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음악학회, 통권 24호
2019 한국대중음악학회 제 25회 정기학술대회:
기획 섹션
“음악이 사회를 만나는 하나의 방식:
정태춘, 박은옥의 음악적 실천” 라운드테이블
사회: 김창남 토론: 정태춘, 이영미, 서정민갑, 김준기
김창남
:
이름이 라운드테이블인데 테이블이 일자로 되어있네요.
하지 만 객석에 계신 분들과 함께 마주 본다는 의미에서 라운드 테 이블로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패널 소개를 드리겠 습니다.
먼저,
정태춘,
박은옥 음악의 문학적 세계를 비판적으 로, ‘
물,
그리고 읊조림’
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대담해주실 이영 미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박은옥,
정태춘 음악의 대중음악 사적인 여러 활동과 작품까지 평가해주실 대중음악의견가 서 정민갑 선생님이십니다.
정태춘,
박은옥40
주년 프로젝트 총 감독을 맡고 계시고,
오늘 정태춘 선생님의 사회적 실천 – 특 히 대추리 투쟁과 관련된 말씀을 해주실 김준기 선생님이십니 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정태춘 선생님 모셨습니다.
박은옥 선생님은 건강상에 약간의 문제가 있으셔서 아쉽게도 오늘 함 께 자리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일단,
객석에서 세 분의 발표를 들으시면서 어떤 감상을 느끼셨는지 간단하게 말을 열어주 시죠
.
정태춘
:
제 노래가 제 생이었다고도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 노래는 제 삶의 아주 작은 일부였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즈음에,
이런 귀한 학회의 프로그램 에 저희 노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뤄주셔서 감사하고요.
또 쑥스럽기도 했습니다.
김창남
:
혹시 들으시면서,
저건 좀 아닌데,
저건 오해인데,
이렇게 생각 하신 부분은 없으셨나요?
정태춘
:
하나 있었어요.
정태춘,
박은옥을 듀엣이라고 이야기하신 내 용에 관해서 우리 부부는 전혀 인정 하지 않습니다.
특히 박은 옥씨는“
나는 솔로가수인데 왜 듀엣이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조금 날카롭게 말씀을 하실 것 같아요.
다른 건 제가 얘 기할 바 없고요.
김창남
:
발표자 분들께서는,
혹시 정태춘 선생님께 궁금했던 점이나 확인하고 싶으셨던 점이 있으셨나요?
서정민갑
:
제가 책에 박은옥 선생님의 음반 리뷰를 쓰면서 더 이상 음반 이 나오지 않는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적었거든요.
박은옥 선 생님의 또 다른 음반에 대한 계획이나 가능성이 있는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정태춘
:
음악은 사실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창작은10
여 년 전에 끝이 났고요.
그리고 창작은 끝이 났는데 내 안에서는 계속 내 이야기가 흘러나오니까,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리고 이번에40
주년이 되어서 시장으로 다 시 나왔는데 이제 곧 돌아갑니다.
인터뷰도 이미 다 정리를 했 고요.
제 인생에서 인터뷰는 다 끝났다고 생각할 정도로새 앨범을 낼 계획은 제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
서정민갑:
혹시 박은옥 선생님도 계획이 없으신 상황일까요?
정태춘
:
박은옥 씨는 저와 생각이 달라서“
내가 곡을 쓰고 새 노래를 가지고 활동을 하겠다”
라고 한다면 한편 환영할지 모르지만,
그게 또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고,
새 노래들에 대한 피드백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글쎄요..
김창남
:
그래도 여전히 내 안에서 할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씀하 시잖아요.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어떤 게 있을까 요?
정태춘
:
텍스트가 아니고 사진으로 표현을 해볼까 했어요.
한3
년 사진 을 열심히 찍었는데 나다운 사진이 나왔어요.
이상한 것,
아이 러니한 것,
칙칙한 것 등등..
이런 사진들이 나왔어요.
이걸 가지고 사진전까지 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 였어요. ‘
파렴치한 산업 시스템,
나는 여기서 나가고 싶다.
그 래서 비상구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비상구가 막혀있더라.’
그 런데 사진으로서의 설득력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요.
사진 다 음에는 저 혼자 그냥 시간을 보내기로 했어요.
이렇게 조용하 게 소진되는 것도 최고의 노년이라고 생각하면서 소진이라는 말을 제 머릿속에 담았죠.
그러고는 가죽공예를 하면서 또 몇 년을 보냈고요.
그러던 시기에 한문을 만나면서 한시 공부를 하게 됐지요.
그리고 한시나 한글로 짧은 이야기들을 붓으로 쓰면서 새로운 이야기 통로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여 러 방식으로 나의 말을 해 오고 있어서 결국 제 속에서 흘러넘 치는 이야기들을 멈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좋 은 음악 을 들었을 때,
어떤 음악에서 특별한 메시지를 접했을 때.
아-
나도 노래를 하고 싶다.
나하고 스타일이 전혀 다르지만 신나는 리듬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 수도 있는데
,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도 있을 텐데,
나도 저런 음악을 만들어볼까 하는 유혹이나 자극은 늘 받고 생각을 하 기는 하지요.
그렇지만 어떤 생각들을 노래로 만들어서 편곡 을 하고 앨범을 만들고 그걸 가지고 마케팅을 하고,
이러한 과정을 소화해낼 수 있을 만큼 음악적인 열정이 남아 있지 않 다고 생각합니다.
김창남
:
얼마 전에 제 컴퓨터를 뒤적거리다가 한10
년쯤 전에 정태춘 선생님이 엄청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으실 때 저를 찍어주신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역시 사진보다는 음악을 하셔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웃음)
이영미
:
노래를 그만두시고 다른 것을 하시는 게 전부 조형적인 것이 거든요.
서예,
가죽공예,
사진과 같은 것들이요.
시각을 통해 서 표현을 해보니 오래간 음악을 그만두고 나서 나에게 노래 를 할 때는 알 수 없었던 어떤 구석이 있었다고 깨닫거나 발견 한 게 있다면 그게 뭐예요?
조형적인 일을 하면서 내 안에 있 었던 여러 가지 역량들 중에 새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요?
정태춘: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실 음악에서도 시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
근래에 컴퓨터를 통해서 편곡을 많이 했습니 다.
그런데 컴퓨터에 편곡하는 툴이 사용자에게 시각적인 것 을 보여줘요.
수십 개의 트랙이 보이고,
시간대가 적혀있습니 다.
그러면 어떤 트랙의 어떤 악기를 언제쯤 배치해서 전체 음악을 만들어낼지 이게 시각적으로 보이는 작업으로 편곡을 하는데,
그 작업을 하면서 음악이 또 달리 시각적으로 느껴지 기도 했어요.
그 조형이라는 것이,
우리가 듣는 게 두 귀로 들 으면서 그 소리 속에도 질감과 색깔이 있고 원근감이 있고 진한 것과 흐린 것들을 소리로도 느낄 수 있듯이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붓글>
을 쓰면서도 늘 고민을 하지요.
글씨를,
무슨 이 야기를 쓸 것인가?
그렇게 이야기는 정리가 됐는데 이것을 어 떻게 평면 위에 조형적으로 풀어낼 것인가..
서예나 시각적 조 형예술에 대해서 공부한 바가 너무 없으니까 참 답답하기는 한데,
고민 을 하지요.
또,
내용만이 아니고,
조형이 주는 어떤 울림이나 힘 같은 것도 고민하게 되죠.
음악을 했던 사람으로 서도 결국은 그 조형과 메시지 풀어내기의 연장선 안에 들어 있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창남
:
좀 전에 이영미 선생님께서 정태춘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이야 기하면서‘
물’
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처음 생각해보고 들어보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절 실하고 의미 있는 키워드를 잡아냈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태 춘 선생님께서는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정태춘:
너무 적절한 키워드였죠.
저도2012
년도에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라는 앨범을 만들면서
,
한두 달여 만에7~8
여 곡을 쓰게 됐는데, ‘
물’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니까(
과거)
에도 물 이야기들이 많았고.
저한테 물 은 특별하지요.
유년기에 저는 갯벌과 들판이 있는 동네에 살 았는데 갯벌을 지나가다 보면 큰 도랑이 있습니다.
지금은 평 택호가 되었지만,
그 도랑으로 바닷물이 꽉 차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면 엄청난 흙으로 된 단층이 생깁니다.
바닷물이 쫙 빠져나가면 갯벌이 무너져요.
북극의 빙산이 무너지듯이‘
콰 광’
하고 무너집니다.
그 물 건너편에‘
평택군 안중면’
이라는 곳 이 있었습니다.
우린‘
팽성면’
이었는데.
이 넓지도 않은 물을사이에 두고 우리는 그쪽 동네를
‘
물 건너’
라고 불렀습니다.
거 기엔 다리도 하나 없었어요.
그래서 물 건너에서 시집온 사람 은 다른 세상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정도로 물 은 우리에게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그런 바다밖에 모르 던 사람이 새벽 안개 가득한 북한강을 지나가면서 느낀 정취 는 정말 특별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북한강에서>
와 같은 노 래가 나왔고.
그런가 하면 시골 마을의 논 경지 정리를 하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들판에 가득했던 황사가 사라지기 시작하 면서 어디선가 용수로라고 하는 물길로 물이 콸콸 들어옵니 다.
그 물이 온 들판에 번져나가요.
그 물을 받아서 못자리를 준비하죠.
거기에 손이나 발을 대면 차갑기 이를 데 없고.
그 런데 우리는 그 물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요.
그런 물이 나에게 는 굉장히 선동적이었어요.
뭔가 은밀하게 준비하다가 흘러오 는 차가운 물.
이런 물에 관한 기억들이 있어요.
그리고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만 단절과 그 너머에 관한,
물 너머에 관한 상상 – 이런 것들이 늘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2012
년도 에 앨범을 만들 때 물이 그렇게 많이 등장했던 것은 당시에 제 정황이‘
떠나고 싶다,
여기가 아니라 저 건너’
와 같은 것들 이 많았던 시기라서 특별히 물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오 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영미
: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2010
년대 쯤 마지막 음반을 내면서 물 이 굉장히 중요한 심상이라고 생각하신 거잖아요.
저도 그 음 반 나올 때쯤에서야 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꼈거든요.
요 번에 글을 쓰면서 새로 안 것은 「아,
대한민국..
」에서 물이 사 라졌다는 것을 안 거였어요.
어머,
세상에,
물이 없네, <
황토강
>
딱 하나밖에 없네.
굉장히 중요한 심상이 상실됐다는 걸안 게 저에게는 큰 소득인데
,
혹시 그걸 생각하고 적으신 건가 요?
정태춘
:
아니요,
아니요,
그런 적은 없고.
그런데 황토강이라는 물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은 했어요.
황토강은 말씀하신 것과 전혀 다른 의미였어요.
황토강은 세상을 쓸어버리고 내려가는 물이 었고 저에게 물은 대개 단절과 그 너머에 관한 상상이란 이미 지였지요.
김창남
:
이영미씨 글에도 잠깐 나옵니다만,
저도 이걸 읽고 나서 제가 좋아했던 정태춘 선생님의<
서해 에서>
를 다시 한 번 떠올렸 어요.
그것이 갖고 있는 유토피아적 상상이 누구한테 보여진 정경을 그려준 것이라기보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지 않기 때 문에 더욱 그립고 아름다운 것으로 쓰여진 바다가 떠올랐어 요.
물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물 너머의 유토피아 에 관한 상상이고,
그러한 자아가 눈앞에 싸우는 흙탕물을 통 해 싸움을 직시하는 장으로 변한 면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이영미
:
그런 것 같아요.
그걸 상상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걸 당장 여 기서 구현하는 것으로 바뀌니까 내 면에 있었던 물의 그 심상 은 사라지는 거죠.
정태춘
:
맞습니다.
그리고 「아,
대한민국..
」을 냈던 시기는 우리 사회 에서 투쟁의 절정기에 올라갔던 시기인데요,
그 이후,
우리가 꾼 꿈들이 적지 않게 좌초되는 것을 봐야 하는 시기가 있었고,
그걸 한동안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곽재구 시인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제가 힘들어하고,
세상에 환멸 을 느끼고,
문명 자체에 관해서 근본적으로 혐오하는 이야기 를 하니까, “
저 형이 너무 큰 박수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서 좌절이 크고 분노가 큰 것일지도 모른다
.”
그때는 그 말이 듣기 안 좋았는데,
맞는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 기나 이런 게 아니고 공감대의 상실..
뭐,
이런 것..
이영미
:
정태춘 선생님께서 계속‘
환멸의90
년대’
라는 표현을 많이 쓰 시는데,
지금 한20
년 떨어져서 보면 그 시기가 굉장히 좋은 시기거든요.
우리 역사 속에서 아주 화려했던 시기고.
그런데 그 화려했던 시기를‘
환멸의90
년대’
로 기억하고 계시는 거잖 아요.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돌아보고 나니까...
정태춘
:
그때 얻은 것도 있었죠.
진보라고 할 수 있겠고,
서민이나 민 중이라고도 하는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편에서 보면 일말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고.
민주화의 성과도 없잖 아 있었고.
전체 큰 상상력으로서의 싸움은 다 와해가 되고 그러고는 문제의식들이 작게 쪼개지면서 거대담론을 버려라,
미시담론으로 들어가자 – 라는 캠페인 같은 분위기가 있었어 요.
그래서 시스템 논쟁과 이념논쟁을 종식하고 환경문제와 생활문제 등 작은 주제들을 가지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이야 기들을 했습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판단했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화라는 것이 진행되면서, -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문 명사적인 일이라고 보는데-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가 거의 해 체되고 국가 영역을 넘어선 새로운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자 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니고 산업주의가 지구를 지배하고,
나는 이게‘
진짜’
거대담론이 오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
진 짜’
거대담론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는데 아무도 동의하 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에 대한 환멸도 있었죠.
김창남:
김준기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전 사실 정태춘박은옥
40
주년 프로젝트 총감독이 김준기 선생님이라는 걸 알고 약간 놀랐어요
.
미술을 하시는 분이고,
큐레이터이시고,
그 런데 음악인의40
주년 전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신 걸 보고 놀랐습니다.
두 분의 인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프로젝 트를 맡게 된 사연,
또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게 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준기
:
저는‘
건너간다’
라는 제목의 전시를 만들어서386
세대들이90
년대를 어떻게 지내왔는가를 전시했었는데요.
그 전시 때,
그 냥 연락을 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와주셨어요.
격려도 해주시 고.
그 이후2005
년도에 정태춘 선생님께서<
바람이 분다>
공 연을 할 때 저도 같이 움직였고,
이후에 비공식‘
시각 예술매니 저’
로 활동했습니다.
또 하나는,
제가 대학 다닐 때 노래패 하 면서 음악적으로도 좋아하는 분이지만,
예술이 어떻게 사회적 실천을 하는가에 관한 저의 관심에 중요한 씨앗을 뿌려주셨거 든요. ‘
대추리’
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터닝 포인트입니다.
그 대추리의 씨앗이 강정과 용산으로 가고,
오늘날 문화재단에서 도 이에 관한 토론과 공모사업까지 벌어질 정도가 되었거든 요.
이런 것이 정태춘 선생님이 뿌려주신 중요한 씨앗인 것 같습니다.
정태춘 선생님은 또 제 공부 선생님이기도 해서,
그 런 인연으로40
주년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게 됐습니다.
김준기:
저도 정태춘 선생님께 질문을 드려보고 싶은데요, ‘
언제까지정태춘 선생님께서 해오신 역할을 대중음악으로 부를 것인가
’,
‘
대학은 왜‘
실용음악’
이라는 이름으로 학과를 만드는가’, ‘
이 시대 대중들과 민중들의 생활과 정신에 깊숙이 들어있는 음악 에 관해서는 학제가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는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역들은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서 인재를 길러내고 영역을 만들고 학술적으로 자료를 만들고 공론의 장을 만드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
반면 대중음악은 그런 시스템이 부재하죠.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정태춘 선생님 께서 음악 활동을 접겠다는 이유 중에 있는 건가요?
이렇게 열심히 음반을 만들어도 이 시대가 내 음악을 수용하지 않는 다.
그 이유는 시장 중심의 돈 되는 음악만 살아남을 수 있는 대중음악 생태이다.
분명히 반산업주의자로서 문제의식을 갖 고 계시단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또 다른 어떤 상이 있을 것 같습니까?
정태춘
: ‘
대중음악’
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적절한가.
우리가 또‘
문화’
라 고 고민하는 것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문화예술이 지금 제가 이야기한 산업주의,
아주 강고하고 야만적인 시스템 속 에 들어와 있는데 이제 우린 뭘 할 수 있을까,
과연 산업의 통제로부터 인간이 벗어날 수 있을까?
예술,
학술,
담론,
철학 도,
모두 시장이 먹어버린 상황 속에서 시장 바깥에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시장이 통제하지 않는 무엇,
시장으로부터 자 유로운 인간의 문예행동 – 이것이 가능할까?
사실 제 고민은 그런 것들이었죠.
그래서 답을 찾는다면 그 속에서 예술을 어 떻게 할 것인가라기보다는,
저는 좀 이상주의에 가까운 사람 이니까,
어떻게 이 산업주의에 균열을 낼 것인가,
산업주의 시 스템을 정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걸 고민했습 니다.
그런데 이미 나이도 너무 많이 들어버렸고, ‘
문화예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또‘
대중음악이 어떻게 되는지’
라는 고 민을 사실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번에40
주년 프로젝트 를 시작하면서, ‘
시장 밖 예술’
이라는 말이 제 입에서 나왔어 요.
시장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예술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이 야기를 좀 시작을 해보려고 하다 보니까,
저는 이미 시장에나와 있고
,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너무나 환대를 받고 있고.
그래서 이미 자격상실이 되어버렸다고 느 껴지는 겁니다.
이렇게 잠시겠지만 환대를 받는 상황에서 내 가 산업과 시장의 지배에 관해서 우울해 하고 화를 내고 그것 과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면,
그 시장 속에서 생존이라도 가능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어떤 예술가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 인가 – 생각하게 됩니다.
이건 제 딸이 저에게 한 이야기입니 다.
그래서 시장예술에 관한 화두도 접었습니다.
김창남
:
접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시장 바깥이라는 게,
정태춘 선생님께서는 상당히 견고하고 모든 문제를 거대담론 중심으 로 생각하는 사고 관념을 갖고 계셔서 일종의 자기 결벽증으 로 표출되는 경향이 예전부터 있었어요.
일찍이 시장에 관한 고민은 많은 사람이 하고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해왔고요.
소 위 공공영역,
문화적 공공성,
어떤 시장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 고 문화적 종 다양성을 살릴 방법에 관한 고민을,
정책적 차원 에서나,
운동적 차원에서나,
늘 하고 있고 그걸 하기 위해서 앞서 시장과 산업과 공공권력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또 있 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조금 더 너그러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태춘
:
그런데 저에겐 이것도 중요해요.
시장의 원리,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생존하는 동안에는 내 개인적인 이해관계로서의 시장 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해야 하고,
적응력을 발휘해야 해요.
그러나 한편,
거기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의 나이를 먹어 버린 것도 있고..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는데,
내 개인 적인 관계,
이 문명과 이 시장과의 관계에만 크게 매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더 원론적인 이야기
,
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말이 좀 이상한가요?
김창남
:
네,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만,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도 박은 옥 선생님께 얘기해서 물꼬가 트였다고 하시니,
앞으로도 박 은옥 선생님께 얘기해서 물꼬가 트일만한 뭔가가 나오지 않을 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이영미
:
사실 정태춘 선생님께서 하고 계신 고민은 많은 사람이 하고 있죠.
어떻게 하면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지 금 김창남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산업화의 폭주와 그 논리 때문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중화시키기 위한 공공 이나 국가나 정부 차원의 정책적 노력이 한 덩어리가 있는 거 고.
또 하나의 방향은 훨씬 더 극단적으로 마을이나 공동체 중심의‘
파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급자족인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그쪽을 보게 되 는데,
인문학도 그 양쪽이 동시에 등장하거든요.
인문학이 한 편으로는 정말 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잘 팔리는 영역이 있기 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곳으로만 가서 인문학이 파괴되기 도 해요.
지금 인문학은 대학에서도 완벽하게 파괴되었잖아 요.
아까 김준기 선생님은 대중가요,
대중음악도 대학 안에서 뭔가 그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
하셨지만,
사실 대학 자체도 많이 붕괴가 되었어요.
다들 경험하셨다시피.
이런 상 황이 지속되지 않기 위해서 연구자들을 살린다고 연구재단을 만들고 무슨 지원금 주고 그런 공공적,
정책적 노력이 하나가 있는 반면에,
하나는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소수지만 존재하는 것이거든 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동체가 지금처럼 국가단위,
세계단위로 움직이고 있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존재할 것인가
’
란 문제는 또 역시 남는 것 같아요.
녹색평론에서 얘 기하고 있는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법은 결국은 자 급자족이란 논리를 충분히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이 세 계와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이 라서,
지금 정태춘 선생님께서 하고 계신 고민은 궁극적으로 남을 고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정태춘 선생님께 서 빛을 발하는 대로 역시‘
시장’
이었다는 생각이에요.
시장 바 깥에서 활동하시던 기간은 굉장히 빛나는 기간이지만 그렇게 까지 길지 않고,
시장 바깥에 마을 인문학,
공동체 인문학 하는 것 같은 수준,
연남동에서 하는 것처럼‘
팔리는 것과는 상관없 는’
노래 만들고,
노래 가르치고,
노래를 부르는 이런 활동이 좀 더 큰 시장에서 빛나는 일이었다는 사실이죠.
정말 아이러 니한.
서정민갑
: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정태춘 선생님께서 하고 계신 고민을 하는 젊은 뮤지션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만나보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영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90
년대에 저는 한총련 소속 학생으로 연세대에서 날아다니는 헬리콥터 밑에서 싸우고 있었고 폭도 취급을 받았는데,
당시 선생님께서는 환멸에 빠져 계시다니 이 온도 차이가 뭘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비난하는 것은 아니고요,
세계에 여러 가 지 층위가 있는데 각자 이 중에 하나를 노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도 하나를 노래하셨다고 보는데,
혹시 아직 문제의식을 계속 갖고 계신다면 가죽을 만지는 것도 좋 지만 이번40
주년 행사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젊은 뮤지션들을 만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의 모든 공연을 매진시킨 팬들의 마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 요.
김창남
:
고맙습니다.
한마디만 더 붙인다면,
시장 밖 예술이 단순히 시 장에 적대적인 예술로 해석한다면 문제는 전혀 풀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시장 밖 예술,
공공성을 고민하는 것은 시 장을 건강하고 다양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요.
다른 방법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태춘
:
자꾸 주제가 다른 데로 빠져서 정말 죄송한데,
시장을 건강하 게 – 라기보다는 시장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면,
하고 생각 을 하는 거예요.
김창남
:
그게 그 얘기죠.
정태춘
:
하하.
그리고 시장 밖 예술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제가 생각 했던 것은‘
시장 밖 인간’
이라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건데,
우 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예술가들과 모이면서‘
시장 밖 문 화’,
더 좁혀서‘
시장 밖 예술’
이라고 얘기가 된 거죠.
그걸 하나 의 이야깃거리로 계속 끌어나가지는 않을 것이고,
그것 관련 된 프로그램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할 것은 아닙니다.
김창남:
오늘 한국대중음악학회에서 모처럼 정태춘 선생님 모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