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肅宗代 戚臣의 정치적 대두와 동향
1. 戚臣의 대두와 배경
숙종대는 즉위로부터 시작된 庚申換局・己巳換局・甲戌換局으로 西人과 南人 의 정치적 浮沈이 반복되면서 상대 黨에 대한 보복이 뒤따르는 등 긴장된 정치 국면으로 치닫던 시기였다.8) 이후 갑술환국으로 西人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잠시 안정되는 듯 하였지만, 또다시 老論과 少論으로 서인이 분열되어 각축하는 양상 이 계속되었다.9)
그런데 숙종 초기 환국의 전개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士林政治下에서 배제되 었던 戚臣의 정치적 신장이라는 측면이다. 숙종 초기 戚臣家門으로는 숙종의 外 祖父인 金佑明의 淸風金門, 숙종의 장인인 金萬基의 光山金門, 閔維重의 驪興閔 門으로 지목되고 있는데,10) 이들은 환국의 과정에서 공을 인정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무렵 兵權을 거의 독점하는 등 정치적 역량이 크게 신장되었다.11)
8) 숙종대 換局의 전개과정과 그 의미는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洪順敏, 肅宗初期의 政治構造와 換局 , 韓國史論 15,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1986.
李熙煥, 肅宗과 己巳換局 , 全北史學 8, 1984.
---, 庚申換局과 金錫胄 , 全北史學 10, 1986.
---, 老少論의 對立과 肅宗 , 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 1987.
---, 甲戌換局과 肅宗 , 全北史學 11・12合輯, 1989.
---, 朝鮮後期黨爭硏究 , 國學資料院, 1995.
9) 肅宗實錄 卷27, 肅宗 20年 7月 丙戌, 朴世采所製敎文條, (前略)…自甲寅以來 世運屢變 一進一退 適足以助其傾軋之勢 遂使當時治事者 亡論彼此 各主黨習而不已 淸濁老少 可推 見…(後略)
10) 肅宗實錄 卷14, 肅宗 9年 5月 丙午, 前參議尹拯 承召到果川…(中略)…朴世采往見 拯言 今有三不可出者 南人怨毒 不可平一也 三戚威柄 不可制一也 尤翁世道 不可變一也 三戚 指 兩金及閔家也…(後略).
11) 肅宗實錄 卷11, 肅宗 7年 5月 乙卯, 校理林泳等 以七條應旨上箚條.
年代 官職 兵曹判書 訓練大將 御營大將 摠戎使 守禦使
되었고,15) 叔父인 金益勳과 함께 주요 군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閔維重은 肅宗 7 년 그의 딸이 숙종의 繼妃로 揀擇되자 병조판서직의 辭職을 요청하였지만,16) 그 의 형인 閔鼎重의 경우에는 좌의정으로서의 직무를 지속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 다.
숙종초 척신이 정치에 관여하게되는 배경은 宋時烈을 비롯한 西人 山林이 北伐 論議를 바탕으로 臣僚 중심의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청나라에 君 弱臣强說이 유포될 정도였다는 것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군약신강설은 숙종 원년 청나라 사신으로부터 다시 거론되어 파문을 일으킬 정도였고,17) 일진일퇴 의 換局 상황은 一黨의 전제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왕권 에 제약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갑인예송 이후 남 인 정권하에서 仁祖의 3子인 麟坪大君의 아들 福昌君・福善君・福平君의 3福이 왕실의 지친으로서 外家인 同福吳門과 許穆・尹 의 후원18)으로 숙종의 나이가 어리고 병약한 상태에서 강한 종친세력으로서 활동하여,19) 이들 또한 왕권을 위 협하는 존재였다.
결국 14세의 幼主로 즉위한 숙종은 왕권의 강화와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外戚 을 각 군영직에 임명하고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이들의 보좌를 통해 君 弱臣强의 상황을 타개하면서 동시에 내부의 변란을 대비하였던 것이다.20) 그런 데 왕권강화 차원에서 척신을 군영직에 임명하였던 사실은 숙종이 즉위초 어린 나이였다는 사실로서 숙종 자신의 판단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주상이 특별히 明聖王后를 뵈니, 명성이 어영대장이 비었다고 하던데 과연 누가 되
15) 肅宗實錄 卷2, 肅宗 1年 1月 丁丑, 許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國舊는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여서는 안되나, 이런 어려운 때에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맡는 것은 무방할 듯합 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金萬基를 注擬하여 넣었으므로, 이 除授가 있었다.
16) 肅宗實錄 卷11, 肅宗 7年 4月 甲申, 兵曹判書閔維重辭免條.
17) 肅宗實錄 卷2, 肅宗 元年 3月 辛酉, 上迎勅于慕華館條.
18) 肅宗實錄 卷3, 肅宗 卽位年 3月 癸酉, 許穆・尹 의 무리는 본디 복창군 楨 등을 주요 한 후원으로 삼았으므로...
19) 黨議通略 肅宗朝, 佑明亦念 上幼弱多疾 無親兄弟 强宗(필자주-三福)近 恐致不測 20) 肅宗實錄補闕正誤 卷15, 肅宗 10年 3月 癸巳, 史臣曰條, 主上 年嗣位 專任一邊之人
未幾逆變猝起於此輩 而戡定禍亂 皆出於外戚之手 自是外戚爲上之所傾倚 益勳亦以戚里之故 至拜大將 上之所以庇護之者 固已至矣
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상은 김익훈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명성이 놀 라며 익훈이 어찌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주상이 익훈을 처 음 어영대장에 제수하였을 때도 자전께서 힘써 권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제수하였던 것 입니다. 지금 이처럼 자전의 말씀이 그 전과 다름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고 하였다.21)
이는 庚申換局 이후 김익훈의 어영대장직 임명에 관한 기사인데, 이를 통해 숙 종 4년 김익훈이 어영대장이 되었을 때 명성왕후 김씨가 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유중이 숙종 7년 병조판서직을 辭任했을때 숙종은 遞任하지 말라는 慈聖의 下敎에 의해 사임을 만류하고 있는 모습22)을 통해서, 이 시기 척신의 병권 장악에는 숙종의 왕권 강화의 의도와 더불어 대비인 명성 왕후가 이에 개입하고 있는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척신의 병권장악을 통한 정치 관여는 士林政治下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일반 士類출신 관료의 반발을 야기하였다. 즉 儒生 李碩徵등은 戚 里가 정권을 침해한다면서 김석주를 배척하였고,23) 吏曹判書 洪宇遠은 김익훈의 어영대장직 임명에 반발하면서 척신의 병권 장악이 가져오는 禍根에 대해 논하 는 등24) 점차 그 비판과 공격을 가중하였다. 그러나 척신의 병권장악은 앞서 살 펴보았듯이 국왕의 의도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숙종은 이러한 士類의 비 판에 대해 척신의 병권장악은 이전 시기에도 있었으며, 人才를 任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로서 척신을 비호하는 동시에 士類의 비판과 공격을 무마하였던 것이다.25) 이처럼 척신의 진출이 士類의 반발로 인해 일시적으로 견제되기도 하 였지만, 숙종의 신임과 지원으로 척신은 그 정치적 영향력을 점차 성장시켜 가 고 있었다. 또한 숙종 6년에는 許堅의 獄事를 통해서 勳功까지 더하게 되었으 며,26) 환국의 과정에서 西人으로부터 남인퇴치의 공까지 인정받고 있었다.
21) 丹巖漫錄 肅宗朝, 上特入侍明聖 明聖問曰 聞御將有 果誰爲之 上曰 金益勳爲之矣 明 聖驚曰 益勳何可爲此任乎 上曰 益勳初除御將時 慈旨力勸 故特除矣 今此慈敎 與前有異何 也
22) 肅宗實錄 卷11, 肅宗 7年 3月 壬午, 金壽恒曰條.
23) 肅宗實錄 卷6, 肅宗 3年 8月 甲寅, 四學儒生李碩徵等上疏.
24) 肅宗實錄 卷7, 肅宗 4年 閏3月 辛酉, 吏曹判書洪宇遠上疏.
南坡集 卷7, 論金益勳不合將任疏
25) 肅宗實錄 卷4, 肅宗 元年 12月 丙寅; 肅宗 7年 3月 己卯; 肅宗 7年 5月 乙卯.
26) 肅宗實錄 卷9, 肅宗 6年 5月 丙午. 許堅의 逆謀관련 獄事가 마무리되고 난 이후 保社功
척신의 군영직 임명은 물론 이전 시기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27) 하지만 숙 종대 척신의 군영 장악은 이전 시기에서와 같이 단순히 군사적인 측면의 의미로 만 한정지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당시 국방개념이 국경방어에서 수도방어체제로 변화된 사실과, 軍役이 良役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 었다는 사실은 군영 장악이 물리적・경제적인 장악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28) 그리고 수도방어체제는 외적의 방어가 주목적이라기보다는 내부의 변란에 대비 하는 治安的인 성격이 더 강했음을 감안한다면29) 이 시기 척신의 군영 장악은 정치적인 장악까지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숙종년간 武臣과 外戚의 정 책결정권 참여가 보장되는 備邊司가 議政府와 六曹를 제치고 최고정책기구로서 그 기능이 강화되어 갔던 것에도 그 척신의 정치적 관여를 확인할 수 있는 모습 이라고 할 수 있다.30)
그런데 척신의 정치개입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숙종대 환국의 과정에서였다. 척신의 정치개입 이후에 벌어진 환국은 甲寅禮訟에서 보이는 바 와 같이 名分論의 차원에서 실시되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즉 갑인 예송의 경우 주요 쟁점은 복제문제 즉 禮論과 관련된 논쟁이었기 때문에, 이 논 쟁의 승패는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어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되는 단순한 정권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경신환국의 경우 남인 집정 자와 종친 4명의 賜死를 포함하여 100여 명이 流配・杖流・削職 당하였고 推鞫 에서 刑杖으로 죽은 자도 10여 명이 넘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의 교체라는 의미 를 넘어 상호간의 숙청과 보복이 더 가혹해짐으로써, 이제 정쟁의 승패는 生死 의 갈림길이 되었던 것임을 알게 해준다.31)
臣 1등에 金萬基와 金錫胄가 策封되었다.
27) 勳戚臣系는 仁祖 이래 兵權에 관여하여 왔다. 이는 능성구씨 및 덕수장씨의 경우에서 살 펴진다.
27) 勳戚臣系는 仁祖 이래 兵權에 관여하여 왔다. 이는 능성구씨 및 덕수장씨의 경우에서 살 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