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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 卽位初 戚臣勢力의 재편

문서에서 景宗代 政局과 戚臣勢力의 動向 (페이지 45-76)

Ⅲ. 辛壬獄事와 戚臣勢力의 분열

3. 英祖 卽位初 戚臣勢力의 재편

영조는 즉위 직후 10월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삼는 등 소론으로 구성된 정국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신임옥사로 인해 귀양가 있던 閔鎭遠을 先后의 동기라 하여

169) 英祖實錄 卷5, 英祖 元年 4月 丙申, 史臣曰條, 辛壬之事 外人皆以爲府院君魚有龜作俑 盖疑有龜 當建儲時 心甚不滿 陰懷罔測之志 內則指揮必貞尙儉輩 外則締結耉鏡儒夢等 凡所 以動撓危逼之計 靡所不至 及儉事之敗 又嗾賊虎上變書 其間情節 上(필자주-英祖)在東宮時 盖已洞照

170) 景宗實錄 卷15, 景宗 4年 8月 乙未.

특별히 방면토록 하여171) 노론 재집권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소론에 대 한 본격적인 견제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求言의 下敎172)로 시작되었다. 辛丑疏가 경종의 구언의 교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을 감안한다면, 영조의 하교 또한 정국 의 전환을 꾀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幼學 李義淵은 영조의 하교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金一鏡의 討逆頒敎文에 보이는 禁庭 血 이란 말의 음험함을 지적하고 오늘날의 災異는 음흉하고 참독 한 뭇소인배들의 죄를 바로잡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173) 이는 김일경 등의 急少를 공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론 被禍者에 대한 신 원을 노린 것이었다. 이후 少論諸臣에 대한 공격이 잇달았지만, 소론은 이의연에 대한 국문을 주장하였고, 영조는 이의연을 절도에 정배시켰다. 하지만 영조는 또 한 특명으로 김일경을 절도에 안치시켰다. 그리고 결국 이의연에 대한 소론측의 국문 요구에 결국 그를 杖殺시켰지만, 이와 함께 김일경과 임인년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拿鞫하여 역적으로서 處斬하였다.174)

이러한 조처는 영조가 처음 김일경과 이의연을 귀양보내면서 好惡을 밝히고 朋 黨을 파하려는 것이라고 하여175) 破朋黨에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영 조는 비록 그의 기반이 노론에 있기는 하지만, 붕당간의 격화된 쟁단으로 인하 여 파행으로 치닫는 정국보다는 是非의 不分과 兩治兩解의 측면에서 각 붕당간 의 대립을 적절히 유지시키면서 정국의 안정과 왕권의 강화를 동시에 모색하였 던 것이다.176) 하지만 노론의 입장에서는 영조의 이러한 처분이 도리어 그들의 소론에 대한 공세를 약화시키는데 작용을 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종 원년 소론계 三司諸臣을 모두 파직되고, 이조판서에 민진원을 임 명함으로서 노론계 人士의 多數가 등용되었다. 그리고 4월에는 鄭澔・閔鎭遠・

李觀命을 재상으로 삼아 노론정권이 구성되었던 것이다.177) 이러한 노론 정권하

171) 英祖實錄 卷1, 英祖 卽位年 10月 戊寅, 特放閔鎭遠敎曰條.

172) 英祖實錄 卷2, 英祖 卽位年 11月 辛丑, 上下敎條.

173) 英祖實錄 卷2, 英祖 卽位年 11月 丙午, 幼學李義淵上疏.

174) 英祖實錄 卷2, 英祖 卽位年 12月 甲戌, 丁丑, 己卯.

175) 英祖實錄 卷2, 英祖 卽位年 11月 己酉, 敎曰條.

176) 丹巖 錄 英祖朝, 주상의 생각은 단지 두 명의 흉적을 죽이고 피차를 나란이 등용하 여 탕평의 뜻을 보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라고 하여 영조의 국정운영 방안으로 탕평을 염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서 5월에는 임인년의 옥사를 부정하는 임인옥안의 飜案이 있었으며,178) 이와 함께 소론 제신에 대한 관작삭탈 및 문외출송, 귀양이 이루어졌고, 被禍된 노론 4대신의 서원을 건립하여 노론의 명분을 뒷받침하는 등179) 乙巳處分이 단행되었 다.

즉위초 是非不分과 兩治兩解 등의 방법으로 노・소론간의 쟁단을 방지하고자 했던 영조가 을사년 그 태도변화를 일으킨 요인은 민진원의 袖箚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180)

신이 어리석게도 가만히 생각건대, 오늘의 賢・邪는 구별하기가 가장 쉽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先王께서 병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殿下의 英明함을 꺼려 서로 굳게 뭉쳐 그 私慾을 이루려 한 者는 모두 凶徒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런 사실을 깨닫고 계시지만, 이들을 물리침에 있어 오히려 혹은 偏重됨이 있을까 염려하여 문득 돌보고 愛護하려는 뜻을 나타내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朱子의 이른바 是非曲直을 묻지 않고 한가지로 대한다면 착한 사람은 항상 펼쳐지지 못하고 악한 사람은 도리어 요행히 면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로서 공평하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大不平인 것이라고 한 말 과 불행히도 가까운 것이라 하겠습니다...徵討가 이미 행하여지고 시비가 크게 정해진 후에 이 원칙을 지켜 변하지 않으면서 세월이 흘러 그 무리중에 약간 뛰어난 者가 있 을때는 재주에 따라 官職에 調用하게 된즉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사람들의 마음이 스 스로 안정되고 시비가 크게 밝아져 자연히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것을 따르려는 효과 가 나타날 터입니다.181)

즉 민진원은 賢邪是非를 不分하려는 왕의 탕평을 비판한 뒤, 소론에 대한 徵討 를 행하여 시비를 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이후 서서히 재주를 보아 소론 계 인물에 대한 調用을 실시하는 것이 올바른 탕평이라고 하였다. 민진원의 이

177) 英祖實錄 卷5, 英祖 元年 4月 庚寅, 卜相 李宜顯李觀命 觀命落點 鄭澔 爲領議政 閔鎭 遠 爲左議政 李觀命 爲右議政

178) 俟百錄 卷7, 英祖 元年, 春 飜壬寅獄 老黨遂大進 179) 英祖實錄 卷7, 英祖 元年 8月 辛巳, 上引見大臣備堂條.

180) 英祖實錄 卷3, 英祖 元年 2月 丁酉.

181) 英祖實錄 卷3, 英祖 元年 2月 丁酉, 臣之愚 竊以爲今之賢邪 辨之最易 何者 幸先王之 有疾 忌殿下之英明 盤據糾結 欲濟其慾者 皆凶徒也 殿下旣已覺其然也 然斥退之際 猶慮其或 歸偏重 輒示顧籍愛護之意 朱子所謂 若不問其是非曲直 而待之如一 則是善者常不得伸 而惡 者反幸而免 以此爲平 是乃所以爲大不平者 不幸近之 (中略) 懲討旣行 是非大定之後 持是道 不變 磨以歲月 而取其中稍有樹立者 隨才調用於百執事 則年久之後 衆心自定 是非大明 自然 有革面從善之效

러한 정치적 견해는 당시 신임옥사를 통해 김창집 등 유력 척신세력이 제거된 후182) 그가 노론계 척신세력의 衆論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그의 의견을 영조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론계 다 수의 인물이 등용되고 노론정권이 성립된 을사처분이 비록 행해졌지만, 영조는 이를 통해 소론 諸臣에 대한 새로운 徵討는 하지 못하도록 그 한계를 분명히 하 면서 이것이 公平한 처사라고 강조하였다.183)

그러나 영조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노론측의 공세를 저지하지는 못하였 다. 민진원은 자신의 진퇴를 걸고서 이광좌 등에 대한 治罪를 직접 요구하고 나 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84) 여기서 영조는 민진원을 좌의정에서 물러나게 하는 한편, 노론내에서 중망을 받으면서도 의론이 平緩하며 이광좌 등 소론과도 친교 가 있는 洪致中을 우의정에 대배하였다.185) 이후 이관명 또한 물러나게 한 뒤 그를 좌의정으로 삼았으며, 또한 논의가 稍緩하다는 趙道彬을 우의정으로 삼았 다.186) 그러므로 홍치중과 조도빈은 영조의 蕩平策을 구체화하려는 움직임을 보 였으며, 영조도 兩治兩解의 방법으로서 이들을 지원하였다.

민진원 등 노론 성향의 척신세력은 홍치중 등 緩論의 활동에 대하여 반발하였 다. 우의정 鄭澔와 예조참의 金祖澤은 이들이 父兄의 원한을 잊고서 다만 가지 고 있는 祿이나 몸만 보전하려 하는 세력이라고 비판하였고, 이에 홍치중과 조 도빈은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나 버렸다.187) 이후 영조 는 민진원 등의 척신세력과 대립하던 李宜顯188)을 우의정에 기용하는 등의 조치

182) 丹巖 錄 英祖朝, 群凶이 당국한 이래 先朝의 대신은 모두 杖殺 당했고, 심지어 한명 의 무사를 보내어 謫所에서 칼로 죽이기까지 하였다. 또한 숙종말 이래 노론 성향 척신 세력과 갈등관계를 맺고 있던 魚有龜마저도 乙巳年(영조 즉위년) 이후에는 민진원과 함께 하였다.( 黨議通略 英祖朝, 咸原府院君魚有龜...乙巳後 專附鎭遠 )

183)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 진단학보 56, 진단학회, 1983, 42쪽.

184) 英祖實錄 卷9, 英祖 2年 正月, 乙未.

185) 英祖實錄 卷9, 英祖 2年 正月 己亥, 洪致中이 정승에 임명되었다. 홍치중은 본디 李 光佐의 무리와 더불어 서로 좋게 지내면서 오래도록 圭角을 드러내지 않았다.

丹巖 錄 英祖朝, 洪致中은 언론이 평소 모가 났고 신축년 이후 取捨에 다소 분명하 였으므로, 매번 준격하게 경계하였으나 또한 그 행동거지가 온화하고 아뢰는 말도 완곡하 여 주상이 심히 아끼고 중히 여겨 상신이 되었었다.

186) 英祖實錄 卷9, 英祖 2年 5月 甲辰.

187) 英祖實錄 卷10, 英祖 2年 12月 癸酉; 卷11, 英祖 3年 2月 丙子.

188) 숙종말년부터 노론내에는 花黨과 駱黨의 구분이 있었다. 영조초에는 대체로 淸流中心의

를 취하였으나, 이들 척신세력은 明辨是非를 앞세워 소론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 였다. 결국 영조는 同王 3年 7月 노론을 내치고 소론을 다시 불러들이는 조치를 단행하였는데 이것이 丁未換局이다.

영조는 자신의 特旨로 유봉휘의 관작을 追復시키고, 영부사 민진원 등 노론 주 요 인사 100여인을 파직하였다. 이어 이광좌・조태억을 재상으로 하는 소론 정

영조는 자신의 特旨로 유봉휘의 관작을 追復시키고, 영부사 민진원 등 노론 주 요 인사 100여인을 파직하였다. 이어 이광좌・조태억을 재상으로 하는 소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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