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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6차시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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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6차시 강의록

담당교수: 윤 휘 탁(교양학부)

발해 (渤海, 698~926)

 고구려 멸망 후의 동북아 정세:

 676년 신라가 당을 축출한 후 고구려 옛 땅은 몇 부분으로 나뉨 - 대동강~원산 이남은 신라가 차지, 그 이북과 요동은 당이 차지

※ 만주 중·동부와 한반도 북부는 신라, 당 어느 쪽도 힘이 미치지 못하는 국제적 힘의 공백지대

 당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저항으로 698년 안동도호부를 폐지

 당은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기 위해 당에 포로로 잡혀갔던 보장왕과 그 후손들을 요동도독(遼東都督)·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임명

 보장왕 등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꾀하자, 당이 이들을 소환

 고구려 보장왕 아들 덕무(德武)가 안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小高句麗國>이라고 칭함

※ 소고구려국: 8C말~9C초 요동지역에 살던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자립한 나 라로서, 건안성(建安城)에 강제 이주된 백제유민과 말갈족 주민이 그 일부를 구성. 후에 발해에 합병

 신라와 당의 힘이 미치지 않는 요동의 공백지대에서 말갈족이 봉기 → 요서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흔들리기 시작

 이 상황에서 요서지방의 영주(營州, 요녕성 朝陽)에 강제 이주당했던 고구려인, 거란인, 말갈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

 696년 말갈족 이진충(李盡忠)이 먼저 반란, 당의 통치력 약화시킴

발해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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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은 말갈족과 거란족의 반란으로 그 여파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또 다른 반란 세력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음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 멸망 후 영주로 강제 이주당해 있던 대조영(大祚榮=高王) 이 698년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敦化)에서 진국(振國 또는 震國) 건국, 자신을

‘진국왕(震國王)’이라 칭함

 당시 대조영 집단이 새로운 힘의 구심점이 되자, 각지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부족들이 그를 중심으로 합쳐짐

 713년 진국왕이 당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된 후 국호도 ‘발해’로 고 쳐짐

 발해 건국으로 한국사는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가 양립 → 남북국(南北國)시대가 전개

발해는 우리 역사인가?

 대조영의 출신: <구당서>에 고구려의 별종(別種) 혹은 속말(粟末)말갈족 출신이라 기록

- 고구려의 별종이라 함은 고구려 계통으로서 고구려인을 의미 - 속말 말갈족 출신이라 함은 말갈족 출신의 중국인을 의미

 발해의 정체성: 일본의 역사서·고문서 보면, 발해가 자신을 ‘고려’라 칭하였고, 일 본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스스로를 고려국(高麗國)으로 지칭, 부여의 전통 이어 받았다고 하였음

- 일본도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을 고(구)려왕으로 표현

- 발해가 망하자 그 지배층 대부분이 고려로 망명, 고려도 발해의 후계자임을 자처

→ 이것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보여주는 것

발해의 영토 확장

 대조영: 사방 2천리 영토 차지

 2대 무왕(武王, 大武藝 719-737): 북만주 일대 차지. 732년 산동의 등주(登州)에 수군 보내 당 공격하는 등 강대한 독립왕국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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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 문왕(文王, 大欽茂 737-794): 755년 안사(安史)의 난으로 당의 국력이 약화 되자 요동반도, 요하까지 지배

- 영토가 남으로 신라에, 북으로 흑수말갈에까지 이름

- 755년 수도를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 →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로 천도 - 785년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길림성 훈춘)로 천도

 5대 성왕: 수도를 다시 상경용천부로 천도

- 고려국을 표방, 일본에 대해 천손(天孫)임을 자랑, 고구려 계승의식 나타냄 - 황상(皇上)이라는 칭호를 사용, 당나라와 대등한 위상을 과시

 10대 선왕(宣王, 818-830): 동-연해주, 서-요하, 남-함남, 북-흑룡강에 이르는 사방 5천리의 방대한 영토 차지

-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림

- 통일신라 영토나 고구려 영토보다 수배 큰 영토를 확보

발해의 대외관계

 발해-당의 관계:

 건국 초기에는 당과 적대적인 관계, 720년대 중반 당이 발해를 압박

 발해는 흑수말갈(黑手靺鞨) 공격, 북쪽으로 영토 확장 및 흑수말갈의 위협 제거 시도

 당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 보내 우호관계 체결

 8세기에 접어들어 당과의 이해관계가 맞아 733년 당과 국교 수립, 서경압록부(西 京鴨綠府)를 통해 왕래. 98차례 당에 사신 파견

 당의 외국인 위한 과거시험(빈공과=賓貢科)에 10명 합격, 당 관료

 발해는 당으로부터 비단, 서적, 공예품 수입, 말과 도자기 수출

 발해-신라의 관계: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 처음부터 반감을 갖고 있었음 → 신라와는 처음부터 대립 관계

 신라는 발해에 대해 위협감을 느껴 발해와의 국경 쪽에 장성을 쌓기도 함(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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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국경선이 대동강~원산만 선으로 굳어진 것은 북쪽에 있는 발해의 압력 때문

 발해에 대해 위협을 느낀 신라 성덕왕은 당과 다시 연합, 발해를 협공(732-733), 신라군은 북진했으나 발해군의 방어와 추위로 철수

 당은 당나라에 있던 발해 무왕의 동생 대문예(大文藝)를 시켜 발해를 공격하게 했 으나 소득이 없었음

→ 발해는 북의 돌궐(突厥), 남의 일본과 연합해서 신라-당의 연합세력에 대응

 발해는 국제관계가 안정된 후 신라와도 자주 교류

- 신라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통해 수차례 발해에 사신 파견, 친선도모

 발해-일본의 관계:

 발해는 신라와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자주 교통

 발해는 일본에 12차례, 일본은 9차례 사신 교환

발해의 종족구성과 역할

 대조영 밑에는 고구려 유민, 북만주의 말갈민(靺鞨民)이 많이 예속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를 부흥시킨다는 자각 의식 지님

 고구려 유민: 발해의 정치적 지배권 독점

- 외국에 파견된 사신의 성(姓)은 고구려 왕실 성인 고씨(高氏)나 중국식 성을 가 진 사람들이 대부분

 말갈민: 대부분은 피지배층을 형성, 수령이라고 불리는 발해 지배조직의 한 모퉁 이 담당

 말갈민 중에는 지배층으로 상승한 부류도 있었고(걸사비우 乞四比羽), 외국 사절 단 중에 말갈 성 가진 사람도 극소수 있었음

 말갈민은 때로 부곡민(部曲民)이나 노비로 전락, 비자유인으로서 고구려계 지배층 에 예속, 이들이 순장(殉葬)의 대상이 되기도 함

 말갈민은 대체로 전통적인 촌락에 거주하면서 촌장인 수령(首領)을 통해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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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통치구조

 중앙조직: 3성(省) 6부(部)

- 3성: 정당성(政堂省=尙書省, 大內相), 선조성(宣詔省=門下省, 우두머리 左相), 중 대성(中臺省=中書省, 右相)의 3성

- 6부: 충부(忠部=吏部), 인부(仁部=戶部), 의부(義部=禮部), 지부(智部=兵部), 예부 (禮部=刑部), 신부(信部=工部)

 당 제도 모방해서 구성

 그러나 수상의 역할이 당나라 3성과는 차이가 남

 또한 3성 6부의 명칭이 유교 색채를 띤 것도 당 제도와 다름

 기타 중앙조직:

 중정대(中正臺, 감찰), 전중시(殿中寺, 궁정사무),

 종속시(宗屬寺, 왕족사무), 문적원(文籍院, 도서관리)

 태상시(太常寺, 제사관리), 사빈시(司賓寺, 외국사절 접대)

 사장시(司藏寺, 재정관리), 사선시(司膳寺, 궁중음식 관리)

 대농시(大農寺, 창고관리), 주자감(胄子監, 교육기관)

 항백국(巷伯局, 환관들의 관청)

발해의 문화

 발해는 당과 평화적인 외교관계 수립 후 당 문화를 적극 수용

 발해 수도 상경(上京)은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을 모방, 외성을 쌓고 중앙에 다시 내성을 쌓아 그 안에 궁전을 만듦

- 궁전 동쪽에 정원을 만들고 인조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었는데, 신라의 안압지를 연상

 많은 유학생이 당에 파견, 당에서 과거에 합격한 자는 10명

 불교가 널리 전파, 발해 지배층에서는 유교도 중시

 조각은 불상이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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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문화 속의 고구려 요소(발해의 고구려 계승):

 이것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함

 5개의 수도를 설치한 제도는 고구려의 5부(部)에 기초

 상경용천부 안 궁전에는 고구려식의 온돌장치가 발견

- 온돌장치는 우리 민족만이 사용해왔음. 이는 발해인들이 고구려유민들이었거나 고구려 영향을 받았음을 증명함

 고분 구조가 고구려 양식인 횡혈식 석실고분

 절터에서 발견된 석상, 불상, 비석 등의 양식, 기와의 연꽃무늬 등도 고구려적인 색채를 뚜렷이 드러냄

 발해의 음악은 고구려 음악을 계승

발해의 대외교역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로가 잘 정비

 5경을 잇는 국내도로와 당· 신라· 일본· 거란 등과의 교통로도 개설

 사절교환, 예물교환 때 상대국 상인들과 직접 교역

 당, 일본과의 사절교환은 정치적 목적 이외에 경제적 의도 강함

 사절교환 시 수백에 이르는 수행원들은 대부분 상인으로 구성

 당과의 교역로: 영주를 거쳐 대륙으로 가거나, 압록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산동반 도 등주(登州)로 가는 조공로(朝貢路)를 이용

 당나라는 등주에 발해관(渤海館) 설치, 사신 접대, 교역 장려

 당에서의 수입: 비단, 서적, 문구류, 은, 공예품

 당으로의 수출: 모피류, 약재, 공예품, 말, 명주

 신라와의 교역로: 동경, 남경→함경도→강원도로 남하, 무역 미 발달

 일본과의 교역로: 동경 → 러시아 연해주의 염주(포시에트만) 거쳐 동해로

 일본에서의 수입: 비단, 옷감, 황금, 수은

 일본으로의 수출: 약재, 담비가죽 등 모피

- 일본과의 왕래는 반년씩 걸렸지만 적극적으로 무역활동 전개

 거란과의 교역로: 길림 지방 거쳐 서요하 상류 → 북경가서 교역

발해의 산업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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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는 고구려문화 계승하면서 당문화 수입, 고구려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고 대문화 건설, 남쪽 신라와 대등한 수준 유지

 농업·목축·수렵·어로 등이 행해졌으며, 광산채굴과 수공업도 발전

 농업은 조·보리·콩 등 밭작물을 주로 길렀지만 일부 평야에서는 논벼도 재배, 구 릉지대에서는 배 등의 과실도 재배

 축산물로는 돼지·말·양 등을 주로 길렀고, 때로는 거란·당에 수출

 발해에서는 수렵이 큰 비중 차지, 토끼·사슴·사향노루·범·표범·곰·살쾡이 등을 잡 아 식용·약용·피복재료로 사용 또는 고급모피로 수출

 발해고분은 무덤 주인에 따라 축조방식이 다름

- 정혜공주(3대 문왕 딸) 무덤의 경우 돌로 무덤 칸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석 실 봉토분으로 고구려 전통을 계승

- 정효공주 무덤의 경우 벽돌무덤, 인물화 중심의 벽화기법 등이 당나라 문화 요소 를 많이 띠고 있음

 도자기·기와·벽돌공예·방직업 발달

 불교가 왕실과 밀착해서 발전

- 수도 상경용천부에만 10여 곳의 절터가 발견

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발해의 멸망:

 9세기 말을 고비로 발해의 국력이 쇠퇴

 916년 발해 서쪽에서 거란족이 요(遼)나라 건국

 926년 발해는 요에게 멸망(15대 230년 존속)

 백두산 화산이 폭발해서 발해의 멸망을 촉진했다는 견해도 제기

 발해 부흥운동:

 발해 유민들은 압록부(臨江鎭)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의 부흥운동을 전개

 발해 멸망 후 <후발해 後渤海>(929-936)가 건국되었다가 → <정안국(定安國)>으로 바뀜

 그 후 요나라의 1,2차 침공(983-986)으로 발해는 완전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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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멸망 후 대씨(大氏) 왕족 등 5만명의 발해 귀족이 고려로 망명

 발해 망명자들은 고려 지배층의 일부를 구성, 고려문화에 영향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 하고 발해유민을 동족으로 포용

 고려는 고구려-발해의 후계자임을 자처

→ 발해는 정신적으로 한국사의 중요한 일부가 됨

발해의 역사적 위치

 발해의 이질성: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과 피지배층인 말갈인이라는 상호 이질적인 요소가 결합하 여 국가를 형성

→ 내부적으로 취약성을 지녀서 926년 거란에 의해 쉽게 멸망

 발해가 멸망한 후 역사와 문화는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함 - 발해문화를 이끈,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이 발해멸망 후 고려로 망명 - 이 지방에 거주하던 말갈인은 그 문화를 계승할 능력이 없었음

- 말갈인들은 거란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후에 여진족으로 이어져 금(金)을 건국하고 거란 축출, 만주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

 발해의 멸망과 함께 만주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무대에서 떠나버림 - 발해는 한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최후의 국가

- 발해 망한 후 지배층은 고려로 망명, 민족통일에 이바지

 발해는 신라와 함께 남북국(南北國) 형세를 이루었지만 후대에는 신라를 한국사의 정통으로 생각하는 사관이 오랫동안 유지

→ 고려시대에 쓴 <삼국사기>에는 발해사가 우리의 역사에서 배제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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