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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 적석총유적의 형식과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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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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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산문화 적석총유적의 형식과 발전과정*

43)

오 대 양**

❙국문초록❙

본 논고는 최근 韓·中 상고사관련 주요 현안인 요하문명에 대하여 홍산문화의 적석총유적을 중심으로 그 특징과 성격을 살핀 것이다. 홍산문화는 요서지역의 신석기시대 중기문화로 중심연대는 기원전 4000~3500년 전후이다. 문화의 중심지는 내몽고 동북부의 노합하 중류에서 대릉하유역권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사회는 비교 적 안정된 정착농경 생활을 영유하였으며 돼지 등의 가축을 기르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요서지역의 적석총문 화는 이처럼 발달된 정착 농경을 기초로 형성되었으며, 壇·廟·塚 조합의 대규모 적석총유적군은 당시 사회 가 이미 문명화단계에 접근하였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무덤유형은 토광묘·적석묘·적석총 등 3단계의 변천과정을 거친다. 토광묘는 전기에 출현하여 적석묘가 축조되는 중기이후에는 발견되지 않으며, 후기단계에 이르면 최종적으로 단·묘·총이 결합된 적석총유적군으로 발전하였다.

[주제어] 홍산문화, 적석총, 요하문명, 요서지역, 신석기시대

❙목 차❙

Ⅰ. 머리말

Ⅱ. 주요유적 현황

Ⅲ. 적석총의 형식과 구조

Ⅳ. 적석총의 발전과정 및 축조연대

Ⅴ. 맺음말

Ⅰ. 머리말

기원전

3500

년경 중국 요서지역에서 등장한 壇

·

·

塚 조합의 적석총문화는 동북아시아에서 출현한 가 장 이른 시기의 거석문화이다

.

당시 이 지역에서 대규모의 적석총문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안정된 농경생활이 주요한 원인으로 이해된다

.

1) 또한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볼 때 당시 사회는 이미 문명단계에 진입

* 이 논문은 동북아역사재단 2009년도 차세대 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 단국대학교 연구전담조교수 / uhpss@hanmail.net

(2)

할 정도로 매우 발달되었으며 그 주체자는 홍산문화의 사람들이었다

.

현재 홍산문화와 관련되어 한

·

중 연구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오가고 있다

.

주된 논점은 민족의 시원 및 그 계승성에 관한 것이어서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의 요하문명론 주장은 홍산문화에 대한 홍보작업의 일 환으로 볼 수 있다

.

그 이면에는 동북공정의 실체인 고구려사 정리 작업을 통해 그 이전 시기의 역사까지 중 화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하다

.

반면 한국에서는 홍산문화를 고조선에 선행되는 상 고문화로 인식하여 이를 환웅단계에 설정하려는 시각이 있다

.

그러나 만족할 만한 연구 성과가 도출되지 못 한 상황에서 피상적인 결론을 유보하자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강하다

.

우선적으로 기초자료의 확보와 전문연 구 인력의 확충을 통한 실질적 연구성과물의 발표 및 이를 위한 학계의 공론화 작업이 요구된다

.

이 글은 홍산문화 적석총유적의 형식과 구조적특징 및 그 발전과정에 관한 글이다

.

무덤은 피장자가 속한 집단의 매장 풍습과 함께 당시 사회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한번 고착화된 그 葬俗 的 특징은 쉽게 변화되지 않기에 보수성과 계승성이 강하다

.

그렇기에 매우 오랫동안 그 전통이 유지된 적석 총문화의 흔적들은 홍산문화의 내용과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

2)

Ⅱ. 주요유적의 현황

홍산문화의 주요 분포범위는 동쪽으로 医巫閭山을 넘어 下遼河 서안에 이르며 남쪽의 동단은 渤海沿岸에

,

서남단은 燕山山脈을 넘어 河北平原까지 이른다

.

河北省 張家口의 桑干河상류에서 홍산문화와 앙소문화가 함께 발견되는 현상으로 보아 이곳을 홍산문화 분포범위의 서남 경계로 볼 수 있겠다

.

3) 또한 유적의 분포와 밀집현상 등에 미루어 적석총유적의 분포권은 西拉木倫河와 老哈河 중상류일대 그리고 大凌河유역으로 볼 수 있다

.

4) 이중 대릉하 중상류지역은 홍산문화 분포권의 중심지역에 해당된다

.

1)楊虎, 「遼西地區新石器-銅石竝用時代考古學文化序列分期」, 󰡔文物󰡕 5, 1994, 37~40; 呂昕娛, 「紅山文化經濟形態述論」, 󰡔赤 峰學院學報󰡕 8, 2009, 7.

2)홍산문화와 고조선의 연관성 혹은 계승관계에 대한 내용은 후속 연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이글은 양자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연구대상을 적석총유적으로 한정한다. 이유는 지금까지 발표된 대부분의 관련자료들이 적석총유적에 집중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기 위한 기초자료의 확보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적석총은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 백제까지 전승된 한민족의 대표적인 무덤양식 중 하나이며, 최근 그 기원과 관련하여 홍산문화에 대한 가능성 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현재 요동지역 일대 적석총유적에 관한 연구는 이미 상당수 진행된 바 있다. 반면 요서지역은 이제 막 시작단계로서 특히 양 지역의 비교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양자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각 지역 적석총유적의 특징과 성격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최초 3단계에 걸친 연구계획이 수립되었다. , 요서지역 적석총문화의 기원과 형성과정, 둘째, 요서지역 적석총문화의 특징과 성격-홍산문화를 중심으로, 셋째, 요동지 역 청동기시대 적석총문화의 특징과 성격-홍산문화와 비교를 중심으로-이다. 현재 첫 번째와 두번째는 항목은 이미 연구가 종료되어 동북아역사재단 차세대 연구지원사업의 결과보고서로 2010년 제출되었으며, 이중 첫번째 항목은 요서지역 적석총 문화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주제로 동북아역사논총 제45집에 발표되었다. 마지막 셋째 사항은 2014년 동북아역사재단 상고 사관련 자유연구과제로 선정되어 현재 연구가 진행중에 있다. 이글에서는 지면상의 한계로 두번째 항목을 대상으로 연구내용 을 요약하며, 나머지 주제의 연구결과는 이후 순차적으로 발표할 계획이다.

3) 郭大順, 󰡔紅山文化󰡕, 文物出版社, 2005, 25~26.

4)이청규,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요서지역 무덤의 부장유물과 그 변천」, 󰡔요하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3)

1. 胡头溝 2. 東山嘴 3. 牛河梁 4. 草帽山 5. 白音長汗 6. 南臺子 7. 洪格力圖 8. 海拉所鎭 9. 康家灣

<지도 1> 홍산문화 적석총유적 분포도 홍산문화 적석총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는

1970

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

당시 중국 학계는 요서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광역적인 문물 조사를 실시하던 중이었다

.

이 조사를 통해 내몽 고 적봉시

,

오한기

,

부신

,

객좌

,

능원

,

건평 등 지 역에서 많은 수의 적석총유적이 발견되었다

.

주 요유적으로는 대릉하유역의 阜新縣 胡頭溝

,

喀左 縣 東山嘴

,

凌源

·

建坪縣 牛河梁

,

內蒙古 敖漢旗 草帽山유적

,

서랍목륜하유역의 林西縣 白音長汗

,

克什克騰旗 南台子

,

洪格力圖

,

翁牛特旗 海拉蘇 鎭

,

赤峰市 康家灣유적 등이 있다

.

아래에서는 그 동안 진행된 홍산문화 적석총 관련유적의 주요 현황에 대해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겠다

.

1. 東山嘴유적

5)

<사진 1> 동산취유적 전경 및 원형제단과 출토 조각상

喀左縣 大城子鎭 동남쪽 약

4km

지점인 대릉하 서안에 위치한다

. 1982

년 홍산문화 중후기에 해당되는 일 련의 제단시설이 발굴되었다

.

유적의 중심부에는 평면 방형의 대형제단이 위치하는데

,

길이는

11.8m,

너비

9.5m

정도로 사면을 반듯하게 조성하였다

.

방형제단 동서 양쪽에는 건물지의 기초부로 추정되는 석축렬이 남아 있으며 그 서쪽 밑에서는 제단보다 시기가 빠른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

방형제단에서 남쪽으로 약

15m

가량 떨어져 지름

2.5m

의 원형제단이 위치한다

.

원형제단의 바깥으로는 잘 다듬어진 장방형 석재를

1

단으로

동북아역사재단, 2010, 24.

5) 郭大順·張克擧, 「遼寧省喀左縣東山嘴紅山文化建築群址發掘簡報」, 󰡔文物󰡕 11, 1984.

(4)

<지도 2> 우하량유적 분포도(출전:곽대순, 2005)

돌려 외곽틀을 구성하였고 그 내부에는 강자갈을 채웠다

.

이 원형제단 동북쪽 아래에서는 인골 한구가 발견 되어 주목된다

.

인골 하부는 바로 생토면이며 별다른 시설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

단지 두개골과 다리뼈 양쪽 이 불규칙한 모양의 판석

2

장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

부장품은 없었으나 인골의 흉부와 가슴에 인접하여 紅陶와 黑陶 편이 덮여 있었다

.

또한 원형제단 동쪽 하단 황토층에서는 소형의 임신부상 두 점이 발견되었고

,

동남쪽 하단에서는 대형의 人物坐像이 출토되었다

.

원형제단은 방형제단에 대응되는 동시기의 건축물이다

.

원형제단 남쪽 약

4m

지점에는 지름

3m

가량의 圓形壇

3

개가 연접한다

.

이미 일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나 머지 두 개는 윤곽이 잘 남아 있다

.

거의 타원형에 가깝고 각각의 규모는 남북 길이

3.1m,

동서

3.8m

과 남 북

2.9m,

동서

4.1m

등이다

.

타원형의 제단시설은 토층관계상 유적 내에서 시기가 가장 빠르다

.

2. 牛河梁유적

6)

凌源縣과 建平縣의 경계지점에 위치한다

. 1981

년부터 최근까지 약

50

㎢ 범위 내에서

20

여 곳의 유적이 확 인되었다

.

이중

16

개 지점에 대해 번호가 부여되었고

,

발굴된 주요 유적은

1·2·3·5·13·16

지점 등이다

.

(1) 1지점 여신묘7)

이곳은 우하량의 중심 줄기인 북산 정상부에 해당된다

.

여신묘는 평면형태가

자형인 半地穴式으로 전

·

후실과 측실로 구성된 다실건축물과 별도의 단실로 구성되었다

.

북쪽의 다실건축물은 주실이 되며

,

남쪽 의 단실은 부속구조물로써 양쪽 사이의 간격은

2.05m

이다

.

주실은 남북 길이

18.4m,

동서 잔존 최대 너비

6.9m

정도이다

.

전체 구조는 비교적 복잡한 편인 데 중심의 주실을 기준으로 동

·

서 측실

,

북실과 남측의 三室이 연접되 었고 다시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남쪽 의 단실이 존재하는 형태로 구성되 었다

.

남쪽의 단실건축물은 길이

6m,

최대너비

2.65m

정도로 전체 규모는 남북

25m,

동서

2~9m,

면 적은

75

㎡이다

.

다실건축물에서는 실제 사람 크 기의 두 배 정도 되는 인물소상의 어깨

,

,

,

다리 등이 출토되었

6)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牛河梁-紅山文化遺址發掘報告(1983~2003)󰡕, 文物出版社, 2012.

7)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牛河梁紅山文化女神墓與積石塚群發掘簡報」, 󰡔文物󰡕 8, 1986.

(5)

.

또한 주실의 서측에서는 실제 사람크기에 해당하는 여신의 머리가 출토되었고 중앙에서는 실제 사람 크 기의

3

배에 해당되는 코와 귀 등이 확인되었다

.

이외에 동물상

(

猪龍

)

의 머리

,

발굽

,

벽화가 그려진 벽체 잔 편

,

彩繪된 대형토기 편

,

鏤孔豆形器盖

,

鉢 등이 출토되었다

.

<그림 1> 우하량 1지점 여신묘 평면도(좌) 및 출토 조각상(우)

(2) 2지점8)

2

지점은 우하량유적군 전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

동서 길이

150m,

남북 너비

60~80m

의 범위 내에 적석총

4

기와 제단

2

기가 발굴되었다

.

<사진 2> 우하량 2지점 2호총(좌) 및 3호제단(우)

1

호총은 유적 제일 서쪽에 위치한다

.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

길이

26.8m,

너비

19.5m

정도이다

.

총 내 에서는 모두

27

기의 석관이 확인되었다

.

중앙에 약

14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동서 대칭으로 자리한 대형 석관

2

(25·26

)

가 있고 그 남쪽으로 동서 방향

4

줄의 중

·

소형석관

25

기가 배열되었다

.

중심묘인

25·26

호의 8)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牛河梁2地點1号塚21号墓發掘簡報」, 󰡔文物󰡕 8, 1997a;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牛河梁紅山文化

2地點1号塚石棺墓的發掘」, 󰡔文物󰡕 10, 2008a.

(6)

·

·

북쪽 묘광 벽은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좁아지며 남벽은 바닥에서부터

5~6

개의 계단을 두 었다

.

석관의 네벽은 잘 다듬어진 석판을

8~12

층 정도로 쌓았고 바닥에는 대석판을 깔았다

.

석관의 길이는

1.96m,

너비

0.45m,

높이

0.54~0.66m

정도 이다

. 25

호의 장법은 성인 여성의

1

인 仰身直肢葬으로 두향은 서쪽을 향한다

.

부장품은 옥기

7

점이 확인되었다

. 26

호는

1

인 앙신직지장이며

,

옥기

4

점이 출토되었다

.

<그림 2> 우하량 2지점 1호총(상) 및 25호묘실(하) 평면도

(7)

2

호총은

1

호총과

3

호제단 사이에 위치한다

.

평면 형태는 길이

17.5m,

너비

18.7m

의 방형이다

.

중심부에 는 대형의 석곽묘가 들어서 있는데 잘 다듬어진 석재를

3

층으로 쌓아 방형의 臺를 조성하였다

.

方臺 중앙에 는 길이

2.21m,

너비

0.85m,

높이

0.5m

의 묘실이 존재한다

.

묘실은 판석재를 이용하여 수직으로 쌓았고

,

상부에는 얇은 판석을 덮었다

.

이 무덤은 이미 도굴된 상태여서 별다른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교란토 내에서 약간의 인골 편과 함께 紅陶 편 및 돼지와 소뼈 등이 수습되었다

.

중심묘 남쪽에는 소형의 석관묘

3

기가 위치한다

.

이 중

1

기는 묘벽 한쪽으로

2

층의 계단을 두었고

,

玉鐲

1

점이 출토되었다

.

나머지

2

기는 부 장품이 없는 소형의 석관묘이다

. 2

호총은 封土部의 둘레에만 적석을 하였는데 총 상부 전체에 적석을 한

1

호 총과 비교된다

.

3

호제단은 평면 원형의

3

단으로 구성되었다

.

각 단의 둘레에는 붉은색의 화강암 석재를 수직으로 세웠다

.

그 내부에는 흙을 다져서 채웠고

,

외곽에는 각 단마다 紅陶 筒形器를 돌렸다

.

제일 하단부의 지름은

22m

이 며

,

중간부는

15.6m,

제일 상부는

11m

이다

.

조사당시 표토층을 벗겨낼 때 인골

3

구가 발견되었는데

,

부장 품은 없었다

.

<그림 3> 우하량 2지점 4호총

(8)

<그림 4> 우하량 3지점 적석총

4

호총은

3

호제단의 동쪽에 위치한다

.

유적내 규모가 제일 크며 구조 역시 가장 복잡하다

.

평면은 前方後 圓이며 남북 길이

36m,

동서 폭

20m

이다

. 1998

년까지 모두

16

기의 무덤이 발굴되었으며 기본적으로 상

·

·

하의

3

개 층위로 구분된다

.

제일 하층은

4

호총의 남반부에서 확인되었다

.

소규모의 석재편을 쌓아놓은 적석부가 형성되었으며 그 외곽으로 彩陶 筒形器를 원형으로 둘러 세우고 그 안쪽에 묘실을 두었다

.

중층은

4

호총 북부이며

,

대형의 원형적석총

2

기가 위치한다

.

상층에는 두 개 이상의 방형적석총이 들어서 있다

.

4

호총 내부에는 원형과 방형 등 여러 개의 적석총이 존재하나 주체가 되는 것은 중층의 원형 적석총

2

기 이다

. 2

기는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었으며 동총의 서북각 일부가 서총의 동부와 겹쳐져 쌍총 결합 구조로 볼 수 있다

.

또한 동총의 동계에서는 북에서 남쪽으로

,

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길이

36m

의 기단부가 있는데 다 시 서쪽으로 꺾이어

4

호총 전체의 남쪽 경계를 이룬다

.

이러한 복잡한 구조의 기단시설은 상하층의 적석총 모두를 포괄하는 총의 外界가 된다

.

축조 방법상

4

호총 역시

1

호총과 마찬가지로

,

최종단계의 무덤이 들어선 이후 하나의 종합적인 총계가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

시기상 가장 빠른 하층의 무덤

(

筒形器圈墓

)

은 모두

10

기가 발굴되었고 전체

4

줄로 동서방향의 규칙적인 배열상태를 보인다

.

각각의 筒形器圈墓는 인접한 무덤들과 서로 맞닿아 있거나 겹쳐 있다

.

묘실은 남북방향 을 장축으로 하여 구덩이를 판 후 시신을 매장하였다

.

무덤벽에는 대부분 석판을 세웠고 바닥은 맨땅이다

.

부장품은 筒形器와 함께 盖罐이 세트를 이루며 옥기나 기타 유물은 적은 편이다

.

(3) 3지점9)

2

지점 남쪽

197m

지점에 위치하며 구릉 정상부 에 단독으로 조성되었다

.

총내 묘실은 모두

12

기 가 찾아졌다

.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직경 약

17m

정도이다

.

중심부에

1

호와

7

호묘실이 있고

,

서남 부에

10

기의 석관이 배치되었다

. 1

호는 평면 장방 형으로 크기는

0.7×0.5m

이다

.

묘벽은 석판을 쌓 았고 바닥은 석판

6

장을 깔았다

.

내부에서는 인골 및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 7

호는

1

호 서북쪽

0.8m

떨어져 위치한다

.

묘실은 석판을 쌓았고 바 닥은 맨바닥이며 크기는

2.9×1.8m

이다

.

장법은 남성

1

인 앙신직지장이며 두향은 북편서하고

3

점 의 옥기가 발견되었다

.

총 남부에 위치한

2

호와

3

호에서는 앙신직지장된 여성 한구씩 확인되었고

4

호는 남성의

1

인 세골장이다

.

9) 魏凡, 「牛河梁紅山文化第三地點積石塚石棺墓」, 󰡔遼海文物學刊󰡕 1, 1994.

(9)

1

3

2

1. 중층1호총 7호묘 2. 상층제단 3. 상층1호총 중심묘와 석퇴

<그림 5> 우하량 5지점 적석총 평·단면도 (4) 5지점10)

유적은

3

지점과 같은 구릉 줄기의 남사면에 위치한다

. 1987

2

기의 적석총과

1

기의 제단이 발견되었고

1999

년 발굴을 통해 모두

3

개 층위 의 홍산문화 유구를 확인하였다

.

제 일 상층은

2

기의 적석총과

1

기의 제 단이 배치된 후기 문화층이며 중층은 적석총

2

기와 祭祀坑

8

개가 배치된 중기의 문화층이다

.

하층은 灰坑 위 주의 홍산문화 초기의 생활유적이다

.

중층에서는

2

개 적석총에서 모두

4

개의 묘실이 확인되었는데 파괴된 것 까지 합하면

10

기 정도의 석관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

중층과 상층 무덤 사이에는 깨진돌로 구성된 積 石層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중층 적석총 상부 구조물의 잔존부에 해당된다

.

상층에서는

2

개의 총과

1

개의 제 단이 확인되었다

.

상층의

1

호총은 평면 원형이며 직경

19m

이다

.

총의 외곽에는 筒形器를 둘러 세웠고 그 바 깥으로 다시 직경

35m

의 環壕가 한줄 돌아간다

.

총내 구조물은 서부의 중심묘와 동부의 원형 적석퇴로 나뉜 다

.

중심묘와 원형 적석퇴 상부는 흙을 덮었고 그 위로 다시 돌을 쌓았다

.

중심묘의 구조는

2·3

지점의 중심 묘와 동일하다

.

장법은 성인남성의

1

인 앙신직지장이며

,

두향은 동남쪽을 향한다

.

내부에서는 다수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

방형제단은

2

기의 총 사이에 위치한다

.

외곽틀과 내부 모두 단층의 석재를 깔았다

.

길이

8.5m,

6m

정도이며 북부의 중심 하단에서

4

구의 인골이 세골장의 형태로 합장되었다

. 2

호총은 평면 방형이며 이미 상당부분이 파괴되었으나 남쪽에서 파괴된 석관 몇 기가 확인되었다

.

구조는 우하량유적 대부분의 중

·

소형 석관과 동일하다

.

(5) 13지점11)

능원현에 위치한 해발

588m

의 轉山子山 정상부에 위치한다

.

유적군 가장 남쪽에 해당되며 북서쪽

1.5km

지점에

16

지점이

,

남동쪽

1.5km

지점에

14·15

지점이 위치한다

. 1

지점과는 직선거리로 약

4.5km

가량 떨 어져 있다

.

유적은 평면형태가 원형인 대형의 토석혼합 건축물이다

.

중심부에는 직경

40m,

높이

7m

정도로

10)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牛河梁第五地點一號塚中心大墓(M1)發掘簡報」, 󰡔文物󰡕 8, 1997b;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遼 寧凌源市牛河梁遗址第五地點 1998~1999 年度的发掘」, 󰡔考古󰡕 8, 2001.

11) 郭大順, 앞의 책, 2005, 88~91; 張星德, 󰡔紅山文化硏究󰡕, 中國社會科學院出版社, 2005, 101~102.

(10)

<그림 6> 우하량 16지점 중심묘 및 石井 평·단면도

흙을 다져 쌓은 夯土 구릉이 있다

.

항토층의 외곽은 대석재를 계단식으로 쌓아 직경

100m

전후에 달한다

.

발굴 결과 내부에서 無葬具

,

無副葬品의 인골만 발견되어 제단유적으로 평가된다

.

또한 피라미드식 석축시설 곳곳에서는 鏤孔토기 편이 확인되며

,

건축물 상부에서는 구리의 제련 흔적이 남아 있는 坩鍋片이 발견되었다

.

(6) 16지점12)

능원현 三官甸子村 서북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한다

.

이곳은

1979

3

기의 홍산시기 무덤

(79

1~3

)

과 주거지

1

,

하가점하층문화의 유구가 확인되어

,

城子山 三官甸子유적이라 명명되었다

.

이후

2002~2003

년 에는 중심묘

(02

4

)

를 비롯한 총

10

기의 홍산문화 무덤 및 灰坑

3

기가 발견되었다

.

적석총은 유적내의 중 심부에 자리하며

,

총내 위치한

13

기의 묘실은 동북-서남방향으로 배열되었다

.

무덤들은 매장 시기에 따라

3

단계의

4

개 群으로 구분된다

.

1

단계의 제

1

군은 제일 이른 시 기에 해당되며 총 남부에 위치한 다

.

모두 토광묘

(2·7·8

, 2002

년발굴

)

이고

,

동남-서북방향으로 배열되었다

.

대부분

1

인 앙신직지 장이며 두향은 동남쪽

,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

내부에는 석축 시설이 확인되지 않으나 무덤상부 를 둘러싸며 깨진 돌이 쌓여있다

. 2

단계에 해당되는

2

군 무덤은

10·11

(02

년발굴

)

등이며 이중

10

호는

3

단계무덤에 해당되는 적석총의 기단하부에서 확인되었다

. 2

단계 와

3

단계문화층 사이에는

5

지점 중층과 같이 積石層이

1

층으로 퇴적되었고

,

그 하부에

3

기의 석관이 조성되 었다

. 2

단계

(

2

)

의 무덤들은 모두 서남-동북방향이며

,

묘실 내에서 많은 양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

그중

1

호의 길이는

1.7m,

너비

0.35m,

깊이

0.11~0.21m

이며 동벽은 판석을 세웠으나

,

나머지 삼면은 모두 흙 벽이다

.

무덤 상부에는 판석을 덮었고

,

바닥은 맨바닥

,

장법은 여성

1

인 앙신직지장이다

.

3

(1~3, 4

)

4

(12·13·14·15

)

3

단계 무덤군에 해당된다

.

중심묘인

4

호의 묘광은

3.9×3.1×4.68m

이고 남벽은 수직

,

북벽은 완만한 경사의

2

층 계단을 두었다

.

묘광 입구에는 석판을 쌓아 만든 石井이 존재한다

.

石井은 크기가

1.35×1.16×0.5m

이며

,

상부에는 석판을 덮었다

.

석정 하부의 중심묘는 석재를 쌓았으며 바닥과 상부 역시 석판을 깔거나 덮었다

.

안에는 황갈색의 흙이 채워졌고 그 하부에서 인골과 다수의 옥기가 발견되었다

.

무덤 주인은 약

45

세 전후의 남성이며 앙신직지장이다

.

4

군의 중

·

소형 석관들은 기본적으로

3

군의 중심 묘와 동일 축선상에 위치한다

.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중층 적석총의 상층부

(

총의 남부 외곽틀

)

을 파괴하고 12) 李恭篤, 「遼寧凌源縣三官甸子城子山遺址試掘報告書」, 󰡔考古󰡕 6, 1986; 國家文物局, 「牛河梁紅山文化遺址群」, 󰡔2003中國重

要考古發見󰡕, 2003;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牛河梁第十六地點紅山文化積石塚中心大墓發掘簡報」, 󰡔文物󰡕 10, 2008b.

(11)

<그림 8> 남대자 1(좌)·7호묘(우) 평·단면도

<그림 7> 백음장한 23·14호묘 평·단면도

들어섰다는 점이다

.

석판을 쌓아서

4

벽을 만들고 상부와 바닥은 석판을 덮거나 깔았다

.

묘실은 서북-동남향 이고 앙신직지장외에도

2

차장이 보인다

.

3. 白音長汗유적

13)

林西縣 白音長汗村 남쪽의 서 랍목륜하 북안 동산에 위치한다

. 1988·89·91

3

차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

유적내에서 소하서문화

,

흥륭와문화

,

조보구 문화

,

홍산문화

,

소하연문화 등 당지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순차

적으로 발견되었다

.

홍산문화단계의 유구는 주거지

17

,

회갱

33

,

무덤

6

기 등

(14·15·18·21~23

)

이 다

.

이중 무덤

4

(14·15·18·21

)

는 지세가 완만한 제Ⅲ호 墓區에 위치하며 나머지 두기

(22·23

)

는 유적 북부의

A

區域 동쪽에서 확인되었다

.

이들은 다시 묘실구조에 따라 적석묘

(14·15·18

)

와 토광묘

(21~23

)

로 구분된다

.

적석묘는 구덩이를 판 후 석판을 세워서

4

벽을 만들었다

.

바닥은 맨바닥이며 상부에 는 판석을 덮은 후 다시 적석하였다

.

내부에서 뚜껑이 덮여 있는 삼족기

(

) 1

점이 출토되었다

. 21~23

호는 토광묘이다

.

묘실 규모는

1.38~2.8×0.56~0.95×0.15~0.4m

이다

.

이중

23

호는 약

40

전후의 여성이 側身屈 肢葬 되었고

,

다리뼈 부근에서 채도편이 확인되었다

.

4. 南臺子유적

14)

赤峰市 克什克騰旗 經棚鎭 自然村 북 쪽의 완만한 대지상에 위치한다

. 1991

년 흥륭와문화 주거지

33

,

회갱

11

개와 홍 산문화 주거지

1

동과 회갱

30

,

무덤

13

기를 발굴하였다

.

이중 무덤은 토광묘

(1·4·10·13

호 등

)

과 적석묘

(7·11·

12

)

로 구분된다

.

1

호는 토광묘로

2

인 합장묘로 크기는

13) 內蒙古自治區文物考古硏究所, 󰡔白音長汗-新石器時代遺址發掘報告書󰡕, 科學出版社, 2004.

14) 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克什克騰旗南臺子遺址發掘簡報」, 󰡔內蒙古文物考古文集󰡕 第1, 1994; 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克 什克騰旗南臺子遺址」, 󰡔內蒙古文物考古文集󰡕 第2, 1997.

(12)

2×1.6×0.3m

이다

. 2

구의 인골은 두향이 정서쪽이며 북측의 인골은 측신굴지장

,

남측의 것은 앙신굴지장 되 었다

.

부장품은

자문 筒形罐과 石斧

,

石錛

,

三角形磨製石器

,

骨器 등이 있다

. 10

호는 평면 원형의 토광묘 이며

,

장식은

1

인 측신굴지장으로 두향은 동북쪽

,

부장품은 없다

. 13

호에서는

4

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서 로 교차되거나 맞닿아 있다

.

묘실 동쪽에서

자문 罐과 鉢

,

石斧

,

石鏟

,

石刀

,

갈판과 갈돌 및 骨角器 등이 출토되었다

.

7

호는 대형의 적석묘로

4

벽은 판석을 세웠고 바닥은 맨바닥

,

상부는 판석을 덮었다

.

길이는

2.7×0.72×

0.7m,

묘실주변으로 대량의 석재를 쌓았다

. 1

인 앙신직지장으로 두향은 정북이고 부장품은 玉環

2,

마제석 착과 패각 등이 출토되었다

.

5. 胡頭溝유적

15)

阜新 蒙古族自治縣 胡頭溝村 서남쪽

2km

지점인 牤牛河 동안의 완만한 구릉상에 위치한다

.

유적의 잔존규 모는 남북 길이 약

20m,

동서 너비

8.5m

정도이다

.

유적은

1973

년 하천수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석관묘가 발견되면서 알려졌고

1973

년과

1993

년 두 차례 발굴되었다

. 1973

년에는 옥기가 부장된 석관묘

(1·3

)

와 이를 둘러싸는 원형石圈 그리고 이를 따라 순서 있게 배열된 彩陶筒形器群이 확인되었다

.

또한 그 상층에서 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춘추시대의 토광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

16)

1993

년에는 유적의 전체윤곽이 들어났 으며

2

기의 석관묘가 새롭게 발굴조사 되었다

.

전체유적은 중앙의 중심대묘와 남측의 소형무덤군으로 나뉜 다

.

중심대묘의 바깥으로는 원형석권이 돌아가고 다시 그 바깥쪽으로 방형의 塚界가 존재한다

.

방형총계 외 쪽으로는 채도통형기가 일렬로 배열되었다

.

발굴된 홍산시기의 무덤은 모두

4

기로 중심대묘

(73M1)

및 남쪽에 자리한 소형무덤

3

(73M3, 93M7,

93M6)

로 구성된다

.

특이한 점은 중심대묘와 그 남쪽의 소형 무덤군 상부에서 적석더미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중심대묘는 원형석권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

무덤바닥은 지표에서

4.5m

정도 깊이이며

,

생토층을 굴 착하여 조성하였다

.

묘광의 입구는 춘추시기의 토광묘에 의해 교란되어 묘광선의 일부가 불명확하나

,

묘광의 남쪽벽은 계단구조로 되어있다

.

묘실은 두꺼운 판석재를 이용하여 석관을 조성하였다

.

바닥에는 얇은 석판을 깔았고

,

석관 위에도 판석을 덮어 개석으로 삼았다

.

葬式은

1

인 仰身直肢葬이며 두향은 서쪽을 향한다

.

유물 은 모두

15

점의 옥기가 발견되었으나 정확한 출토위치는 알 수 없다

.

3

호묘

(M3)

는 다실무덤으로 내부는 석판을 세우거나 쌓아서 모두

5

개의 석관을 두었다

.

무덤의 깊이는 지 표에서 약

1.1m

정도이며

,

내벽은 남북 너비

2.2m,

높이 약

0.4m

이다

.

각 석관의 번호는 북에서 남으로

1~5

호가 된다

. 3

-4(M3-4)

1

실내

2

개체의 시신을 매장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단인장을 하였다

.

부장품은

15) 方殿春, 앞의 논문, 1984; 方殿春·刘晓鸿, 앞의 논문, 2005; 崔岩勤, 「胡頭溝红山文化墓葬再探」, 󰡔赤峰學院學報󰡕 2006-5, 2006.

16) 춘추 중만기의 석곽묘(M2)와 그 좌우로 토갱수혈묘(M4·M5)가 확인되었다. 중심의 대형 석곽묘는 내부에서 부식된 목재 장구의 흔적이 약 2cm 두께로 확인되었고, 십이대영자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과 유사한 형식이 발견되었다.

(13)

모두

3

점이 확인되었다

.

3

-1

:너비

36cm,

성인

,

단인장

,

인골은 이미 부식됨

,

부장품 없음

.

3

-2

:너비

47cm,

성인

,

단인장

,

인골은 이미 부식됨

,

부장품 없음

.

3

-3

:너비

28cm,

성인 單人直肢葬

,

魚形墜

1

점 출토

.

3

-4

:너비

46cm,

성인 두명이 매장

,

三聯玉璧

1

점 출토

.

3

-5

:너비

30cm,

미성년

,

단인장

,

두개골 근처에서 어형추

1

점이 발견

.

6

호묘

(93M6)

는 판석을 세우거나 쌓아서 조성하였다

.

장축은 북서-남동을 향하며 내벽의 길이는

2.05m,

너비

0.40m,

깊이

0.40m

이다

.

상부에는 여러 매의 긴 판석을 덮어 개석으로 삼았다

.

내부에 한사람을 매 장하였고

,

두향은 동남쪽이다

.

<그림 9> 호두구유적 평면도(상) 및 3호(73M3, 하좌)·6호(93M6, 하우)평·측면도

Ⅲ. 적석총의 형식과 구조

홍산문화의 적석총은 대부분 하천에 임한 고대지나 저평한 구릉상에 위치하여 주변의 조망이 매우 좋은 편이다

.

무덤 상부에는 방형 혹은 원형으로 계단식 석축을 하며 하부는 석판을 쌓거나 세워 묘실을 두었다

.

(14)

구분 형식분류 특징 부장품 장식

곽대순 (1997)

중심대묘 총 중심부

대계식묘 묘광 한쪽만 계단식 臺 존재

갑류석관묘 1식

중·소형석관묘 (옥기 수량에 따라 3식으로 구분)

옥기 다량

2식 옥기 일반

3식 옥기 1점씩

을류석관묘 옥기는 없으나 석관을 정성들여 만듬

부속묘 총 상부나 바깥쪽 위치, 간단한 수혈 無副葬品

화옥빙, 양영창 (1998)

갑류 토갱수혈묘 봉토 혹은 묘상부 적석

을류 토갱수혈

석관묘

A 깊은 토갱, 계단식 臺 존재 옥기 풍부

B 계단식 臺 없음 옥기 석기 3~4점

C 얕은 토갱, 작은 석관 소량 옥기, 일부

토기존재 다차장과 굴지장

D 무규칙석관 없음

병 적석

석관묘

상부적석, 묘상부가 지상에 노출

A 중심대묘 옥기다량 1인 앙신직지장

B 얕은 토갱

C 간단한 석관, 부장품 옥기 1,2점 다인 2차장위주,

D 석관과 시신은 있으나 부장품 없음

장법은 주로 앙신직지장 위주이고 대형묘는 총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

부장품은 옥기를 다량으로 부장하는데 토기와 석기가 공반되는 경우가 드물다

.

이러한 특징들은 홍산문화 적석총에서 찾아지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개별유적별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

이장에서는 홍산문화 적석총의 형식과 구조적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

1. 형식분류 검토

적석총은 석재를 쌓아 만든 특수한 형태의 무덤양식으로 내부에는 다수의 묘실이 존재한다

.

내부 묘실은 積石墓

,

石板墓

,

石棺墓

,

石砌墓

,

竪穴土壙墓

,

土坑竪穴石棺墓

,

積石石棺墓 등으로 구분되며 구조는 그 명칭 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

.

현재 중국학계에서 통용되는 분류방안은 토갱수혈묘

,

토갱수혈석관묘

,

적석석관묘 등

3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

<표 1> 적석총 형식분류 연구현황17)

17) 표안의 무덤관련 용어들은 원문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각 연구자가 직접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표기하였다. 그 이유는 중국 보고서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한국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 할 경우(아직 중국학계에서 조차 관련용어 의 통일 및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로), 추후 원문을 통한 본 논문과의 비교분석 및 2차연구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 문이다. 이글에서는 현재 중국학계에서 통용되는 적석총관련 용어들을 정리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며, 관련용어의 통일 및 우리말 번역에 관해서는 추후 단행본 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정리할 계획에 있다.

(15)

구분 형식분류 특징 부장품 장식

려학명 (2000)

A형 토갱수혈무장구묘 무석관 단인 굴지장위주

B형 토 갱 수 혈 석 관 묘

1식 얕은 토갱, 간단한 석관 1인 앙신직지장

2식

깊은 토갱, 규칙적으로 쌓은 석관, 단인 앙신직지장 위주, 개별합장

갑 깊고 넓은 묘혈 1차장

을 묘혈이 갑보다 얕음 2차장증가

병 얕은 묘혈, 소형석관 2차장위주

3식

묘광이 얕고 좁음, 석판을 세워서 조성

갑 석관 크고 넓음 앙신직지장

을 소형석관 1·2차장

병 간단한 석관 2차장

C형 대계식묘

계단식 대 존재, 중심묘적 성격 갑 우2-2-1호, 우5-1-1호, 호두구1호

을 우2-1-25·26호

D형 무광석관

적석총의 최종 경계가 완성될때 형성됨, 우2-1·4호총에만 존재

갑 석관은 작으나 규칙적으로 조성

을 석관이 불규칙적으로 조성

병 작은 석상으로 인골조각만 존재

E형 무묘광, 無葬具

웅증룡 (2005)

A형 토갱수혈묘 남대자10호, 백음장한22호

B형 토 갱 수 혈 석 관 묘

Ⅰ식 갑 계단식 臺 존재 중심묘

을 계단식 臺 존재 중심묘 아님

Ⅱ식

계단식 臺 없음, 묘광 깊음

갑 넓고, 깊은 묘혈 1차장

을 얕고, 좁은 묘혈 2차장 위주

Ⅲ식

얕은 묘혈, 석판을 세워 조성

갑 석관이 약간 넓고 큼 앙신직지장

을 좁고, 간단한 석관 2차장 다수

C형 적석석관묘

얕은 토갱, 석관상부가 지표에 노출, 그 상부로 적석

규칙적으로 축조된 석관 규모작음

간단축조 불규칙

조촐한 석관

郭大順은 적석총내부 묘실의 구조와 규모

,

옥기부장 양상에 따라 中心大墓

,

臺階式墓

,

甲類石棺墓

,

乙類石 棺墓

,

附屬墓 등

5

개 형식으로 분류하였다

.

이들간에는 최상위에서 하위등급으로의 순차적인 단계성이 존재 하는데 간략한 석관구조에서 복잡한 구조로 발전되는 대략

2

단계에 걸친 축조과정을 설명하였다

.

18)

18) 郭大順, 「紅山文化的唯玉爲葬與遼河文明起源特征再認識」, 󰡔文物󰡕 8, 1997.

(16)

이에 대해 華玉冰과 楊榮昌은 같은 시기 무덤의 등급 차이는 사자의 신분을 표현하며 시기가 다른 무덤의 규모 차이는 사회발전단계의 단계성을 표현한다고 하였다

.

또한 적석총의 건축 시설은 상부의 제사시설과 하 부의 무덤시설로 구분되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墓

·

祭의 내용과 방식 역시 변화되며

,

이는 각 무덤의 시설물 들이 서로 중복 교차되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

그리고 적석총의 형식에 대해서는 먼저 외관상에 서 나타나는 특징에 따라 적석묘와 적석총으로 구분하였고 다시 묘실의 내부구조 차이에 따라 토갱수혈묘

,

토갱수혈석관묘

,

적석석관묘 등으로 분류하였다

.

그러나 적석묘와 적석총의 구분에는 명확한 기준과 설명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

다만 다수의 무덤이 집합되어 있는 점을 적석총의 특징으로 규정한 점으로 보아 적석묘 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소규모의 무덤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19) 이들이 제시한 무덤의 하부구조에 따 른 분류와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토갱수혈묘는 지하에 토갱형의 묘실을 둔 형식이다

.

토갱수혈묘의 개념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에 는 무덤상부에 적석시설을 둔 일부 무덤들도 이 형식에 포함시키는 등 명확한 구분이 없었으나

,

呂學明20)과 熊增龍21)은 새로 발표되는 자료들에 근거하여 무덤상부에 적석시설이 없고

,

無葬具인 무덤들만을 토갱수혈 묘로 정의하였다

.

남대자와 백음장한유적에서 발견된 무덤들이 대표적으로 모두 홍산문화 전기로 편년된다

.

두 번째 토갱수혈석관묘는 상부에 적석을 하고 하부에 깊거나 얕은 토광을 판 후 그안에 석관을 만든 형식이 다

.

세 번째 적석석관묘는 상부에 적석을 하고 하부에는 석관을 둔 형식으로 곽대순이 분류한 중심대묘와 대 계식묘 등 대형묘에 해당된다

.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이 세가지 유형의 분류안을 대체적으로 수용하며 새로 운 자료가 발표됨에 따라 조금씩 수정되는 정도이다

.

그런데 상기의 적석총관련 용어 및 형식 구분은 다소 복잡하며 명확한 개념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

그 원인은 아직까지 우하량유적을 제외한 대부 분의 유적들에서 정식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고 적석총만을 대상으로 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 있다

.

필자 역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능력은 부족하며 단지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보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는데 중점을 두겠다

.

이상을 종합하면 홍산문화의 무덤양식은 외부형태에 따라 크게 積石型과 無積石型으로 구분되며

,

내부구 조에 따라 다시 세분할 수 있다

.

첫 번째

,

無積石型은 기존에 토갱수혈묘 혹은 토갱수혈무장구묘 등으로 분류되던 것이다

.

이글에서는 토 광묘로 통일해 부르겠다

.

묘실은 모두 간단한 구조의 구덩이며 장법은 합장과 단인장이 확인되었다

.

합장식 은

2

인 합장

(

남대자

1

)

4

인 합장

(

남대자

13

)

이 있는데 모두 굴지장이며 두향은 대체로 서쪽을 향한다

.

묘실에서는

자문 筒形罐과 소량의 석기 및 골기가 출토되었다

.

그리고 단인장식은 모두 측신굴지장을 하 였으며 두향은 북쪽을 향한다

.

백음장한유적

21~23

,

남대자

4·10

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

묘실내에서는

19) 華玉冰·楊榮昌, 「紅山文化墓葬剖析」, 󰡔靑果集-吉林大學考古學系十周年記念文集󰡕, 吉林大學考古系編, 知識出版社, 1998, 35~36.

이글에서 지칭하는 적석묘는 무덤상부에 단독의 적석묘역 혹은 적석퇴를 가지며 그 하부에 한 1개의 묘실만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적석총은 하나의 묘역내에 다수의 묘실이 집합된 대형무덤을 지칭하기로 한다.

20) 呂學明, 󰡔紅山文化墓葬硏究󰡕, 吉林大學碩士學位論文, 2000.

21) 熊增龍, 󰡔紅山文化墓葬制度及相關問題硏究󰡕, 吉林大學碩士學位論文, 2005.

(17)

대부분 유물이 확인되지 않으나 백음장한

23

호에서 채도편

1

점이 출토었다

.

無積石型의 토광묘단계에는 모 두 굴지장을 하였으며 토기와 석기류 등을 함께 부장한 것이 특징적이다

.

또한 합장묘와 단인장식의 두향이 서로 다른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

두 번째는 積石型무덤이다

.

이 유형은 소규모의 개별묘역을 가지는 단독묘 형태의 적석묘단계와 대형의 총계를 가지며 내부에 다수의 묘실의 존재하는 적석총단계로 구분된다

.

먼저 적석묘는 땅을 파서 석관 혹은 토광형태의 묘실을 조성한 후 그 상부에 적석을 하였다

.

묘실의 축조 방법 및 재료에 따라 토광식과 석관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

묘실이 토광식으로 된 것은 우하량

16

지점

1

단계

1

(2·7·8

)

에서 발견되었다

.

묘실 상부에 깬돌을 깔아 개별묘역을 표시하였고 그 위로 다시 적석하였

.

장법은 모두

1

인 앙신직지장이며 두향은 동남쪽을 향한다

.

묘실이 석관식인 것은 백음장한과 남대자유 적

,

우하량유적

2

지점

4

호총 하층의 筒形器圈墓 등에서 확인되었으며 적석시설의 형태에 따라 다시

3

가지 형 태로 구분된다

.

첫째

,

백음장한

14·15·18

호는 묘실 상부에 소규모로 적석을 하였다

.

묘실은

4

벽 모두 판 석을 세웠고 내부에 흙을 채운 후 그 위로 적석하였다

.

모두

1

인 앙신직지장이며 두향은 북쪽을 향한다

. 15

호에서 삼족기

(

陶鼎

) 1

점이 발견된 외에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

둘째

,

우하량

2

지점

4

호총 하층

4~9

호는 무덤 상부에 깬돌을 쌓아서 묘역을 표시하고 다시 그 외곽으로 筒形器를 둘러 배치하였다

.

대부분 석재를 토 광벽에 기대어 석관을 만들었고

1

인 앙신직지장 위주이며 두향은 모두 동남쪽을 향한다

.

내부에서는 뚜껑이 딸린 雙耳彩陶罐 및 소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

셋째

,

남대자

7·11·12

호는 석관 상부에 적석을 하고 다시 그 외곽으로 두터운 석재들을 돌려 쌓아 원형석권을 둔 형식이다

.

사용된 석재들은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것 이며

,

자리한 곳은 유적 내에서 가장 지세가 높다

.

내부에는 옥결과 석착

,

패각 등이 부장되었으며

1

인 앙신 직지장이고 두향은 북쪽을 향한다

.

이상에서 살펴본 적석묘단계의 무덤들은 앙신직지장 위주로

,

전단계의 無 積石型 무덤들이 굴지장 위주인 것과 비교되며

,

두향은 북쪽과 동남쪽으로 대별된다

.

적석총단계의 무덤들은 하나의 총내부에 여러 개의 묘실이 모여 있는 집체묘적 성격을 가진다

.

이 단계의 무덤들은 상부 적석시설의 층수에 따라 단층식과 다층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

먼저 단층식은 우하량

5

지점 중층과

16

지점

2

단계군

(

이하 우

16-2

로 표기

)

에서 확인되었다

.

총의 구조를 보면 상부에는 주먹크기로 균일 한 석재들을 쌓았으며 그 하부에는 다수의 석관이 조성되었다

.

또한 상부의 적석층 사이에는 筒形器片이 산 포해 있어 본래 총외곽에 통형기를 둘러 세웠음을 알 수 있다

.

우하량

5

지점 중층

(

이하 우

5

중으로 표기

)

에는

2

기의 단층식 적석총이 존재한다

. 1

호총은

3

기의 석관식 묘실과 함께 제사갱

8

개가 찾아졌다

.

장식은 모두

1

인 앙신직지장이며

,

두향은 동남

(5

)

과 서남

(6·7

)

을 향한다

.

이중

7

호는 묘광 규모가

240×135×45cm

정도로 대형무덤에 속하며

,

무덤내에서 옥탁

1

점이 출토되었다

.

동류 무덤인

5·6

호를 비롯한 이전단계의 무덤들이 모두 석재를 세워서 석관을 조성한데 비하여

, 7

호는 석관을 규칙적으로 쌓아서 조성한 특징을 보인 다

.

16-2

단계 적석총의 기본 구조는 우

5

-1

호총과 유사하며

,

장식과 두향 역시 일치한다

.

16-2

단계

1

호 묘실에서 三聯璧과 雙聯璧 각

1

,

玉璧

1

,

玉環

2

점 등이 발견되었다

.

이 단계의 무덤들에서부터 묘실에 옥기만 부장되는 특징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

다층식은 우하량

2

지점

1·2

호총을 대표로 하며 부신 호두구

,

22) 오한기 초모산유적23) 등에서도 발견되었

(18)

<그림 10> 홍산문화의 무저통형기 각종 다

.

묘실은 모두 석관식이며

,

지하에 깊고 넓은 토광을 파고 규칙적으로 석재를 쌓아 만든 지하무덤과 얕은 토광을 파고 간단하게 석관을 설치한 지상무덤이 있다

.

지하식의 경우 무덤의 규모가 대형이며 정교하게 가 공된 옥기위주의 부장 및 중심묘적 성격을 가진다

.

지상식은 중심대묘의 남쪽 혹은 그 주변부에 순차적으로 들어선 부속적 무덤들로 무덤의 규모 및 부장옥기 등 방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

이상에서 살펴본 각 무덤들은 형식별로 유행한 시기에 차이가 있다

.

無積石型의 토광묘는 홍산 전기에만 확인되며 중기이후의 유적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

積石型 중 적석묘단계의 무덤들은 중기부터 홍산문 화 분포권 전체에서 유행을 하며 후기에는 최종적으로 단

·

·

총이 결합된 적석총유적군으로 발전하게 된 다

(

제Ⅳ장의

<

3>

참조

).

2. 구조와 특징

우하량유적의 壇

·

·

塚 조합은 홍산 후기 적석총유적의 중요한 특징이다

.

현재까지 우하량

16

개 지점에 서 시기를 달리하는

20

여기 이상의 적석총이 발견되었고 이외에 여신묘와 함께 제의관련시설도 확인되었다

.

이러한 후기단계의 유적은 대릉하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데 특히 우하량유적 주변 반경

50km

내에서 는 주거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 홍산문화 전체의 성지적 성격으로 해석된다

.

24)

우하량의 적석총은 모두 명확한 형태의 묘역을 가지며 그 邊界에는

1

중 혹은 다중의 석벽을 쌓는 다

.

그리고 석벽 열을 따라 無底筒形器를

1

렬로 배 열한 공통성을 보인다

.

적석총내부에 존재하는 석 관들은 하층에서 상층으로 갈수록 규모가 작아지 고 부장품도 적으며 제작방법이 간단하거나

2

차장 이 증가하는 등의 특징을 보인다

.

무덤의 발전단계

에 따라 장법과 두향도 함께 변하며 동일단계 같은 형식의 무덤들은 장법과 두향이 같다

.

총내 중심부에는 대형의 무덤을 안치하며 중

·

소형무덤들은 주변부 혹은 지세가 낮은 곳에 배치되었다

.

적석총 상부구조의 변화과정을 보면 평면형태가 원형에서 방형으로

,

소형에서 대형

,

彩陶筒形器를 무덤 외 곽에 둘러놓은 형태에서 석재를 쌓아 올리는 석벽형태로 변화 된다

.

25)총내부의 석관묘 역시 토광벽에 석재 를 둘러 세우는 간단한 구조에서 다듬어진 석재를 규칙적으로 쌓아올리는 형태로 변화한다

.

대형석관묘들은 대부분 묘광을 깊이 파고 지하에 조성되는데 중심묘의 경우 묘광벽면으로 계단식의 대를 설치하였다

.

바닥은

22) 方殿春·劉曉鴻, 「遼寧阜新縣胡头溝红山文化積石塚的再一次調査與發掘」, 󰡔北方文物󰡕 2, 2005; 崔岩勤, 「胡頭溝红山文化墓 葬再探」, 󰡔赤峰學院學報󰡕 5, 2006.

23) 邵國田, 「草帽山祭祀遺址群」, 󰡔敖漢文物精華󰡕, 內蒙古文化出版, 2004;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內夢古工作隊·內夢古自 治區敖漢旗博物館, 「內夢古敖漢旗蛙河, 老虎山河流域新石器時代遺址調査簡報」, 󰡔考古󰡕 3, 2005.

24) 田廣林, 「紅山文化··與中國古代宗廟·陵寢的起源」, 󰡔史學集刊󰡕 2, 2004.

25) 華玉冰·楊榮昌, 앞의 책, 1998, 37.

(19)

맨바닥에서 석판을 까는 형태로 발전되며

,

부장품 역시 소량에서 대량으로 토기

·

석기 혹은 석기와 옥기가 공반되던 것이

唯玉爲葬

의 특징으로 변화된다

.

적석총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중심묘의 존재와 독립된 제단의 등장이다

.

특히 중심묘 바로 옆 혹은 상층에 존재하는 석축구조물들은 아직까지 그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의문을 더한다

.

용도미상의 석 축구조물이 확인된 유적은 우

16-4

호 묘실

,

5-1

호총

,

3-7

호 묘실 등으로 모두 총의 중심부에 위치한 공통 점이 있다

.

16

의 석축구조물

(

石井

)

은 중심묘인

4

호 상부의 土臺위에 자리한다

.

5

의 석축구조물은 중심묘 인

1

호의 동쪽에 위치하며

,

기본 구조는 우

16-

중심묘의 石井과 유사하다

(

그림

5·6

참조

).

3

의 석축구조물

(1

호묘실

,

그림

4

참조

)

은 무덤으로 보고되었으나 내부에서 부장품은 물론 인골 등이 발견되지 않아 그 성격 에 대해 논란이 있다

.

역시 총 중심부에 자리하며 평면 형태는 방형이다

.

중심묘 인근에 위치한 석축구조물 들은 아직까지 그 성격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 바가 없다

.

다만 우

3

의 구조물은 석관으로 만든 후에 사람을 매장하지 못하였거나 매장을 이미 옮긴 경우

,

무덤의 실용적 기능을 잃어버린 것 등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 다26)

.

필자는 이상의 구조물들이 무덤이 아니며 중심묘에 부속되는 시설로서 제의와 연관되었을 것이라 생 각한다

. 3

기의 구조물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모두 총내 정 중앙부에 위치하며 그 주변으로 중심묘가 자리한 다는 것이다

.

또한 인골 및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덤으로 볼 수는 없다

.

만약 도굴의 가능 성을 생각한다면

,

바로 옆에 위치한

3

기의 중심묘에서는 모두 양질의 옥기들이 발견되고 있어 이해하기가 어 렵다

.

그 성격은 아마도 이전 단계의 단층식 적석총내에서 발견되는 제사갱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

5

중층의 단층식에서는 모두

8

개의 제사갱이 확인되었다

.

이중 제사갱

1

호는 바닥에 크기가 균일한 석재 들이 퇴적되어 있는데 그 상부에는 제사용기인 雙耳彩陶罐

1

점이 발견되었다

.

내부에서는 흑색토기편

(

黑陶 盂

) 1

점이 발견되어 본래는 雙耳彩陶罐을 덮고 있던 것이 깨져서 내부로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

또한 제 사갱

5

호에서는 표토층상부로 완형의

자문 筒形罐

1

점을 엎어 놓은 것이 확인되어 당시의 제의 혹은 장속 등의 한 부분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

이상의 제사갱들은 모두 총의 범위

(

경계

)

를 나타내는 적석시설 하부에 서 묘실과 함께 발견되었기에 총내 하부 구조물로 볼 수 있다

.

지금까지 적석총의 하부구조에서 묘실외의 성 격을 가진 구조물이 확인된 것은 단층식단계의 제사갱과 다층식단계의 석축구조물밖에 없으며 양자는 발전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

묘실은 묘주인의 보다 편안한 안락을 위하여 점차 땅속으로 깊이 들어가며

,

제의시설은 점차 지상으로 올라와 하늘과 보다 가까워지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

우하량

2

지점의 원형 제단 은

3

층의 계단식 구조물로서 지점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

여신을 모신 신전 역시 유적군내 가장 높은 봉오리에 위치해 하늘과 소통하길 기원하는 듯하다

.

홍산문화의 제의관련 유적은 동산취유적과 우

1

의 여신묘

,

2

와 우

5

의 각 제단유구 및 우

13

등이 대표적 이다

.

동산취유적은 각각 시기를 달리하는 제단 위주의 제의관련유적이다

.

유적내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되 는 원형제단 아래에서 부장품이 없는 인골이 확인되었는데 유사한 성격의 인골들이 우

2

의 원형제단

,

5

상층 의 방형제단

,

13

등에서도 검출되었다

.

27)

26) 魏凡, 앞의 논문, 1994, 13.

27) 이하 홍산문화 제의관련 유적의 특징에 관한 내용은 오대양, 「요서지역 적석총문화의 기원과 형성과정」, 󰡔동북아역사논총󰡕

(20)

먼저 동산취 유적의 원형제단에서는 약

80cm

정도 깊이의 붉은색 燒土面상에서 인골 한구가 발견되었다

.

인골은 두개골과 다리뼈 양쪽이 두 개의 석판위에서 발견되었는데

,

명확한 묘광이 없었다

.

인골의 가슴과 복 부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의 토기편이 덮여 있었고 복원된

1

점은 흑색의 鉢이었다

.

2-

제단에서는 상부의 표 층 적석내부에서 부장품 없이 인골

3

구가 발견되었다

.

또한 우

5

의 제단에서는 세골장된 인골

4

구가 검출되 었다

.

역시 부장품은 확인되지 않았다

.

우하량

13

지점에는 지름이

100m

가량 되는 대형의 건축물이 발견되 었다

.

중심부인 항토구릉의 지름만

60m

가량 되는데

,

그 상층부에서 인골이 확인되었다

.

역시 부장품과 뚜렷 한 묘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 1

지점의 여신묘는

13

지점의 대형건축물과 직선상으로 마주본다

.

여신묘 야 말로 제의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제사

·

종교의례의 대표적 장소이다

.

여신묘는 주실과 부실로 나뉘며 내부에서는 인물소상과 동물조각상 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

인물 및 동물소상들은 여신묘 외에 기타 제단 유적에서도 발견되는데

,

동산취와 여신묘에서는 실제 사람크기 및

3

배 이상이 되는 것들도 확인되고 있다

.

이외에 임신한 여성의 특징을 부각시킨 조각상은 대부분 목이 없는 상태로 출토되었고

,

초모산

2

지점의 두 개의 방형제단사이에서는 남자의 얼굴을 묘사한 석재조각상이 머리부분만 발견되기도 하였다

.

28)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단 및 제의 관련시설에서 확인되는 공통적인 특징은 無葬具

,

無副葬品의 인골 과 인물 및 동물소조상 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

특히 인골의 경우 인근에 묻혀있는 적석총의 주인들과는 다 르게 매우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다

.

적석총의 주인들을 당시 사회의 특수한 신분

,

높은 계층의 사람들로 해 석한다면

,

이처럼 제단시설하부에 간단하게 매장된 인골들은 아마도 당시 사회의 제의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즉 당시사회는 이미 적석총과 같이 거대한 무덤에 진귀한 옥장식품과 함께 부장되는 계층이 존재 하는 반면 제의행사에 희생되는 하급계층 역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

Ⅳ. 적석총의 발전과정 및 축조연대

홍산문화의 단

·

·

총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

특징적인 점은 적석총단계에서는 주 로 옥기만 출토되며 토기와 석기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

또한 적석총 주변에서는 대부분 채도의 無底筒形器 가 발견되는데 이러한 양상은 적석총의 발전단계에 따라 기종과 문양변화 등 조금씩 차이가 있다

.

홍산문화 의 분기와 사회발전단계를 검토함에 있어 토기분석을 통한 상대편년 연구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관련 연구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

楊虎는 홍산문화를 당시 유행하던 토기의 특징에 따라 전

·

·

후기의

3

시기로 구분하였다

.

29) 전기는 흥 륭와유적 홍산문화 주거지

133

호를 대표로 하며 동체부에 刺紋과 網格狀

,

刻紋 등이

,

저부에 席紋 등이 시문

45, 2014, 264~265쪽의 내용을 전재함. 28) 邵國田, 앞의 책, 2004, 27. 29) 楊虎, 앞의 논문, 1994, 37~40.

(21)

<표 2> 홍산문화 분기연구 현황

저자 시기 유적 비고

양 호 1989

전 흥륭와F133

중 서수천, 주지산, 홍산후, 삼도만자, 나사태 후 동산취, 우하량, 사가자

화옥빙 1998

전 백음장한, 남대자

중 우16M2, 호M1, 우5Z1M1, 우2Z1M21, 우3M7, 우16M1

후 우2Z1M4, 우2Z1M11, 우2Z1M14, 우2Z1M15, 우2Z1M7, 우3M3, 우3M9, 호M3

려학명 2000

전 백음장한, 남대자 중 우1 우2Z4(하), 우5(중)

후 우2 우2Z4(상), 우5(상), 우2Z1·2, 우3, 우16

란봉실 2004

전 우5(중), 우2Z4(하)

중 우2Z3, 우2Z4(중), 호두구유적 후 우2Z1·2, 우2Z4(상)

장성덕 2005

전 지주산, 서수천

중 삼도만자, 성자산(하), 서수천, 우2Z4(하), 우5(하·중) 후 성자산(중), 우5(상), 우2Z4(상), 호두구, 동산취, 여신묘

웅증룡 2005

1 백1단계 무덤없음

2 1 백2단계, 남M1, 백M22 2 백3단계, 백M14, 남M7

3 1 우5(중), 우2Z4(하)

2 우2Z4(상), 우5(상), 우2Z1·2, 우3

색수분 2007

1 흥륭와F133 B.C.4700~4500년

2 백1단계 B.C.4500~4000년

3 삼도만자, 우1단계 우5(하) B.C.4000~3500년

4 동산취

호두구

백2·우2단계 우2Z4(하), 5(중), 16(하)

B.C.3500~3000년 백3·우3단계 우1, 우2Z1·2, 우2Z4(상), 우3,

우5(상), 우16(중), 우13

진국경 2008

1 백1단계, 흥륭와F133, 남M13 2 백2단계, 남대자

3 백3단계, 우1~4지점, 우5(하), 동산취, 성자산 1기, 호두구 4 우5(중·상), 성자산2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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