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辛壬獄事와 戚臣勢力의 분열
1. 辛丑疏와 政局의 변화
이러한 척신세력의 代理聽政 시도를 무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소론은 여전히 朝廷의 要職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시에 정국을 反轉시킨 사건이 발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거듭된 天災地變으로 인하여 諸臣들의 直言을 널리 구한 경종의 下敎였다.118) 일반적으로 災異에 대한 求言의 교지가 군주에 의한 정국 의 전환이나 난국 타개책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119) 이 당시 경종 또한 정국 전환의 타개책으로서 이러한 하교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 다.120) 이에 경종의 하교에 응하여 金一鏡을 疏頭로 朴弼夢・李明宜・李眞儒・
尹聖時・鄭楷・徐宗廈 등 7명이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綱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君爲臣綱이 으뜸이 되고, 倫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君臣有 義가 첫머리가 되니, 이것이 天常이고 民彛입니다...(中略)...오늘날 조정 신하가 진실로 전하께 北面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두 대궐 뜰에 엎드려 머리를 부수고 肝을 가르며 비 록 해와 달을 넘길지라도 차마 갑자기 물러갈 수 없는 것이 곧 하늘과 백성의 그만둘 수 없는 떳떳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伏閤・庭請으로 겨우 책임이나 면하고 3일 만에 聯名으로 箚子를 올려 마음대로 裁定하고는, 臣子가 어찌 감히 가볍고 갑작스러움에 구애받아 한결같이 모두 어기고 거역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빨리 有司 로 하여금 節目을 거행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人臣으로서 감히 마 음속에 품었다가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성복과 더불어 머리와 꼬리로 호 응하며 서로 表裏가 된 형상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中略)...아! 代理聽政의 일은 代마
118)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1月 癸丑, 下敎條.
119) 숙종대를 살펴보면 災異에 대한 求言을 내린 이후 人事문제 및 時局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였다.( 肅宗實錄 卷4, 肅宗 卽位年 12月 戊寅; 卷16, 肅宗 11年 7月 庚午; 卷21, 肅 宗 15年 9月 戊午; 卷25, 肅宗 19年 2月 辛丑; 卷31, 肅宗 23年 9月 乙巳; 卷64, 肅宗 45年 10月 丙午, 災異란 하늘이 仁愛로써 警告하는 것이니, 옛날에는 국가에서 재이를 만나면 임금이 반드시 敎旨를 내려 求言하고, 相臣은 策免하며, 三司에서는 陳戒하였습니다. ) 120) 蒼 , 景宗 元年 11月 26日, 頭註에서 上躬孤危群凶爲計日急 故有此求言之敎 , 彼輩
(老論-필자주)亦知換局幾微 故抵死不爲代草 라고 하여 경종의 하교가 난국타개책이나 환국 의 조짐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간혹 있으며, 모두 수십 년을 臨御하여 춘추가 많고 병이 중
2월 3월 5월 6월 윤6월 7월 9월 11월 12월
領議政 趙泰耉**(19)
左議政 崔奎瑞**(19)
右議政 崔錫恒**(19)
吏曹 李宜顯*(15) 崔錫恒**(12) 權尙游*(12) 沈檀***(6)
戶曹 金演**(6)
禮曹 李宜顯*(20) 宋相琦*(18) 李宜顯*(9) 李光佐**(6)
李肇**(14)
兵曹 李晩成*(12) 崔錫恒**(6)
宋相琦*(19) 刑曹 李弘述*(4) 兪集一*(27) 李觀命*(18)
趙道彬*(29) 李晩成*(5) 李宜顯*(19) 趙道彬*(9) 洪致中(5) 李肇**(6) 李光佐**(14)
工曹 李觀命*(3) 韓配夏**(18)
에 대해 嘉納한다고 하였다. 이 상소에 노론은 반발하면서 承旨 申思喆・李喬 岳・趙榮福・趙鳴謙 등이 김일경 등의 상소를 痛斥하도록 청하였으나, 도리어 경종은 임금의 淺深을 엿본다고 꾸짖으면서 여러 승지를 아울러 파직하였으며, 이어 三司의 여러 신하를 일체 削黜하고 노론인 훈련대장 李弘述에 대한 門外黜 送을 명하였다.
<표 2> 景宗 元年(1721) 三政丞・六判書 任命表123)
※ *는 老論, **는 少論, ***는 南人임.
※ 괄호안의 숫자는 임명된 날짜임.
<표 2>에서 보이듯 신축소를 계기로 남인인 沈檀을 이조판서에 제수하고, 소론 인 崔錫恒・李光佐・李肇・金演을 병조・예조・형조・호조판서로 특별히 제수 하였다. 또한 同月 19일에는 三政丞마저도 趙泰耉・崔奎瑞・崔錫恒 등의 소론으 로 삼아124) 일시에 소론이 정국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경종은 이와 같은 소론 정국하에서 즉위초 肅宗誌文에 대한 改撰을 요구했던 윤지술을 賜死하였고, 희 빈 장씨의 名號를 정할 것을 청하다 죽음을 당한 조중우에게 특별히 贈職을 가 하는 동시에 禮官을 보내 致祭하게 하여,125) 결국 소론의 의리・명분을 실추시
123) 景宗實錄 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임.
124)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2月 庚午, 李台佐爲兵曹判書條.
키려 했던 노론의 시도가 모두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김일경 등이 올린 이른바 辛丑疏 는 일시에 정국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대리청정의 문제를 가지고 노론 4대신의 죄를 논핵하고자 했던 신축소에 소론 대신이 이에 참여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에 대한 파악을 위해 서는 먼저 소론내의 분화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소론은 노론 대신에 대 한 치죄에 대하여 이를 급하고 준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김일경 등의 峻論(峻 少)과, 경솔한 행동으로 후회를 초래하지 말아야 하고 김일경과 함께 일을 도모 하는데 반대한 尹淳・徐命均 등의 緩論(緩少)126)으로 나누어졌다.127) 그런데 준 론의 대신급인 조태구・이광좌・최석항・조태억 등은 이후 김일경의 발호를 불 쾌히 여겨 이들과 角立하는데,128) 김일경의 무리들이 峻論보다도 노론에 대한 치죄를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동시에 왕세제까지 謀害129)하려고 하므로 이 들을 急少라고 하였다.130) 결국 경종대 소론의 내부에는 急少・峻論・緩論의 정 치세력으로 분화된 모습이 살펴지는 것이다.131)
신축소의 제기는 소론내에서도 특히 급소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계 기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을 일시에 정계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소 론의 정권장악은 그 실체를 살펴보면 급소의 정국장악이라고 파악될 수 있는 것 이다. 하지만 급소의 경우에는 준론 및 완론에 비해 그 정치기반이 취약했으며, 노론에 대한 철저한 치죄에 동조해 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였다. 이 당시 이
125)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2月 丙寅, 己巳.
126) 이 시기 東宮僚屬으로서 王世弟의 신임을 받았던 趙文命・趙顯命・宋寅明・鄭錫三 등 數三人은 淸流 로서 자처하였지만,( 承政院日記 第八一五冊, 英祖 11年 12月 25日 庚寅) 이들도 또한 緩論에 포함된다.( 景宗修正實錄 卷3, 景宗 2年 5月 丁亥)
127) 景宗實錄 卷6, 景宗 2年 戊申, 李肇爲吏曹判書條.
黨議通略 景宗朝.
128) 景宗實錄 卷14, 景宗 4年 2月 己酉, 憲府論條.
129) 景宗 元年 12月 宦官 朴尙儉이 王世弟 謀害하려한 사건이 발생하여 박상검이 죽음을 당 하는데, 이때 박상검을 사주하였던 사람으로 김일경이 지목되고 있다.( 丹巖漫錄 景宗朝) 130) 이 시기 소론내의 분화로서 보통 緩論과 峻論으로 나누어지는데, 黨議通略 景宗朝에
는 急少 라는 용어와 함께 급소의 우두머리로 김일경을 지칭하고 있다.
131) 承政院日記 第六六五冊, 英祖 4年 7月 9日 戊午, 當逆鏡之得志也 人之論議 其類有三 層 其一則如右所陳 投附 合者也 其一則非不知逆鏡之爲惡 而或慮世道之乖戾 避其氣焰 莫 敢言之 左右拘牽 依違苟且 而袖手旁觀者也 其一則痛心 疾 若將 焉 不欲與之 世者也 (中略) 朝紳之間 緩峻之中 又別有一岐焉
러한 세력으로는 바로 南人이 있었고, 沈檀의 이조판서직 임명은 이러한 급소와 남인의 결합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의 조치였을 뿐이었고, 김일경은 남인을 시켜서 노론을 공격하여 죽인 후에 다시 남인들을 몰아내고자 하였다.132) 이와 같은 김일경의 남인계 수용에 소론 대신인 조태구는 이를 남을 속이는 수단이라 하면서 반대하였고,133) 급소 인 이진유와 서종하 마저도 심단을 배척하여134) 김일경이 의도하는 노론에 대한 討逆은 늦추어질 수밖에 없었다.135)
비록 신축환국으로 인하여 정국의 대부분이 소론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노론의 대신급 인사들과 왕세제가 건재해 있는 한 언젠가는 다시 노론에 의해 정국이 구성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노론에 대한 治罪과 왕세제 謀害등의 급격 한 주장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김일경 등의 급소로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계속해서 미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종 또한 급소가 요청 하는 노론 대신에 대한 처벌을 윤허하지 않고 있었으며,136) 김일경이 宦官 朴尙 儉을 사주한 왕세제 謀害 사건 또한 철저히 국문하기를 청하는 소론 대신 및 緩 論들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즉 이와 같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노론 및 왕세 제의 처벌 및 제거가 용이하게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것이며,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비상수단이 필요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