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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12차시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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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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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12차시 강의록

담당교수: 윤 휘 탁(교양학부)

조선왕조의 성립

 이성계의 집안 배경과 득세: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은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정벌 때 공을 세워 동북면병마사 (東北面兵馬使, 북계 동계의 군사 행정총괄)가 됨

 아버지의 후광을 업은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격퇴하고 동녕부 정벌 때 공을 세워, 최영과 더불어 명장으로 날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후 최영 축출,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의 영수로서 정치실권 장악, 1392년 조선왕조 건립

• 조선 초기의 정치 상황:

• 왕실과 종친의 불만: 조선 초기에는 정도전, 조준 등 개국공신들이 도평의사사(都 評議使司)를 중심으로 실권 장악

☞ 왕실과 종친의 소외감과 불만을 야기

• 이방원의 정치적 불만: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문과에 급제, 새왕조 건설에 반대한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큰 공을 세움

• 이방원은 정몽주 격살사건으로 이성계의 분노를 사 창업공신 대열에 끼지 못함

• 세자 자리는 이성계가 총애하던 강씨 소생 이복동생인 방석에게 빼앗김

• 당시 실권자 정도전은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이방원을 멀리함

• 요동정벌과 사병 혁파: 조선과 명의 관계 악화로 요동정벌 결정

• 정도전은 재상, 왕족의 사병까지 없애고, 군권을 빼앗아 요동정벌에 필요한 군사 를 확보하려고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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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원 등 야심 가진 왕족들이 권좌를 차지하려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들의 사병을 없애서 무력화시키려고 함

☞ 이방원은 많은 군공을 세웠지만 기존 정치체제에 불만을 품음

• 당시 이방원의 처인 민씨는 사병을 없앨 때 몰래 군사를 숨겨놓았다가 이방원의 반란 때 동원. 요동정벌은 물거품으로 끝남

• 왕자의 난: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개국공신들이 세자로 책봉한 동생 방 석(芳碩)과 그의 스승 정도전을 죽임(제1차 왕자의 난)

•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2대 국왕 정종(1398~1400)으로 즉위

• 정종 때도 넷째 아들 방간 등이 반란을 시도, 왕권이 불안정

• 이방원은 방간을 제거하고 정종을 압박해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국왕(태종)에 오 름(제2차 왕자의 난)

• 태종(1400~1418):

•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틀을 확립

• 사병을 없애고 모든 군대는 국왕의 지휘를 받도록 함

•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고쳐 그 권한을 축소

• 정치 실무를 6조(曹, 이 호 예 병 형 공)에 맡기고 국왕의 재가를 얻어 시행하는 6조(曹) 직계제(直啓制) 실시, 6조를 직접 통제

• 언론기관인 사간원(司諫院)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케 함

• 태종은 국가 경제기반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강화

• 고려시대부터 지방의 강력한 지배층으로 성장한 사원의 토지를 몰수

• 사원의 노비들은 관에서 몰수, 억울한 노비 조사하여 해방

• 토지제도 개혁을 마무리, 토지측량사업 실시, 토지현황 파악

• 호패법(號牌法, 신분 표시하는 호패를 지니게 한 법) 실시해서 인구현황 및 인구 파악, 통제

• 지방의 권력자들이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통제

• 태종은 강력한 지도력 발휘해 왕권 강화, 국가의 제도적 기반 확립

• 세종이 유교정치를 세련되게 만들고 민족문화를 꽃피울 수 있도록 한 배경에는 태종이 닦아놓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이 뒷받침

• 세종(1418~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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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의 복지증진에 노력. 세금 낮추고 공평하게 부과

• 의창(義倉) 제도를 실시, 빈민 구제, 관비(官婢)의 출산휴가 늘려줌

• 감옥 시설 개선, 사형수에 대한 2심제 시행,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 천민을 과감하게 등용, 수공업자 상인에게도 잡직의 벼슬길 열어줌

• 광대와 도살업자를 새로운 백성이라 하여 양민으로 승격

• 궁궐에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전 설치, 젊은 학자 우대, 전통문화 연구

• 훈민정음 창제. 민생정책 결정할 때 백성의 여론 존중

• 도덕적 기강이 바로 잡히고, 민생이 안정되고 국가재정도 충실

• 이종무(李從茂)를 대마도로 보내 왜구의 소굴 정벌

• 여진족 몰아내고 4군(郡) 6진(鎭) 설치, 압록강~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영토 를 확보

• 세조(1455~1468):

• 조카 단종을 폐위, 스스로 왕위 계승. 동생 안평대군,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 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폐위된 단종 살해

•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착수(성종 때 반포 시행)

• 행정단위인 군현을 군사조직인 진(鎭)으로 편성, 행정 군사를 일원화한 진관(鎭管) 체제로 전환, 진 중심의 방어체제를 지역중심으로 전환

• 왕권 강화, 부국강병 위해 성리학 억압, 민족신앙과 도교, 법가 존중

조선왕조의 통치체계는 어떠했을까?

 중앙의 통치기구: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좌의정, 우의정의 3정승이 국가의 중요 정사를 논의, 합 의사항을 국왕에 보고, 결재 받은 뒤 해당 기관에 하달

 6조(조):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서 국왕에게 직접 업무를 보고하고 결재를 받음

 승정원(承政院): 국왕의 비서기관으로서 왕명의 전달

 3사(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 홍문관: 문헌 정리, 국왕에게 강의(經筵)하고 국왕의 고문 역할 - 사헌부: 감찰기관으로서 관리 잘못 규찰, 풍기 습속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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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간원: 국왕의 잘못 비판하고 불공정한 관리 임명 논박, 시정 - 사헌부와 사간원은 ‘대간(臺諫)’, 그 관원은 ‘언관(言官)’이라 불림

 지방통치기구:

 전국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평안의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府) 목(牧) 군(郡) 현(縣) 설치

 도에는 관찰사(觀察使, 監司)를 임명해서 부윤(府尹, 府使), 목사(牧使), 군수(郡 守), 현령(縣令, 縣監) 등 지방수령을 통제, 감시

• 지방의 수령은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징발해서 중앙에 바침

• 지방관은 행정 사법 등 광범한 권한을 위임 받음

• 임기는 관찰사가 1년, 수령은 5년(뒤에 3년)으로 제한. 자기 출신지에는 미 임명

• 군현에는 그 지방 양반들로 조직된 향청(鄕廳)이 설치

• 향청: 좌수(座首), 별감(別監)이 있어 수령 보좌, 풍속 단속, 규찰등 지방 양반세 력의 근거지 역할하면서 많은 영향력 행사

• 지방행정에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6방(房)이 있고, 지방의 향리들이 6방의 업무 를 세습적으로 맡아 영향력 행사

• 향리는 왕명을 집행하는 지방관과 양반의 기득권 수호기관인 향청사이의 매개자 역할

• 지방행정은 양반을 먹여 살리기 위한 행정적 보조기관에 불과

조선의 과거제도와 교육

 조선시대에는 음서(蔭敍, 특별채용)가 공신 및 3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 한정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는 출세할 길이 별로 없었음

 과거시험은 양인이면 누구나 응시 가능했지만 교육 기회나 과거등용시험은 양반 이 독점

 문관시험: 생진과(生進科, 小科)와 문과(文科, 大科)

- 사학(四學)과 향교에서 수학한 유생(儒生)들이 생진과에서 유교경전과 문장시험에 응 시, 지방시험(初試)과 서울시험(覆試)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라 부름

- 생원, 진사가 되면 최고학부 성균관에 진학, 졸업 후 문과에 응시 - 1등인 장원 급제자는 6품 이상의 참상관(參上官)에 임명

- 당시의 교육현실에서는 관학인 4학과 향교보다도 사학인 서재(書齋)가 과거시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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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관으로서 양반사회에서 더 환영받음

- 과거시험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 국가 경사 때나 공자에게 제사 지낼 때 부정 기적으로 시험을 치름

 무과(武科): 활쏘기, 말타기, 창검술 등 무술과 유교경전, 군사서적(兵書) 등으로 시험

- 이 무과는 나중에 해이해져 천민들의 사회 진출 통로로 변질

 잡과(雜科): 통역관(譯科), 의사(典醫監), 천문관측관(觀象監), 법률 기술관 채용을 위한 것으로, 사회적으로 천시받아 중인(中人)의 자제가 응시

조선-명의 관계

 조선은 명과의 외교관계를 사대(事大)라 하여 친선유지 노력

 가문이 보잘 것 없었던 태조는 자신을 잘 섬기지 않는 구 귀족들의 질시 속에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명을 정치적으로 이용

※ 친명 정책은 조선왕조의 권위를 보장하는 외부 요인으로 작용

 태종 이후에는 조공관계가 수립, 1년에 세 번 정기사절 파견 - 정월 1일, 명 황제 생일, 명 황태자 생일

- 군주의 사망, 황위 계승, 황후를 정할 때도 사절 파견

 조공무역: 사절의 왕래과정에서 조선의 종이 붓 금 은 인삼 모피 모시 화문석 책 말 등이 수출. 명의 견직물 약재 서적 도자기 비단 등이 수입

조선의 영토 개척

 두만강 개척:

 태조: 여진족 평정, 두만강 하류까지 영토 확대했다 경성으로 후퇴

 세종: 김종서 등이 두만강유역의 여진족 정벌, 6진(鎭) 설치 - 수차례 이민을 실시. 토착민이 안정적으로 방어케 함

- 함경도에서 5,518호, 충청 전라 경상도에 거주하던 함경도 이민 1,122호를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

 압록강 개척:

 태종: 압록강 이남 확보했지만 여진족의 침범으로 지배가 불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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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최윤덕 등을 시켜 여진족 토벌, 4군(郡) 설치

 세종 ~ 성종 때 함경도 출신 유민 5,230호가 북방으로 이주

 태종~세종 때 평안도 인구 증가(33,890호 → 105,444호)

 식량 의류 농기구 등을 얻기 위해 여진족이 자주 침입하자, 경성, 경원에 무역소 설치. 말 모피 등으로 곡물 옷감 농기구 교환케 함

 여진인의 귀화와 조공을 장려, 그들에게 관직 의복 식량 가옥 제공

 선조 16년(1583) 니탕개(尼蕩介)가 난을 일으켜 경원 등 여러 진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신립(申砬)의 분투로 진압

조선-일본의 관계

 산악이 많아 식생활을 자급할 수 없던 대마도의 왜인(倭人)은 조선이 교역 거절하 면 해적질 일삼음

 세종 원년(1419)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 왜구 근거지 소탕

 대마도에서 수차례 사신을 보내 사죄의 뜻을 전달

 3포(웅천, 동래, 울산)에 왜관(倭館)을 설치, 미곡 면포를 구매

 세종 25년 왜와의 무역을 제한,

 중종 5년(1510) 왜인이 반란을 일으켜 3포를 폐쇄, 교역 단절

 대마도 통치자의 애걸로 교역량을 절반으로 제한

 일본은 미곡 면포 나전칠기 도자기 화문석 대장경 서적 범종 불상 등을 수입하고, 구리 유황 약재 향료 등을 수출

조선은 왜 당파싸움을 벌였을까?

 훈구(勳舊)세력의 부(富)의 독점과 사회적 모순:

※ 훈구세력: 조선왕조 건국공신인 정도전 조준, 조선의 제도정비에 참여한 사육신(死六 臣,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세조의 왕위 쟁탈을 도운 정인지 최 항 양성지 신숙주 서거정 등을 지칭

 조선 초기 훈구세력은 고위 관직, 많은 토지, 노비를 차지, 세습

 훈구세력의 농장(토지)이 확대되면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토지가 점점 부족

→ 국가의 조세수입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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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들은 각종 세금과 노동력 징발에 시달려 생활이 궁핍화 → 농민이 떠돌면서 농촌이 황폐화, 도적 무리가 넘쳐남

 사림(士林)세력의 등장과 훈구세력과의 권력투쟁:

 사림: 중소 지주 출신의 유학자로서 양반의 기득권 대변기구인 유향소(留鄕所, 지 방 군 현의 자문기구)나 향청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향약 조직을 통해 향촌 사회의 지배력을 강화

 사림은 성균관, 향교 통해 성리학 받아들이고 향촌에서 후학 양성

 김종직과 그 제자들의 노력으로 영남과 기호지역에서 세력화

 사림세력은 주로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계통에 자리를 차지하고 언론 문필을 담당

 도덕적 수양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은 자연히 개국공신 중심의 훈구세력의 비리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 <사림파>라 불림

 사화(史禍)의 발생:

 성종이 훈구세력의 비대화를 막기 위해 사림을 중앙에 등용하면서 훈구파와 사림 파 사이의 대립이 형성 → 사화(史禍)로 이어짐

 무오사화(1498): 연산군 때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쟁탈을 비난한 글을 썼다가 발 각, 훈구세력이 김일손 등 사림학자들을 귀양, 처형

 갑자사화(1504): 사치 향락으로 재정이 곤란해진 연산군이 훈구세력의 토지와 노 비를 몰수하는 것을 훈구세력이 반발하자, 연산군이훈구세력 및 사림세력(윤필상 이극균 성준 김굉필)을 귀양, 처형

 기묘사화(1519):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해서 훈구세력들의 비리 척결과 이상정치 실현을 위한 개혁을 추진. 조광조를 미워한 훈구세력이 모략으로 조광조 일파를 제거

 을사사화(1545): 인종과 명종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인종이 먼저 즉위했다가 죽자, 왕위를 계승한 명종의 외척세력(윤원형, 이기)이 인종 때 득세한 반대파 100여 명을 숙청

 사화는 사림파의 비판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보복의 성격을 띰

 사림세력은 몇 차례의 사화로 타격을 받으면서도 서원(書院, 주세붕의 백운동 서 원, 이황의 소수서원 등)에서 양성한 유학자들과 농장, 향약 조직 등의 인적 물적 토대를 지지기반으로 삼아 세력을 확대

사림세력은 중앙에서 임명된 지방관들보다 더 강한 지배력을 발휘하면서 훈구세력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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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압하고 선조 이후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

 붕당(朋黨, 당파)의 발생:

 선조 때 외척정치의 청산에 소극적인 기존의 사림(士林)과 외척의 정치참여를 봉 쇄하려는 신진 사림간의 대립이 발생

 왕실의 외척이자 기존 사림의 신망을 받던 심의겸(沈義謙)과, 신진 사림인 김효원 (金孝元)이 하급 관리의 인사권을 놓고 대립이 심화

 선조 때(1575) 심의겸 지지하는 기존 사림은 ‘서인(西人)’, 김효원 지지하는 신진 사림은‘동인(東人)’이라 불리면서 붕당 발생

 서인: 이이, 성혼의 제자들이 가담, 현실문제 해결에 많은 관심 가짐

 동인: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다수의 신진이 참여, 도덕적 신념을 중시, 훈구세력의 비리에 대해 엄격하게 비판

 그 후 정치를 주도한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가혹하게 처리한 정철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온건파(남인)와 강경파(북인)로 분열

 임진왜란의 발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남인이 실각

 임진왜란에서 항일 주도한 북인이 실권장악, 광해군 옹립

 광해군은 전후 복구사업과 중립외교를 통해 정세 안정에 노력. 영창대군 살해, 인 목대비 서궁 유폐로 민심을 상실

→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몰락

 이후 서인이 장기간 정권 담당, 권력투쟁 일삼으며 정국 혼란 야기

 정계에서 소외된 자는 낙향, 서원 건립, 지방민 상대 교육활동

• 사림들은 17세기 후반부터 건전한 정책대결보다 국왕의 정통성, 왕위 계승문제 등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을 일삼음

• 붕당정치로 정국이 혼란, 정계에서 소외된 사림들이 자신의 향촌으로 내려가 서 원 건립, 지방민 상대로 교육활동 전개

→ 17세기 후반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서원이 급격히 증가

• 숙종의 탕평책: 상대 붕당에 대한 보복이 치열해지자 탕평책(군주의 정치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개인적 감정에 흐르지 않고 공정하게 인사등용) 실시

• 영조의 탕평책: 노론 내의 온건세력을 등용하여 소론에 대한 보복을 못하도록 해 서 붕당간 대립을 완화

•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정리. 사림의 공공여론 주도권을 불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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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론, 소론 출신을 골고루 등용, 당쟁의 토대를 붕괴시키려고 함

• 정조의 탕평책: 노론, 소론, 남인 가운데 당파의 이익보다 자신의 학문적 원칙을 준수하려는 세력을 등용

• 규장각 개편, 젊은 선비를 등용해서 측근으로 삼음

•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은 규장각 출신으로 북학파(北學派)나 실학파로 성장, 정약용도 정조의 총애를 받아 득세

• 재상의 권한 강화, 개혁적 인물을 등용

• 정조는 붕당을 쇠퇴시키고 왕권을 강화시켜 정국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민생대책 을 마련해서 시행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