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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理聽政의 제기와 戚臣勢力의 갈등

문서에서 景宗代 政局과 戚臣勢力의 動向 (페이지 30-34)

Ⅱ. 景宗 卽位初 戚臣勢力의 갈등

2. 代理聽政의 제기와 戚臣勢力의 갈등

왕세제에 대한 책봉이 노론계 척신세력의 뜻대로 성사되자 두 달도 지나지 않 아 이들은 또다시 代理聽政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일반적으로 신하된 자로서 대 리청정에 대한 요구는 쉽사리 꺼낼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는 丁酉獨對 이후 척신세력이 그들의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정해 진 왕권의 轉移라는 수순을 따른 것이었다.

執義 趙聖復의 王世弟가 參政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상소문을 통해 대리청 정에 대한 건의는 시작되었고, 경종은 바로 대리청정을 명하는 備忘記를 내렸다.

대리청정의 명이 하달되자 즉시 承旨 李箕翊 등은 입대하여 대리청정의 반환을 요청하였고, 左參贊 崔錫恒 또한 밤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입대를 청하여 명을 환수하도록 간곡하게 청하였으며 이에 경종은 대리청정의 명을 환수하였다.106) 이후 소론은 호조참판 조태억107)을 비롯하여 사직 이광좌, 청은군 한배하, 행사 직 홍만조 박태항, 예조참판 이집 등이 조성복의 치죄와 노론의 탄핵을 계속하 여, 노론 大臣과 三司 및 승정원의 관리들을 비난하는 등 공격의 강도를 높여갔 다.108) 노론 또한 최석항의 深夜入對를 비난하고 소론의 상소문 중 왕세제를 침 해하는 부분으로서 그들을 탄핵하였다.109)

그러나 최석항의 심야입대를 통한 간곡한 청으로 대리청정의 명을 환수한 사흘 뒤 경종은 또다시 時任・原任大臣과 2品 이상의 관리들을 소집하여 또다시 왕세

106)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0月 丁卯, 執義趙聖復上疏條.

107) 趙泰億은 소론이면서 동시에 경종의 장인인 沈浩와 아래의 계보도에서와 같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태억 또한 경종 보호세력으로 파악될 수 있겠다.

沈熙世 麟瑞

鳳瑞( 出)

龜瑞

趙泰億

鳳瑞

108)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0月 戊辰, 己巳.

109)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0月 己巳, 李瑜啓辭.

제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는 비망기를 내렸다.110) 이에 참석한 신하들은 모두 대리청정의 환수를 요청하였고, 종친 유생 등 수백 명도 계속해서 대리청정의 反汗을 요청하였다. 3일 동안 정청을 하였으나 경종은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그 런데 계속된 환수의 요청을 거절하는 경종을 두고 점차 노론계 척신세력의 경우 에는 국왕의 명을 신하된 자로서 계속해서 거역할 수는 없다는 논리로서 환수를 요청하는 庭請을 철회하기로 결정하고, 肅宗朝의 丁酉節目에 따라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聯名箚子를 올렸다.111) 이제 소론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였고, 병이 심한 소론 대신 趙泰耉가 대궐에 들어가 입대를 청하기에 이 른다. 조태구의 입대에 승지들로 하여금 이를 저지하고자 都承旨 洪啓迪는 조태 구가 臺諫의 탄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서 입대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司 房의 宦官에게 시켜 宣仁門으로 조태구를 들어오게 하여 面對를 하였다.112) 이에 備局에서 禮官을 모아 節目을 講定하고 있던 김창집 이하 諸臣들은 경종과 조태구의 면대 사실에 놀라면서 즉시 경종에게 입대를 청하여 그들의 연명차자 준비에 대한 변명과 함께 환수에 대한 요청을 다시금 하였던 것이다.113) 결국 계속된 환수의 요청에 경종도 대리청정의 명을 드디어 거두기에 이르렀다.

앞서 건저의 제기시에 비척신계 노론인 송상기의 불참을 노론 내부의 분화로서 살펴보았는데, 대리청정의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벌어진다. 이는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이때 金昌集・李健命 등이 주상으로 하여금 정무를 놓게 만들려고 趙聖復을 사주하 여 상소를 올리고 嘗試하였는데, 그 당파로서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가 혹 크게 놀라기도 하여 이조판서 權尙游는 큰 소리로 승정원에서 조성복의 상소를 배척하며 죄 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114)

110)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0月 庚午, 備忘記條.

111)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0月 甲戌, 領議政金昌集等聯名箚子.

112) 景宗은 그의 生母인 희빈장씨와 趙師錫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서( 丹巖 錄 肅宗朝, 張氏가 여염집에 있을 때 그녀의 어머니와 같이 師錫의 집에 출입하였다. ) 그의 아들인 趙泰耉를 신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경종은 노론계 척신세력의 建儲・代理聽政의 요청을 통한 王權의 轉移라는 국면을 타개하고자, 자신이 신임하였던 조태구를 전교( 黨議通略 景宗朝, 抛棄前事 洗滌時態 幡然入城 以安 將亡之國 )를 통해 불렀던 것이다.

113) , 景宗 元年 10月 17日, 右相引見條.

114)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0月 丁卯, 時昌集健命等 欲上之釋務 嗾聖復上疏 以嘗試之

朴弼正・朴致遠은 평소 時論에 빌붙어 용렬하여 취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조성복을 논죄한 바는 말이 지극히 嚴正하니, 대개 또한 群凶의 꾀를 알지 못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조판서 권상유가 실제로 指授하여 한 것이라고도 한다.115)

이 두 기록은 모두 권상유가 조성복의 상소를 배척하면서 죄주자고 청하거나, 다른 이들을 시켜서 조성복을 논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리청정의 제기 또한 노론계 척신세력과 비척신계 노론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견은 이들의 성향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 즉 노 론계 척신세력은 앞서의 건저제기나 이후 대리청정의 제기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들의 지속적인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척신세력의 속상상 명분이나 의리상의 하자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반면 비척신계 노론은 물론 정국운영상의 장악을 중요시 여기고는 있지만, 이것 또한 의리와 명분상의 우위속에서 가능한 것으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분상 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저・대리청정을 제기하는 노론계 척신세력 의 방안을 비척신계 노론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서 파악해야 될 것이다.

이처럼 건저・대리청정의 과정에서 노론 내부의 분화의 조짐 이외에도 척신세 력 내부의 갈등이 더욱 표면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다음의 기 록이 참고된다.

王大妃 金氏는 宗社를 걱정하여 延 君으로서 建儲하고자 하였는데, 王妃 魚氏는 宗 室의 어린아이를 얻어 자신의 아들로 삼고자 하였다. 左議政 李健命이 大妃의 密旨를 얻어 領議政 金昌集에게 通하여 이에 李廷 로 하여금 상소하게 하였다.116)

이는 건저를 요청했을 때 이건명이 대비의 밀지를 받아 김창집을 통해 이정소 를 사주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건저의 과정에서 경종의 繼妃인 魚氏는 종실

其黨之不與其論者 或大駭之 吏曹判書權尙游 大言斥聖復疏於政院 以爲可罪

115) 景宗實錄 卷5, 景宗 元年 10月 己巳, 司果朴弼正朴致遠上疏條, 朴弼正致遠 平日趨附 時論庸碌 無可取 而其所論罪聖復 語極嚴正 盖亦不知群凶之謀者 而或言 吏曹判書權尙游 實 指授而爲之云

116) 丹巖漫錄 景宗朝, 王大妃金氏 以宗社爲憂 欲以延 君建儲 王妃魚氏欲得宗室子年幼者 鞠爲己子 而左相李(健命)得大妃密旨 通于領相金(昌集) 仍使廷 上疏云

내에서 양자를 들여 아들로 삼아 왕위를 이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유 귀가 대신들이 建儲를 청할 때에 자신에게 기별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원망하 였다는 사실117)로 살펴보건데 민진원・김창집 등의 노론계 척신세력과 어유귀는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갈등양상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왕위계승의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건저와 대리청정의 과정은 경종 보호세력과 노론계 척신세력의 갈등 을 더욱 표면화시켰던 사건이었다. 결국 건저와 대리청정의 과정을 통해 경종 보호세력은 명분상의 문제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전이를 진행하 려는 노론계 척신세력에 대한 제거를 꾀하였던 것이며, 이들을 제거하는 명목은 바로 대리청정 제기의 과정에서 노론계 척신세력이 보인 소위 三變(환수요청→

대리절목의 講定→환수요청)의 행위를 이후 문제삼았던 것이다. 즉 삼변은 환수 를 일관되게 요청하지 않은 노론계 척신세력으로서는 왕세제에게 왕권을 전이하 려 하였다는 혐의로서 이후 소론으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며, 이후 신임옥사의 과정에서 충역론의 시비에 노론계 척신세력이 휘말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117) 丹巖漫錄 景宗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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