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景宗 卽位初 戚臣勢力의 갈등
1. 老論의 政局주도와 世弟 冊封
숙종 후반기 병신처분 및 정유독대를 통해서 노론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종의 즉위와 함께 이 시기 時局이 조석간에 마땅히 변할 것이라고 소 문이 도는 등,79) 노론은 의심과 두려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소론이 지원 하는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소론이 앞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 노론과 갈등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론은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경종이 비국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閔鎭遠은 肅宗의 정치 를 繼述하는 것이 孝道에 합당한 일80)이라고 말하면서 이전의 정치상황을 유지 시키려 했다. 그리고 正言 徐宗燮은 이광좌가 즉위초 禮曹參判에 제수된 것에 대해81) 出處의 義理가 없는 것임을 들어 責罰을 요청82)하는 등 소론에 대한 견 제를 해나갔다.
하지만 우려하였던 상황은 趙重遇가 경종의 生母인 희빈장씨에 대한 名號 정하 기를 요청하는 上疏로 표출되었다.83) 하지만 이 문제가 처리되면 辛巳年에 희빈 장씨에 대한 賜死를 묵인한 노론이 그 의리・명분상의 실추를 면하지 못하기 때 문에 즉시 이에 반발하여 조중우를 엄중히 징계하고 배척하도록 청하는 한편, 조중우에 대한 刑訊을 주장하여 관련자를 찾아내 모두 流配하였다.84) 또한 同類 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肅宗誌文에 대한 改撰 요구였다.
79)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11月 丙寅, 右承旨柳重茂論時事條, (前略)…盖時輩 方內懷 疑懼 閭巷浮 謂時象朝夕當變…(後略)
80)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庚辰, 工曹判書閔鎭遠曰條.
81)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丙子.
82)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癸未, 正言徐宗燮上疏條.
83)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丙戌, 幼學趙重遇上疏條.
84)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丙戌, 丁亥, 己丑.
李 命은 경종의 명에 의해 肅宗誌文을 撰述하였는데, 이 지문의 내용에 불만 을 품고 太學의 齋生들이 捲堂을 하였다. 이에 大司成 黃龜河가 권당의 사유를 물으니, 掌議 尹志述은 辛巳年과 丙申年의 처분 사실들이 그 지문에 빠져있거나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改撰을 요구하였다.85) 이에 正言 金 는 윤지술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이를 앞서 간쟁하지 못했음을 들어 본 인의 遞職을 요구하였고, 獻納 宋必恒도 또한 같은 이유로서 체직을 청하였다.86) 경종은 물의를 일으킨 윤지술이 대신을 誣陷하고 私親인 희빈 장씨를 陰險한 뜻 으로 언급하였다하여 邊方에 定配토록 하였지만, 領議政 金昌集은 윤지술이 성 균관 유생이며 그를 처벌하는 것은 士氣를 꺾는 것이므로 용서해주자는 청을 하 였고, 이에 경종은 留意하겠다고 하였다.87) 그러나 당시 소론의 領袖인 戶曹判書 趙泰耉는 大臣(李 命)이 지문에 신사년과 병신년의 처분사실을 명백히 서술하 지 않은 것은 어버이를 隱諱하는 義理에서 찬술한 것이었다88)라고 언급하면서, 윤지술은 이러한 뜻을 모르고 경망스럽게 행동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변 방으로 定配를 한 경종의 처분이 합당함에도 윤지술을 두둔하는 자들과 김창집 을 함께 비난하였다. 이러한 조태구의 비난에 김창집이 相臣의 직책을 해면해 줄 것을 청하는 등 노론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89) 관학유생의 계속된 권 당으로 결국 윤지술에 대한 정배의 명은 환수되기에 이르렀다.90)
경종 즉위초 희빈장씨에 대한 名號를 정하기를 요청하는 조중우의 상소와 이에 대한 처분, 그리고 이후 숙종지문 改撰에 대한 요구는 모두 정국장악의 재진입 을 노리고 있는 소론 및 남인에 대한 엄정한 경고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조중우의 상소 직후 올라온 다음의 상소문을 통해서도 파악된다.
(前略)…중우의 무리들이 이 말로써 일찍이 오늘날에 시험해 보려 한 것은 대개 망령 된 마음으로 감히 말하기 어려운 자리를 의논하여 국가에 앙화를 끼치는 계책을 이루 고자 한 것이니,…(中略)…엎드려 원하건대 더욱 마음을 강건하게 하시므로서 이와 같
85)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辛未, 太學齋生捲堂條.
86)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癸酉, 甲戌.
87)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甲戌, 戊寅.
88)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8月 壬寅, 奏請正使李 命上疏條.
89)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戊寅, 藥房入診條.
90) 景宗實錄 卷2, 景宗 卽位年 9月 甲申, 館儒累日捲堂條.
은 상소를 許함을 엄히 방비하시고, 다시는 捧入하지 말도록 이내 명령하시어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뒤를 이어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後略)91)
이는 大司諫 趙觀彬의 상소로서 당시 조중우의 상소를 간사한 무리들이 일어나 기 위한 계책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과감히 물리칠 것을 경종에게 요 구하고 있다. 노론 또한 조중우의 상소가 소론 및 남인의 정계 재진입의 가능성 을 타진하는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과감한 처단이 필요하였 던 것이다. 물론 희빈장씨를 사사한 辛巳年의 처분은 당시 노론이 행한 것으로 서, 노론계 척신세력과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조중우의 상소 직후 노론계 척신세력의 별다른 반응이 없는 반면에, 承旨 및 司憲府・司諫院의 非戚臣系 老論 人物의 조중우의 상소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 일어났던 것이 다.92)
하지만 신사년의 처분에 직접적인 관련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노론계 척신 세력이 이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병신처분 및 정유독대의 과 정에서 노론이 명분상의 승리를 차지하면서 정국의 장악이 가능하였던 것이므 로, 사소한 명분상의 문제라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노론계 척신세력 에 대해 비판적인 소론의 정계 재진입은 이들에게 위험한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노론계 척신세력은 尹志述을 사주하여 소론에 대한 경고 및 노론 명분의 우위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同副承旨 李眞儉의 上 疏를 통해서 이이명이 숙종지문 찬술의 문제와 관련되어 윤지술을 사주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음에서 파악된다.93)
그러나 이와 같은 노론계 척신세력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즉위년 11월 京畿幼學 金行進이 尹志述을 참할 것을 청하였고,94) 더 나아가 즉위년 12월에는 湖西의 91) 景宗實錄 卷1, 景宗 卽位年 7月 丁亥, 大司諫趙觀彬上疏條, (前略)…重遇輩 以此說 嘗
試於今日者 盖以妄度之心 敢議難言之地 欲 禍人國家之計…(中略)…伏願益恢乾剛 以嚴 防 如許之疏 仍命勿復捧入 無使凶邪之輩 接跡而起焉…(後略)
92) 趙重遇의 上疏 직후로부터 조중우 및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처벌에 이르기까지, 노론계 척신세력의 上疏 혹은 이와 관련된 기사는 보이지 않고 있음이 주목된다.
93) 景宗修正實錄 卷1, 景宗 卽位年 12月 庚申, 同副承旨李眞儉上疏條, …而末乃在途封章 自作物議 請改文字於刻役已始之後者 似若啓志述 今日之事者然 人心之疑惑 烏得免乎. 이 를 통해 살펴보면 이이명의 숙종지문 찬술이 어버이를 隱諱하는 義理에서 한 행동이 아니 라 노론계 척신세력의 계획된 일임을 소론은 의심하고 있다.
儒生 李夢寅은 윤지술을 求解하여 母子의 倫理를 끊어버린 것과 胡差에게 글을 써주어 君父에게 욕을 끼친 김창집의 治罪를 요구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었 다.95) 또한 원년 3월에는 同副承旨 金始煥이 상소하여 병신처분시 疏儒가 坐罪 된 일을 논하면서 이들에 대한 解罰을 요구하는 등 병신처분에 대한 문제를 제 기하였다.96)
그런데 간헐적인 노론계 척신세력에 대한 치죄의 요구와, 소론 명분의 회복을 의미하는 병신처분에 대한 문제제기와 달리, 정국을 긴장시키는 사건이 발생하 였다. 즉 관원의 進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銓曹의 職인 吏曹判書에 소론의 崔錫恒이 임명되었던 것이다.97) 결국 이는 소론의 정계 재진입할 수 있 는 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노론계 척신세력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는 상황이 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숙종 후반기 정유독대의 과정에서 염두해 두었던 연잉군 을 세제로 책봉하는 요구, 즉 建儲의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辛丑年(景宗 元年, 1721) 8月에 正言 李廷 가 建儲를 요청하고 나섰다. 이때 경종의 나이는 34세였고, 繼妃인 魚氏 또한 17세였는데 後嗣를 보지 못하고 있 었다. 이에 이정소는 임금의 나이가 한창임에도 후사가 없음을 구실 삼아 건저 의 정당성을 논하고 급히 國本을 정하도록 요청하였던 것이다. 경종은 이를 대 신에게 의논하여 稟處하라고 명하였으며, 그 날 밤 노론인 金昌集・李健命・趙 泰采・閔鎭遠・李弘述・李觀命・李晩成・任 ・李宜顯・洪啓迪・洪錫輔・趙榮 福・申昉 등이 모여 건저의 문제가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경종이 이를 승낙하자 다시 定宗 때의 故事에 따라 왕대비에게 아뢰어 手筆로 儲嗣의 적임자 이름을 받도록 경종에게 청하였다. 이에 경종은 왕대비의 封書를 받아서 김창집 에게 넘겨주었다. 이 봉서에는 2장의 종이가 들어있었는데 한 장에는 후계자로
辛丑年(景宗 元年, 1721) 8月에 正言 李廷 가 建儲를 요청하고 나섰다. 이때 경종의 나이는 34세였고, 繼妃인 魚氏 또한 17세였는데 後嗣를 보지 못하고 있 었다. 이에 이정소는 임금의 나이가 한창임에도 후사가 없음을 구실 삼아 건저 의 정당성을 논하고 급히 國本을 정하도록 요청하였던 것이다. 경종은 이를 대 신에게 의논하여 稟處하라고 명하였으며, 그 날 밤 노론인 金昌集・李健命・趙 泰采・閔鎭遠・李弘述・李觀命・李晩成・任 ・李宜顯・洪啓迪・洪錫輔・趙榮 福・申昉 등이 모여 건저의 문제가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경종이 이를 승낙하자 다시 定宗 때의 故事에 따라 왕대비에게 아뢰어 手筆로 儲嗣의 적임자 이름을 받도록 경종에게 청하였다. 이에 경종은 왕대비의 封書를 받아서 김창집 에게 넘겨주었다. 이 봉서에는 2장의 종이가 들어있었는데 한 장에는 후계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