度時因, 搜妙創眞.”; 荊浩, 筆法記, 北京: 湖南美術出 版社, 1997, pp. 252-253.

47) “方其忽乎忘四肢形體, 擧天機而見者皆山也. 故能盡其道.”; 董逌, 廣川畵跋, 書李成畵後 ,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1999, p. 286.

48) 수잔 부시, 김기주 역, 중국의 문인화, 학연문화사, 2008, p. 100.

49) “李成命筆唯意所到, 宗師造化, 自創景物, 皆合其妙.”; 劉道醇, 山水林木門 , 앞의 책, p. 55.

(17)

의 이치를 인식하고자 하였다. 이 천기는 그의 자연관과 연관돼 있다. 자연이 반 응하여 음양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의 산수에서는 “안개와 노을, 산에 낀 안개 사이에서 자연의 내적 작용으로 양이 열리고 음이 닫히는 것이 신속하게 일어나 놀라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50)

그의 창작과정은 화가가 자연과의 조화 내지 합일하는 상태이다. 예컨대 당 의 발묵화가인 왕흡이 술을 마시고 나서 역동적인 동작을 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

‘자연이 저절로 이뤄지고 순식간에 창조되었던’ 창작태도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51)

이는 범관의 산수화 개념은 소식과 미불 등 문인화가들도 전신론에 입각한 산수화의 경계와 다르다. 당시 사람들은 범관이 ‘산과 전신하였다’고 말하 였으며,

52)

그는 화가는 모름지기 그림의 대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정신)’을 그려야 한다고 보았다.

휘종시기의 선화화보에서는 이성에 대해 당 오도자와 동일하게 포정과 윤 편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예로써 도에 나아갔다’고 평가하였다.

53)

또한 북송 휘종 시기에 활동한 산수화론가 동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 가지 예술로 나아가 지극해져 도에 합치되는 경우에, 이것은 고인들이 말한 기예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이성의 그림을 보면 형상에 사로잡혀 황홀 해서 망각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또한 놀라서 신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우연히 보여서 그런가.54)

또한 그의 그림은 “도무지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붓의 움직임을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속기가 없는 데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다른 화가보다 뛰어난 것은 형체의 眞에 있지 않았으며, 산수, 수석, 연기, 안개 그림에서 그 천

50) “其絶人處不在眞形, 山水木石烟霞巍霧間, 其天機之動, 陽開陰闔, 迅發警絶, 世不得而知也.

故曰氣生于筆, 遺于像. 夫爲畵而至上忘畵者, 是其形之適哉. 非得于妙解者未有此者也.”; 董 逌, 書李成畵後 , 앞의 책, p. 281.

51) “故王洽之所畫者,先潑墨于縑素之上,然后取其高低上下自然之勢而爲之.今浩介二者之間,則 人以爲天成,兩得之矣.”; 宣和畵譜 권 10, 山水 1 형호 , p. 222.

52) “故天下皆稱寬善與山傳神.”; 宣和畵譜 권 11, 山水 2 범관 , p. 236.

53) “道子解衣盤礴,因用其氣以壯畫思,落筆風生,爲天下壯觀.故庖丁解牛,輪扁斫輪,皆以技進 乎道”; 宣和畵譜 권 2, 道釋2 吳道玄 , p. 40.

54) “由一藝以往, 至有合於道者, 此古之所謂進乎技也. 觀咸熙畵者, 持于形相, 忽若忘之, 世人方 且惊疑以爲神矣, 其有寓而見邪?”董逌, 書李成畵後 , 앞의 책,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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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움직임에 양이 열리고 음이 합쳐지니 매우 놀라웠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것 을)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55)

북송 중기이후 형호와 이성을 계승한 ‘眞景’ 산수화의 개념은 곽희의 ‘진산 수’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56)

하지만 한졸은 화가가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산의 실 체를 알지 못한다고 경고하였다. 단순히 시의 제목만을 따서 그림을 그렸던 곽희 와 같은 당시 산수화가들을 비판하였다.

그가 올랐던 산의 이름과 모양이 갖춰져 있으면 그림을 그릴 때 채택하는 것이며, 또한 학식이 넓고 우아한 성품의 군자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것 이다. 만약 물었는데 대답 없으면 무지한 화사로 여기니 알지 않으면 안 된 다. 혹자는 시구 중에 산 이름이 많아 모름지기 이름을 얻었는데 산의 실체 를 알지 못한 것은 (너무 급해서) 손 놓고 (가 볼) 여유가 없이 그림을 그 렸던 것이다.57)

한졸의 산수론에서도 화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산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강조하였다. 곽희의 경우, 시의 화제로부터 화의(畵意)를 얻고는 “밝은 창가에 조 용히 앉아, 향을 피워 만 가지 상념을 없애는” 내적인 수양을 통해 산수자연과 조 화에 도달한 화가라고 보았다.

58)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인간의 기본적 소양’

즉 인간의 심성의 바탕을 기리고 본래의 천성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곽희의 예술세계는 동시대인 소식, 문동의 예술심미관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소식에 있어서도 인간이 공유하는 본성인 ‘성(性)’을 인식론 범주에 두고 성 찰하였다. 인식론의 범주 안에서 보면 ‘성’과 ‘도(道)’는 분명히 상통하는 개념이었 다. 사물로 말하면 ‘도’이고, ‘인간’으로 말하면 ‘성’에 해당한다. 소식 자신이 종국 적인 가치 즉 ‘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도’는 매우 유효하게 인간의 사회생활

55) “于畵妙入三昧, 至于无蹊轍可求, 亦不知下筆處, 故能无蓬壤氣, 其絶人處不在眞形, 山水木石 烟霞巍霧間, 其天機之動, 陽開陰闔. 迅發警絶, 世不得而知也”; 董逌, 廣川畵跋, 書李成畵 後 , 北京: 湖南美術出版社, 1999, pp. 280-281.

56) “眞山水之岩石, 遠望之以取其勢, 近看之以取其質.”; 郭熙, 山水訓 , 앞의 책, p. 13.

57) “以上山之名狀, 当備畵中用也, 兼備博雅君子之問. 若問而无對, 爲无知之士, 不可不知也. 或 詩句中有諸山名, 雖得名卽不知山之體狀者, 惡可措手而制之.”; 韓拙, 論山 , 앞의 책, p. 68.

58) Lichard Edwards, Painting and Poetry in the Late Sung, Words and Images: Chinese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Princeton Univ. Press, 1991, p.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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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곤경과 번뇌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어도, 인간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 하기에 부족하였다.

59)

따라서 문동과 소식의 산수화 세계는 북송 산수화의 세계 와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Ⅳ. 맺음말

본고는 북송회화에 있어 문인화론의 역할과 그 의미를 연구고찰해 보았다.

과거의 문인화 연구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서 탈피하여 중국미술사의 다양한 시각 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북송시대 문인화론이 북송회화와의 관 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에서 출발하였다. 오대 이후의 수묵화 등장과 수묵산수화의 세계를 통해, 북송시기 문인화론의 성립배경과 문인화의 회화이상 을 조망해보았다.

곽약허의 기운비사론은 당 장언원의 서화용필동론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화가의 창작정신에 기반한 기운론을 강조하였다. 이는 오대 형호의 필묵론에 의 한 북송 수묵화의 발전을 도외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문인화론의 한계를 잘 드러냈다. 한졸이 기운론의 병폐를 지적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북송중 기 이후 수묵화 풍조의 만연은 미불에 이르러 일종의 ‘묵희(墨戱)’였으며, 소식의

‘사인화’ 즉 문인화의 핵심개념으로 형성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문인화론은 화가의 기운을 강조하는 수묵화풍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아 북송시 대의 주된 화론경향을 왜곡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소식을 중심으로 한 문인화론의 회화이상은 위진시대의 현학으로부터 유래 한 ‘음영성정(吟詠性情)’에 따른 회화세계를 보인다. 대상의 본질을 강조함에 있어

‘전신’의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의 주체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화가 자신이 화가자신이 조물자가 되려는 의기를 표현했다. 소식 등 문인화가는 북송 이학체 계의 궁극적인 가치인 ‘도’와 무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북송시대 대표적인 산수화가인 이성의 수묵산수화의 세계는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도’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성은 ‘천기(天機)를 가진 화가

59) 소식은 북송 이학가와 달리 선악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았다.

(20)

로, 문인화가들이 주장하는 ‘생지(生知)’론과 구별된다. 이 천기론은 화가가 ‘좋아 하는 것을 마음에 쌓아두고 오래 놓아두면 그것에 동화되는(積好在心, 久而化之)’

것을 의미하였다. 이성은 자신과 세계와의 격리시키는 가운데 주체적 인식에 도 달하고, 자연과의 일체를 통해 우주적 법칙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이성은 당 오 도자와 함께 포정과 윤편의 ‘기예로써 도에 나아간(技進乎道)’ 고사에 적합한 화 가였다. 이처럼 이성의 수묵산수화의 세계는 문인화론의 회화이상과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1)

* 논문투고일: 2011년 9월 8일 / 심사기간: 2011년 11월 8일-12월 10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1 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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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본고는 북송회화에 있어 문인화론의 역할과 그 의미를 연구고찰해 보았다.

과거의 문인화 연구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서 탈피하여 중국미술사의 다양한 시각 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북송은 문인화론이 형성되었으며, 문인화가가 활동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북 송 회화사에 있어 산수화가 문인화가 가장 발달한 것은 당말과 오대이후 수묵화 의 출현에 기인하였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북송시대 문인화론이 북송회화와의 관 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에서 출발하였다. 오대 이후의 수묵화 등장과 수묵산수화의 세계를 통해, 북송시기 문인화론의 성립배경과 문인화의 회화이상 을 조망해보았다.

당말 오대의 수묵화의 출현은 문인화론의 형성에 비교적 많은 영향을 주었 다. 곽약허의 기운비사론은 당 장언원의 서화용필동론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화 가의 창작정신에 기반한 기운론을 강조하였다. 곽약허의 문인화론은 직업화가와 문인화가를 구별함으로써 송대 이후 문인화의 우세를 규정하였다. 한편, 그의 문 인화론은 문인화론의 한계를 잘 드러냈다. 장언원의 용필론을 고집함으로써 오대 형호의 필묵론과 북송 수묵화의 발전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한졸 이 기운론의 병폐를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문인화의 수묵화풍은 북송중기에 이르 러 만연하였으며, 또한 화가의 기운을 강조하는 수묵화풍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아 북송시대의 주된 화론경향을 왜곡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소식을 중심으로 한 문인화론의 회화이상은 위진시대의 현학으로부터 유래 한 ‘음영성정(吟詠性情)’에 따른 회화세계를 보인다. 대상의 본질을 강조함에 있어

‘전신’의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의 주체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화가 자신이 화가자신이 조물자가 되려는 의기를 표현했다. 소식 등 문인화가는 북송 이학체 계의 궁극적인 가치인 ‘도’와 무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북송시대 대표적인 산수화가인 이성의 수묵산수화의 세계는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도’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성은 ‘천기(天機)를 가진 화가

로, 문인화가들이 주장하는 ‘생지(生知)’론과 구별된다. 이성은 당 오도자와 함께

포정과 윤편의 ‘기예로써 도에 나아간(技進乎道)’ 고사에 적합한 화가였다. 이처럼

이성의 수묵산수화의 세계는 문인화론의 회화이상과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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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북송회화, 문인화론, 기운론, 소식, 형호, 이성, 수묵산수화, 생지론, 천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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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抄錄

在北宋繪畫, 關于文人畵論的作用和其意味硏究

韓 芳 任

*1)

这本是在北宋繪畫, 关于文人畵論的作用和其意味研究考察了. 从而意在多经过 反省所过去文人畵論研究的认识不足, 试图把样方面的接.

北宋是那个时代形成文人畵論, 還有那个文人畵家活跃. 在北宋的画史, 山水畵 与花鳥畵最大发展, 因为唐末及五代以後水墨畵的出现. 这本是從北宋文人畵論和画史 的關系出發. 在唐末及五代以後, 把水墨畵的出现和水墨山水畵的意识作为硏究对象, 在北宋时文人畵論的成立背景和文人畵的思想.

唐末及五代水墨畵的出现, 對形成文人畵論有较大的影响. 郭若虛的‘氣韻非師’之 說, 来源于唐張彦遠的書畵用筆同論, 而以畵家的創作情神为主调的氣韻論. 郭若虛的 文人畵論, 以区分職業畵家和文人畵家, 模式化宋代以後文人畵区位优势. 一边, 他的 氣韻論露出有限文人畵論, 以死固执了張彦遠的用筆之論, 逆行了五代荊浩的筆墨論和 北宋水墨畵的發展. 因此, 韓拙痛陈氣韻論的弊端. 文人畵把水墨畵风气延到了北宋中 期以後. 且以畵家的氣韻为主调水墨畵风气, 有方面歪曲北宋時代的畵論傾向.

蘇軾的文人畵論的理想, 显示了吟詠性情的繪畵意識, 來源于魏晉時玄學. 他捕 捉物象背后的实质, 導入傳神概念, 重视人間的主体意识, 终究 表现出畵家本身成为 造物主的意志. 蘇軾等文人畵家不关心北宋理學體系的價値體系, 这就是道.

从另一方面来看, 北宋代表的山水畵家, 李成的水墨山水畵意識, 到达自然法则 的道. 他有天機, 就是畵家的積好在心, 久而化之. 在本身和自然界間的隔離, 以他和自 然呼应, 认识直观性的宇宙法則. 李成的繪畵意識, 与文人畵論的‘生知’之論有着区别.

李成与吳道子, 像庖丁和輪遍一样, 就是以技進乎道的畵家. 如此 李成的水墨山水畵 意識和文人畵的繪畵理想不同.

* 朝鮮大 講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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核心語

北宋繪畫, 文人畵論, 氣韻論, 蘇軾, 荊浩, 李成, 水墨山水畵, 生知論, 天機論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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