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 저자([email protected])
보령군 성주사지에서 부여군 무량사 가는 길
외로운 그림자가 뒤를 돌아보다
사시사철 어느 때나 가면 좋은 곳이 있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가을이면 가을, 겨울이면 겨 울. 그곳에 가면 마음이 서늘해지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곳. 보령의 성주사지와 부여군 외산 면의 무량사라는 절이다.
쌀 씻은 물이 10리나 흘렀던 성주사의 성쇠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사찰 성주사는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聖住 山) 아래에 있다.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바로 성주사라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1960년에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확인되었다.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 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며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 주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가 김양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였고 주 지가 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의 기록에 따르면 성주사는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한 다. 미루어 짐작하면 성주사의 규모는 천여 칸에 이르렀을 것이다. 성주산파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은 한때 약 2500명의 승려들이 모여 도를 닦았을 정도로 번창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피해 우리 옛길 걷기 42
성주사지 전경
키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이 남아있는 성주사
이 절에는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의 하나이자 국보 제8호 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최치원의 사산 비문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 부도비와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비와 성주사의 낭혜 화상백월보광탑비를 말하는데 특히 낭혜화상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었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의 여반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뒷날 중 국이 선풍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 했던 낭혜화상의 비는 신라 진성왕 4년에 세워졌다. 당시로서는 가장 큰 비였는데, 전체 높이가 4.5m에 달하는 듬직하고 거대한 외형에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다. 신라시대의 석비를 대표 하는 이 비는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 수를 비롯해 4면에 운룡문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이 비에는 낭혜화상의 행적이 모두 5천여 자 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글은 최치원이 지
었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연이 썼는데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주사지에는 이 탑비 외에도 신라 말에 건립된 4기의 석탑이 있다. 보물 19호인 성주사지 오층석 탑과 보물 20호인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및 조 각수법이 뛰어난 보물 47호 성주사지 서 삼층석 탑, 그리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0호인 성주사 지 동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있다. 바람 한 점 없 는 폐사지의 탑 밑에 앉아 백제의 기왓장을 들춰 내며 한나절 보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일 것이지 만 마음뿐, 길은 다시 부여의 만수산 자락에 있는
도착 만수산
옥마산
심연동 계곡
보령 시청
성주사지보령
무량사 외산면
만수산 자연휴양림 성주산
자연휴양림 보령 석탄박물관
보령산 모린공원
성주면
김시습과 한명회의 일화
만수산 입구에 서 있는 나무장승은 여전히 변함없다. 하나둘씩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세워지는 장승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김시습(金時習)을 만나러 갔다. 김시습은 500여 년의 세월 저편 에서 부도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시습은 자 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으로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고, ‘한 번 배우면 곧 익힌다’라고 하여 이름도 시습이 되었다. 당 시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장래에 크게 쓰겠다”라는 전지도 받았다. 그는 13세까지 수찬 이 재전과 성균관 대사성 김반, 그리고 윤상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해 예기와 제자백가 등을 배 우다가 그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 에 태운 뒤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관동지방과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과 전 주,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전주에서도 그가 한겨울을 보냈 다는 연유 탓인지 전주객사 동익헌 쪽에 매월당이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채 흔적이 없다.
김시습은 31세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 집의 당호를 매월당이라 이름을 붙인 후 그곳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여러 책들 을 지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여러 절들을 전전하던 김시습은 47세가 되던 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기도 했으나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 의 길에 나선다.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 폐위 사건을 일으킨 한명회와 김시습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서울의 압 구정동에 남아있다. 압구정(鴨鷗亭)은 당시 세도가였던 한명회가 한강에 화려한 정자를 지은 뒤 명나라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인 예겸에게 청해 받은 이름이다. 그곳을 찾아온 시인묵객들이 경 치를 감탄하는 현판들을 걸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自首臥江湖”
압구정에 놀러가 이 현판을 들여다보던 김시습이 이 글을 다음과 같이 고쳐놓았다.
“청춘에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靑春危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自首汚江湖”
김시습이 扶를 危로, 臥를 汚자로 고치자 그 글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럴듯하다고 하였다. 나중 에 이 현판을 본 한명회는 결국 현판을 떼어내고 말았다.
우리 옛길 걷기 42
“한 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 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서 스스 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경청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기 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융통하 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남음이
있다.”
다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 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라면서 불우했던 그의 한 평생을 애석해 했다. 김시습은 50대에 이르러서 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가 구석 구석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 든 곳이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 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 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버릴 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였다.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 는 없지만 불만이 가득한 김시습의 초상화가 지나 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59세에 무량사 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므 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 두었다가 3년 후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 시습의 안색은 생시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 식으로 다비를 하였다. 이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 웠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은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 를 사모하여 학궁 곁에 사당을 지은 뒤 청일사라
김시습 초상화
오래된 인연이 닿는 곳, 무량사
무량사 부도밭에서 무량사로 가는 길은 나무가 총총히 우거져 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는 당 간지주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무량사가 보인다. 그윽하고도 기품이 넘친다. 무량이란 셀 수 없 다는 표현으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것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무량사다. 내가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순간마저도 셀 수 없는, 지극히 오래인 그 인연 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수산 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사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고승인 무염국사가 머물렀다고 하지만 범일국사(810~889)는 문무왕 재위기간(661~680)과 훨씬 동떨어진 후대의 인물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명주 굴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기 때 문에 그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때 크게 중창한 것으 로 보인다.
조선시대엔 선승으로 이름이 높은 김제 출신의 진묵대사가 이 절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였고, 만수산 기슭에서 나는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며 몇 수의 시를 남겼다.
우리 옛길 걷기 42
무량사 일주문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내 장삼을 천하곤륜산에 걸어두도다.”
그러나 진묵대사는 당시 조선에 휘몰아쳤던 기축옥사로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을 때 그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았던 정여립과의 관계가 있을 법한데 아무런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산대사 휴정이나 사명당 유정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온몸을 다 바쳐 나라 를 위해 일어났을 때에도 진묵대사는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 대해서만 은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던 것을 우리들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진묵대사는 이 절과 완 주 서방산의 봉서사 그리고 모악산의 수왕사를 비롯, 전라도 일대의 절들에 기행과 술에 얽힌 일 화들을 많이 남겼다.
무량사 부도군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뿐이고
무량사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화재를 입었으며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다. 천왕문 을 들어서면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뒤 에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보물 185호)은 창건 당시부터 이 절을 지켜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완만한 지붕돌과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룬 채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주는 모습의 처 마선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장하리 삼층석탑, 은선리 삼층 석탑과 같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 탑의 제1층 몸돌에서는 금동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발견되었고, 5층 몸돌에서는 청동 합 속에 들어 있는 다라니경과 자단목 등 여러 점의 사리장치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 린 것을 인조 때에 중건한 무량사의 대웅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 황전, 그리고 마곡사의 대웅보전처럼 특이하게 지어져 있다.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인 2층 목조건물은 밖에서 보면 2층 건물이지만 내 부는 위 아래층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하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정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기둥의 높이는 14.7m나 된다. 중앙부의 뒤쪽에 불당이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 ‘소조아 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본존상인 아미타불(5.4m) 좌우에는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 (4.8m)이 배좌하고 있는데,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 랑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불사의 복장유물에서 발원문이 나와 조성연대와 조성연유, 조성자가 밝혀졌다. 조성 연대는 1633년(인조 11) 6월이다.
절을 둘러보는 사이 햇살이 뉘엿뉘엿해진다. 다시 오리라,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옮겨 ‘만수산 무량사’라고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나설 때 매월당의 시 한수가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이고 삶이란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것이었고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결 같은 것이었노라고.”
우리 옛길 걷기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