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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cheon Metropolitan City Museum Newsletter

│특집

한국 근대문학에 새겨진 인천

│리뷰

‘세 가지 시선, 러일전쟁’기획특별전

│기획연재

인천의 시장 이야기 ①

│박물관 Culture

소장유물‘간돌칼’

쇠뿔고개 서양집과 옛 기억 한 가지

│박물관 소식

송암미술관 재개관기념 특별전 검단선사박물관 가족교육프로그램 박물관 소식 및 일정

마음 창에 시선 담기

박물관 소식지 제9호

인천 배다리 아벨 서점 앞

2011년

(2)

제9호 특집

한국 근대화의 기항지이자 요람지, 인천 근대 인천의 역사와 문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근대문학 작품 속에 아로새겨져 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파고 끝에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한국 근대사의 본격 무대를 제공한 곳도 인천과 그 앞바다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 에서의 승전을 찬양한 노래인 신재효(申在孝)의

⌜괘씸한 서양되놈⌟은 이 지역의 역사에 아프게 각인된 반외세의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인천은 어쩔 수 없이 서구 제국의 조선 침략 전진기지로 화하고 만다. 그 때문에 비록 타율적 일망정 조선이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근대 박래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천의 면모를 우리는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굃人稙)의⌜혈의 누(血의 淚)⌟(『만세보』, 1906)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련한 여주인공 옥련이 타고 떠난 윤선과 현해탄 뱃길.

인천은 한국 근대화의 기항지이자 요람지였다.

서정과 낭만의 땅 인천이 낳은 문학인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정치적 무대를 제공한 인천이지만 그 땅과 자연마저 비정하지는 않았다. 황해와 그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풍광은 다시 뭍의 산천과 건축과 어우러져 미항으로서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 그로 부터 길어진 서정과 낭만이 다시 풍요로운 문학 작품을 낳았다. 강화도 출신의 명문장가 이건창 (굃建昌)이 지은 한시⌜숙광성진기선새신어(宿廣 城津記船賽神語)⌟는 오늘날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연행되는 <서해안 풍어제 배연신굿>을 빼어나게 묘사한 한시이다. 근대적 정감으로 인천 제물포의 풍광을 처음 읊조린 소월의 시⌜밤⌟또한 아름답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인천의 풍광을 고양된 문학적 표현으로 그려낸 이들은 인천 출신의

문학인들이다. 고유섭(高裕燮)의 연시조⌜경인 팔경(京仁八景)⌟을 비롯, 함세덕(咸世德)의 희곡과 김동석(金東錫)의 수필에서 인천과 그 인근 지역은 서정과 낭만이 충만한 곳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런데 이 고장 출신으로 이처럼 훌륭한 문학인 들이 여럿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개항과 더불어 축적된 근대적 기제와 문화가 축적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 1927년 2월 1일 발행된 월간잡지『습작시대(習作時代)』를 손꼽을 수 있다. 인천 지역에서 발간된 최초의 순문예 잡지로 인천 지역문단의 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극인 진우촌(秦雨村)에 의해 주도된『습작시대』

창간호에는 축항 인천항의 면모가 선연하게 형상화 된 여수 박팔양(朴八陽)의 시⌜인천항⌟이 실렸다.

인천+문학

한국 근대문학에 새겨진 인천

1)

1) 이 글은 필자의 책『문학으로 인천을 읽다』(도서출판 작가들, 2010)의 내용을 축약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함세덕 초상사진

김소월 사진

『습작시대』표지

(3)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잿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빼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 제, (……) 오오 제물포! 제물포!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 박팔양의 시⌜인천항⌟『습작시대』( , 1927. 2) 부분

해항도시 인천의 도시 정체성을 뛰어나게 형상화 한 시다. 박팔양을 비롯한 중앙문인의 대거 참여로 성황을 이룬 인천 지역문단은 1937년 1월에 간행 된『월미(月眉)』에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월미』는 오히려 인천 자체의 문학적 역량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의 숨 막히는 상황 속 에서『월미』는 계속되지 못하였다. 『습작시대』와

『월미』로 분출했던 인천의 문화적 역량은 숨죽이 다가 해방기에 이르러 다시 개화한다.

한국 근대 모더니즘 문학의 자양분

인천은 또한 한국 근대 모더니즘 문학이 꽃피는 데에도 일정하게 자양분을 제공했다. 축항의 건설과 함께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인천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분망한 모더니티의 전시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시대적 감각에 민감한 많은 문화인이 인천으로 찾아들었다. 1930년대 문학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구인회(九人會)의 핵심 멤버들인 정지용, 김기림의 시와 이상, 이태준 의 소설에서 인천은 주요한 문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한국 사회의 모더니티는 식민 지적 타율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전략 하에 추진된 식민지 근대화와 그로 인한 민족과 민중의 고통과 시련은 따라서 우리 근대문학이 탐구해야 할 고통스런 주제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리는 인천 축항과 공장 지대를 무대로 농민과 노동자의 절박한 생애를 형상화한 강경애(姜敬愛)의 장편『인간문제(人間 問題)』를 떠올린다. 엄흥섭의 여러 단편과 함께 현덕(玄德)의⌜남생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식민지

질곡 속에 절망의 삶을 살아가는 지역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채만식(蔡萬植)은 희곡

⌜당랑(螳螂)의 전설(傳說)⌟

에서 해안통에 있었던 인천 미두장(米豆場)을 생생하게 복원하여 식민지 착취에 내몰리는 조선 민중의 절박한 처지를 통절하게 극화하였다.

해방과 분단의 장소, 인천항

해방과 함께 인천은 기쁨과 감격의 파도가 약동 하는“꽃바다 기빨바다”(김기림, ⌜파도소리 헤치고⌟

로 형상화된다. 해방의 비주체적 측면을 간과해 버린 낭만적 시의식이긴 하지만, 인천항으로 들어 오는 연합군의 모습에서“잃어버렷던 祖國의 아츰”

에 대한 열렬한 희망을 떠올린 이가 어찌 김기림 뿐이었을까. 때문에 해방 직후 인천은 젊은 시인과 예술가들의 열기로 가득하였다. 1945년 연말에 잇따라 결성된 인천문학동맹(위원장 엄흥섭)과 시인 배인철(裵仁哲) 중심의 인천신예술가협회의 활동으로 해방기 인천에는 아연 문화적 활력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해방기의‘의미 있는 혼란’이 외세의 개입과 단정의 수립으로 짧게 사라져 버리고, 이로부터 고착화되기 시작한 분단체제와 전쟁으로 말미암아 인천은 얼어붙고 만다. 한동안 문화적 활력을 잃고 만다.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싸인은 붉고 짠그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온 작크가 날리든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어간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없이 닮어간다.

- 박인환의 시⌜인천항⌟『신조선』( , 1947. 4) 부분

박인환의 시⌜인천항⌟은 분단의 결절지대로 화하는 인천의 모습을 예견한 듯해 인상적이다.

하지만 분단의 상처가 그 어느 곳보다도 극심했기에 인천은 분단극복을 지향하는 남한 민족문학의 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남한 체제를 떠나 북으로, 분단체제를 떠나 제3국으로 정신적 망명을 선택 하는『광장』(1960)의 주인공 이명준, 그의 첫 밀항지가 바로 인천이었다.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희환

남생이

(4)

제9호 리뷰

100년 전의 진실 혹은 차이

라쇼몽(羅生門)이라는 영화가 있다. 일본의 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1950년에 만들어 베니스 영화제 에서 수상까지 한 작품이다. 하나의 살인사건에 연루된 4명의 남녀를 다룬 이야기로 얼핏 단순해 보이는 구조이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을 목격한 네 사람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면서 과연 진실은 무엇 인지 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영화는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살인사건의 당사자들과 목격자는 모두 나름대로 자신의 처지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각자 의 설득력을 갖고 사건을 피력하여 보는 이들을 그때그때마다 납득시킨다. 자,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혹 그들은 모두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일까.

‘세 가지 시선’이라는 제목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러일전쟁 특별전은 이 전쟁을 바라 보는 세 개의 시각과 그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전시이다. 영화 라쇼몽의 구조에 생각이 미쳐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100년 전 20세기의 처음을 연 전쟁, 러일전쟁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쟁 당사국과 주변국의 시각에서 그들만의 진실 혹은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아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세 개의 시선?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전쟁 당사국과 전쟁 수행국인지 주변국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위치에 섰던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이를 둘러쌌던 서구 열강의 시선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 에서는 주로 러시아·일본·한국의 정부 혹은 국가, 지식인과 같은 사회지도층에서 이해하고 드러낸 전쟁에 대한 관점과 인식을 조명하였다. 실타래 처럼 복잡하게 얽힌 전쟁의 내용과 의미를 재구성 하기에 조금은 쉽고 간편하며 대표성마저 띠는 구분법이지 않은가.

전쟁에서 패배했는데도 위배한 패배자이자 영웅을 자처했던 러시아. 자신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황인 종의 위대한 승리로 영광의 역사를 만들어낸 일본.

전쟁을 피하려고 했으나 막지 못했고 국가의 안위와 이웃나라의 침략적·공격적 행위를 우려했으나 한편으로 일본의 승리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 지금은 이 전쟁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 전시에서 표면적으로 밝힌 세 개의 시선이다. 그러나 실제 에서나 전시에서나 세 개의 시선만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게 문제다.

일종의 구경꾼으로서 전쟁의 제3자였던 영국, 미국, 프랑스 등도 러시아, 일본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주관적 해석을 거친 전쟁을 말하고 전달 하였다. 한 나라 안에서도 계층에 따라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삶의 터전이 전쟁터가 되고 전장 에서 죽고 죽이며, 후방에서라도 각종 세금과 부역, 징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서민의 입장은 분명 다를 터이기 때문이다. 전시구성상에서도‘구경꾼’

과‘나라면 그렇게 얘기하지 않겠어’라는 섹션에서 이러한 시각이 일부 드러나고는 있다. 그러나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는 지난 2010년 12월 1일

부터 2011년 1월 30일까지 <세 가지 시선, 러일전쟁>

기획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국사교과서에 불과 한두 줄로밖에 서술되지 않는 역사적 사건을 장장 두 달에 걸친 전시회로 열었던 것이다. 대다수 사람의 관심 밖에 있고, 심지어 학계에서조차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러일전쟁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지게 된 것일까.

(5)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다. 글이 아닌 시각 으로 보여야 하는 전시의 특성상 실 유물의 확보가 보다 절실했지만 아쉽게도 국내자료만으로는 구성에 한계가 있었고, 외국과의 유물대여협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다섯 개, 여섯 개의 시선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사실 전쟁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모든 사건의 중심, 혹은 주변에 선 인물-사람이 아니라 사회, 국가가 되기도 한다-들은 주관적 해석이나 상대적 관점에 따라 동일한 내용에 대해 종종 다른 말을 뱉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상황과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유독 러일전쟁에‘라쇼몽’

적 시각을 도입한 것은 인천이라는 지역의 공간성 때문이었다.

지역의 역사로 풀어내기

러일전쟁의 전쟁터라면 흔히 중국 대련과 동해- 일본에서는 일본해라고 할-를 떠올리기 쉽다.

인천 제물포에서 러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해전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0차세계대전 혹은 1차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도 불리는 제국 주의전쟁, 유럽과 아시아의 전쟁, 백인종과 황인 종의 전쟁인 러일전쟁은 분명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이 근대 한국의 중요한 정치·경제·

사회적 공간 중 하나인 인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인천지역에서 갖는 의미가 보다 중요해진다.

2010년 11월 11일 박물관 소장품인 <바랴크호 깃발>이 러시아로 대여되었다. 과거 제물포 앞바다 에서 일본에게 패해 수장이나 자폭을 선택했던 러시아 전함의 수병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웅 이었다. 침몰한 세 척의 러시아 배 중 바랴크호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과 애정은 유별나다. 그래서 바랴크호의 깃발을 대여하기 원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도입부에서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는 러시아, 일본, 한국의 스케치 영상을 연출한 바 있다. 영상 속 한국은 인천이 배경으로 전쟁 당시 죽은 러시아 병사들을 위한 기념비 설립과 이를 반대하는 시민 단체들의 시위 장면이 주요 내용이다. 이번 전시 바로 직전 인천에서 있었던 바랴크호 깃발의 대여식 과 깃발의 귀환을 환영하는 러시아 내 기념식과도 오버랩되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러일 전쟁이 단순히 제국주의전쟁으로 우리와 별 상관 없는 타국 간의 전쟁이 아니라 지금도 생생히 한국 에서, 인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라는 점을 부각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전시의 주요 대상물인 유물의 측면에서도 바랴크호의 깃발은 복제품이 출품되었지만 그 밖의

꼬레이츠호와 숭가리호의 깃발을 비롯한 포탄, 포탄피 등 러시아 전함에서 인양한 유물과 다수의 러시아, 일본 측 관련자료가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아마도 국내 어느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인천 광역시립박물관만의 지역특성화된 소장유물일성 싶다. 이 유물들을 통해 특히 인천시민들이 지역 사회의 역사문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인천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정체성을 만들어내는데는 기본적으로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과 존재들을 바탕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시선, 러일전쟁> 특별전은 러일전쟁이 라는 보통의 관심에서 벗어난 낯설고 어려운 역사 사실을 진실 혹은 거짓식의 이분법이 아닌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 특히 인천의 지역정체성을 그 속에서 생각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 바람이 서투른 전시연출을 넘어서 관람객 들에게 조금이라도 전달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전시교육과 안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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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장시’가‘매일장’으로 바뀌어 오랫동안 서울 종로에서 비단, 무명, 명주, 종이, 건어물 들을 관가에 납품하거나 백성들에게 팔았던 육의전(괯矣廛)이 갑오개혁 등 시대적 추세에 따라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지방에서는 5일장이 계속 이어지던 때였다.

인천에서는 강화 읍내장과 황어장 등의 5일장이 대표적인‘장시(場市)’였는데, 전통적인 명칭이 오늘날과 같은‘시장(市場)’으로 바뀐 것 역시 개항 뒤였다. 그 요인은 상품경제의 발달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사회, 경제, 문화 및 기타 대상물의 가격을 결정하고 지불하는 곳’이라는 고전적‘장시’의 의미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인천의 상설시장 효시는 어시장

인천에서 장시가 발달한 형태인 매일장(每日場), 즉 상설시장으로 처음 문을 연 것은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어시장(魚市場)이었다. 인천 근해에서 잡은 각종 어물을 사들여 인천부 내리(현 중구 내동)에서 팔아오던 정흥택이란 분이 1902년 그곳에 상설 시장을 개설했다.

한국인 정흥택이 문을 연 근대적 의미의 어시장이 제법 활기를 띠자, 그를 눈여겨 보아왔던 일본인 들이 1905년 그 건너편에 저들만의 어시장을 개설해 한동안 경쟁을 벌였으나 상대가 되지 않자, 나중에는 값비싼 선어만을 취급하며 일본인 고객 만을 상대했다.

그 무렵 인천 근해에서는 생선이 많이 잡혔다.

제9호 기획연재

개화기 당시의 사진가 황철(黃鐵) 선생이 찍은 인천 제물포항의 이런저런 모습을 보면, 아직 항구로서의 기반 시설이 미비했음을 알 수 있다. 몇몇 길거리 좌상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띄는데, 그것이 아마도 인천 상설시장의 씨앗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칠통마당을 배경으로 한‘스테레오 뷰’(2장짜리 입체사진) 역시 본격적인 시장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근해에서 잡아 올린 듯한 생선들을 마치 모래를 쌓아놓듯 벽돌창고 앞에 질펀히 널어놓고 흥정을 하는 광경이었다. 그 같은 장면들이 인천의 시장 초기사를 어렴풋이 짐작케 하는 단서 들이겠는데, 정작 시장이 들어선 것은 개항(1883년) 후 한참 뒤의 일이다.

6.25 직후의 노천시장 광경. 멀리 답동성당이 보인다.

인천의 시장 이야기 ①

인천의 상설시장 효시는 어시장

1950년대 말 신포시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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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잡이 철이 되면 연평, 칠산 바다에서 잡힌 알배기 조기가 중선에 가득가득 실려 오고, 민어·농어·도미·갈치·숭어·고등어·

아지·낙지·삼치 등과 인근 섬에서 채취해 온 굴, 조개와 꽃게·새우 등으로 인천항은 풍성한 해산물 잔치를 벌였다. 1950년 말만 해도 인천 시가지에는 조기·민어 등이 지천으로 흔했다.

생선배가 들어오면 하인천 선창가 일대는 분주 했다. 북성동 제빙공장에서 생산해 낸 얼음과 백설 같은 주안 천일염을 가득 채운 생선 궤짝들을 새벽녘 첫 기차 편으로 서울 남대문시장으로 보내 싱싱한 인천 어물의 위력을 과시했다. 1960년까지 경인선을 오갔던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의 역사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인천의 전통적 행상의 하나 였던 것이다.

푸성귀전은 청국인이 열어

어시장보다 늦게 지금의 중구 신포동에 농산물 시장을 개설한 것은 청국인이었다. 이때 밑천을 마련한 그들은 광복 후인 1950년 말까지도 인천의 채소류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대규모의 채소밭 주인은 대개 중국인이었고, 인천 지역의 화상(華商) 들은 그들의 주요한 고객이었다. 그 무렵 푸성 귀전의 풍경을 향토사가 고일 선생은 유저‘인천 석금’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금융조합 아래 골목길은 푸성귀전이다. 첫봄에는 돈냥 이나 있고, 맛난 것만 찾는 설두귀족

들이 구미에 맞는 제철 푸성귀를 찾는다. 물쑥, 냉이, 달래, 소리쟁이, 쑥갓, 시금치가 먼저 등장하고, 값비싼 연근, 당근, 토란, 고보 등이 애교를 부린다.

아무리 흔한 배추, 무 따위라도 온실에서 길렀던 연한 햇배추와 새알만 한 홍당무, 새끼손가락만 한 오이는 제철이 아닌 것으로 총애를 받을 대로 받는다. 그 외 여러 가지 과실 배, 사과, 복숭아, 귤 등이 궤짝에 차곡차곡 담겨 산 같이 쌓인다.

이것은 시내에서도 소비되지만 과실이 귀한 중국 땅으로 수출되는 것이 많다. 생산자는 중국인이요, 소비자는 일본인이고, 소매인은 우리 상인이다.”

그러나 이 푸성귀전들은 일제의

‘시장 규칙’이 공포된 10여 년 뒤인 1927년 생선전들과 함께 모두 인천부

직영으로 바뀌었다. 인천부는 1929년 생선류를 파는 어시장인 제1시장을, 1933년 청과류를 다루는 농산물 제2시장을 각각 신포동에 신축하고 손님을 맞았는데 제1시장은 벽돌 단층에 28구획, 제2시장 은 목조 단층에 31구획 규모였다.

이 어시장 건물(현 중구 신포동 커피점‘베네’

자리)은 6·25전쟁 후에도 그대로 남아 시장으로서 존립해 있었다. 어시장에 들어서면 예의 진한 생선 비린내야 수협 어판장과 별반 다른 게 없었지만, 어판대 자체를 견고하게 시멘트로 만들고, 시장 바닥도 물이 잘 빠지게 흔히‘도끼다시’(갈아딱기)를 한 신식 매장이어서 재래시장과는 크게 차이가 났다. 이곳이 시장 기능을 잃게 된 것은 1981년 연안 부두에 대단위로 인천종합어시장을 건설한 이후다.

참외전거리는 지금도 명목 유지

그 뒤를 이어‘공설 청과물시장’이 1930년 용강정 (현 인현동)에서 문을 열었다. 지금의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경동 싸리재 언덕길 초입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이 시장을 사람들은‘깡’이라고 불렀다. 어원이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싸게 파는 시장’이란 뜻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시장의 정식 이름은‘인천 청과물주식회사’였다. 일본인이 주축이 된 인천 물산주식회사와 경쟁하다가 자본합병에 따라 청과류는 인현동 시장, 채소류는 신포동 시장에서 판매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 일대에는 과일가게들이 즐비해 그 옛날부터

‘참외전거리’라 불렀다. 참외를 파는 가게가 즐비 했던 때문이리라. 참외뿐만 아니라‘깡’에는 온갖 청과류가 모여 1960년대 말경만 해도 김장철만 되면 우마차, 손수레, 지게꾼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볐다. 그러나 비만 오면 흙탕길로 변해 발목까지 푹푹 빠져 큰 곤욕을 치렀다.

‘마누라는 없어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푸념은 그때 생겨 회자되었던 우스개였다.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적 교환 공간만이 아니다. 인정과 문화가 얽히고 설켜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그래서 한번 시장이 열리면, 어지간한 사회적 변동이 아니면, 시장은 오래도록 그 생명을 이어나간다.

인천의 재래시장이 수십 년간 존속하는 것은 그 본연의 생명력 때문인 것이다. 시장은 지역사적·

생활문화사적인 의미도 심대하다.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인천 지역에서 가장 높이 만세의 횃불을 들어 올린 곳이 바로 5일장‘장시’였던 강화 읍내 장터와 계양의 황어장터였다는것은시장의사회적 기능을 단적으로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조우성

초창기‘인천 공설 송월시장’의 전경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어시장인인천부의‘공설 제1시장’

지금의 중구

내동에 있던‘공설 제2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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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호 박물관 Culture

간돌칼은 청동기시대 실생활 또는 의기용으로 사용된 도구로‘마제석검’, ‘간돌검’이라고도 한다.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물 가운데 하나로 일본 규슈와 연해주 지역 일부를 제외하고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석기다.

이 간돌칼은 1954년 인천 남구 주안에서 주민이 채집해 우리 박물관에 기증한 것 이다. 길이 26.3cm, 너비 4.5cm의 셰일로 만든 이 돌칼은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거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유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인천 도심지역에서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생활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로 그 의미가 있다.

간돌칼은 크기가 보통 길이 30cm 내외이며 형태는 곧은 날의 검신 (劍身)과 자루(柄部)로 이루어진다.

검신은 칼끝에서 양날 부분으로

가면서 넓어지다가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 아래쪽 으로 내려간다. 검신의 단면은 마름모꼴 또는 볼록 렌즈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간돌칼의 재료로는 퇴적암 계통의 셰일, 슬레이트, 니암제, 점판암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간돌칼은 손잡이의 형태와 구조에 따라 슴베(莖)가 달린 유경식(有莖式)과 손잡이가 달린 유병식(有柄式), 슴베나 손잡이가 없는 무경무병식(無莖無柄式)으로 나누어진다.

보통 간돌칼은 무덤과 주거지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주거지에서 발견되는 경우는 길이가 짧은 실용적인 형태가 대부분인 반면,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 출토 되는 경우는 상당수가 날 부분에 손상이 없고, 자루 위와 아래 끝이 심하게 벌어져 실용품으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셰일제 돌을 갈아 만든 이 주안 출토 간돌칼은 손잡이가 있는 유병식으로 검코는 없으나 검신이 손잡이보다 약간 좁아 검신과 구분된다. 손잡이 중간에 마디는 없다. 검신의 단면은 마름모꼴, 자루는 장방형으로 검신은 3부분으로 절단된 것을 접합하였다.

전국 어디서나 사정이 비슷하지만 인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급속하게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본래의 지형이 몰라보게 변해갔고 그 속에 남아 있던 과거의 흔적도 함께 사라져 갔다. 그러나 40~50여 년 전만 해도 옛 모습이 대부분 남아 있었고, 마을 주변 밭이나 구릉에서 돌칼이나 화살 촉 같은 오래된 유물을 줍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채집된 유물 중 일부가 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이 간돌칼도 당시에 기증된 유물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우리가 선사시대 인천을 간접적이나마 느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유물관리과 이희인

창영동 우각로를 따라가다 보면 기독교 사회복지관 이란 이름의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믄 이국풍의 집을 만난다. 한 세기 전 벽안의 서양 선교사들이 숙소로 사용했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건물은 자그마한 언덕 위에 앉아 있다. 지금은 문화재로 격상하여 귀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 앞을 가로막는 우람한 건물들 때문에 오히려 뒷마당에 내몰린 처지가 되어 그 쓸쓸함이 안쓰럽다. 내 어린 시절이 이 건물 에겐 차라리 호시절이었던 듯싶다. 시야가 탁 트여 가슴 답답할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항상 들락거리고 옆으로 난 길에는 적어도 몇 천 명은 되는 창영, 샛별 꼬맹이들의 재잘거림이 늘 학교 오가는 길에 그치질 않으니 사방은 수선 스러우면서도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 온기에 끌려서였을까? 나는 유독 이곳이 좋았다. 어린 나이에 그 집의 내력을 알 턱이 없는 나로서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집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특히 지금의 창영교회 교육관 뒤편에 있던 멋스런 미끄럼틀 위에 앉아서 볼 땐 어린 눈에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도 무슨 느낌은 있었던지 한참 동안 멍하니 올려다 보곤 했는데…….

하지만 이곳에는 또 하나, 옛 친구에 대한 기억이 똬리를 틀고 있다. 4학년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 아이가 쭈뼛거리며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우리들 눈은 휘둥그레

졌다. 전학 왔다는 그 아이는 놀랍게도 새하얀 피부의 서양 아이였다. 마른 몸에 금발과 깊고 파란 눈! 영락없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그

‘양키’……. 당시 철없던 꼬마들은 그런 애들을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부르곤, 아니 놀리곤 했었다.

‘튀기’라고.

‘홍 우현’, 이상하게 4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그 아이의 이름이다. 몹시 거친 성격의 그는 툭하면 쌈질이요 나오느니 욕설이었다.

겁이 많던 나는 당연히 그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이 곳 서양 집 앞마당 에서 였다. 그날도 나는 하교 길에 예의 그 미끄 럼틀로 향했는데 아뿔사! 거기에 그 아이가 먼저 와 있는 게 아닌가. 마지못해 건성건성 얘기를 하던 중 그가 이런 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야, 그래 가지고 무슨 반장이냐! 쬐그맣고 삐쩍 마른 놈이!

못되게 구는 놈 있으면 말해!”말은 거칠었지만 뒷말에서 나를 싫어하지만은 않는구나 하는 느낌에 내심 안도했다.

그 후에도 우리는 거기서 어쩌다 만나면 같이 공도 차고 미끄럼도 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기억에 없지만 당시 하인천에 있던 선창으로 함께 배를 타러 가기로 했는데 쪽배에 겁도 없이 그를 따라 올라탔다가 매 놓은 줄이 풀리는 바람에 우리 둘은 그야말로 죽다 살아

났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그는 결국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배 타러 가다 자유공원에서 반갑게 아는 척하는 미군들에다 대고 쌍욕을 해대던 그의 저 깊고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는 우리네 역사의 쓰라린 생채기를 어림짐작이라도 하는 데는 세월이 많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마음의 빚으로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가 내게 곁을 조금이 나마 내주었을 때 답해주지 않은 게 미안했고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그들의 외로움과 아픔을 편견으로 덧나게 했을 것이 부끄러웠다. 귀소본능 일까? 요즘 들어 쇠뿔고개 길을 종종 찾게 된다.

이제 이곳도 많은 것이 변하겠지만, 나는 언제 까지고 편치만은 않은 눈길로 소식을 알 수 없는 그 아이를 오버랩 하며 서양 집을 바라보게 될 것만 같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초대 자원봉사단장 조명진

소장유물

간돌칼(磨製石劍)

쇠뿔고개 서양집과 옛 기억 한 가지

인천 남구 주안에서 발견된 셰일제 간돌칼은 지금의 인천 도심에서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생활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유물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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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명칭 : 송암미술관 재개관기념 특별전「우리미술 속 松巖이야기(1)」

● 전시기간 : 2011년 4월 26일(화) ~ 6월 26일(일)

● 전시장소 : 송암미술관 기획전시실 인천송암미술관에서는 공립미술관 으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재개관기념 특별전 <우리미술 속 松巖이야기(1)>를 오는 4월 26일(화)부터 송암미술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특별전은 우리 미술을 사랑하고, 이를 지역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기꺼이 소장 유물을 기증한 송암 이회림 선생의 뜻을 헤아리는 동시에 송암미술관이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소나무 와 바위처럼 앞으로도 끊임없이 발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은 전시 로 기획되었다.

소나무는 예로부터 지조와 절개, 장수, 풍류와 탈속의 상징물로 미술 품에 표현되었다. 바위는 영원불멸의 상징이며 비바람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자태로 군자의 모습에 비유 되기도 한다. 소나무가 미술에 표현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이미 등장 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사랑받아온 주제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송암미술관의 대표 소장 품인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를 비롯 하여 관련 기관에서 대여한 작품 30여 점을 통해 조선 후기 화단에서 이어져 온 소나무와 바위그림을 감상하고자 한다.

전시는 크게 <제1부; 松이야기>와

<제2부; 巖이야기>로 구성된다. <松 이야기>는‘변치 않는 성품을 본받다’,

‘솔숲에서 여유를 즐기다’로 구성하여 오래 살고싶은 염원을 담은 장수사상 과 꿋꿋한 지조와 절개로 대변되는 소나무의 모습이 표현된 그림들을 살펴볼 것이다.

세속의 번잡스러움을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려 했던 문인들의

바람을 함께 느끼고 미술관이 관람객 들에게 솔숲과 같은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길 바라는 마음을 더하였다.

<巖이야기>는‘강직한 성품에 예를 표하다’, ‘함께하여 아름다움을 더하다’

로 구성하여 소나무와 바위가 지닌 다양한 상징의미가 우리 그림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송암미술관이 소나무와 바위 같은 꿋꿋함과 강건함을 가지고 계속 발전해 나가려는 바람을 조선 후기 소나무와 바위 그림을 감상 하면서 함께 느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미술관에서는 앞으로도 우리 미술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된 송암(松岩)에 대한 탐구를 계속할 계획 이다.

송암미술관 신은미

시립박물관 분관 이야기

검단선사박물관 가족교육프로그램

검단선사박물관(관장 김상원)에서는 오는 3월 부터 가족교육프로그램 <우리 가족을 전시해요!>

를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가족이 한 단위가 되어‘우리 가족’을 직접 전시해 봄으로써, 박물관 운영과 전시를 구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참가자들은 먼저 전시 기획과 방법, 디자인 등 큐레이터의 기초적인 업무를

배우고, 전시실을 관람하면서 실제 전시 사례와 방법을 익힐 것이다.

이 과정을 끝내면 본격적인 전시 준비에 들어가는데, 우리 가족이 소중히 여기는 물건들이 전시할

‘유물’이 된다. 무엇을 주제로 어떤 물건을 전시할 것인가를 기획하고, 이리저리‘유물’들을 배치해보면서 어떻게 하면 주제가 잘 드러나는가 를 살펴본 후, 네임텍과 패널을 제작

하여 진열장에 배치한다. 마지막으로‘큐레이터 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 가족이 기획한 전시의 의도와 스토리를 설명하고, 다른 가족들의 전시와 비교해 본다.

이 가족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참가자들은 평소 전시된 유물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던 관람객의 입장에서 벗어나 직접 주제를 정하고 전시해

봄으로써, 박물관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박물관의 전시를 유물의 배치와 그 밑에 놓인 의도와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가족의 각 성원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확인하고 공유함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확인하고 가족간 유대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데, 참가하고자 하는 가족은 그들의 과거·현재를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전시물을 지참해야 한다. 참가자들이 직접 기획한 전시 는 검단선사박물관에서 한 달간 전시된다.

검단선사박물관 신은영

시립박물관 분관 이야기

송암미술관 재개관기념 특별전

<석벽제시>, 임경수, 송암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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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호 박물관 소식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청량로 160번길 26┃Tel 032 440 6750┃http://museum.incheon.go.kr

창 간 일 발 간 일 발 행 인 기획·편집

표 지 사 진

제 호

디자인·인쇄

2009년 3월 1일 2011년 3월 1일

인천광역시립박물관장 서관석 전시교육과 안성희

자원봉사자 구자인혜, 김미경, 김미혜, 이건자, 정효숙, 조택환 조택환

근정 이태용 동양인쇄사 신규 자원봉사 교육생 이론교육 실시

2011년 신규 자원봉사 교육생에 대한 정규교육과정이 지난 1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교육생들은 이미 작년 12월 오리엔테이션 및 예비교육을 이수한 바 있다. 정규교육과정은 이론교육, 실무교육, 수습봉사교육 등으로 구성되어 2011년 한 해 동안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1월 29일 개강한 이론교육은 5월 21일까지 약 5개월간의 교육기간동안 인천의 역사와 문화 및 한국미술사 전반에 대한 내용

을 다룰 예정이다. 인천광역시립 박물관만의 특화된 교육커리큘럼 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교육생들은 2012년 제12기 자원봉사자로 박물관에서 활동하게 된다.

박물관-인천시교육청 진로체험교육 협정체결

인천광역시립박물관(관장 서관석)과 인천시교육청(교육감 나근형) 간 진로체험교육 협정이 2월 28일 체결되었다. 이번 진로체험교육 협정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추진하는 창의체험교육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인천시 교육청과 박물관 및 국립생물자원관, 인천지방법원 등 7개 기관 간에 체결된 것이다. 협정에 따라 앞으로 매월 1회 교육청에서 중고교 학생 40명을 박물관에 보내어, 유물

관람 및 박물관업무 종사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 이다.

박물관 페이스북 개통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리 꾼들과 새로운 소통을 하기 위해 페이스북 (www.facebook.com/icmuseum)을 개통하였다.

기존 홈페이지가 다소 딱딱한 형식의 정보, 신청 등을 위주로 하였다면 페이스북은 박물관 과 박물관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까지 살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무료 와이파이존 설치 및 전시실내 QR코드 사용, 전시안내와 유물정보 관련 무료 어플리케이션 개발, 디지털박물관 (http://digitalmuseum.or.kr) 운영 등 스마트한 관람환경 구축과 함께 현재 박물관 에서 진행 중인 디지털과 SNS를 통한‘함께하는 박물관’, ‘행복한 박물관’

만들기의 주목할 만한 결과 중 하나이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을 좋아하는 보다 많은 시민들이 페이스북으로 박물관과의 거리 좁히기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상설음악회 모니터요원 선발

박물관 상설음악회 <박물관으로 떠나는 음악여행>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공연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기 위한 공연 모니터링제가 2011년부터 도입된다. 전시 모니터링제는 이미 작년부터 시민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된 바 있지만 음악회에 대한 시민 참여 모니터링제는 올해가 처음이다. 총 20회 진행되는 상설음악회의 매 공연 프로그램의 기획과 내용 및 운영 평가를 실시, 향후 공연 계획에 반영할 예정이다. 이를 위하여

지난 2월 14일부터 23일까지 공고를 통해 모니터요원을 모집하였고 지원자 가운데 5명을 선발하였다. 모니터링을 통해 그간 시민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던 박물관 공연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지·정월대보름 민속행사 개최

잊혀져가는 전통 세시풍속을 즐기고 시민과 함께하는 박물관이 되고자 마련한 동지와 정월대보름 민속행사가 지난 12월 19일, 2월 19일 개최 되었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과 박물관 자원봉사자가 공동주최한 이번 행사는 박물관 우현마당을 주요 무대로 진행되었다. 참가자 모두 절기와 관련한 먹거리(동지팥죽, 귀밝이술과 부럼 등)를 함께 나누고 각종 체험 (새해 달력 만들기, 연 만들기 등) 및 놀이(긴줄넘기, 윷놀이, 떡메치기 등) 를 즐기며 연말 이웃돕기 성금모금, 한해 액막이와 소원을 비는 달집 태우기에 동참하는 등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신규 간행물 소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2010년 세 번째 기획특별 전으로 개최된 <세 가지 시선, 러일전쟁> 전시회 (2010.12.1~2011.1.30) 도록이 12월 발간되어 관련 학계 연구자들과 일반시민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 켰다. 제물포해전 인양유물을 비롯한 러일전쟁 관련 지도, 화보, 사진, 잡지, 기념품 등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출품 유물을 충실히 소개하였다. 또한 특별전과 연계 하여‘러일전쟁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주제로 열린 박물관 학술회의(2010.11.24)의 주제발표와 토론 등의 연구 성과를 실은

『인천문화연구』제8집도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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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특별전 <Coffee, 양탕국에서 커피믹스까지> |

기 간 2011년 4월 1일 ~ 2011년 5월 29일 장 소 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내 용 커피의 역사와 한국의 커피문화

| 박물관으로 떠나는 음악여행 |

매월 둘째, 넷째 주 일요일 오후 4~5시 / 박물관 1층 석남홀 홈페이지 선착순 접수

3월 13일 신나는 섬(퓨전 어쿠스틱) 3월 27일 아닌카 공연단(아프리카 전통춤) 4월 10일 퍼플캣(국악)

4월 24일 요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요들) 5월 8일 가야금 앙상블‘미소’(국악)

5월 22일 뮤지컬 갈라쇼‘희원’(뮤지컬 갈라쇼)

| 우리 가족 박물관 가는 날 |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오전 10~12시, 오후 1~3시 박물관 3층 해넘이방 / 홈페이지 선착순 접수 3월 26일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던 움집 만들기 4월 23일 내손으로 만드는 고소한 손두부 5월 28일 압화로 꾸미는 단오부채

| 박물관 시민강좌 |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2~5시 / 박물관 1층 석남홀 선착순 입장

3월 5일 한국의 첫 세계인, 혜초와 왕오천축국전 4월 2일 파미르의 고구려인 고선지

5월 7일‘고려인 되기’프로젝트

| 인천시민 인문학강좌(상반기과정) |

3~6월 격주 화요일 오후 2~4시 / 박물관 1층 석남홀 홈페이지 선착순 접수, 청강 병행

3월 15일 국학, 조선학, 한국학 3월 29일 해외에서의 한국학 4월 12일 일본학과 한국학의 교섭 4월 26일 한국학과 중국학의 교섭 5월 17일 21세기 문화연구와 한국학 5월 31일 사회과학과 한국학

| 제13기 박물관대학(상반기과정) |

5~6월 매주 금요일 오후 2~4시 / 박물관 1층 석남홀 홈페이지 선착순 접수, 청강 병행

전체 일정 추후 홈페이지 게시

전시·행사·교육 일정

소 를 닮은 섬.

소 울음소리가 육지에서도 들린다고 하여 불린 우음도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뭍을 그리워했던 섬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한 번의 거름조차 없이 그저 우음도로 차질게 드난살던 물길은

인간의 악착스런 손을 타자(시화호 물막이공사) 더 이상 넘나들지 못한다.

아주 긴 - 세월 뭍을 그리워하며 조쌀스런 노인마냥 평생 섬으로만 살아왔던 우음도

그렇게 뭍이 되면서 바다도 잃고 섬도 잃었다.

잘팍했던 개펄은 바다대신 바람에 적셔지고 갯물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배어나온 하얀 소금기는 1억만년 전 공룡이 뛰놀았던 흔적도

남편을 기다리다가 바닷물에 갇힌

금슬 좋은 부인의 원혼이 담긴 각시당의 전설도 모두 하얗게 절여놓았다.

우음도에 가보셔라.

넉살 좋은 마른 갈대와 비위 좋은 *퉁퉁마디가 부숭부숭한 치레로 근드렁거리면 잠시 멈춰서라.

부서져 헤뜨러진 양 들의 잔해에서 대놓고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우음도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음도의 짯짯한 바람을 마셔보셔라.

그 비틀한 바람엔 섬을 기억하는 바다의 짠맛이 들어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워했던 뭍이 되고서도

바다를 잃어버린 것에 짠한 바보섬 우음도.

그래서 여전히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어 섬이다.

* 퉁퉁마디 - 함초

섬은 섬을 바라보는 그 사람이 섬이다.

글·사진 조택환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고정리 우음도

마음 창에 시선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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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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