碩士學位論文
景宗代 政局과 戚臣勢力의 動向
國民大學校 大學院 國 史 學 科
曺 圭 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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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宗代 政局과 戚臣勢力의 動向
指導敎授 鄭 萬 祚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請求論文으로 提出함
2001年 4月 日
國民大學校 大學院 國 史 學 科
曺 圭 燕
2 0 0 0
曺圭燕의
碩士學位 請求論文을 認准함
2001年 6月 日
審査委員長 池 斗 煥 (印) 審 査 委 員 鄭 萬 祚 (印) 審 査 委 員 張 錫 興 (印)
國民大學校 大學院
目 次
머 리 말 ... 1
Ⅰ. 肅宗代 戚臣의 정치적 대두와 동향 ... 5
1. 戚臣의 대두와 배경 ... 5
2. 肅宗 後半期 戚臣勢力의 동향 ... 11
Ⅱ. 景宗 卽位初 戚臣勢力의 갈등 ... 20
1. 老論의 政局주도와 世弟 冊封 ... 20
2. 代理聽政의 제기와 戚臣勢力의 갈등 ... 26
Ⅲ. 辛壬獄事와 戚臣勢力의 분열 ... 30
1. 辛丑疏와 政局의 변화 ... 30
2. 壬寅獄事와 戚臣勢力의 분열 ... 34
3. 英祖 卽位初 戚臣勢力의 재편 ... 41
맺 음 말 ... 49
參 考 文 獻 ... 54
附 錄 ... 61
ABSTRACT ... 72
머 리 말
士林勢力은 16세기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후 많은 정치적 피해를 입는 가운데 16세기 후반 비로소 이들 주도의 정국이 이루어졌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림 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정치이념이나 정치논리 등을 가지고 17세기 이른바 士 林政治期를 주도하였다. 사림정치란 그 정치목표를 성리학적 정치이념의 구현에 두고, 이를 위한 정치운영방식으로 公論을 앞세운 言官權의 宰相權에 대한 비판 과 견제, 그리고 붕당상호간의 의리・명분논쟁을 통한 상호비판과 견제의 정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1) 그러나 이와 같은 사림정치는 肅宗代 이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붕당간의 대립에 국왕이 직접 관여하게 되면서 각 붕당의 진퇴가 결정 되는 換局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戚臣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지면서 결국 사림정치는 변질되면서 爛熟期를 지나 衰退하였다.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景宗代(재위 1721~1724)는 辛壬獄事2)를 통해 이른바 老論 4大臣이라 지칭되는 金昌集・李 命・李健命・趙泰采 등이 賜死되고, 獄事 에 연루된 60여명이 刑訊에 불복하다가 杖殺되는 등 다수의 노론계 인물이 禍를 입었다. 경종과 왕세제인 延 君(英祖)의 王位繼承 문제를 둘러싼 노・소론간의 갈등이 忠逆의 是非紛爭으로 비화하여 정치적 참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후 영 조는 이전 시기와 같은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탕평론을 본격적으로 적용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비록 재위기간이 4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경종대를 전후로 당시 정국운영 방식이 변화하는 계기를 보 인다는 데에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급격한 정국변동이 야기되었던 경종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숙종 후반기3)
1) 鄭萬祚, 朝鮮時代의 士林政治-17세기의 政治形態 , 韓國史上의 政治形態 , 一潮閣, 1993.
2) 景宗 1年(1721년)의 이른바 辛丑疏 이후 換局의 상황과, 그 이듬해(壬寅年)에 일어났던 景 宗 弑害의 혐의로 老論이 被禍되었던 獄事사건을 辛壬獄事라 한다. 이를 두고 辛壬士禍 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이는 英祖 31年 이후 소론의 명분이 실추되었을 때 노론 측의 입장에서 사용하였던 용어이다. 노론의 경우 이를 士禍 혹은 誣獄 이라고 하는 반면, 소 론의 경우에는 逆獄 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老・少論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 는 용어로서, 필자는 逆獄이니 士禍니 하는 용어 대신에 보다 객관적이라 생각되는 獄事 라는 명칭을 채용하고자 한다.
정국의 추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이와 관련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 이다.4) 특히 이 시기 정국을 주도하였던 戚臣의 존재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종대 정치사 이해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단지 경종대 를 英・正祖代로 移行되는 과도기로서 언급되거나,5) 辛壬獄事의 과정에서 나타 나는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양상이 王權의 强化 혹은 弱化라는 측면에 국한되어 설명하고 있는 정도이다.6)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先學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 시기 戚臣7)의 동향 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1장에서는 숙종대 척신의 등장배경을 살펴보고자, 당시 척신의 兵權 장악에 주 목하여 확인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전 시기와 달리 숙종대 척신이 정치에 개 3) 숙종대의 시기구분은 鄭萬祚, 肅宗朝 良役變通論의 展開와 良役對策 ( 國史館論叢 17, 국 사편찬위원회, 1990)이 참조된다. 여기에서는 숙종 초기를 즉위 년부터 숙종 20년까지의 시기로, 중기는 숙종 20년에서 숙종 35・36년경까지를, 그리고 말기로서 구분하였다. 물론 이러한 시기구분은 良役變通 論議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정치집단의 상이한 이해관계 나 정치적 성향과의 관련 위에서 이를 검토한 것이므로, 본고에서도 이와 같은 시기구분 을 참조하였다.
4) 이전까지 숙종 및 영조대를 다룬 논문에서 간혹 숙종 후반기에 대한 언급은 하였지만, 그 소략함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최근 鄭景嬉의 肅宗 後半期 蕩平政局의 變化 ( 韓 國學報 79, 1995)와 이근호의 肅宗代 申琓의 國政運營論 ( 朝鮮時代史學報 8, 1999) 그리 고 鄭萬祚의 肅宗後半~英祖初의 政局과 密庵 李栽의 政治論 ( 密菴 李栽 硏究 , 근간) 연구는 숙종 후반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5) 李載浩, 蕩平政策의 本質考(中)-特히 士林政治의 爭點에 對하여- , 釜大史學 6, 釜山大學 校 史學會, 1982.
李銀順, 18세기 老論 一黨專制의 成立過程 , 歷史學報 110, 歷史學會, 1986.
朴光用, 朝鮮後期 蕩平 硏究 ,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4.
6) 吳甲均, 景宗朝에 있어서의 老少 對立 , 論文集 8, 淸州敎育大學, 1972.
---, 辛壬士禍에 對하여 , 論文集 9, 淸州敎育大學, 1973.
---, 景宗의 生涯와 施政에 대한 一考察 , 論文集 13, 淸州敎育大學, 1977.
鄭會善, 景宗朝 辛壬士禍의 發生 原因에 대한 再檢討 , 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 1987.
---, 景宗朝 辛丑換局의 전개와 金一鏡 , 全北史學 11・12合輯, 全北大學校 史學會, 1989.
李熙煥, 景宗代의 辛丑換局과 壬寅獄事 , 全北史學 15, 全北大學校 史學會, 1992.
7) 戚臣이란 戚 ・戚里・戚族・戚屬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大漢和辭典 戚 참 조) 이들은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정국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넓게는 親族인 宗親勢力까지도 포함된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 는 母戚과 妻戚의 外戚으로서 그 자신이 직접 出仕하거나 혹은 배후로서 영향 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을 戚臣으로 한정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입할 수 있었던 요인을 파악하고자 정치・경제적 상황과 숙종의 왕권강화 측면 에서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숙종대 환국정치의 상황에서 척신의 정치개 입이라는 측면이 미친 영향을 간략하나마 검토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숙종 후반 기 老・少論의 대립구도 하에서 이루어진 丙申處分 및 丁酉獨對가 가지는 의미 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숙종 즉위 이후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온 척신세력에 대한 파악과 이들의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당시 노론이 꺼려하였던 경종이 정유독대 이후 대리청정을 할 수 있었던 것과, 이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면서 즉위할 수 있었던 단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장에서는 경종 즉위 이후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의 소론에 대한 견제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노론의 계속된 정국 주도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는 연잉군의 建儲의 논의 및 代理聽政 건의의 배경 및 전개과정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동시에 이들의 배후로서 지목되고 있는 척신세력을 분석하여, 척신 세력이 즉위초 정국의 진행과정에서 노론 및 소론의 黨人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 하고자 한다. 이는 경종 즉위초 정국의 양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척신세력 내부의 갈등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3장에서는 경종대 주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辛丑換局과 壬寅獄事를 분석하 고자 하였다. 급작스러운 정국의 변동을 야기하였던 金一鏡 등의 辛丑疏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과 경종의 정국운영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김일경 등 急 少勢力에 대한 파악이 가능할 것이며, 이들과 연결된 척신세력의 활동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후 임인옥사를 통한 다수 노론계 인사의 처벌이 가 지는 배경과 그 의미를 확인하고자 한다. 또한 옥사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대두 되었던 경종에 대한 폐위 음모인 三手 의 진상파악에 대한 진행과정에 대한 파 악을 통해서 경종 즉위초 갈등관계를 나타내고 있었던 척신세력의 분열상을 뚜 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왕세제인 연잉군이 계속해서 그 지위 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연잉 군, 즉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실시되는 탕평의 양상과 척신세력의 재편이 가지 는 의미를 언급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이에 대한 파악을 위한 자료로 實錄이나 承政院日記의 年代記資料
를 주로 활용할 것이나, 척신세력의 동향 및 성향은 위의 자료에 그 실상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이에 대한 보완을 목적으로 黨論書 및 個人 文 集類 등을 이용하여 그 내용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通婚關係는 정치의식이나 사회적 지위등의 유사한 기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族譜 의 활용을 통하여 척신세력의 결속 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는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의 정국운영 방식의 변화상을 척신 세력의 동향과 연결지어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즉 척신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국의 혼란스러운 양상과, 이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정국을 주도하려는 국 왕의 모습속에서 나타나는 蕩平政局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척신세력의 정치개입 및 정국 장악에 대한 파악이 이후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를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Ⅰ . 肅宗代 戚臣의 정치적 대두와 동향
1. 戚臣의 대두와 배경
숙종대는 즉위로부터 시작된 庚申換局・己巳換局・甲戌換局으로 西人과 南人 의 정치적 浮沈이 반복되면서 상대 黨에 대한 보복이 뒤따르는 등 긴장된 정치 국면으로 치닫던 시기였다.8) 이후 갑술환국으로 西人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잠시 안정되는 듯 하였지만, 또다시 老論과 少論으로 서인이 분열되어 각축하는 양상 이 계속되었다.9)
그런데 숙종 초기 환국의 전개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士林政治下에서 배제되 었던 戚臣의 정치적 신장이라는 측면이다. 숙종 초기 戚臣家門으로는 숙종의 外 祖父인 金佑明의 淸風金門, 숙종의 장인인 金萬基의 光山金門, 閔維重의 驪興閔 門으로 지목되고 있는데,10) 이들은 환국의 과정에서 공을 인정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무렵 兵權을 거의 독점하는 등 정치적 역량이 크게 신장되었다.11)
8) 숙종대 換局의 전개과정과 그 의미는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洪順敏, 肅宗初期의 政治構造와 換局 , 韓國史論 15,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1986.
李熙煥, 肅宗과 己巳換局 , 全北史學 8, 1984.
---, 庚申換局과 金錫胄 , 全北史學 10, 1986.
---, 老少論의 對立과 肅宗 , 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 1987.
---, 甲戌換局과 肅宗 , 全北史學 11・12合輯, 1989.
---, 朝鮮後期黨爭硏究 , 國學資料院, 1995.
9) 肅宗實錄 卷27, 肅宗 20年 7月 丙戌, 朴世采所製敎文條, (前略)…自甲寅以來 世運屢變 一進一退 適足以助其傾軋之勢 遂使當時治事者 亡論彼此 各主黨習而不已 淸濁老少 可推 見…(後略)
10) 肅宗實錄 卷14, 肅宗 9年 5月 丙午, 前參議尹拯 承召到果川…(中略)…朴世采往見 拯言 今有三不可出者 南人怨毒 不可平一也 三戚威柄 不可制一也 尤翁世道 不可變一也 三戚 指 兩金及閔家也…(後略).
11) 肅宗實錄 卷11, 肅宗 7年 5月 乙卯, 校理林泳等 以七條應旨上箚條.
年代 官職 兵曹判書 訓練大將 御營大將 摠戎使 守禦使
肅宗 卽位年(1674) 李尙眞(9.15) 金錫胄(9.20)
肅宗 1年(1675) 權大運(1.26)
金錫胄(2.20) 金萬基(1.18)
肅宗 2年(1676)
肅宗 3年(1677) 李汝發(2.2)
肅宗 4年(1678) 金益勳(윤3.16)
金錫胄(윤3.21) 閔熙(윤3.21) 肅宗 5年(1679)
肅宗 6年(1680) 鄭載嵩(10.10)
閔維重(12.13) 金萬基(3.29) 申汝哲(3.29) 肅宗 7年(1681) 李 (4.2)
金錫胄(12.26) 肅宗 8年(1682) 鄭載嵩(5.18)
南九萬(8.23)
金錫胄(2.19) 申汝哲(5.19)
申汝哲(2.19) 金益勳(5.19)
金益勳(2.20)
具鎰(5.19) 鄭載嵩(1.23) 肅宗 9年(1683) 申汝哲(1.27) 尹趾完(1.5) 李仁夏(1.27)
肅宗 10年(1684)
鄭載嵩(1.12) 趙師錫(8.6) 金錫胄(9.3)
徐文重(8.29) 金錫翼(9.1)
<표 1> 肅宗 卽位年~10年 兵曹判書 및 各 軍營大將 任命表12)
* 禁衛營의 경우 肅宗 8年 3月 金錫胄의 건의로 創設한 이후 兵曹判書가 兼職함.
* 괄호안은 任命日이고, 밑줄은 三戚으로 지목된 家門의 인물임.
숙종 초기 척신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모습은 <표 1>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데, 金錫胄의 경우에는 숙종의 외조부인 金佑明의 조카로 숙종 즉위년 先朝인 현종의 遺旨라 하여 守禦使에 발탁된 이래13) 숙종 1년 兵曹判書, 숙종 6년에는 吏曹判書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숙종 8년에는 병조판서로서 금위대장과 훈련대 장까지도 겸직하는 등 실질적인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同年 5월에는 右議 政의 반열까지 오르게 된다.14) 숙종의 장인인 金萬基는 國舅로서 총융사에 제수
12) 肅宗實錄 및 정홍준의 조선중기 정치권력구조연구 부록편을 참조하여 작성.
13) 肅宗實錄 卷1, 肅宗 卽位年 9月 辛巳, 先朝末年 守禦使擬望以入 而未及落點 至是 上命 大臣加望 錫胄以承旨 擢拜 盖有先朝遺旨云.
14)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10月 丁酉; 肅宗 8年 5月 乙丑.
되었고,15) 叔父인 金益勳과 함께 주요 군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閔維重은 肅宗 7 년 그의 딸이 숙종의 繼妃로 揀擇되자 병조판서직의 辭職을 요청하였지만,16) 그 의 형인 閔鼎重의 경우에는 좌의정으로서의 직무를 지속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 다.
숙종초 척신이 정치에 관여하게되는 배경은 宋時烈을 비롯한 西人 山林이 北伐 論議를 바탕으로 臣僚 중심의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청나라에 君 弱臣强說이 유포될 정도였다는 것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군약신강설은 숙종 원년 청나라 사신으로부터 다시 거론되어 파문을 일으킬 정도였고,17) 일진일퇴 의 換局 상황은 一黨의 전제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왕권 에 제약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갑인예송 이후 남 인 정권하에서 仁祖의 3子인 麟坪大君의 아들 福昌君・福善君・福平君의 3福이 왕실의 지친으로서 外家인 同福吳門과 許穆・尹 의 후원18)으로 숙종의 나이가 어리고 병약한 상태에서 강한 종친세력으로서 활동하여,19) 이들 또한 왕권을 위 협하는 존재였다.
결국 14세의 幼主로 즉위한 숙종은 왕권의 강화와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外戚 을 각 군영직에 임명하고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이들의 보좌를 통해 君 弱臣强의 상황을 타개하면서 동시에 내부의 변란을 대비하였던 것이다.20) 그런 데 왕권강화 차원에서 척신을 군영직에 임명하였던 사실은 숙종이 즉위초 어린 나이였다는 사실로서 숙종 자신의 판단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주상이 특별히 明聖王后를 뵈니, 명성이 어영대장이 비었다고 하던데 과연 누가 되
15) 肅宗實錄 卷2, 肅宗 1年 1月 丁丑, 許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國舊는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여서는 안되나, 이런 어려운 때에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맡는 것은 무방할 듯합 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金萬基를 注擬하여 넣었으므로, 이 除授가 있었다.
16) 肅宗實錄 卷11, 肅宗 7年 4月 甲申, 兵曹判書閔維重辭免條.
17) 肅宗實錄 卷2, 肅宗 元年 3月 辛酉, 上迎勅于慕華館條.
18) 肅宗實錄 卷3, 肅宗 卽位年 3月 癸酉, 許穆・尹 의 무리는 본디 복창군 楨 등을 주요 한 후원으로 삼았으므로...
19) 黨議通略 肅宗朝, 佑明亦念 上幼弱多疾 無親兄弟 强宗(필자주-三福)近 恐致不測 20) 肅宗實錄補闕正誤 卷15, 肅宗 10年 3月 癸巳, 史臣曰條, 主上 年嗣位 專任一邊之人
未幾逆變猝起於此輩 而戡定禍亂 皆出於外戚之手 自是外戚爲上之所傾倚 益勳亦以戚里之故 至拜大將 上之所以庇護之者 固已至矣
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상은 김익훈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명성이 놀 라며 익훈이 어찌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주상이 익훈을 처 음 어영대장에 제수하였을 때도 자전께서 힘써 권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제수하였던 것 입니다. 지금 이처럼 자전의 말씀이 그 전과 다름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고 하였다.21)
이는 庚申換局 이후 김익훈의 어영대장직 임명에 관한 기사인데, 이를 통해 숙 종 4년 김익훈이 어영대장이 되었을 때 명성왕후 김씨가 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유중이 숙종 7년 병조판서직을 辭任했을때 숙종은 遞任하지 말라는 慈聖의 下敎에 의해 사임을 만류하고 있는 모습22)을 통해서, 이 시기 척신의 병권 장악에는 숙종의 왕권 강화의 의도와 더불어 대비인 명성 왕후가 이에 개입하고 있는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척신의 병권장악을 통한 정치 관여는 士林政治下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일반 士類출신 관료의 반발을 야기하였다. 즉 儒生 李碩徵등은 戚 里가 정권을 침해한다면서 김석주를 배척하였고,23) 吏曹判書 洪宇遠은 김익훈의 어영대장직 임명에 반발하면서 척신의 병권 장악이 가져오는 禍根에 대해 논하 는 등24) 점차 그 비판과 공격을 가중하였다. 그러나 척신의 병권장악은 앞서 살 펴보았듯이 국왕의 의도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숙종은 이러한 士類의 비 판에 대해 척신의 병권장악은 이전 시기에도 있었으며, 人才를 任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로서 척신을 비호하는 동시에 士類의 비판과 공격을 무마하였던 것이다.25) 이처럼 척신의 진출이 士類의 반발로 인해 일시적으로 견제되기도 하 였지만, 숙종의 신임과 지원으로 척신은 그 정치적 영향력을 점차 성장시켜 가 고 있었다. 또한 숙종 6년에는 許堅의 獄事를 통해서 勳功까지 더하게 되었으 며,26) 환국의 과정에서 西人으로부터 남인퇴치의 공까지 인정받고 있었다.
21) 丹巖漫錄 肅宗朝, 上特入侍明聖 明聖問曰 聞御將有 果誰爲之 上曰 金益勳爲之矣 明 聖驚曰 益勳何可爲此任乎 上曰 益勳初除御將時 慈旨力勸 故特除矣 今此慈敎 與前有異何 也
22) 肅宗實錄 卷11, 肅宗 7年 3月 壬午, 金壽恒曰條.
23) 肅宗實錄 卷6, 肅宗 3年 8月 甲寅, 四學儒生李碩徵等上疏.
24) 肅宗實錄 卷7, 肅宗 4年 閏3月 辛酉, 吏曹判書洪宇遠上疏.
南坡集 卷7, 論金益勳不合將任疏
25) 肅宗實錄 卷4, 肅宗 元年 12月 丙寅; 肅宗 7年 3月 己卯; 肅宗 7年 5月 乙卯.
26) 肅宗實錄 卷9, 肅宗 6年 5月 丙午. 許堅의 逆謀관련 獄事가 마무리되고 난 이후 保社功
척신의 군영직 임명은 물론 이전 시기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27) 하지만 숙 종대 척신의 군영 장악은 이전 시기에서와 같이 단순히 군사적인 측면의 의미로 만 한정지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당시 국방개념이 국경방어에서 수도방어체제로 변화된 사실과, 軍役이 良役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 었다는 사실은 군영 장악이 물리적・경제적인 장악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28) 그리고 수도방어체제는 외적의 방어가 주목적이라기보다는 내부의 변란에 대비 하는 治安的인 성격이 더 강했음을 감안한다면29) 이 시기 척신의 군영 장악은 정치적인 장악까지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숙종년간 武臣과 外戚의 정 책결정권 참여가 보장되는 備邊司가 議政府와 六曹를 제치고 최고정책기구로서 그 기능이 강화되어 갔던 것에도 그 척신의 정치적 관여를 확인할 수 있는 모습 이라고 할 수 있다.30)
그런데 척신의 정치개입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숙종대 환국의 과정에서였다. 척신의 정치개입 이후에 벌어진 환국은 甲寅禮訟에서 보이는 바 와 같이 名分論의 차원에서 실시되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즉 갑인 예송의 경우 주요 쟁점은 복제문제 즉 禮論과 관련된 논쟁이었기 때문에, 이 논 쟁의 승패는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어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되는 단순한 정권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경신환국의 경우 남인 집정 자와 종친 4명의 賜死를 포함하여 100여 명이 流配・杖流・削職 당하였고 推鞫 에서 刑杖으로 죽은 자도 10여 명이 넘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의 교체라는 의미 를 넘어 상호간의 숙청과 보복이 더 가혹해짐으로써, 이제 정쟁의 승패는 生死 의 갈림길이 되었던 것임을 알게 해준다.31)
臣 1등에 金萬基와 金錫胄가 策封되었다.
27) 勳戚臣系는 仁祖 이래 兵權에 관여하여 왔다. 이는 능성구씨 및 덕수장씨의 경우에서 살 펴진다.
28) 洪順敏, 肅宗初期 政治構造와 換局 , 韓國史論 15,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1986, 168~
172쪽.
29) 이근호, 숙종대 중앙군영의 변화와 수도방위체제의 성립 ,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 , 서 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8.
30) 朴光用, 朝鮮後期 蕩平 硏究 ,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4, 26~27쪽.
李在喆, 朝鮮後期 備邊司硏究 , 集文堂, 2001.
31) 金駿錫, 탕평책 실시의 배경 , 한국사 32, 국사편찬위원회, 1997, 35쪽.
즉 이러한 정쟁의 격화는 김석주 등 척신의 염탐・정탐정치32)로 인한 誣獄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즉 경신환국은 숙종 6년 4월에 鄭元老와 姜萬鐵이 올린 종친 福善君 과 허적의 서자인 許堅이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고변이 직접적 인 계기가 되었다.33) 그런데 이 고변은 김석주가 여러 차례 申範華와 鄭元老34) 를 유인해 복선군과 허견의 비밀스런 사항들을 염탐하게 한 결과로서, 억지로 탐지한 데서 나온 것으로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35) 하지만 국문의 결과 남인은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김석주・김만기 등의 척신은 保社功臣에 책봉되기까지 하 였던 것이다. 또한 염탐・정탐정치는 壬戌年(숙종 8년, 1682) 金煥・金重夏・金 益勳의 고변 사건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36) 이는 경신년 남인을 치죄한 후 많은 인물들이 형벌에서 빠진 것을 우려한 김석주가 김익훈으로 하여금 의심스 러운 자를 정탐하게 하였다.37) 이에 김익훈은 김환을 배후에서 조정하여 고변하 게 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역모자로는 許璽・許瑛・柳命堅・李德周・閔 등이 언급되었으나, 국문의 결과 허새・허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무런 증거 와 실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이 고변사건은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 쪽으 로 결말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는 趙持謙・兪得一 등 삼사의 언관들이 김익훈의 정탐에 근거를 둔 密啓 등을 공격하여38) 정치적으로 그 여파가 매우 크게 되었
32) 염탐 또는 정탐 은 사림정치하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으므로, 삼사의 언관들은 이러한 척신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김석 주의 경우 오히려 明 나라때 王守仁이 冀元亨을 시켜 반역사건을 엿보게 한 것에 빗대어 그 타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9月 甲子; 黨議通略 肅宗朝) 33) 肅宗實錄 卷9, 肅宗 6年 4月 甲子, 鄭元老・姜萬鐵上變書.
34) 鄭元老와 申範華는 평소 남인들과 교류하고 있었으며, 정원로의 경우 金錫胄와 내통하는 사이였으며,( 黨議通略 肅宗朝) 申範華는 김석주의 내외종 동생이다.(아래 系譜圖 참조)
申翊聖
金佐明 女 申冕
金錫胄 申範華
35) 黨議通略 肅宗朝, 逆獄皆出鉤探 無確證 主其事者 錫胄等數人 36) 肅宗實錄 卷13, 肅宗 8年 10月 甲午, 庚子.
37) 丹巖 錄 肅宗朝; 黨議通略 肅宗朝.
다.39)
요컨대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척신이 숙종의 비호 아래 내부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빌미로 실시하였던 염탐・정탐정치는 이전까지 義理・名分論爭으로 상호비판과 견제를 실시하였던 정치형태를 변화시켰다. 즉 염탐・정탐정치의 결 과 일어난 역모사건은 그 진위의 여부를 떠나 忠逆是非와 관련된 문제였으므로, 예송논쟁의 결과에서 보이는 단순한 붕당간의 교체가 아닌 獄事에 따르는 慘禍 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후 환국이 거듭될수록 상호간의 숙청과 보복은 더욱 가혹해져 극단적인 붕당간의 갈등 양상으로 나타났으며,40) 이러한 상황은 결국 경종대 辛壬獄事라는 최대의 黨禍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2. 肅宗 後半期 戚臣勢力의 동향
경신환국 이후 등장한 서인 내부에 이러한 戚臣의 처리문제41)와 축출된 남인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42) 갈등이 나타난다. 서인은 척신에 타협적이고 우호적인 성향과 남인에 대한 철저한 治罪를 주장하는 議政府의 大臣들이 주류를 이룬 老 論과, 척신에 비판적이고 적대적이며 남인에 대한 辨別的 治罪를 주장하는 三司 의 年少 관료들이 주류가 된 少論으로 나뉘어졌던 것이다.43) 비록 기사환국(숙종
38) 肅宗實錄 卷13, 肅宗 8年 11月 癸丑; 癸酉.
39) 金益勳의 처분문제를 놓고 서인 내부의 年少輩는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결집되었고, 서인 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할 때 소론의 핵심이 되었다.
40) 이는 己巳換局으로 재집권한 남인은 金壽恒・洪致祥・李師命 등 노론계 인물과 金益勳 등 척신등을 賜死하는 등 서인계 인물 다수를 유배하거나 파직 등의 처벌을 가한다. 이로 서 환국이 거듭되면서 상호간의 숙청과 보복은 더욱 심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
41) 肅宗實錄補闕正誤 卷14, 肅宗 9年 閏6月 戊辰, 判中樞李尙眞箚子條.
42) 黨議通略 肅宗朝.
43) 肅宗實錄 卷14, 肅宗 9年 3月 甲辰.
肅宗實錄補闕正誤 卷14, 肅宗 9年 2月 甲戌.
하지만 時前輩大臣中 惟李尙眞力扶少論 而尹趾完南九萬柳尙運 年位稍過於五諫 亦主少論 云 ( 黨議通略 肅宗朝)이라하여 소위 前輩 중에서도 소론을 돕거나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官職의 高下와 年齡의 年少에 따른 노・소론의 분류는 일반 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5년, 1689) 이후 서인이 일시적으로나마 남인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갑술환국(숙종 20년, 1694) 이후 축출된 남인 및 희빈 장씨의 처리, 그 리고 이른바 謀害東宮 의 상소사건 문제44) 등으로 또다시 노론과 소론의 의견이 벌어져 숙종 후반기 정국은 노・소론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 전개된다.
한편 척신은 숙종 9년 12월 명성왕후 김씨가 승하하고,45) 이듬해에는 김석주가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46)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기사환국 이후 남인 집권시 김석주의 아들 金道淵이 음독자살함으로써47) 김석주의 淸風金門은 척신 가문으로서의 명성이 쇠퇴하였다.48) 이와 같은 척신세력의 약화와 함께 숙종도 더 이상 즉위 초기와 같이 척신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지는 않았다. 즉 숙종은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의 과정속에서 정국 주도의 자신감을 가짐으로서 노・소론 연립 정국의 운영과정을 통하여 왕권의 우위를 도모하였고, 숙종 20년 이후 宰 相職에 노론과 소론을 적절히 안배하되 자주 교체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49)
그러므로 척신세력은 더 이상 국왕인 숙종의 전폭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이들의 활동은 척신의 측면보다는 老論 黨人의 활동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50) 숙종 후반기 척신가문으로는 숙종 초기의 광산김문・여흥민문 외에 숙종 12년 숙종의 後宮으로 간택된 金昌國의 安東金門, 숙종 28년 10월 숙종의 繼妃로 간택된 金柱臣의 慶州金門과, 世子嬪으로 숙종 22년 간택된 沈浩의 淸松 沈門과 숙종 44년 간택된 魚有龜의 咸從魚門을 들 수 있다.
44) 肅宗 32年 林溥와 李潛의 上疏로 인한 노・소론간의 대립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燃藜 室記述 卷38, 林溥・李潛之獄)
45) 丹巖 錄 肅宗條.
46)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9月 癸未, 淸城府院君金錫胄卒記.
47) 肅宗實錄 卷20, 肅宗 15年 閏3月 戊申.
48) 丹巖 錄 肅宗朝, 道淵飮藥自殺 遂籍沒錫胄家産 道淵以獨子 而無子而死 錫胄遂絶嗣 49) 禹仁秀, 朝鮮 肅宗代 政局과 山林의 機能 , 국사관논총 43, 국사편찬위원회, 1993, 154
쪽.
50) 이는 민진후가 숙종 37년 4월 비변사 사안을 독단으로 처리하였다가 왕을 업신여긴다는 죄목으로 罷職不敍의 처분을 받은 것과( 肅宗實錄 卷50, 肅宗 37年 4月 丁亥), 민진원이 숙종 42년 노론 당론을 주창하였다하여 체직되거나 삭탈관작의 처분을 받은 것( 肅宗實 錄 卷57, 肅宗 42年을 3月 辛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도 1> 主要 戚臣 家門 學統圖51) 金#
集
宋 李 宋 李
浚 惟 時 端
吉 泰 烈 相
閔 金#金#閔 金#金#李 李 閔 閔 閔 閔 權 金*金* 金*李 維 萬 萬 鼎 萬 鎭 敏 師 鼎 維 鎭 鎭 尙 昌 昌 昌 重 基 重 重 基 圭 敍 命 重 重 厚 遠 夏 集 協 翕 命
李 李 李 閔 韓 閔 李 李 趙 李 魚 趙 李 閔
師 健 鎭 元 亨 觀 健 泰 有 謙 喜 亨
命 命 命 遠 震 洙 命 命 萬 縡 鳳 彬 之 洙
閔 閔 閔 李 李 翼 遇 亨 喜 徽 洙 洙 洙 之 之
※ #표시는 光山金門, *표시는 安東金門임.
그런데 이중 광산김문・여흥민문・안동김문・함종어문은 <도 1>에서 보는 바 와 같이 송시열의 學人이라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척신세력의 정치적 활동이 노론 당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측면은, 물론 노론의 척신세력에 대한 우호적인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노 론과 공통된 학적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또한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 므로 위의 가문은 노론 성향의 척신세력으로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도 1>
에서 이후 이른바 노론 4대신 중 한 명인 李 命에 대하여 주목할 수 있다. 물 론 이이명은 척신가문의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親兄인 李師命은 김석주의 이질 이며 김수항의 동서로52) 경신환국 당시 김석주가 염탐할 때 유생으로서 그 계책
51) 朝鮮儒賢淵源圖 를 참고하여 작성함.
52) 肅宗實錄補闕正誤 卷12, 肅宗 7年 12月 乙未, 史臣曰條; 丹巖 錄 肅宗朝, 이사명은 인조조 名臣으로 號가 白江인 李敬輿의 손자이며, 현종조 명신이었던 대사헌 李敏迪의 아 들로 김석주의 이질이며, 김수항의 동서이다.
에 참여하여 공이 있어,53) 일찍이 김석주와의 관계를 통하여 척신세력으로서 활 동하였다. 또한 이이명의 경우에도 김만기의 아들인 金鎭圭와 편지를 통하여 서 로의 안부를 묻고 있는 등54) 척신가문과의 꾸준한 交遊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으 로 보아 척신세력의 범주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겠다. 경주김문의 경우 金一 振과 金聖臣의 墓碣銘을 朴世堂과 崔錫鼎이 각각 撰述55)하고 있으며, 金柱臣의 경우 朴世堂의 門人56)으로서 소론가문이었지만, 김주신은 일찍이 김창집과 왕래 하면서 노론 성향을 나타내었다.57) 그러므로 김주신의 경우에도 노론계 척신세 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노론계 척신가문들은 공통된 학적기반 이외에도 상호간의 혼인관계를 통 해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은 다음의 圖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黃一皓 金佐明
李敏迪 女 女 金錫胄 女 趙顯期 羅星斗
李師命 李 命(出李敏采) 女 女 女 金壽恒
53) 許堅의 獄事가 정리되고 난 이후, 金錫胄와 金壽恒의 상의하에 이사명은 保社二等功臣의 훈공이 더해졌다.(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11月 丁丑)
54) 竹泉集 卷13, 與李相養叔書 ; 答李判府養叔書 ; 答李左相養叔書 ; 與李判府養叔書 . 55) 西溪集 卷13, 成均生員金君(一振)墓碣銘 .
明谷集 卷24, 成均進士金君(聖臣)墓碣銘 . 56) 壽谷集 卷2, 上西溪朴先生書
57) 景宗實錄 卷4, 景宗 元年 7月 癸丑, 慶恩府院君金柱臣卒記.
黨議通略 景宗條, 慶恩府院君金柱臣 本少論 而意嘗嚮老論
< 도 2> 主要 戚臣 家門 婚姻圖58)
閔 李 金#
光 敏 益
勳 敍 兼
閔 閔 李 金* 李 金* 金*李 金* 金# 金#
鼎 維 健 昌 觀 昌 女 昌 昌 萬 萬
重 重 命 緝 命 國 立 命 業 重 基
閔 金* 閔 趙 閔 仁 閔 李 李 金* 寧 李 金* 金# 金#仁 李
鎭 昌 鎭 泰 鎭 顯 鎭 勉 女 望 女 益 嬪 翊 女 信 女 鎭 鎭 敬 師
長 集 厚 彙(泰采之兄) 遠 王 永 之 之 謙 金 之 謙 華 龜 王 命
后 氏 后
閔 趙 閔 李 金# 金# 金#
啓 女 女 女 奎 女 昌 女 德 女 光 龍 女 普 女
洙 彬 洙 祥 澤 澤 澤
※ 인명은 노론4대신 및 숙종의 妃와 後宮임
※ #표시는 光山金門, *표시는 安東金門임.
<도 2>를 통해 노론계 척신세력간의 중첩된 혼인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일반 적으로 士林은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고 學錄을 매개로 결집되는데 반해, 척신세 력은 권력의 획득 및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나 집단에 趨附하는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보인다.59) 결국 <도 1>에서 살펴보았던 공통된 학통기반보다는 이러한 상호간의 중첩된 혼인양상에서 척신간의 결합관계를 보다 더 극명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이들의 권력 지향적인 모습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청송심문의 경우 세자빈 간택시 숙종이 소론의 영의정 南九萬과 좌의정 柳尙運에게 간택의 여부를 물어보는가 하면,60) 심호의 아들 沈維賢의 경우 영조 4년 戊申亂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物故되는 모습이 보인다.61) 이는 노론 성향의
58) 光山金門, 安東金門, 驪興閔門 族譜를 참고하여 작성함.
59) 金宇基, 朝鮮 明宗代 戚臣勢力의 性分 , 韓國史硏究 93, 111쪽.
60) 肅宗實錄 卷30, 肅宗 22年 4月 癸巳, 王世子嬪三揀擇條.
61) 英祖實錄 卷17, 英祖 4年 4月 甲申, 沈維賢物故條.
척신세력과 입장차이를 보이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魚有龜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도 1>에서 보듯이 그의 형인 魚有鳳은 金昌協의 門人으 로서 노론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의 祖父인 魚震翼의 신도비를 송시 열의 嫡傳弟子인 權尙夏가 撰述62)하고 있어 老論家로서의 모습이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어유귀의 경우에는 본래 노론이었으나 노론이 그와 더불어 함께 일하지 않았다. 라고 하여63) 함종어문 또한 여타 노론계 척신세력과 異見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이와 같은 청송심문과 함종어문의 모습은 앞서 서술한 척신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를 중시하는 정치성향을 염두 한다면, 노론 성향의 척신세력과 이들의 이견 은 경종의 왕위계승 여부를 둘러싼 갈등관계로 설정해 볼 수 있다. 즉 소론 및 남인의 지원 및 보호를 받는 경종의 왕위계승은 노론 성향의 척신세력으로서는 그들의 권력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들로서는 경종의 즉위는 부담으 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청송심문과 함종어문의 경우에는 景宗妃를 배출 한 가문으로서 경종의 즉위는 그들의 권력을 획득・유지시킬 수 있는 측면이 더 욱 강했다. 결국 숙종 후반기 척신세력의 이견은 왕위계승의 문제가 언급될 때 마다 갈등 양상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갈등관계에 대한 파악을 기반 으로 숙종 후반기 정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숙종은 갑술환국 이후 노・소론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유지하였 다. 하지만 숙종 41년 家禮源流 의 간행을 둘러싸고 또다시 노・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에 기존의 노・소론의 시비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 던 숙종이,64) 직접 노론의 의리・명분이 옳다고 결정하는 丙申處分이 단행된 다.65) 그리고 소론의 영수로서 추앙받던 윤선거와 윤증 父子에 대한 儒賢의 칭
62) 寒水齋集 卷24, 觀察使魚公(震翼)神道碑銘 .
63) 黨議通略 景宗朝, 上國舅咸原府院君魚有龜 本老論 而老論不與共事 .
64) 숙종 40년 崔錫鼎이 館儒를 代身해 지은 윤증의 祭文 내용이 논란을 일으켜 또다시 懷尼 是非 의 문제가 벌어졌다.( 肅宗實錄 卷55, 肅宗 40年 8月 辛巳, 儒生李匡輔朴弼顯等 操文 祭尹拯之喪條) 하지만 숙종은 그 제문이 사문서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肅宗實錄 卷55, 肅宗 40年 8月 辛巳, (前略)…上答曰 大臣代撰祭文中數句語 其所指斥 未知果如爾等之所論也 況此儒生 祭儒相文 則非公家文字 決不可推而上之於朝廷 也…(後略) )
65) 肅宗實錄 卷58, 肅宗 42年 7月 癸亥, 下敎曰條.
호를 금하는 조처를 통하여,66) 그 동안 소론의 의리와 명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취해온 숙종의 왕권강화책과 상반되는 조치인데, 숙종의 이 같은 태도변화는 병신처분을 내린 지 6개월 만인 정유년 7월 이이명과 이례적으로 史官과 承旨를 참여시키지 않고 실시한 獨對67)를 통하여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독대의 내용에 대하여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는 숙종이 이이명에 게 세자의 代理政을 보필하게 하는 한편 王子 延 君(훗날의 英祖)과 延齡君의 보호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68) 당시 숙종은 고질병으로 인해 더 이상의 國事를 처리하는데 불가능하였으며69) 後嗣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 이 즉위초 서인과 남인의 政爭속에서 이른바 君弱臣强 을 경험한 바 있었고, 이 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척신의 정치개입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해온바 있었다.
그러므로 숙종은 그 집권후반기 강성해진 척신세력을 통하여 세자를 보좌토록 부탁하였으며, 그 대신 척신세력의 권력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병신처분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숙종이 노론계 척신세력의 領袖인 김창집과 독 대를 하지 않은 것은 그가 七旬의 老軀로 병이 위중하여70) 後嗣를 부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즉위초부터 신임하였던 김석주의 이질인 이이명과의 독대를 실시한 것으로 파악된다.71)
66) 肅宗實錄 卷59, 肅宗 43年 正月 丁卯, 上下敎曰條.
67) 肅宗實錄 卷60, 肅宗 43年 7月 辛未, 大臣獨對條.
68) 이는 후일 英祖 16年 이른바 僞詩사건과 金福澤에 대한 鞫問의 과정에서 비로소 밝혀지 게 되었다.( 英祖實錄 卷52, 英祖 16年 10月 壬戌; 丹巖漫錄 肅宗朝.)
69) 肅宗實錄 卷60, 肅宗 43年 7月 辛未 下敎曰條.
70) 肅宗實錄 卷60, 肅宗 43年 7月 辛未; 丹巖 錄 肅宗朝, 당시 영의정 김창집은 약방 도제조였으나 병이 위중하여 대궐밖에 있었다.
71) 李 命과 金錫胄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이이명은 소론의 大臣인 李光佐와 청송심문과의 관계도 나타난다.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 또한 숙종이 독대의 大臣으로 이이명을 택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朴長遠
李敏采 女 女 李世龜 朴
系
이러한 숙종의 독대 제의에 척신세력 또한 이를 거부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비록 세자의 즉위 자체는 그들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이끌수도 있었다.
하지만 훗날 세자 보좌의 공으로 경종의 廟廷에 配享72)되는 閔鎭厚73)와 李濡74) 그리고 청송심문과 함종어문의 척신세력이 세자에 대한 보호를 자처하고 있었 다. 또한 당시 세자는 비록 희빈장씨의 소생이기는 하지만 仁顯王后의 養子로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孝誠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정통성에 문제 나 폐륜적 행위 등으로 廢世子를 거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75) 결국 세자의 왕위계승이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노론계 척신세력은 일단 세자 보위를 표방하 면서 훗날 세자 즉위시에도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정유독대는 노론계 척신세력이 국왕인 숙종으로부터 직접 왕세자의 보 위를 부탁받았고, 이들은 국왕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대신, 당시 정국을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조성하였고 더 나아가 왕세자가 즉위한 이후에도 그들의 권익을 보 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것이었다.
한편 숙종은 왕자인 연잉군 및 연령군의 보호 또한 척신세력에게 부탁하고 있 는데, 이는 독대 이후 이이명과 민진원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이후 이이명이 민진원과 더불어 독대의 일을 언급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만 약 태조조의 고사에 의거하여 주상에게 禪位하시게 하여, 세자가 선위를 받은 이후 다
李 命 李光佐 女 沈浩
端懿王后
72) 承政院日記 第620冊, 英祖 2年 7月 丙午, 配享抄啓時 司諫閔應洙持平尹涉校理金龍慶進 參 賓廳三啓曰 今日配享諸臣會圈 則八点行左參贊閔鎭厚 七点領議政李濡 二人 抄啓別單書 入之意敢啓 傳曰 知道
73) 肅宗實錄補闕正誤 卷65, 肅宗 46年 5月 己卯, 그(閔鎭厚)의 東宮을 위한 赤心만은 죽음 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만일 민진후가 생존해 있었다면 李 命・金昌 集의 무리들이 반드시 감히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고 하였다.
74) 李濡의 경우 魚有龜의 고모부로 함종어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경종의 배향신으 로 선정되는 바 숙종말 경종의 왕권 유지를 지지한 인물로 파악될 수 있다.
75) 경종은 비록 後宮인 희빈장씨의 소생이기는 하지만 仁顯王后의 養子로서 효성이 지극하 여 이미 그 大統을 잇는데 문제가 없었다.( 景宗實錄 卷15, 景宗大王誌文; 丹巖 錄 景 宗朝, 殿下旣承大統爲仁顯之子 )
시 공정대왕 고사에 의해 建儲하고, 곧 형세를 보아서 代理한 즉 國勢가 가히 공고해질 수 있다. 어찌 祖宗朝의 故事를 우리 임금께서 들을 수 있게 말씀드리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76)
이는 숙종의 禪位 이후의 상황을 염두해 둔 척신세력의 수순으로 보이는데, 결 국 세자 선위 이후 훗날 영조의 즉위까지의 논리를 민진원이 제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丹巖 錄은 영조 무신난 이후에 민진원의 기록임을 감안한다면 이 기록은 영조의 즉위에 민진원 자신의 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으로 파악되며, 민진원이 태조・공정대왕조의 고사를 이용한 논리를 세웠다는 것에는 의심이 간 다. 하지만 경종 즉위 이후 건저・대리청정의 제기가 이와 같은 논리로서 진행 되므로, 이는 노론계 척신세력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으로 파악된다.
즉 노론 성향의 척신세력은 세자의 왕위계승에 개입하여 그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받았지만, 만일의 경우 그들의 권력이 위협을 받게될 때에는 세 자의 질환을 빌미로 삼아 연잉군이나 연령군으로 하여금 建儲한 이후 곧 代理聽 政을 요구77)하여 왕권의 轉移를 도모하였던 것이다.78)
결국 숙종말 병신처분으로 인한 소론의 의리와 명분의 부정은 세자를 보좌하는 척신세력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는 그 동안 숙종이 취해왔던 왕 권강화책의 포기가 아니라 後嗣의 왕권강화를 위한 새로운 방법의 모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숙종 후반기 정국은 척신세력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러한 상 황에서 숙종이 승하하자 경종이 그 뒤를 이어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던 것이 다.
76) 丹巖 錄 肅宗朝, 其後( 命)與閔(鎭遠)語 及其時事 (鎭遠)曰 若依太祖朝故事勸上禪位 世子受禪後又依恭靖大王故事 卽爲建儲 仍又觀動代理 則國勢可以鞏固 何不以祖宗故事聞於 吾君乎
77) 世子의 뒤를 이을 後嗣로 延 君과 延齡君이 언급되고 있지만, 연령군 이 숙종 45년에 졸하자( 肅宗實錄 卷64, 肅宗 45年 10月 辛丑) 척신세력은 그 후사로서 연잉군을 지목할 수 밖에 없었다.
78) 이는 세자의 대리청정에 대한 下命이 있은 직후 소론의 윤지완이 올린 상소문( 肅宗實 錄 卷60, 肅宗 43年 7月 庚辰, 領中樞府事尹趾完上疏)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즉 세자를 싫 어하는 노론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는 것은 오히려 이를 통해 세자를 모해하려는 음 모를 꾸미고 있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리청정 이후의 상황에 대한 소론 의 우려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Ⅱ . 景宗 卽位初 戚臣勢力의 갈등
1. 老論의 政局주도와 世弟 冊封
숙종 후반기 병신처분 및 정유독대를 통해서 노론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종의 즉위와 함께 이 시기 時局이 조석간에 마땅히 변할 것이라고 소 문이 도는 등,79) 노론은 의심과 두려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소론이 지원 하는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소론이 앞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 노론과 갈등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론은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경종이 비국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閔鎭遠은 肅宗의 정치 를 繼述하는 것이 孝道에 합당한 일80)이라고 말하면서 이전의 정치상황을 유지 시키려 했다. 그리고 正言 徐宗燮은 이광좌가 즉위초 禮曹參判에 제수된 것에 대해81) 出處의 義理가 없는 것임을 들어 責罰을 요청82)하는 등 소론에 대한 견 제를 해나갔다.
하지만 우려하였던 상황은 趙重遇가 경종의 生母인 희빈장씨에 대한 名號 정하 기를 요청하는 上疏로 표출되었다.83) 하지만 이 문제가 처리되면 辛巳年에 희빈 장씨에 대한 賜死를 묵인한 노론이 그 의리・명분상의 실추를 면하지 못하기 때 문에 즉시 이에 반발하여 조중우를 엄중히 징계하고 배척하도록 청하는 한편, 조중우에 대한 刑訊을 주장하여 관련자를 찾아내 모두 流配하였다.84) 또한 同類 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肅宗誌文에 대한 改撰 요구였다.
79)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11月 丙寅, 右承旨柳重茂論時事條, (前略)…盖時輩 方內懷 疑懼 閭巷浮 謂時象朝夕當變…(後略)
80)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庚辰, 工曹判書閔鎭遠曰條.
81)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丙子.
82)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癸未, 正言徐宗燮上疏條.
83)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丙戌, 幼學趙重遇上疏條.
84)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丙戌, 丁亥, 己丑.
李 命은 경종의 명에 의해 肅宗誌文을 撰述하였는데, 이 지문의 내용에 불만 을 품고 太學의 齋生들이 捲堂을 하였다. 이에 大司成 黃龜河가 권당의 사유를 물으니, 掌議 尹志述은 辛巳年과 丙申年의 처분 사실들이 그 지문에 빠져있거나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改撰을 요구하였다.85) 이에 正言 金 는 윤지술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이를 앞서 간쟁하지 못했음을 들어 본 인의 遞職을 요구하였고, 獻納 宋必恒도 또한 같은 이유로서 체직을 청하였다.86) 경종은 물의를 일으킨 윤지술이 대신을 誣陷하고 私親인 희빈 장씨를 陰險한 뜻 으로 언급하였다하여 邊方에 定配토록 하였지만, 領議政 金昌集은 윤지술이 성 균관 유생이며 그를 처벌하는 것은 士氣를 꺾는 것이므로 용서해주자는 청을 하 였고, 이에 경종은 留意하겠다고 하였다.87) 그러나 당시 소론의 領袖인 戶曹判書 趙泰耉는 大臣(李 命)이 지문에 신사년과 병신년의 처분사실을 명백히 서술하 지 않은 것은 어버이를 隱諱하는 義理에서 찬술한 것이었다88)라고 언급하면서, 윤지술은 이러한 뜻을 모르고 경망스럽게 행동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변 방으로 定配를 한 경종의 처분이 합당함에도 윤지술을 두둔하는 자들과 김창집 을 함께 비난하였다. 이러한 조태구의 비난에 김창집이 相臣의 직책을 해면해 줄 것을 청하는 등 노론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89) 관학유생의 계속된 권 당으로 결국 윤지술에 대한 정배의 명은 환수되기에 이르렀다.90)
경종 즉위초 희빈장씨에 대한 名號를 정하기를 요청하는 조중우의 상소와 이에 대한 처분, 그리고 이후 숙종지문 改撰에 대한 요구는 모두 정국장악의 재진입 을 노리고 있는 소론 및 남인에 대한 엄정한 경고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조중우의 상소 직후 올라온 다음의 상소문을 통해서도 파악된다.
(前略)…중우의 무리들이 이 말로써 일찍이 오늘날에 시험해 보려 한 것은 대개 망령 된 마음으로 감히 말하기 어려운 자리를 의논하여 국가에 앙화를 끼치는 계책을 이루 고자 한 것이니,…(中略)…엎드려 원하건대 더욱 마음을 강건하게 하시므로서 이와 같
85)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辛未, 太學齋生捲堂條.
86)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癸酉, 甲戌.
87)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甲戌, 戊寅.
88)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8月 壬寅, 奏請正使李 命上疏條.
89)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戊寅, 藥房入診條.
90)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甲申, 館儒累日捲堂條.
은 상소를 許함을 엄히 방비하시고, 다시는 捧入하지 말도록 이내 명령하시어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뒤를 이어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後略)91)
이는 大司諫 趙觀彬의 상소로서 당시 조중우의 상소를 간사한 무리들이 일어나 기 위한 계책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과감히 물리칠 것을 경종에게 요 구하고 있다. 노론 또한 조중우의 상소가 소론 및 남인의 정계 재진입의 가능성 을 타진하는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과감한 처단이 필요하였 던 것이다. 물론 희빈장씨를 사사한 辛巳年의 처분은 당시 노론이 행한 것으로 서, 노론계 척신세력과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조중우의 상소 직후 노론계 척신세력의 별다른 반응이 없는 반면에, 承旨 및 司憲府・司諫院의 非戚臣系 老論 人物의 조중우의 상소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 일어났던 것이 다.92)
하지만 신사년의 처분에 직접적인 관련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노론계 척신 세력이 이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병신처분 및 정유독대의 과 정에서 노론이 명분상의 승리를 차지하면서 정국의 장악이 가능하였던 것이므 로, 사소한 명분상의 문제라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노론계 척신세력 에 대해 비판적인 소론의 정계 재진입은 이들에게 위험한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노론계 척신세력은 尹志述을 사주하여 소론에 대한 경고 및 노론 명분의 우위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同副承旨 李眞儉의 上 疏를 통해서 이이명이 숙종지문 찬술의 문제와 관련되어 윤지술을 사주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음에서 파악된다.93)
그러나 이와 같은 노론계 척신세력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즉위년 11월 京畿幼學 金行進이 尹志述을 참할 것을 청하였고,94) 더 나아가 즉위년 12월에는 湖西의 91)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丁亥, 大司諫趙觀彬上疏條, (前略)…重遇輩 以此說 嘗
試於今日者 盖以妄度之心 敢議難言之地 欲 禍人國家之計…(中略)…伏願益恢乾剛 以嚴 防 如許之疏 仍命勿復捧入 無使凶邪之輩 接跡而起焉…(後略)
92) 趙重遇의 上疏 직후로부터 조중우 및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처벌에 이르기까지, 노론계 척신세력의 上疏 혹은 이와 관련된 기사는 보이지 않고 있음이 주목된다.
93) 景宗修正實錄 卷1, 景宗 卽位年 12月 庚申, 同副承旨李眞儉上疏條, …而末乃在途封章 自作物議 請改文字於刻役已始之後者 似若啓志述 今日之事者然 人心之疑惑 烏得免乎. 이 를 통해 살펴보면 이이명의 숙종지문 찬술이 어버이를 隱諱하는 義理에서 한 행동이 아니 라 노론계 척신세력의 계획된 일임을 소론은 의심하고 있다.
儒生 李夢寅은 윤지술을 求解하여 母子의 倫理를 끊어버린 것과 胡差에게 글을 써주어 君父에게 욕을 끼친 김창집의 治罪를 요구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었 다.95) 또한 원년 3월에는 同副承旨 金始煥이 상소하여 병신처분시 疏儒가 坐罪 된 일을 논하면서 이들에 대한 解罰을 요구하는 등 병신처분에 대한 문제를 제 기하였다.96)
그런데 간헐적인 노론계 척신세력에 대한 치죄의 요구와, 소론 명분의 회복을 의미하는 병신처분에 대한 문제제기와 달리, 정국을 긴장시키는 사건이 발생하 였다. 즉 관원의 進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銓曹의 職인 吏曹判書에 소론의 崔錫恒이 임명되었던 것이다.97) 결국 이는 소론의 정계 재진입할 수 있 는 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노론계 척신세력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는 상황이 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숙종 후반기 정유독대의 과정에서 염두해 두었던 연잉군 을 세제로 책봉하는 요구, 즉 建儲의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辛丑年(景宗 元年, 1721) 8月에 正言 李廷 가 建儲를 요청하고 나섰다. 이때 경종의 나이는 34세였고, 繼妃인 魚氏 또한 17세였는데 後嗣를 보지 못하고 있 었다. 이에 이정소는 임금의 나이가 한창임에도 후사가 없음을 구실 삼아 건저 의 정당성을 논하고 급히 國本을 정하도록 요청하였던 것이다. 경종은 이를 대 신에게 의논하여 稟處하라고 명하였으며, 그 날 밤 노론인 金昌集・李健命・趙 泰采・閔鎭遠・李弘述・李觀命・李晩成・任 ・李宜顯・洪啓迪・洪錫輔・趙榮 福・申昉 등이 모여 건저의 문제가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경종이 이를 승낙하자 다시 定宗 때의 故事에 따라 왕대비에게 아뢰어 手筆로 儲嗣의 적임자 이름을 받도록 경종에게 청하였다. 이에 경종은 왕대비의 封書를 받아서 김창집 에게 넘겨주었다. 이 봉서에는 2장의 종이가 들어있었는데 한 장에는 후계자로 지명된 자로서 延 君 의 석자가 楷書로 쓰여 있었고, 다른 한 장에는 연잉군을 지목한 이유가 적혀 있었다.98)
94)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11月 丁卯.
95)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12月 戊申.
96) 景宗實錄 卷3, 景宗 元年 3月 庚午, 同副承旨金始煥上疏條.
97) 景宗實錄 卷4, 景宗 元年 7月 辛丑.
98) 景宗實錄 卷4, 景宗 元年 8月 戊寅, 正言李廷 上疏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