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사
제11주
자료를 통한 중세국어 이해하기
2009년 2학기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를 담은 언해본 『삼강행실도』
세종이 설순(偰循)에게 명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에
서 삼강(三綱: 忠, 孝, 烈)에 뛰어났던 인물 110명
씩의 이야기를 판화, 한문 기사(記事), 시(詩)와 찬
(贊)을 붙여 세종 16년(1434)에 간행한 『삼강행
실도』를 훈민정음 창제 후 그 대상을 각각 35명씩
으로 줄이고 난상(欄上)에 언해를 붙여 성종 21년
(1490)에 3권 1책으로 간행한 책
《三綱行實圖》의 선행 형태
남송대 趙子固(조자고)의 《二十四孝圖》
1346년 權溥(권보) 일가의《孝行錄》
• 권준(權準)이 《二十四孝圖》를 만들어 아버지 권보에게 올리자 권보는 38 명을 추가해 총 62명에 대하여 사위인 李齊賢(이제현)이 찬(讚)을 붙여 편찬
• 고려 충목왕 때 권보(權溥)와 그의 아들 준(準)이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 아 엮은 책. 1책. 목판본. 고려 말에 초판이 나왔으며 1428년(세종 10) 설순(律循) 등이 개정하여 중간하였다. 초간본에는 이제현(李齊賢)의 서 (序)가 있고, 후에 권근(權近)이 주해(註解)와 발문(跋文)을 달았다. 권보 가 노경에 들게 되자, 아들 준(準) 이 화공(怜工)에게 명하여 24효도(二 十四孝圖)를 그리게 한 뒤 그것을 이제현에게 주면서 찬(贊)을 지어 달 라 부탁하여 아버지를 위안하였다. 이에 권보도 38효행을 골라 이제현 으로부터 찬을 지어받았는데, 전 24찬은 12구(句), 후 38찬은 8구로 되 어 있다. 이 책은 효행설화에 대한 최초의 집대성으로, 아이들에게 노래 로 불러 외우도록 하여 효도를 고취하는 자료로 삼았다. 규장각도서․장 서각도서 등에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는 모두 중국의 사례를 싣고 있음
《三綱行實圖》의 편찬(1)
세종 10년(1428)
[09월] 진주 사람 김화(金禾)가 그 아비를 살해
[10월] 변계량(卞季良)이 《孝行錄》의 반포를 건 의 세종은 설순(偰循)에게 재편집을 지시
세종 13년(1431)
[11월] 설순에게 《충신도》 안에 정몽주(鄭夢周)
와 길재(吉再)의 얼굴을 그리고 찬(贊)을 짓도록 명
함
《三綱行實圖》의 편찬(2)
세종 14년(1432)
[06월] 집현전에서 《三綱行實圖》를 편찬하여 서 문(序文)과 전문(箋文)을 더불어 올림
세종 15년(1433)
[02월] 대제학 정초(鄭招)가 명을 받들어 발미(跋 尾)를 지어 올림
세종 16년(1434)
[04월] 《三綱行實圖》를 인쇄∙반포하고 이를 가 르치도록 하고자 윤회(尹淮)가 지은 교서(敎書)를 발표
[11월]《三綱行實圖》를 종친 신하에게 하사하고 각 도(道)에 반사(頒賜)
● 총 3권 3책의 한문본 《三綱行實圖》
《三綱行實圖》의 편찬(3)
세종 26년(1444)
[02월] 정창손(鄭昌孫)에게 《三綱行實圖》를 언문으로 번역할 것을 하교
성종 12년(1481)
[3∙4월] 언문으로 된 《三綱行實圖烈女圖 》를 인쇄해 반 사(頒賜)
성종 20년(1489)
허침(許琛)과 정석견(鄭錫堅)에게 《三綱行實圖》의 산 정을 명함
성종 21년(1490)
인원을 각각 110명에서 35명씩으로 줄이고 난상(欄上) 에 언해를 붙인 언해본 《三綱行實圖》를 경성의 오부(五 部)와 팔도의 군현(郡縣)에 반사
● 총 3권 1책의 언해본 《三綱行實圖》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를 담은 언해본 『삼강행실도』
출처: 삼강행실도
[01] 閔損單衣(魯) [02] 子路負米(魯) [03] 楊香搤虎(魯) [04] 皐魚道哭(楚) [05] 陳氏養姑(漢) [06] 江革巨孝(漢) [07] 薛包洒掃(漢) [08] 孝娥抱屍(漢) [09] 黃香扇枕(漢) [10] 丁蘭刻木(漢) [11] 董永貸錢(漢) [12] 郭巨埋子(漢) [13] 元覺警父(□) [14] 孟熙得金(蜀) [15] 王裒廢詩(魏) [16] 孟宗泣竹(吳) [17] 王祥剖氷(晉) [18] 許孜埋獸(晉) [19] 王延躍魚(晉) [20] 潘綜救父(晉) [21] 黔婁嘗糞(齊) [22] 叔謙訪藥(齊) [23] 吉翂代父(梁) [24] 不害捧屍(梁) [25] 王崇止雹(後魏)[26] 孝肅圖像(隋) [27] 盧操順母(□) [28] 徐積篤行(宋) [29] 吳二免禍(宋) [30] 王薦益壽(元) [31] 劉氏孝姑(國朝)[32] 婁伯捕虎(高麗) [33] 自强伏塚(本國)[34] 石珎斷指(本國)[35] 殷保感烏(本國)
(1) 삼강행실효자도(三綱行實孝子圖)
[01] 龍逢諫死(夏) [02] 欒成鬪死(晉) [03] 石碏純臣(衛) [04] 王蠋絶脰(齊) [05] 紀信誑楚(漢) [06] 蘇武杖節(漢) [07] 朱雲折檻(漢) [08] 龔勝推印(漢) [09] 李業授命(漢) [10] 嵆紹衛帝(晉) [11] 卞門忠孝(晉) [12] 桓彛致死(晉) [13] 顔袁罵賊(唐) [14] 張許死守(唐) [15] 張興鋸死(唐) [16] 秀實奪笏(唐) [17] 演芬快死(唐) [18] 若水效死(宋) [19] 劉韐捐生(宋) [20]傅察植立(宋) [21] 邦乂書襟(宋) [22] 岳飛涅背(宋) [23] 尹穀赴池(宋) [24] 天祥不屈(宋) [25] 枋得茹蔬(宋) [26] 和尙噀血(金) [27] 絳山葬君(金) [28] 蝦䗫自焚(金) [29] 普顔全忠(元) [30] 堤上忠烈(新羅)[31] 丕寧突陳(新羅)[32] 鄭李上䟽(高麗) [33] 夢周隕命(高麗)[34] 吉再抗節(高麗)[35] 原桂陷陳(本國)
(2) 삼강행실충신도(三綱行實忠臣圖)
[01] 伯姬逮火(宋) [02] 女宗知禮(宋) [03] 殖妻哭夫(齊) [04] 宋女不改(蔡) [05] 節女代死(漢) [06] 高行割鼻(漢) [07] 穆姜撫子(漢) [08] 貞義刎死(漢) [09] 禮宗罵卓(漢) [10] 媛姜解梏(漢) [11] 令女截耳(魏) [12] 李氏感燕(宋) [13] 崔氏見射(隋) [14] 淑英斷髮(唐) [15] 魏氏斬指(唐) [16] 李氏負骸(五代) [17] 趙氏縊輿(宋) [18] 徐氏罵死(宋) [19] 李氏縊獄(宋) [20] 雍氏同死(宋) [21] 貞婦淸風(宋) [22] 梁氏被殺(宋) [23] 明秀具棺(金) [24] 義婦臥氷(元) [25] 童氏皮面(元) [26] 王氏經死(元) [27] 朱氏懼辱(元) [28] 翠哥就烹(元) [29] 寗女貞節(國朝)[30] 彌妻啖草(百濟)[31] 崔氏奮罵(高麗)[32] 烈婦入江(高麗) [33] 林氏斷足(本國)[34] 金氏撲虎(本國)[35] 金氏同窆(本國)
(3)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
최만리 등이 올린 반대 상소문 관련 기사 속에 나타난 내용
•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 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 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 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 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 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 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 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世宗實錄 卷103 世宗 26年 2月 20日(更子)條]
『삼강행실도』 언해의 배경
‘ㅸ'자의 사용, 한자음 종성으로 ‘ㅇ’이 없으며, 현실한자음으로 반영 된 주음(注音)들이 출현한다. 세종대에 언해가 이루어졌다.(南廣祐 1966)
‘ㅸ, ㅭ, ㆅ’까지 나타나는 사실로 보아 원간본의 언어 사실은 초기 한 글 문헌과 비슷하다.(安秉禧 1979)
서체․필법, 번역 양식, ‘ㅇ’을 쓰지 않는 한자음 표기의 특징, 된소리 표기, ㅸ자 사용, 종성 표기, 긴 연결어미, 모음조화 등을 검토해 본 결과, 번역은 세종조에서 세조 초에 걸쳐 이루어졌다.(志部昭平 1990)
1447년의 『석보상절』과 조권(調卷)의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 중 1459년의 『월인석보』에서 변화한 언어 사실을 주로 고유어의 문법 소, 어휘 사용면에서 비교해 본 결과(㉠~㉤), 언해본은 1447년~
1459년 사이에 번역되었다.(고영근 1991)
㉠여격표시어( /의그 > /의게), ㉡시간부사(즉자히>즉재), ㉢보조 적 연결어미(긔>게), ㉣한자어 표기(한글표기>한자표기 cf.미혹>迷 惑), ㉤‘ㅏ’로 끝나는 용언 어간 뒤 연결어미의 쓰임(아>ø cf.가아>가)
언해문의 성격과 번역 시기(1)
사이시옷의 표기 경향과 어미 {-ㄹ}과 후행어와의 통합 표기 경향, 한자음 표기에서 잘못된 주음(注音) 을 공통적으로 가지며 현실음 중성을 유지하려는 경 향, 한자어 선택 및 한자음 표기 경향이 『석보상절』
보다는 『월인천강지곡』과 일치하는 점을 들어 1446년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번역이 계획되어
『월인천강지곡』과 거의 동일한 방침, 거의 동일한 인물 진용에 의해 번역되어 1447년 즈음에는 원고 가 완성되었을 것이다.(鄭宇永 1999)
언해문의 성격과 번역 시기(2)
《三綱行實圖》의 판화
판화사적(版畵史的)으로 살펴볼 때 《三綱行實圖》
는 불교판화의 전통을 계승하여 유교판화의 전형 이 되었다.
《三綱行實圖》 밑그림의 작가는 조선 전기의 대 표적 화가인 安堅(안견)이다.
지그재그에 의한 상의 배치로 공간 운영이 뛰어
나고 건물, 산수, 구름 등에 의하여 장면을 구획
하거나 배경으로 삼아 여러 설화 장면을 다양한
조형세계 속에서 소화해 나갔다.
陳띤氏:씨 ·나·히 ·열 여·스·세 남진 어·러 그 남지·니 防 禦: 저·긔 닐·오· 防 禦 ·는 軍군 마·기·라 내 죽사·
리· :몯:내 :알리·니 兄 弟:뗴 :업·고 늘·근 ·어미· :네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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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싀·어미· ·나·날 ·새· · 孝· 道: · ·야 乃:내終 : 내 다 남진 · · ·디 :업더·니 제 父:뿌母: ㅣ 다 남진 얼·유·려 커·늘 닐·오· 남진 저·긔 늘·근 ·어미·로 맛·뎌·
늘 그·리·호려 ·호·니 · 늘·근 ·어미· ·치다·가 乃:내終 :내
<誠庵本 孝子 5a>몯 ·며 · 그 :오녀 ·고 고·티·면 어·드·리 世·셰間간·
애 ·니리·오 ·고 주·구·려 커·늘 두·리·여 :몯 얼·이·니 ·싀
·어미· ·스·므 여·듧 · · 孝· 道: · 다·가 죽거·늘 받·
과 집·과 :다 · ·라 무·드·니 일·후·믈 孝· 婦: ㅣ·라 ·니·
라
孝· 婦: ·는 孝· 道: · :겨지·비·라 <誠庵本 孝子 5b> 효자도 陳氏養姑(漢)
翰· 林림學· 士: 崔최婁 伯· · 水: 原 戶: 長· · 아· ·리러·니 ·나 히 ·열다· ·신 저·긔 아·비 山산行 ·갯다·가 :범 믈·여·늘 ·가·아 자·보·려 ·니 · 어·미 말·이더·니 婁: 伯· ·이 닐·오· 아· 怨 讐 를 아·니 가· ·리 ·가 · 고 ·즉자·히 :돗·귀 :메·오 자괴 바·다 가·니 :버·미 ·마 · 브르 먹·고 누· 거·늘 바 ·드·러·가·아 구·지주· :네 내 아·비· 머·그·니 ·내 모·로·매 너·를 머·구리·
라 · 야· ·리 :젓·고 업:데어·늘 :베·텨 · ··아 아· · ·콰 · ·와 :내·야 그
·르·세 :담·고 :버·믜 고·기·란 도· 다·마 :내·해 묻·고 아·비 묻·고 侍·씨墓·모 :사 더·니 · 흐 <誠庵本 孝子 32a>
· ·얫거·늘 아·비 ·와 ·그·를 이·푸· 披피榛즌· ·야 到· 孝· 子: 廬려·호·니 개욤 나모 헤·오 孝· 子: 廬려·에 :오·니 情 多다感:감· ·야 淚· 無무窮 ·이 로·다 ·데 感:감動: ·호·미 :만· ·야 · ·므·리 다 :업도·다 負: 土:토· ·야 日· 加가塚· 上· · ·니 ·지·여 ·나·날 무·덤 우·희 올·이 ·니 知·디音 · 은 明 月· 淸 風 ·이시·니·라 :아· ·시 ·닌 · · ·와 · ·미시·니·
라 生 則·즉養: ·고 死: 則·즉守· · ·니 사·랏거·든 이받·고 죽거·든 디·킈 ·니 誰 謂· 孝· 無무始·시終 ·고 ·뉘 닐·오· 孝 道: ㅣ 乃:내終 :업·다
· 더·뇨 :다 입·고 믄·득 :몯 보·니·라 婁: 伯· ·이 居거喪 ·고 :버·믜 고·기·
:다 머·그니·라 <誠庵本 孝子 3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