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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8차시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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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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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8차시 강의록

담당교수: 윤 휘 탁(교양학부)

고려의 민족통일

 후백제의 멸망:

 후백제 군대는 고창전투(930), 운주전투(934)에서 고려군에 패배

 견훤은 지나치게 무력에 의존, 백성을 혹독하게 다뤄 민심을 상실

 935년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자, 큰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견 훤을 폐위, 김제의 금산사에 연금하고 왕이 됨

 견훤은 10월 탈출하여 고려에 망명, 복수하기 위해 고려군 안내

 936년 왕건은 선산과 황산전투에서 후백제군 격파, 완산주 점령하고 후백제를 멸 망시킴

 신라의 멸망:

 935년 10월 신라 경순왕은 자진해서 고려에 항복

→ 고려의 민족통일은 자주적, 발해 유민 수용은 발해 계승을 의미

고려의 왕권 강화

 왕건의 세력 확장과 왕권 강화:

 호족 포섭: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지방호족의 지원 얻기 위해 노력

 자기편으로 넘어온 호족에게 관직, 명예직, 왕(王)씨 성 하사

 호족이 원할 경우 개경으로의 이주도 허가

 호족 포섭 위해 호족의 딸과 결혼(왕후 6명, 부인 23명)

 부인 29명의 출신지는 신라, 백제, 고구려 지역을 망라, 각 지역의 호족들과 인척 관계를 맺어 연합세력을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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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적인 호족층을 포섭, 사회통합을 이룩하려고 시도

 호족세력 견제: 호족세력의 지원을 받아 통일했지만, 통일 이후에는 할거하고 있 는 호족을 국가 틀 속에 억제하는 것이 숙제

 서경(西京=평양)을 중시, 고려 왕실의 독자세력 기반 육성 시도

 호족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하는 기인제(其人制)와, 해당 지방 출신자가 자기 지 방 감독하도록 사심관(事審官) 제도 실시

 발해유민 수용: 태조는 발해가 거란에 멸망 당하고 발해의 왕족과 관료 등(5만여 명)이 고려에 망명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우대

→ 고구려의 계승을 선언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부분적으로 수용, 계승

 유훈(遺訓):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도덕적 유교 정치 진흥, 농민생 활 안정, 불교 및 사찰 보호, 풍수지리사상 존중, 전통문화 존중, 서경 존중, 공정 한 인사 등의 내용을 제시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① 국가의 대업이 불교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 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② 사원을 쟁탈하거나 함부로 짓지 말 것,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큰 아들이 똑똑치 못할 때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西京, 평양)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령산맥 이남의 금강(錦江) 밖은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반역의 기운을 품고 있으니 그 지방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모든 관료의 기록을 공평히 해줄 것, ⑩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2대 혜종(943-945):

 태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권을 안정시키지 못함

 태조의 부인이 29명이고 왕자들이 너무 많다 보니 왕권 경쟁이 치열

 혜종은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노리는 적대세력의 준동으로 불안한 생활 영위, 아 무런 치적 없이 재위 2년만에 의문의 죽음

 3대 정종(945-949):

 서경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왕식렴(王式廉)의 군사력을 수도로 불러들 여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름 → 왕실의 독자적인 힘으로 왕권을 확립 하지 못함

 정종은 재위 4년만에 병으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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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광종(949-975):

 왕권강화의 장애물인 호족세력을 숙청, 왕권강화에 성공

 노비 해방정책 착수: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실시. 본래 양인(良人)이었다가 호족 의 노비가 된 자를 조사, 다시 양인으로 해방

→ 호족 세력의 기반을 약화

 과거제 실시: 985년 쌍기의 건의로 실시.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양반제의 시작

 성종(981-997):

 개국공신이나 광종이 등용한 급진적 관료들이 물러난 자리에, 과거시험을 통해 들어온 신흥관료로 충원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층으로 자신의 인적 기반을 확충

 지방에 12목 설치, 처음으로 지방에 수령 파견

 개경에 최고 유학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을 설치. 지방의 12목에는 향학(鄕學) 을 설치

 성종 때부터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기 시작

- 왕의 묘호(廟號, 황제나 왕이 죽은 후에 붙이는 명칭)에 조(祖)나 종(宗)을 붙임 → 신라 때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

고려의 행정제도

 중앙 관료제도:

 3성: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상서성(尙書省)

 6부(部): 상서성 산하에 이(吏, 인사) 호(戶, 재정) 예(禮, 외교, 의례) 병(兵, 군사) 형(刑, 법률) 공(工, 토목 건설)부(部)

 중서문하성=재부(宰府): 2품 이상 재신(宰臣)과 3품 이하 낭사(郎舍)로 구성. 국가 정책 결정, 건의, 비판 역할

- 낭사는 관리임명, 법령 개폐에 대해 동의하는 서경권(署經權)과 왕의 명령에 대한 비 판 권리(封駁權)를 통해 왕권 견제

 중추원(中樞院, 뒤에 추밀원樞密院): 국정을 총괄하는 신하인 추밀(樞密)로 구성.

국왕의 비서기관, 군사정보기관으로서 왕의 명령 전달, 왕실호위 군사업무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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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은 막강한 권한 행사. 추부(樞府)라고도 불림

※ 재부+추부=재추(宰樞)로 불림. 재추들의 합동회의를‘재추회의’라 부름

 삼사(三司): 곡식, 화폐, 회계 담당

 한림원(翰林院, 뒤에 藝文館): 왕의 문서, 외교문서 작성

 춘추관(春秋館): 역사 편찬

 사천대(司天臺): 천문 관측

 보문각(寶文閣): 궁중의 서적 관리

 식목도감(式目都監): 법제의 세칙 작성

 도병마사(都兵馬使): 상설기구가 아닌 임시기구. 국가에 중대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과 중추원의 추밀들이 모여 대책 논의. 군사문제를 주로 논의함.

- 1279년 충렬왕이 이 기구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편,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기 관으로 상설화

 지방제도:

 초기에는 중앙정부에서 전국 각지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것이 불가능. 단지 세금 을 징수하기 위해 임시관리를 파견했을 뿐

 중앙정부에서 처음으로 지방관을 직접 파견한 것은 983년 성종 2년(983) 때 12 목(牧)을 설치한 것에서 비롯

 지방행정구역 개편은 현종 9년(1018)에 일단락

 3경(京): 개경, 서경, 동경→남경=한양

 5도호부(都護府): 안동=경주, 안남=전주, 안서=해주, 안북=안주, 안변=등주. 군사 적 방어의 중심지 역할

 8목(牧): 상주, 진주, 전주, 나주, 광주, 충주, 청주, 황주=황해도 - 지방행정의 중심 역할, 이 목을 중심으로 후에 도(道)가 형성

 군(郡), 현(縣), 진(鎭)

 5도(道):

- 도의 장관인 안찰사(按察使)는 도내의 주(州)와 현을 다니면서 수령의 잘잘못을 살피 고 백성들의 민원 문제 등을 해결

- 안찰사는 중앙 행정부의 직책을 가진 채 파견. 임기도 6개월이고 봄 가을로 교체. 상 설 행정기관도 없었음

- 안찰사로 임명된 자들은 5품, 6품의 하위직이어서 권한과 임무 수행에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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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가 출발부터 지방 호족세력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통치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음을 의미

 양계(兩界): 북계, 동계는 국경지대에 설치된 행정구역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컸던 만큼 병마사(兵馬使)가 파견

- 양계의 요충지에는 군사 요새인 진(鎭)을 설치, 외적의 침입에 대비. 군사 통제구역

 군현(郡縣): 도와 양계 아래의 행정구역. 대개 지방관이 파견된 곳은 주현(主縣=

主邑),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곳은 속현(屬縣=屬邑)으로 불림

- 속현은 이웃 주현의 지방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앙통제 받음. 전국적으로 주현보다 속현의 수가 훨씬 많았음

→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에 한계가 있음을 의미

고려의 북진정책과 거란

 거란(契丹): 당 말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부족 통일, 916년 요(遼, 916~1125)를 건국.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고자 배후에 있는 발해 멸망시킴(926)

 고려의 북진정책: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표방. 거란에게 뺏긴 고구려, 발해 영토 수복을 목표로 설정, 북진정책 추진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 서경(西京)으로 승격 →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음

 태조 왕건은 중국대륙이 5代10國(907~979)으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북진정책을 추진, 북쪽 국경선을 대동강~원산만에서 청천강~영흥까지 북진, 거란 에 강경 대응

→ 만주일대에서 흥기하던 거란과 갈등 불가피

 송(宋)이 중국 통일하고 거란과 대치하자, 고려 광종은 송과 제휴해서 거란(요 遼) 을 견제하는 정책 추진

 거란은 발해 멸망시킨 후 송을 점령하기 전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고려와 화친 시도. 942년 낙타 50필, 30여 명의 사신 파견

 태조는 거란과 화친을 거부, 낙타 굶겨 죽이고 사신은 섬으로 축출. 발해 유민 수 용, 북진정책 추진

 고려는 거란의 침략 예견, 광군(光軍) 조직, 거란침략에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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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거란)의 고려 침략:

 제1차 침략:

 성종 12년(993) 요는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수십만 대군을 보내 고려 침입, 고 려는 청천강에서 거란군의 침략 저지

 서희(徐熙) 보내 소손녕과 담판,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밝힌 뒤 여진족이 차지한 땅을 고려가 차지해서 요와의 통로가 열리면 요와 외교관계를 맺고 송과 단교할 것을 약속. 요와 조약을 맺음

 그 대가로 강동(江東) 6주(의주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의 관할권을 획득, 압록 강 서부지역까지 영토를 확장

 거란은 1004년 송을 굴복시키고 <전연(邅淵)의 맹약>을 체결

 고려는 거란과 화친한 이후에도 비밀리에 송과 계속 접촉, 교류

 제2차 침략:

 이에 불안감과 의구심을 갖게 된 요는, 강동 6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강동 6주를 돌려받기 위해 고려에 재차 침입

 고려 현종 원년(1010) 거란의 성종은 보병과 기병 40만을 이끌고 고려 침공, 개 경을 점령

 고려의 저항이 완강하자,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고려 현종의 입조(入朝.

신하로서 예의 표시)를 조건으로 철수 시작

 퇴각하던 거란군은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병마를 상실

 고려 또한 개경의 궁궐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소실

 제3차 침입:

 거란의 성종은 고려가 입조를 거절하자, 강동 6주의 반환을 고려에 요구. 고려 현 종 9년(1018) 소배압(蕭排押)이 군사 10만 거느리고 개경 부근까지 진격했다가 자신 없자 철군

 강감찬(姜邯贊)이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격파, 10만 중 수천 명만 생환. 이 때 포로나 투항한 거란인이 수만 명

 투항한 거란인들은 집단적으로 마을 형성. 노래와 춤, 연예활동으로 수입 얻어 생 활. 이들이 재인(才人, 광대)과 기생의 주류를 형성

 고려 침략에 실패한 거란은 고려가 배후에 있는 한 송을 공격할 수가 없게 됨.

자연히 고려-송-요 3국이 대등하게 정립. 고려 역시 북진정책 추진이 벽에 부딪 힘

참조

관련 문서

[우리말 소리의 체계] 한국문화사..

사림의 공공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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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교육분야의 행정업무를 주로 수행하며 평생교육기관의 관리자로서

평생교육분야의 행정업무를 주로 수행하며 평생교육기관의 관리자로서

대부분 수동으로 작동되는 공정은 주로 낮은 인건비의 작업자에 의해서 운영됨 광범위하게 자동화된 공정은. 주로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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