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실천과 실천적 ‘연애’
중국 延安시기 ‘연애’담론을 중심으로
38)
김 윤 수
*초 록
‘5.4신문화운동’ 시기에 전개된 다양한 여성해방론 중에서 ‘연애’는 많은 여성들로 하여 금 가부장적, 봉건적 문화의 폐해를 자신의 문제로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많은 호응을 얻 을 수 있었다. 서구에서 유입된,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연애’라는 용어는 배움을 통해 서구의 문화를 익힐 수 있었던 신여성들의 전유물로 인식 되어졌다.
延安시기에도 소위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연애’, ‘혼인’, ‘가정’과 같은 여성들의 경 험이 공적영역의 의제로 논의되었다. 이 시기의 ‘연애’는 근대적 의미의 낭만적 사랑과 계 몽적 성격을 지닌 ‘자유연애’ 담론과 달리, ‘혁명의 실천’을 의미하였다. ‘연애’는 이데올로 기적 성격을 띤 사유와 행동양식이 되었으며, 이 시기의 ‘연애’담론은 개인주의적 성격을 벗어나 사회에 대한 책무가 강조됨으로써 근대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조우하는 새로 운 방식을 만들어냈다.
5.4신문화운동 시기, 여성의 ‘연애’를 성적방종으로 치부하였던 남성중심 논리와 마찬 가지로, 延安시기에는 여성의 ‘연애’가 ‘혁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성의 추구로 인식되 어 억압되었으며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되기도 하였다. 또한 여성성을 ‘가정’의 범주로 제한하는 전략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억압은 여전히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혁명’과 ‘항전’
이 가지는 정당성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억압은 더욱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주제어: 연애, 가정, 혁명, 항전, 여성
* 덕성여자대학교 중어중문과 시간강사
1. 들어가며
중국에서는 ‘5.4신문화운동’ 전후로 여성해방을 위한 다양한 담론의 스펙트럼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 많은 여성으로부터 큰 반응을 얻은 것 이 ‘연애’였다. 부모가 맺어준 혼인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던 당시 중국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연애’라는 용어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연애’는 이 시기를 대표 할만한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5.4신문화운동’ 시기에 전개된 다양한 여 성해방론 중에서 ‘연애’는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가부장적, 봉건적 문화 의 폐해를 자신의 문제로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많은 호응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구에서 유입된,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연애’라는 용어는 배움을 통해 서구의 문화를 익힐 수 있었던 신여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졌다.
매매혼인과 包辦혼인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연애’를 실천했던 신여성 들과 달리 가난한 농민의 딸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어떠한 항거도 할 수 없었다. 당시 매매혼인과 包辦혼인으로 고통 받았던 하층 여성의 모 습은 莫言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紅高粱(1986)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1920~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 속 주인공은 당나귀 한 마리 값에 나병환자인 양조장 주인에게 신부로 팔려가는 가난한 농민 딸로, 혼인에 있어서 어떠한 결정권도 가질 수 없 었던 하층 여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5.4신문화운동 시기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여성의 상징이었던 ‘신 여성’ 형상에 전쟁 시기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생겨난다. 1935년 10월부 터 1948년 10월까지 중국 공산당이 陝西省 북부에 있는 延安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延安시기라 하는데, 이때부터 ‘신여성’ 대신에 ‘혁명부녀’
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부녀’는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다. ‘5・
4신문화운동’ 시기 유행하던 ‘신여성’ 대신 ‘항전’과 ‘혁명’의 주체를 의
미하는 ‘부녀’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농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당 중앙은 지식여성 중심의 부녀해방운동이 농촌의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다고 보고, 부녀정책을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에서
‘부녀가 생산에 참여하게 하는’으로 전환시킨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943년 關于各抗日根據地目前婦女工作方針的決定 (簡稱‘四三決定’)을 발 표하고, 整風運動 이전 부녀해방운동의 ‘부녀주의’에 비판을 가하였다.
즉 整風運動 이전의 부녀해방운동 방향성을 부정하고, 경제건설과 생산 참여를 부녀해방의 중심으로 확립하는 가운데, 개인적이며 사사로운 문 제로 여겨지는 ‘연애’는 여성 관련 담론 중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본고는 ‘혁명’과 ‘항전’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 던 시기에, 소위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연애’, ‘혼인’, ‘가정’ 등이 공 적 토론의 장에 등장하는 방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남녀평등’, ‘자 유연애’ 등을 중심으로 한 5.4시기 여성해방운동을 계승한 여성 지식인들 이 그들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연애’, ‘혼인’, ‘가정’과 같은 중 요한 문제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공적 토론의 장에서 논의를 진행하였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延安을 떠들썩하게 했던, 1937년 1월 紅軍 간부가 자신과의 혼인을 거부한 여학생을 살인한 사건이 공론화되는 방 식을 살펴봄으로써 ‘혁명’과 ‘연애’가 관계 맺는 양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집나간 노라’에서 ‘혁명부녀’로의 변모
5.4신문화운동시기 ‘노라’는 당시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여성 형상이 되었으며, 부모가 혼처를 정해주는 중매결혼 내지는 包辦혼인을 피해
‘집 떠남’은 이 시기 지식여성의 진취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 다. 이처럼 ‘5.4신문화운동’ 시기에 전개된 다양한 여성해방론 속에서 여 성의 ‘자유연애’는 큰 호응을 얻었고 대단히 중요시되었다.1) 그러나 다
른 한편으로는 신여성의 ‘자유연애’는 성적 방종으로 인식되기도 하였으 며, 신여성 역시 ‘세기말적 병태 분위기를 띠고 있는 근대 여성’, ‘자산 계급의 퇴폐와 향락을 드러내는 인물’로 간주되어 비판받기도 하였다.
‘노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여성해방론에서 사회주의 부녀해방론으로 이어지는 여성해방론의 조류 속에서, ‘자유연애’를 추종하는 ‘신여성’이 가졌던 부정적 의미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2)
그러나 5.4계몽정신을 이어받은 ‘신여성’의 목소리와 흔적을 전혀 찾 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延安에 합류한 여성들 중 많은 수가 5.4신문 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진보적인 지식여성들이었다. 공산당이 1934년 4월 반포한 「中華蘇維埃共和國婚姻法」은 큰 호응을 얻었고, 이 혼인법은 ‘가 정’ 내 여성의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여성이 가정 내에서의 권리를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게 하였다. 가부장적인 가족구조 아래에서 학대와 불평 등한 대접을 받았던 여성은 혼인법을 통해 남성과 대등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적지 않은 수의, 지식을 갖 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혁명’정권에 합류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항전’과 ‘혁명’은 적지 않은 지식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를 갖게 했고 1937년 이후 延安은 ‘항전’의 중심지가 되면서 젊은 여성 지식인이 延安으로 다수 유입되었다. 확실히 해방구는 제도적으로 여성 의 정당한 권익을 위해 여러 개혁을 진행함으로써 부녀해방운동을 전개 하는 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8년 3월 8일 제1차 婦女大會가 延安師範學校에서 열렸으며 陝甘寧 각 지역에서 婦聯合會의 성립이 정식 으로 선포되었다. 1939년 3월 8일에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활동 을 진행하였고, 1939년 7월 10일에는 여성 간부를 교육하기 위해 中國女 子大學를 창설하였다. 1939년 6월 1일 중국공산당이 창간한 첫 번째 여
1) 그리하여 지식인 여성과 ‘자유연애’를 추종하는 신여성이 5.4신문화운동과 함께 많이 소개되었고 그 의미도 많이 연구되었다.
2) 졸고, 2018 「整風運動 이전 延安 시기 여성 담론 고찰 : 中國婦女 (1939 1941)의
‘가정 담론’을 중심으로」, 中國小說論叢 54輯, 203쪽.
성 전문 간행물 中国婦女3)가 창간되었을 때 毛澤東은 다음과 같은 기 념글을 남기기도 했다.
부녀해방, 새로운 역량으로 나타나다, 2만명의 무리, 분발하여 힘이 있다.
남녀가 나란히 하여, 적을 제압한다. 해처럼 밝게 나타나서 적을 제압하니 어찌 승 리하지 않겠는가. 힘차게 투쟁하면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없으며 뜻이 있으면 반드 시 이루어진다.4)
이처럼 공산당 지도부가 일부 개혁된 여성관련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 면서 지식 여성들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적지 않 은 수의 신여성들이 延安으로 유입되었고, 진보적인 여성 지식인들은 다 양한 부녀조직에 가입하며 부녀운동을 진행하였다. 특히 여성들을 억압 해온 전통가족윤리에 대항하여 ‘남녀평등’, ‘연애 및 결혼자유’를 주장하 였고, ‘남녀평등’, ‘자유연애’와 같은 현대식 ‘혼인’ 및 ‘가정’ 개념을 延 安에 보급하여, 가부장적인 가족구조의 개혁을 어느정도 이끌어낼 수 있 었다. 1939년 延安지구는 혼인법규 「陜甘寧邊區婚姻條例」를 반포했는데,
“남녀혼인은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혼 후 여성이 아직 결혼하지 못하면 직업 재산이 없거나 노동력이 없기 때문 에 생활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여성이 재혼할 때까지 남성은 도움을 줘 야한다. 그러나 많아도 3년까지를 기한으로 한다”5)와 같은 ‘가정’ 내 여
3) 中國婦女 는 1939년 6월 1일 陝甘寧에서 창간되어, 延安의 中國婦女社에서 편집, 출판한 중국공산당이 창간한 첫 번째 간행물이다. 1939년 6월 1일 간행하기 시작하여 1941년 3월 폐간되어, 총 22期까지 출간하였다. 1939년 6월 1일부터 1940년 5월까지 총 12期, 1940년 6월부터 폐간되기까지 총 10期가 있다. 延安의 新華書店이 발행하 였고, 전국의 각 書局에서 대리 판매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新 中國婦女 으로 複刊되었다가 1956년 中國婦女 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1966년 文化 大革命이 발발하면서 정간된 후 文化大革命 종결 이후인 1978년 複刊되었다.
4) 婦女解放, 突起異軍, 兩萬之衆, 奮發爲雄。男女並駕, 如日方東, 以此制敵, 何敵不 傾。到之之法, 艱苦鬥爭, 世無難事, 有志竟成。 中國婦女 第1卷 第1期,中國婦女 出版社, 1939, 3쪽.
5) 董麗敏, 2016 「延安道路:從“婦女主義”到“家庭統一戰線” 兼論“革命中國”婦女解放理
성의 이익을 보호하는 항목으로 인해 여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가부장적 가족구조에서 억압받아온 부녀를 보호한다는 취지하에 서 마련된 혼인조례는 ‘남녀평등’, ‘자유연애’ 등을 중심으로 한 5.4시기 여성해방운동을 일정정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희망을 안고 공산당의 근거지 延安에 합류한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으 로 陳學昭를 들 수 있는데, 그녀가 쓴 延安訪問記 의 도입부는 延安이 라는 도시에 대한 호기심을 보여주고 있다.
항전이 시작된지 이미 1년이 지났는데, 일반인의 머릿속에 延安은 여전히 신비하 며, 마치 그림과 같이 한 면만을 보고 전체를 보지 않는다. 延安은 신비하고 이상 한 도시인가? 통일전선 후의 延安은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 그리고 항전 중의 延安은 어떠한 동태를 보이는가? 특히 그곳의 사람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내가 알고 싶으나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결국, 나는 延安에 와서 짧은 시간동안 체류하기로 결정하였고, 나는 나의 의문에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이라 생각한다.6)
그러나 이러한 여성해방운동 조류는 농촌 사회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당 중앙에서는 농촌 가정 내에서의 갈등을 조율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여성해방사상을 지닌 신여성의 등장은 ‘남녀평 등’, ‘연애 및 결혼자유’ 등의 여성해방론과 기존의 가부장적인 전통 혼 인관의 충돌을 가져왔다. 특히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는 수가 점차 늘어 나, 1938년에서 1943년까지 陜甘寧邊區에서의 이혼건수는 총 807건이었 는데, 그중 1943년 판결한 이혼 건수는 302건에 달하였고, 이는 1938년 의 3.36배에 해당하는 수였다. 1944년 각 縣에서의 이혼 안건은 65건에
論的生成問題」, 婦女研究論叢 6, 23쪽.
6) 抗戰已經一年多了。在一般人的腦子中,延安依然是很神秘的,好比一幅圖畫,只見 到一角,不見整個。延安是不是這樣的神秘古怪?統一戰線後的延安,可有什麽改變?
及抗戰中的延安,是怎樣的動態?特別是那裏的,那裏的人是怎麽生活著的?這些都是 我想知道而不得的。結果,我決定跑到延安去做一個短時間的逗留。我想我的疑問或 者會得到一個清楚地回答。陳學昭, 2013 延安訪問記 , 中國國際廣播出版社, 6쪽.
달하는데 여성이 이혼을 요구한 것이 52건으로 80프로에 해당되었다. 이 에 전선에서 ‘항전’하던 남성 농민들이 이혼에 대한 우려로 고향으로 돌 아오기도 하고, 다시 혼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빈농들이 전처를 둘러 싸고 싸움을 벌이는 등 여러 문제가 생겨났다.7) 농민들의 지지를 절대적 으로 받고 있었던 당 중앙은 농민 가정 속에 발생하는 이와 같은 문제 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부녀해방운동 관련한 논쟁을 가져왔다. 많은 부녀들이 婦女隊에 참여하면서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이혼을 요구하거나 전방에 가서 일하고자 하였다. 부녀들의 생활 개선 및 자유에 대한 요구는 가부장적인 ‘가정’의 반대를 가져왔고, 이는 민족 단결과 통일전선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인식되어졌다.8) 불만을 느낀 남성 농민들로 인해 성별 간의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농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공산당 지도부는 가부장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남성 농민들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여성이 주체적인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서 ‘가정’ 내 남성 농민의 이익에 저촉되지 않아야 함은 당시 여성 논자들의 글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中國婦女 에 실린 여성 논자 蘇華9)의 글 속에는 가부장적 제도 안에 서 고통받는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과 함께 ‘가정 내에서의 화목’을 제창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가족구조 아래에서 학대와 불평등한 대접을 받았던 많은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남성과 대등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 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으나 ‘항전’과 ‘혁명’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가족구조에서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하기가
7) 董麗敏, 2016 「延安道路:從“婦女主義”到“家庭統一戰線” 兼論“革命中國”婦女解放 理論的生成問題」, 婦女研究論叢 6, 20쪽.
8) “婦女一般的要求改善生活和自由,會激起封建頑固份子的反對,這就破壞了民族團結 和統一戰線。” 葉華, 「贛江東西的婦女工作」, 中國婦女 第1卷 第8期,中國婦女出 版社, 1940年, 29쪽.
9) 蘇華(1908 2008)의 본명은 黃德馥으로,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1938년에는 中共莆田中心縣委書記을 역임하고, 1949년 이후로는 月起任省總工會女工部部長, 省 婦委書記, 省婦聯主任兼黨組書記 등을 맡은 바 있다.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가정 내 우애와 화목이 있어야함을 주장하며 부녀를 경시하는 구풍습을 타도한다”10)에서 알 수 있듯이 蘇華는 여성 의 권리와 함께 가정의 화목을 제창함으로써 양성 간의 갈등을 방지하 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절대적 지지층이었던 남성 농민들의 이익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느 낀 당 중앙은 점차 ‘가정화목’을 전면에 내걸게 되었고 당시 여성 전문 간행물 中國婦女 (1939 1941)에서는 여성의 권익과 ‘가정화목’을 둘러 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당 중앙의 ‘가정화목’ 제창은 남성 농민의 지지를 가져왔으나 ‘부녀’ 생활 개선 및 권익 추구 면에서 한계점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의 주체적 권리 향유를 주장하는 여성 들, 예컨대 亞蘇는 “가정의 화목과 가정통일전선의 건립만을 고려하고 투쟁을 잊어버렸고 이렇게 후퇴된 정책으로 인해 투쟁을 두려하여 봉건 세력에게 굴복과 타협을 드러내게 되었다”11)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위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연애’, ‘가정’과 같은 여성들의 경험이 공적영역의 의제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신여성의 ‘연애’와 ‘혁 명’ 간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규명한 글로는 史容의 「論新女性的戀愛觀」
이 있다.
우리는 먼저 혁명의 이익이 모든 것의 위에 있으며 우리 개인의 이익은 반드시 혁 명의 이익에 복종해야함을 분명히 인식해야한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연애문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연애문제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반대하거나
10) 反對買賣和媒妁的婚姻,同時也反對輕易離婚的舉動。一方面反對丈夫、婆婆不人道 地打罵妻子和兒媳;另一方面主張家庭裏要有友愛的和睦,同時打破一切輕視婦女的 舊習氣。蘇華, 「 獲得民主權利的陝甘甯邊區婦女」, 中國婦女 第1卷 第7期,中國 婦女出版社, 1939年, 21쪽.
11) 亞蘇認爲,是因爲在建構家庭統一戰 線的時候缺少“鬥爭”這一前提,沒有將“鬥爭”作爲 建構“聯合”的必要步驟: “第一,只顧到了家庭的和 睦—— —即只顧到家庭統一戰線 的建立,而忘卻了鬥爭(即統一戰線只有在鬥爭中才能生長發展和擴大的基本真理);
二,由于這樣造成了退卻的政策,怕鬥爭,向封建勢力表示了屈服和妥協。亞蘇, 「二三 婦女工作意見談」, 中國婦女 第2卷 第3期,中國婦女出版社, 1940年, 41쪽.
찬성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적당하게 자신의 연애와 혁명의 이익을 일치시킬 것인 지를 구해야 한다.”12)
「論新女性的戀愛觀」의 저자 史容는 신여성의 ‘연애’와 ‘혁명’ 담론을 결부시키며, “오늘날 항전 시기에 혁명 투쟁 속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연애문제를 해결할 것인가”13)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혁명부녀’의 ‘연 애’와 ‘혁명’의 이익을 함께 논하고 있으나, ‘혁명’ 이익이 ‘연애’보다 우 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집나간 노라, 자 기 욕망에 충실한 ‘신여성’에서 ‘혁명부녀’로의 변신은 신속하게 이루어 졌고 가장 사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연애’, ‘혼인’, 그리고
‘가정’까지도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14)
3. ‘혁명’ 실천의 장 속으로 편입된 ‘연애’
‘연애’는 내면과 감정, 사랑이라는 내밀한 감정에 수반되는 감각을 기 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혁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개인성의 추구를 어
12) “我們首先要認識清楚革命的利益是高於一切,我們個人利益必須服從革命的利益,
我們今天對於自己的戀愛問題也應該這樣來處理。正因為如此,我們對於戀愛問題不 是抽象的反對或贊成,而是如何適當的使自己的戀愛和革命利益求得一致。” 史容,
「論新女性的戀愛觀」, 中國婦女 第2卷 第5期,中國婦女出版社, 1940年,18쪽.
13) “在今天,在抗戰時期,在革命鬥爭中的我們應該怎樣解決戀愛問題呢?” 史容, 「論 新女性的戀愛觀」, 中國婦女 第2卷 第5期,中國婦女出版社, 1940年,12쪽.
14) 혼인은 조직의 요구와 ‘혁명’의 필요에 따라 진행하게 되었고, 연애도 제한받게 되었 으며 남녀 청년의 연애는 모두 조직의 허가를 거치지 않으면 비판을 받게 되었다.
陳小英, 「 中國婦女 (1939 1941)中女性婚戀話語研究」, 湖南醫科大學學報:社會 科學版 , 2009, 52쪽. 혼인은 조직의 요구와 ‘혁명’의 필요에 따라 진행하게 되었고,
‘연애’도 제한받게 되었으며 남녀 청년의 ‘연애’는 모두 조직의 허가를 거치지 않으 면 비판을 받게 되었다. 陳小英, 2009, 「 中國婦女 (1939 1941) 中女性婚戀話語研 究」, 湖南醫科大學學報: 社會科學版 , 52쪽. 졸고, 2018 「整風運動 이전 延安 시기 여성 담론 고찰 : 中國婦女 (1939 1941)의 ‘가정 담론’을 중심으로」, 中國小說論 叢 54輯, 204쪽에서 재인용.
떻게 볼 것인가? ‘혁명’과 ‘항전’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하는 전시 상 황에서 주관적, 감성적, 개인적 문제인 ‘연애’와 ‘혼인’은 객관적, 이성적 담론으로 범주화될 수밖에 없었다. 즉 ‘연애’와 ‘혼인’에 대한 주관적 감 상의 표출은 금지되고, 개인의 은밀한 생활은 ‘혁명’ 실천의 장 속으로 편입되었다.
이처럼 ‘연애’와 ‘가정’ 및 ‘혼인’이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여성 의 ‘연애’는 ‘혁명’ 활동과 대척인 지점에 놓이게 된다. 區夢覺는 「 改造 我們的思想意識」에서 여성당원의 사상개조를 요구하며 소자산계급 출신 의 여성 지식인을 비판하고 있다.
(여성은) 협소하고 자질구레하며 정치문제에 대한 흥미가 높지않고 힘의 대부 분을 보잘 것 없는 말 한 마디에 주의를 기울인다. 개인 문제에 대해, 누가 결 혼하고, 누가 이혼하고 같은 남들 일에 흥미진진해하며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 는다. 심지어는 주관적인 억측으로 당과 대립하기도 한다...여성 당원은 감정을 중시하고...문제를 처리할 때 개인의 감정에서 출발하며...그 입장은 당이 아닌 개인의 관점이다...남편이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를 원하고 그가 일로 바빠서 만 족을 주지 못하면 고민하고 슬퍼한다.15)
이 글에서 區夢覺는 여성이 ‘혁명’과 ‘항전’과 같은 정치문제에는 흥미 가 낮고 사적 영역의 결혼, 이혼 등의 보잘 것 없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 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여성은 “주관적인 억측으로 당과 대립하기 도 하고...감정을 중시하고...문제를 처리할 때 개인의 감정에서 출발하
15) 狹窄瑣碎,對政治問題興趣不高,把精力的最大部分注意一針一線、 一言一語。對私 人問題,誰結婚,誰離婚,張家長、李家短的小廣播,津津有味,刺刺不休。甚至爲 了這些事,主觀的揣測,把它片面化而與黨對立起來...重感情...處理問題多從個人感 情出發...立腳點不是站在黨的方面,而是站在個人的方面... 要求于丈夫的是溫情安 慰,如果他忙于工作,不能給予滿足,則苦悶悲哀。區夢覺, 1982 「改造我們的思想 意識」, 陝甘甯邊區婦女運動文獻資料選編1937 1949 ,內部發行, 173쪽, 王亞莉, 2016 陝甘甯邊區婦女婚姻生活研究 從女性、婚姻與革命關系的視角考察 ,山西大 學 博士學位論文, 188쪽에서 재인용.
며...그 입장은 당이 아닌 개인의 관점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성의 속성으로 감수성, 주관성을 내세우고 이를 남성성보다 열등한 의미로 해 석하고 있다.
혁명의 이익을 위해 일하려면 연애와 생활이 당의 업무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남편의 위안을 얻지 못해 고민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의 이익에 위반되는 사람에게는 동지의 태도로 권고, 비판해야 한다. 감정에 의해 끌려가서는 안 된다. 남편이 있는 여동지는 연애, 혼인, 출산은 필연적임을 이 해해야 한다. 남편과 아이에게 미련을 가지면서 일에 대해 원대한 포부를 갖는 모순으로부터 뛰쳐나와야 한다. 남편과 아이에게 많이 주의를 기울이려면 많이 일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이 더 큰 일을 하려면 남편과 아이를 잘 보살필 수 없 다. 두 개의 길 중 반드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혁명의 남편을 잘 보살 피고 혁명의 후손을 잘 키워야 한다.16)
‘혁명’과 ‘항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기였던 만큼 사적형식으로의
‘연애’ 방식을 새로이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인용문에서 논자는 “혁명의 이익을 위해 일하려면 연애와 생활이 당의 업무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도, “남편이 있는 여동지는 연애, 혼인, 출산은 필연 적임을 이해해야한다”는 상반된 주장을 피고 있다. 인용문 첫 번째 줄
‘연애’는 개인의 주체적 욕망을 의미한다면, 네 번째 줄의 ‘연애’는 부녀 의 역할로 규정된 결혼과 출산을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공적 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본래 사적인 영역으로 인식되 어 온 ‘연애’가 사적인 의미와 공적인 의미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올바른 자녀 양육을 책임지고, 남편의 공적활동을 도움으로써 “혁명의 남편을 잘 보살피고 혁명의 후손을 잘 키워내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즉 여성에게 있어
16) 區夢覺, 「改造我們的思想意識」, 1982 陝甘甯邊區婦女運動文獻資料選編1937 1949 , 內部發行,176쪽, 王亞莉, 2016 陝甘甯邊區婦女婚姻生活研究 從女性、婚姻與革 命關系的視角考察 ,山西大學 博士學位論文, 188쪽에서 재인용.
‘혁명’의 길은 “연애, 결혼, 출산을 통해 혁명의 남편을 잘 보살피고 후 손을 잘 키워내는” 것이며, 여기에서 ‘연애’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지니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애’와 ‘혼인’이 범주화되고 공론화된 것은 5.4 신문화운동 시기 ‘자유연애’ 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은 신여 성과 지식인 세계에 한정된 계몽적 성격을 띤 것이다. 延安시기의 ‘연애’
는 근대적 의미의 낭만적 사랑, 그리고 계몽적 성격을 지닌 ‘자유연애’
담론과 달리 ‘혁명’의 실천을 의미한다. ‘연애’를 둘러싼 인식과 표현방 식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사유와 행동양식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식 ‘연애’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벗어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무가 강조됨으로써 근대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조우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 5.4신문화운동 시기의 지식인 남성이 신여성 담론이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타자화시켰듯이 延安시기의 여성들 또한 국가 담론에 의해 타자화되었다. 여성의 역할을 “혁명의 남편을 잘 보살피고 혁명의 후손을 잘 키워내는” 것으로 제한한 것에서 알 수 있 듯이 항전체제 시기 여성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시도로 여성성을
‘가정’의 범주로 제한시켰다. 여성성을 ‘가정’의 범주로 제한하는 이 같 은 전략은 여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5.4신문화운동 시기 여성의 연애를 성적방종으로 치부하였던 남성중심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延安시기에는 여성의 ‘연애’가 ‘혁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성의 추구로 인식되어, 억압되었으며 주변인들의 호기심의 대 상으로 전락되기도 하였다.
항전시기 여성성을 ‘가정’의 범주로 제한하는 이 같은 전략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억압은 여전히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혁명’과 ‘항전’이 가 지는 정당성으로 인해 여성의 억압은 더욱 은폐되고 제기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丁玲은 1942년 3월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三八節 有感」이라는 제목의 글로, 延安 사회 내의 여성문제를 언급하는데, 이 글로 인해 丁玲은 이후 지속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그녀들의 결혼은 늘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한편,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성들은 남성 동지와 친해서는 안 되며, 몇 남성 동지와 친해지는 것은 더욱 안 되는 일이다. 그들은 화가들에게서 “과장(科長)에게 시집갔는가?”라는 얘기 를 듣는다. 시인들도 “延安에는 말 타는 지도자만 있고, 예술가 지도자는 없다.
예술가는 延安에서 아름다운 정인을 구할 수 없다”고 투덜댄다. 또 어떤 곳에 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제기랄, 우리 노간부를 무시해서, 촌놈이라 고 하는데 우리 촌놈이 아니면 너희들이 延安에 와서 쌀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여성은 언젠가 결혼해야 한다.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악이며 루 머의 대상이 되어 영구히 모욕당하게 될 것이다.) 17)
丁玲은 이 글에서 전시 상황에서 여성이 처한 여러 문제점들, 예컨대 여성의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가부장적 인식과 여성을 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을 지적하는 한편, 여성들이 남성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丁玲은 이 글에서 공산당의 근거지에 합류한 여성들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구하면서도, ‘혁명’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 고 있다. 그러나 丁玲의 「三八節有感」이 발표된 후 毛澤東의 반응은 다 음과 같다.
延安 문예좌담회 3차 회의 중 단체 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 毛가 물었다. “丁玲 동 지는 어디에 있나요? 좀 가까이 와서 찍으라고 해요. 내년에도 또 「三八節有感」
쓰지 말고.” 毛는 丁玲이 자기와 세 명 떨어져서 朱德 옆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18)
17) 女同志的結婚永遠使人注意,而不會使人滿意的。她們不能同一個男同志比較接近,
更不能同幾個都接近。她們被畫家們諷刺:“一個科長也嫁了麽?”詩人們也說:“延安 只有騎馬的首長,沒有藝術家的首長,藝術家在延安是找不到漂亮的情人的。”然而 她們也在某種場合聆聽著這樣的訓詞:“他媽的,瞧不起我們老幹部,說是土包子,
要不是我們土包子,你想來延安吃小米!”但女人總是要結婚的。(不結婚更有罪 惡,她將更多的被作爲制造謠言的對象,永遠被汙蔑。)丁玲(郜元寶), 2010 三八 節有感 , 北京廣播學院出版社, 5쪽.
18) 朱鴻召, 1999 「丁玲到延安後的思想波瀾」, 炎黃春秋 , 7期.
丁玲의 「三八節有感」은 毛澤東에게 한 여성 작가의 투정 정도로만 인 식되고 있었다. ‘혁명’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丁玲의 발언은 사소하면 서도 별 것 아닌 화법으로 치부된 것이다. 丁玲의 예를 통해 보았을 때 여성들 스스로가 억압 받는 실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었다.19)
4. ‘연애’ 속의 총성
1937년 1월 延河邊에서 한 홍군 간부가 한 여학생을 살해한 사건은 延安 시기 남녀간의 ‘연애’관에 있어서의 충돌을 보여준다. 中國人民抗日 軍政大學의 第15隊 隊長 黃克功이 16세 여학생 劉茜를 불러내 혼인 문 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살인을 저지른 이 사건은 당시 延安을 떠들썩하 게 했다. 劉茜는 山西省 출신으로, 蘆溝橋사변 발발 이후 유복한 집안을 떠나 延安으로 향하였으며, 中國人民抗日軍政大學의 第15隊 학생으로 입 학하였다. 26세의 黄克功은 江西省 출신으로, 소년시기 紅軍에 가입하여, 井岡山 투쟁과 장정에 참여한 바 있으며 抗大 第15隊 隊長을 맡으면서 劉茜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抗大에서 약5주간 연애기간을 가졌고 구 두로 혼인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후에 혼인을 취소하고자 했던 劉茜에게 黄克功은 ‘혁명’군인인 자신을 농락하고 명예를 손상시켰다며 화를 냈고, 결국 논쟁 끝에 권총으로 劉茜를 살해한다. 다음은 劉茜가 黄克功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한 부분이다.
나는 나의 애인이 정신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래요.
나는 당신이 친구 혹의 사랑하는 사람의 지위에서 당신의 여동생을 지도해주기를 바래요. 가능할까요? 당신에게 이르노니, 아니! 솔직히 말해서 (직설적으로 말해서) 사랑은 물질이 아닌 의지와 인식의 서로 같음에서 세워지는 거예요. 당신은 물질을
19) 허구이메이(賀桂梅), 2003 「지식인, 여성, 혁명 딩링(丁玲)의 사례를 통해 본 延安 의 대안적 실천과 신분정치」, 황해문화 40집, 363쪽.
나에게 바치지 말아요. 이는 당신이 내게 보내온 돈과 물질을 거절한 이유입니다.
다시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어떤 마음에서였든지, 무의식적으로 친구를 우롱하는 행위를 한 겁니다
(...)
우리 모두 연애의 자유가 있고, 누구도 상대방의 교우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당신 은 의아하겠지요! 친구! 이 말은 이론서에서 찾은 것이에요.
돈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주어서는 안돼요. 부디 전방의 전사 가 쓰도록 주세요!
우리, 광의적 의미에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지요! 국가의 생사존망이 눈앞에 펼쳐져있고 4만여 동포가 우리들의 사랑을 구하고 있어요! 그런가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당신은 더욱 대중을 사랑해야 해요! 이것은 나의 희망이예요.20)
劉茜는 ‘남녀평등’, ‘연애 및 결혼자유’ 등의 여성해방론에 영향받은 신여성이자 ‘항전’에 대한 의지도 불태우는 애국여성이었다. 16살에 불과 했던 劉茜이지만 10살 차이가 나는 상사 黄克功에게 편지로 충고를 건 낼 만큼 담대하고 의지가 강한 학생이었다. 「中華蘇維埃共和國婚姻條例」
에 따르면 당시 남자는 만 20세, 여자는 18세가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 었다. 그렇다면 黄克功가 16살에 불과했던 劉茜에게 물질적 지원을 하면 서까지 구애하고 결혼 승낙을 얻고자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통계에 의하 면 이 사건이 발생한 1938년을 전후로 延安에서의 남녀 비율은 30:1, 1941년에는 18:1로, 남녀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해 여성들은 ‘연 애’ 및 ‘혼인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또한 ‘혼인은 조직과 지도자의 안배에 따라 진행되었고, 젊은 여성 중 대부분은 원로 紅軍, 청년 영웅
20) 就直接說我, 愛情不是建立在物質上的, 而是意志、認識的相同。你不應把物質來供 我, 這是我拒絕你送我錢和用品的原因。 希望你不要那般地了, 你無形中做了侮辱朋 友的行爲, 不管你是知何的用心。(...)我們都有戀愛的自由, 誰都不能幹涉對方的交 友 ! 你或者在驚奇吧! 朋友! 這話是從正確的理論書上得來的。 這錢嗎? 假如你愛 我, 就不應給我, 請你給前方戰士用好了! 我們還是講講廣義的愛吧! 整個國家的生死 存 亡擺在眼前, 四萬萬多的同胞正需要我們的愛哩! 你說是嗎? 你愛我嗎? 而你更應 愛大衆 ! — 這是我的點許希望。「劉茜致黃克功信」, 陝西省檔案館存, 朱鴻召, 2000 「戀愛中的槍聲」, 上海文學 5月號,57쪽에서 재인용.
들과 결혼해야 했다. 丁玲이 「三八節有感」에서 “여성은 언젠가 결혼해야 한다.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악이며 루머의 대상이 되어 영구히 모욕당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혁명’ 정권 하에서 혼인법 등을 통해 가부장적인 가족구조의 개혁을 어느정도 이끌어냈지만, 여전 히 많은 한계점이 존재하였다. 여성해방사상을 지닌 신여성 劉茜가 지닌
‘남녀평등’, ‘연애 및 결혼자유’ 등의 애정관과 어려서부터 전장을 누빈 홍군 黄克功의 가부장적인 혼인관은 충돌을 가져왔고, 이는 비극적인 결 과를 빚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黄克功이 劉茜를 권총으로 살해한 후, 반성 또는 후 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혁명’ 군인인 자신을 농락했다고 분 개해하고, 초심에서 사형을 판결받자 불만을 품고 毛澤東에게 진정서를 보내어 마오쩌둥이 이 일을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또한 당시 많은 紅軍 간부들이 공을 세워 속죄할 수 있도록 그의 사형집행을 면해 달라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劉茜가 사실 국민당 군과 은밀히 연애를 하 고 있었기 때문에 黄克功과의 혼인을 거부한 것이라는 거짓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문: 너는 그녀가 올해 몇 살인지 아는가?
답: 알고있다. 16세이다
문: 그녀가 몇 살인지 안다면 왜 그녀와 결혼하려 했는가?
답: 그녀의 몸은 이미 발육이 다 되어 16세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라를 팔아먹 은 도적이 아니다. 나는 일본제국주의를 증오한다. 그녀가 공개적으로든 비공개 적으로든 나의 명예를 훼손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죽인 것이다.21)
21) 問 : 你知道她今年多大年紀嗎?
答 : 知道, 16歲。
問 : 既知道她多大年紀,
答 : 她的身體已發育完全了, 不像是十六歲的人。……我並非漢奸賣國賊, 我還恨 日本帝國主義。因爲她公開或不公開的破壞我的名譽, 故我恨她才打死她。 「黃克功 案公審記錄」, 陝西省檔案館存, 朱鴻召, 「戀愛中的槍聲」, 2000 上海文學 5月號,
59쪽에서 재인용.
전시체제 하에서 전쟁에서의 승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은 한 여학생의 비극적인 죽음을 은폐시키고 왜곡시켰다. ‘혁명’과 ‘항전’에 대항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던 여학생의 가족은 ‘혁명’ 정권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혁명’의 길은 사적 영 역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가졌고 이러한 관념은 한 남성 혁 명가의 여학생 살인 행위에도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많은 논란 끝에 毛澤東은 당시 “사람을 죽이면 자신의 목숨으로 보상한 다”는 규정대로, 그 해 10월 11일 사형을 선고하였고, 많은 군중과 紅軍 간부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집행 장면을 지켜보았다.
5. 나가며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출범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희망을 노동자와 농민 계층에게 부여하였으며, ‘혁명’은 분명 여성들에게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가부장적 구조 아래에서 학대와 불평등한 대우 를 받았던 여성들은 주체적 권리를 지니고, 남성들과 대등한 사회적 역 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현대여성’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여성상이 창출 되는 과정 및 사회주의 건설과 여성해방 간의 복잡한 관계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전족으로 상징되듯 가부장적 구조 하에서 고통 받았던 중 국 여성이 사회주의 중국 체제에 의해 공적 영역으로 동원되는 과정을 통해 ‘전통여성’에서 오늘날 ‘현대여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이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주의식 ‘연애’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벗어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무가 강조됨으로써 근대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조우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회주의식 ‘연애’의
기틀이 마련된 延安시기에 진행되었던 사회적 삶을 사는 여성들의 소위
‘사적경험’을 공론화시키는 작업은 사회주의 중국 체제에서의 여성이 공 적영역에 등장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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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이메이(賀桂梅), 2003 「지식인, 여성, 혁명 딩링(丁玲)의 사례를 통해 본 延安의 대 안적 실천과 신분정치」, 황해문화 40집, 새얼문화재단, 350 376쪽, 여기서는 3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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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鴻召, 1999 「丁玲到延安後的思想波瀾」, 炎黃春秋 . 朱鴻召, 1999 「戀愛中的槍聲」, 上海文學 5月號.
<Abstract>
The Practice of ‘Revolution’ and Practical ‘Love’:
Focused on the Meaning of ‘Love’ in the Yenan Era of CCP
YUNSU KIM
(Duksung Women’s Univ.)
‘Love’, among various feminist theories deployed during the ‘May Fourth Movement’
period, naturally won immense responses as it made many women to realize the evils of patriarchal and feudal cultures, which were the issues that concerned them. The word
‘love’ was introduced by the West and referred to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two persons who are in love with each other’. Love was perceived as an exclusive property of modern women who became familiar with the Western culture through learning.
Women’s experiences that are considered private such as ‘Love’ and ‘Family’ had been also discussed as topics in public sphere in the Yenan Era. ‘Love’ in the Yenan Era referred to practice of revolution rather than romantic love in modern sense and ‘Free Love’ of enlightening nature. The perception of love and the method of expression regarding ‘Love’ and marriage became the reason and patterns of behavior of ideological nature. The discourse on love during this period emphasized on the responsibilities toward the society beyond the individualistic nature and created a new method that combined private and public spheres of modern age.
Like the male centered theory which regarded women’s ‘Love’ as sexual laxity during the ‘May Fourth Movement’, women’s love was considered as a pursuit of individuality which does not return to revolution, thereby suppressing the suffering during the Yenan Era and degenerating into the subject of lascivious curiosity. Moreover, the suppression of women continued during the wartime due to the strategy that limited femininity to the scope of ‘family’ and was concealed even further due to the justification claimed by revolution and resistance to Japan.
Key words : Love, Revolution, Yenan Era, family, women
투 고 일 : 2018년 7월 10일 심사완료일 : 2018년 8월 10일 게재확정일 : 2018년 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