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가 우람한 남자의 기상을 지니고 있다면 남해는 곱게 단장하고 그리운 사람을 기 다리는 조선의 처녀처럼 조용하면서도 아늑하다. 남해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이는 만 덕산 자락에 다산학茶山學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길 이 “바다가 보이는 산길이 나는 좋아”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바다가 보이 는 산길이다. 야생차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진 그 길을 셀 수도 없이 많은 나날을 걸어 다 닌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백련산이라고도 부르는 만덕산萬德山은 강진읍 임천리, 덕남리와 도암면 만덕리, 덕서 리 사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08m다.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도암면 만덕리 귤동 우 리 옛 길 걷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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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강진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차 향기 그윽한 남해의 한자락
마을의 다산초당에서 다산 정약용은 17년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였다.
만덕산 자락의 귤동마을
만덕리는 본래 강진군 보암면의 일부였는데 1914 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산리, 고전리, 마점리와 합쳐지면서 만덕산의 이름을 딴 새로운 지명을 갖
뒤의 차나무가 많은 산으로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하였던 곳이다.
「산림경제」를 보면 “터를 가림에 있어서는 반 드시 그 풍기風氣(지세와 기운)가 모이고, 전면과 배 후가 안온하게 생긴 곳을 가려서 영구한 계획을 삼 아야 할 것이다”라고 실려 있다. 다산이 의도한 것 은 아니고 불가항력적으로 머물러 살았던 곳인데 도 이곳의 지형은 전통풍수가 찾고자 한 땅의 전형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강진의 만덕산을 두고 고려시대의 승려 혜 일慧一은 “앞 봉우리는 돌창고 같고, 뒷 봉우리는 연 꽃 같았다”라고 하였다. 다산초당의 천일각天一閣에 서 바라보이는 구십포九十浦에 대하여 「신증동국여 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강진현 서쪽의 물 과 합쳐 구십포가 된다. 탐라耽羅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을 바칠 때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眈津이라 하였다.” 그러나 탐진강은 영암군 금 정면 세류리 궁성산의 북동계곡에서 발원하여 강 진읍에서 남해로 들어간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던가? 역사 속 국사범들 의 유배지였던 곳,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빼어난 사 람들이 절망과 질곡의 시절을 보낸 장소들이 현대 에 접어들면서 역사유적지와 문화관광지로, 또는 말년을 지낼 거주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던 강진 의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이 남긴 「다신계안茶信契案」 을 보자.
“나는 신유년(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하여
다산초당
동문 밖의 주막집에 우접寓接하였다. 을축년 (1805년)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기식 하였고, 병인년(1806년) 가을에는 학래의 집 에 이사 가 살았다. 무진년(1808년) 봄에야 다 산茶山에서 살았으니 통계를 내보면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것이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0년이었다.”
유배지의 오두막집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은 그는 그 집에서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 을 살았다.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을 조금씩 시 작한 그는 이곳에서 「상례사전」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 하나 말 걸 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하기를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 나는 이곳에서 「사상례士喪禮」 3편과 「상복喪服」 1편 및 그 주석註釋을 꺼내다가 정밀 하게 연구하고 구극까지 탐색하며 침식을 잊었다.”
서문에 쓴 글이다.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에 있는 보은산의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주로 「주역」 공부에 전념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속으로 사색하는 것, 붓과 먹으 로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거나 손가락을 비비고 배를 문지르던 것 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인들 「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소.”
그 다음해 가을에는 강진 시절 그의 수제자가 된 이청李晴(자는 학래鶴來)의 집에서 기 거했다. 다산이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생활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해남 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 이었다. 정약용이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가 윤씨였는데, 귤동마을 해 남 윤씨들은 정약용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 되었다. 유배생활이 몇 해 지나면서 삼엄 우 리 옛 길 걷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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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의 천일각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세 형제가 있어서 정약 용을 다산초당으로 모셔갔던 것이다.
다산초당으로 온 후 정약용은 비로소 마음을 놓 고 사색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연구 와 저술에 몰두할 여건을 갖게 되었다. 다산초당에 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산책길과 귤동마을 앞 구강 포 바다, 스스로 가꾼 초당의 조촐한 정원에서 유 배객의 울분과 초조함을 달랠 수 있었다. 또한, 유 배 초기에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해남 연동리의 외 가에서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윤선도에서 윤두서에 이르는 외가의 책을 모두 가 져다 볼 수 있었던 것은 다산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뒷날 이곳을 찾았던 곽재구 시인의 시 한 편을 보자.
아흐레 강진강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 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 …
어느덧 귤동 삼거리 주막에 이르면
얼굴 탄 주모는 생굴 안주와 막걸리를 내오고 그래 한잔 들게나 다산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바라본
벽 위에 빛 바랜 지명수배자 전단 하나 가까이 보면 낯익은 얼굴 몇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하나 더듬어가는데 누군가가 거기 맨 나중에
덧붙여 적은 뜨거운 인적사항 하나
정다산丁茶山1762년 경기 광주산 깡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님 전직 암행어사 목민관
기민시 애절양 등의 애민愛民을 빙자한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자생적 공산주의자 및 천주학 수괴
만덕산 자락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에서 천일각 을 지나 그윽하게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보며 아름 답기 이를 데 없는 산길을 걸어가면 동백나무 숲에 이르고 그곳에 고려 때 백련결사로 이름을 떨쳤던 백련사에 이른다.
정약용이 다산초당 시절 각별하게 지냈던 혜장惠藏 선사가 백련사에 주석駐錫하고 있었던 것이다. 혜장 선사(1772~1811)는 해남 대둔사 승려였다. 30세 쯤 되었던 그는 두륜회(두륜산 대둔사의 불교학 술대회)를 주도할 만큼 대단한 학승으로 백련사 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읍내 사의재에 살 던 1805년 봄에 서로 알게 되어 그후 깊이 교류하 였다. 정약용이 한때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역을 공 부하고 아들을 데려다 공부시켰던 것도 혜장선사
백련사
가 주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혜장은 다산보다 나이는 어리고 승려였지만, 유 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재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1811년에 혜장선사가 죽자 비명을 쓰 면서 “논어 또는 율려律呂,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었다” 라고 하였다.
다산초당에서 저술에 몰두하다
정약용이 사의재에서 지내던 때에는 혼자 책을 읽고 쓰면서 읍내 아전의 아이들이나 가 끔 가르쳤을 뿐 터놓고 대화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정약용은 혜장과의 만남을 통해 막 혔던 숨통을 틔울 수 있었고 그와 토론하는 가운데 학문적 자극을 받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혜장을 통해 차를 알게 되었으며 초의草衣선사 의순意恂과 교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812년의 다산은 강진의 대부호이자,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윤광택尹光宅 의 손자인 윤창모尹昌模에게 외동딸을 시집보냈다. 그 무렵 고향에 있는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다음과 같다.
“폐족의 자제로서 학문마저 게을리한다면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 과거를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참으로 독서할 기회를 얻었다 할 것이다.”
“너희들이 만일 독서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가 쓸데없이 될 테고, 내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다만 사헌부의 탄핵문과 재판기록만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또 ‘시詩는 나라를 걱정해야’라는 글에서는 “임금(오늘날은 민중으로 해석함)을 사랑 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 하고 세속을 분개하지 않는 내용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 것을
‘밉다’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내용의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 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자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 은 시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 연연하면 그 시를 시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정약용 이 아들들에게 유배지에서 피로 써 보낸 듯한 편지는 바로 그 자신의 그날 그날의 삶의 자세이자 다짐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편지 중에 오늘날의 상황과 그때의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이 ‘서울에서 우 리 옛 길 걷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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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명이나 풍속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 이나 먼 변두리 마을에서 살더라도 성인聖人이나 현 인賢人이 되는 데 방해받을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 라는 그렇지 않아서 서울의 문 밖에 몇 십리만 떨어 져도 태고처럼 원시사회가 되어 있으니, 하물며 멀 고 먼 외딴 집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무릇 사대부 집안의 법도는 벼슬길이 한창 위로 올라 권세를 날릴 때에는 반드시 산비탈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處士로서 본색을 잃지 말아야 한 다. 그러나 만약 벼슬길이 끊어져 버린다면 당연히 서울의 번화가에 의탁해 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넓 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요즘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 에 숨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만 사람 이 살 곳은 오로지 서울의 십리 안팎뿐이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 갈 수 없다면 잠시 동안 서울 근교에서 살면서 과 일과 채소를 심으며 삶을 유지하다가 자금이 점점 불어나면 서둘러 도시의 복판으로 들어간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서울 강남으로의 인구집중 현상과 그다 지 궤를 달리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 살아야 정치·경제·문화의 혜택을 고루 받을 수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글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 기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이 땅과 그 병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여김공후」에서는 “살아서 고 향으로 돌아가느냐의 여부는 오직 나 한 사람의 기 쁨과 슬픔일 뿐이지만, 지금 만백성이 다 죽게 되
서 그 당시 백성들이 직면했던 실상을 ‘애절양 ’ 같은 시로 남겼으며, 그곳에서 유배가 풀려 고향인 능내리로 돌아가기까지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긴 것이다.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그가 가르쳤던 18명 의 제자들이 떠나간 스승을 흠모하고 정을 유지하 기 위해 만든 계가 다신계다. 그들은 청명이나 한 식날 스승이 거처하던 초당에 모여 운을 내어 시를 지어서 다산에게 보냈다. 그날 고깃값 한 냥은 곗 돈에서 내고, 양식 한 되씩은 각자 가져오기로 약 정이 되었다. 그 뒤 곡우절에 연한 찻잎을 따서 겻 불에 말려 한 근을 만들고, 입하立夏에는 만다를 따 서 떡 두 근을 만들어 그들이 지은 시찰과 함께 스 승에게 보냈다.
다산이 별세할 때까지 이어진 제자들의 스승 사 랑에 다산 또한 가끔씩 편지를 보내어 그곳의 경향 을 물었다. ‘동암東菴의 지붕은 잘 이었는지, 뜰에 심 었던 홍도는 잘 살고 있는지, 차는 철을 놓치지 않 고 잘 따고 있는지’ 하고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몸 은 고향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다산초당 일대를 그 리워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스승과 제자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머물고 있는 다산초당은 다산이 고난에 찬 한 시절을 보냈던 곳 이다. 그런 연유로 다산의 사상이나 그 정신을 닮 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아가 다산이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