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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才不遇한 曹植의 처세 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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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懷才不遇한 曹植의 처세 태도*

– 그의 시를 중심으로 –

40) 심 우 영**

❙국문초록❙

조비(曹丕)가 위(魏)나라를 건국하여 황초(黃初) 연호를 쓴 이후, 조식(曹植)은 그의 시에 자신의 처지에 대 한 탄식과 형에 대한 원망을 대부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때로는 군주의 은총을 은근히 기대하였고, ‘건공입업(建功立業)’에 대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천명하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실현되지 않 자 때로는 현실의 비애를 털어놓으며 정권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속세를 떠나 소요경계인 신선세계를 향한 정신적 해탈을 추구하며 초세의 삶을 꿈꾸기도 하였다.

그의 처세태도는 조비(文帝)와 조예(明帝) 즉, 부자로 이어진 계속된 핍박과 압제의 생존환경으로 인하여 언제나 피동적일 수밖에 없어서, 어릴 때부터 쌓아온 건공입업의 유가적 태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부 학 자는 조식이 건공입업의 뜻을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고 하여, 이것을 침소봉대하여 충성과 애국의 유가적 처 세태도가 초지일관 충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잃어버린 옛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 려는 개인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드니, 이는 나약하고 소극적인 그의 처세태도로 인하 여 야기된 인과응보적인 결과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주제어] 조식, 회재불우, 조조, 조비, 조예, 건공입업, 신선, 비애, 탄식, 원망, 해탈

❘목 차❘

Ⅰ. 들어가면서

Ⅱ. 회재불우 시기의 처세 태도

Ⅲ. 나오면서

* 이 논문은 2016년 상명대학교 산학연구처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습니다(2016-A000-0127).

** 상명대학교 글로벌지역학부대학 중국어권지역전공 교수 / wyshim@smu.ac.kr

(2)

Ⅰ. 들어가면서

조식(曹植)은 동탁(董卓)의 난이 끝난 뒤 3년째인 초평(初平) 3년(192)에 조조(曹操)와 변(卞)부인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이 넘자 詩文과 辭賦를 외었으며, 글 짓는데 능하여 조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 다. 그리고 ‘전란 중에 태어나 군영에서 자란’1) 조식은 아버지인 조조를 따라 남북 원정에 모두 네 차례 참가 하며 ‘建功立業’의 원대한 뜻을 다졌고, 또한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애민사상을 크게 고취시켰다. 제 2차 원정이 이루어진 16세 즉, 건안 12년(207) 9월에 조조를 따라 북쪽 柳城2) 원정길에 나서 지은 것으 로 추정하는 「白馬篇」을 보면, 젊은 협객인 “遊俠兒”라는 영웅의 형상을 통해 자신의 건공입업에 대한 웅대 한 이상과 각오를 기탁하였고, 또한 「雜詩」 제 2수에서는 자신을 굴러다니는 다북쑥인 “轉蓬”에 비유하며

“遊客子”로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종군하는 자들의 시름을 역설적으로 토로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귀족 계급의 공자로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호사스런 생활과 향락을 누리면서 짧은 인생에 대한 탄식과 체념을 보여 주기도 하였는데 「鬪鷄」·「公宴」·「箜篌引」·「名都篇」 등을 보면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또한 자신을 다스리는 데 부주의하여 지나친 음주로 조조의 신뢰 를 점점 잃게 되는데, 건안 22년(217)에 일으킨 司馬門 사건3)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결국 태자의 지위는 조비에게 가게 된다. 그리고 건안 24년(219)에 다시 과음으로 인하여 조조의 명을 받지 못하자 완전히 눈 밖에 나게 된다.4) 그 다음해(220) 정월에 결국 조조가 사망하고 11월에는 조비가 위(魏)나라를 건국하자 조 식은 마침내 ‘懷才不遇’의 삶이 시작된다.

이후 文帝인 조비와 明帝인 조예(曹叡)의 압제와 속박이 대를 이어 진행되는데, 이 논문은 조식이 이 시기 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목하여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를 중심으로 ‘文史互證’5) 의 연구 방식으로 풀어나가기로 하였다. 특히 조식의 시는 이때부터 꽃을 피웠으니, 회재불우의 시련과 좌절 그리고 탄식과 회한과 욕망이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그의 시는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탁월하며, 서정과 서사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복잡한 외부 사태를 쉽게 묘사했고, 우여곡절을 거듭하는 심리적 갈등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는 회재불우한 시기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방식 과 태도를 견지하며 살았는가? 라는 문제를 놓고, 그가 남긴 시 작품6)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1) “生乎亂, 長乎軍”(曹植 「陳審擧表」) 2)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朝陽)

3)조조가 나가 있는 동안에 조식은 술을 먹고 흥이 나자, 왕궁의 대문인 司馬門을 열고 왕실의 車馬를 탄 채 제왕이 의식을 거행할 때만 걸을 수 있는 길을 마음대로 내달려 金門에 이르렀다. 이에 조조는 크게 노하여 왕실의 거마를 관장하는 公車令 을 처단하고, 제후에 대한 법규와 금지령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식은 조조의 총애와 신임을 잃고, 그 해 10월에 는 조비가 태자로 명을 받았다.

4)당시 曹仁이 관우에게 포위를 당하자, 조조는 조식을 南中郞將으로 임명하고 征虜將軍의 자격으로 조인을 구하려 하였으나, 과음으로 인해 조식은 그 명령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에 조조는 후회 막급하여 그를 더 이상 중용하지 않았다. 5)陳寅恪이 세운 연구 방법론으로 간단히 말하면, 史學으로 詩文을 고증하거나 시문으로 역사를 증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방

법은 특히 위진 시대의 사상·문화·역사 연구에 매우 효과가 있다(景蜀慧 著, 󰡔魏晉詩人與政治󰡕, 中華書局, 2007, 4~5).

6) 현재 전하는 시는 109, 잔구 57(이치수·박세욱 옮김, 󰡔조자건집󰡕, 소명출판, 2010, 22~23).

(3)

Ⅱ. 회재불우 시기의 처세 태도

조식은 황초(黃初) 원년(220) 이후의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慶雲未時興, 상서로운 구름이 제 때 일지 않아 雲龍潛作魚. 승천할 용은 숨어서 물고기가 되고, 神鸞失其儔, 신령스런 난새는 그의 짝을 잃더니 還從燕雀居. 돌아와 제비와 참새를 쫓아가네.

이 시는 「言志詩」인데, 회재불우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상서로운 구름을 만 나지 못해 용이 되지 못하니 물고기로 살 수밖에 없고, 신령스런 난새도 짝을 잃으니 제비와 참새를 쫓을 수 밖에 없다. 사람과 때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용과 난새를 통하여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회재불우 한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극복하려고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탄식과 원망의 소극적 자세

조식의 시 중 인구에 회자되는 시로 「七步詩」가 있다. 이 시는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조식을 제거하기 위해 일곱 발을 뗄 동안 시를 한 수 지으라고 명령해 나온 작품이다.7)

煮豆持作羹, 콩을 삶아 국을 만들고 漉菽以爲汁. 메주를 걸러 즙을 만드네. 萁在釜下燃, 콩깍지는 가마솥 아래에서 타고 豆在釜中泣. 콩은 가마솥 안에서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건만 相煎何太急. 지지고 볶는 것이 어찌 이리 급할까.

여기서 콩깍지는 조비를, 콩은 조식을 비유한 것으로, 봉건 통치 집단 내부의 잔혹한 투쟁에서 야기되어 뿌리가 같은 형제에게조차 박해를 가하는 조비를 원망하고 권력을 잃고 곤궁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탄식한 시이다. 침통하면서도 격앙된 시인의 감정을 다분히 느낄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감정에서 나온 시가 또 하나 있다. 高樹多悲風, 큰 나무는 슬픈 바람 잦고

7) 󰡔世說新語󰡕 「文學篇」

(4)

海水揚其波. 바닷물은 파도를 드날린다. 利劍不在掌, 예리한 칼이 손안에 없는데 結友何須多. 친구 많이 사귈 필요 있을까. 不見籬間雀, 울타리 사이 참새 보지 못했는가? 見鷂自投羅. 매를 보면 스스로 그물에 뛰어드는 것을. 羅家得雀喜, 그물 친 이는 참새 잡았다 기뻐하나 少年見雀悲. 소년은 참새를 보고 슬퍼한다네. 拔劍捎羅網, 칼을 뽑아 그물망을 베니 黄雀得飛飛. 참새는 훨훨 날아가는구나. 飛飛摩蒼天, 훨훨 날아 푸른 하늘에 다가갔다 來下谢少年. 다시 내려와 소년에게 감사하네.

이 시는 「野田黃雀行」이란 작품인데, 시인이 새롭게 이름을 붙인 악부시이다.8) 건안 25년(220)에 조위 (曹魏)를 건국한 조비는 조식과 아주 가까웠던 정의(丁儀)와 정이(丁廙) 형제를 주살함으로써 政敵들을 제거 하기 시작했고, 조식을 포함한 형제들을 封地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무력감을 느낀 시인은 침통하 고 격앙된 심정으로 이 시를 지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들판의 참새를 제재로 삼고 참새를 구하는 소년 을 등장시킨 것은 寓言故事9)를 빌려 만든 풍유 수법으로,10) 자신의 슬프고 분한 심정을 隱晦曲折한 방법으 로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참새[雀]는 핍박 속에서 주살을 당한 정의와 정이 형제들이고, 매()와 그물 친 이[羅家]는 강력한 세력으로 박해를 가하는 조비와 그 무리들이며, 소년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상상 속의 영웅으로 자신이 바라는 자아 형상의 화신이다. 전체 기조는 탄식과 원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음으로 여성을 제재로 한 시를 보기로 하자. 우선 棄婦詩인 「妬詩」를 보면 아래와 같다.

嗟爾同衾, 아! 그대와 함께 이부자리 썼건만 曾不是志. 일찍이 그대의 뜻이 아니었던 게지. 寧彼冶容, 차라리 이렇게 예쁘게 단장이나 할 걸 安此妬忌. 어찌 이렇게 질투하고 시기나 할까.

이 시는 여인의 입장에서 낭군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회한을 그렸는데, 여기서 부부지간을 형제지간으 로 바꾸면 조비와 조식의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회재불우의 이유가 바로 버림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버림은 오히려 짝사랑한 본인에게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였다. 지난 날 예쁘게 단장하여 낭군님의 마음을 사 로잡을 것을, 이제 와서 질투나 시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후회하였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칠보

8) 󰡔昭明文選󰡕·󰡔玉臺新詠󰡕·󰡔樂府詩集󰡕 등은 모두 「相和歌辭·瑟調曲」에 포함시켰다.

9) 󰡔戰國策󰡕「楚策」에 등장하는 것으로, 초나라 사람인 莊辛이 초나라 襄王에게 들려준 고사이다. 참새는 사람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王公과 貴族의 자제가 열 길 상공을 나는 참새에게 활을 쏘아 떨어뜨렸다는 내용이다. 10) 劉勰說:陳思之黃雀, 公幹之靑松, 格剛才勁, 而幷長於諷諭.”(󰡔文心雕龍󰡕 「隱秀篇」)

(5)

시」에서는 형제를 콩과 콩깍지의 관계로 비유하여 형에 대해 직접적인 원망과 탄식을 했건만, 이 시에서는 이것마저도 접고 그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음을 통탄한 것이다. 즉, 자아비판을 통하여 스스로 안위를 찾기 위해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또한 「七哀詩」11)도 10년 이상 집을 비운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독 백12)에 기탁하여, 군주인 조비와 소통이 단절된 상황을 슬픔과 탄식으로 피력하였다, 전형적인 閨怨詩13)로 군신간의 간극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시로는 「잡시」 제 3수와 「閨情詩」 제 2수가 있다. 두 작품 모두 집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빈 방을 지키는 아낙네의 탄식과 원망을 통해 애절한 그리움을 표출하였다. 또한 「種葛篇」은 결혼 초기 더없는 은혜로운 정과 사랑을 받았으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멀어져 가는 낭군을 원망하면서 버림받은 여인의 심리적 변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묘사하였다.

다시 여성을 제재로 한 「잡시」 제 4수를 보기로 하자.

南國有佳人, 남쪽 나라에 아름다운 여인 있어 容華若桃李. 예쁜 얼굴이 복사꽃과 오얏꽃 같네. 朝遊江北岸, 아침이면 장강 북쪽 언덕에서 노닐고 夕宿瀟湘沚. 저녁이면 소수와 상수의 물가에서 묵네. 時俗薄朱顏, 세상 사람이 미인을 경시하는데 誰為發皓齒. 누구를 위해 하얀 이를 드러낼까. 俯仰歲將暮, 순식간에 한 해가 저물지니

榮曜難久恃. 빛나는 용모도 오래가기는 어려울세.

이 시는 자신을 남국의 미인 즉, 굴원(屈原)의 「九歌」에 등장하는 湘夫人으로 비유해 회재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개탄한 작품이다. 여기서 “세상 사람이 미인을 경시하는데, 누구를 위해 하얀 이를 드러낼까.”라는 두 구는 자신의 처지를 가장 근사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이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순식간에 한 해가 저물지 니, 빛나는 용모도 오래가기는 어려울세.”라고 개탄한 것은, 아무리 능력과 뜻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세월은 자꾸 가는데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나온 결과로, 마음속의 원망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시기적으로 완전히 포기한 단계는 아니지만, 조비 부자의 시기와 압박은 ‘用世立功’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 빼앗는 느낌이다.

이와 유사한 시로는 「美女篇」이 있는데, 마지막 여덟 구14)에 자신의 회재불우에 대한 탄식이 잘 드러나 있다.

11) 徐陵의 󰡔玉臺新詠󰡕에는 「雜詩」로 명명 되어 있다.

12) “君行逾十年, 孤妾常獨棲. 君若清路塵, 妾若濁水泥. 浮沉各異勢, 會合何時时諧? 願爲西南風, 長逝入君懷. 君懷良不開, 賤妾 當何依.”

13) 閨怨詩는 思婦詩와 棄婦詩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규방에서 머무는 부녀자의 哀怨을 담은 시를 말한다.

14) 󰡔昭明文選󰡕·󰡔玉臺新詠󰡕·󰡔樂府詩集󰡕 등은 모두 <雜曲歌辭·齊瑟行>에 포함시켰다. 30구로 마지막 여덟 구를 제외하 면 대부분 미녀의 용모와 자세 그리고 집안 배경 등을 소상하게 묘사하였다.

(6)

媒氏何所營, 중매쟁이는 무슨 계획이 있는 건지 玉帛不時安. 옥과 비단을 때맞춰 처리하지 않는구나. 佳人慕高義, 미인은 성격이 고결한 자를 흠모하고 求賢良獨難. 어진 자를 구하지만 실로 어렵도다. 衆人徒嗷嗷, 뭇사람은 부질없이 떠들기만 할 뿐 安知彼所觀. 어찌 그녀가 찾는 사람 알 리가 있으리오. 盛年處房室, 한창 젊은 나이에 방에만 있으니

中夜起長歎. 한밤에 일어나 길게 한숨짓는다.

모두가 사모하는 미녀에 대해 중매쟁이는 선뜻 혼례 주선을 하지 않고, 미녀 또한 고결하면서 어진 자를 사모하니 임자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질없이 떠들기는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미녀가 시집을 못 간 비유로 든 전형적인 회재불우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미녀는 시인 자신이며 건공입업을 갈망하나 이룰 수 없는 슬픔과 원망의 감정을 탄식조로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15)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조식의 사부시와 怨女詩는 대부분 부인이나 여인을 통하여 자신을 기탁하고, 비흥수법을 동원하여 탄식과 원 망을 에둘러 표현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비흥수법의 시를 보면 자신을 ‘다북쑥[蓬]’에 비유한 것이 있는데, 이는 ‘借物言志’의 예술수 법을 이용하여 회재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였다. 「盤石篇」과 「吁嗟篇」이 이에 해당하는데, 먼저 「반석 편」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盤盤山巓石, 크디큰 산꼭대기 바위였는데

飄飄澗底蓬. 골짜기 낮게 날아다니는 다북쑥이 되었네. 我本太山人, 나는 본래 태산 사람인데

何爲客淮東. 어찌하여 회수 동쪽 나그네가 되었는가.

…… ……

南極蒼梧野, 남쪽으로 창오의 들판에 이르고 遊眄窮九江. 구강 끝까지 가서 노닐며 보리라. 中夜指參辰, 밤중에는 삼성과 진성 가리키며 欲師當定從. 스승 삼아 반드시 따르고자 하노라. 仰天長太息, 하늘 바라보며 길게 한숨짓나니 思想懷故邦. 그리워 생각나는 건 고국뿐.

乘桴何所志, 뗏목 타고 나선 것이 어찌 뜻한 바이겠는가. 吁嗟我孔公. 아! 우리의 공자님이시여!

15) “子建志在輔君匡濟, 策功垂名, 乃不克遂. 雖受爵封而其心猶爲不仕, 故託處女以寓怨慕之情焉.”(元 劉履, 󰡔選詩補注󰡕 卷2)

(7)

이 시는 황초 4년(223) 雍丘王 시절에 지은 것으로, 다북쑥이 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조비의 핍박에 대한 원망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잘 담겨진 작품이다. “蒼梧”16)와 “九江”17)의 등장은 자신의 고뇌를 잊기 위해 신선이 되는 것을 상상한 것이며, 영원히 서로 보지 못하는 “參星”과 “辰星”의 등장은 고상한 스승을 결 코 만나지 못하리라는 상황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고향 생각으로 귀결된다. 마지막 두 구는 용 전한 것으로, 󰡔논어󰡕 「公冶長」에 등장하는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갈 것이다.”18)라고 하였는데, 시인은 공자가 말한 것처럼 도가 행해지지 않아 바다로 나선 것이 아니라 형인 조비에 의해 강제 로 옹구에 봉해진 것이니 “뗏목 타고 나선 것이 어찌 뜻한 바이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다음으로 「吁嗟篇」19)을 보면 다음과 같다.

吁嗟此轉蓬, 아! 굴러다니는 다북쑥이여! 居世何獨然. 세상살이 어찌 이리도 어려운가. 長去本根逝, 오랫동안 뿌리에서 떠났으니 夙夜無休閒. 밤낮으로 한가로울 때가 없구나.

…… ……

飄颻周八澤, 훨훨 날아 팔택을 두루 다니고 連翩歷五山. 홀로 외로이 오악을 넘나드네. 流轉無恒處, 이리저리 떠돌며 정해진 처소 없음에 誰知吾苦艱. 누가 내 이런 고달픔 알겠는가. 願爲中林草, 원컨대 깊은 숲 속의 풀이 되어

秋隨野火燔. 가을이면 들불에 의해 태워지길 바랄 뿐. 糜滅豈不痛, 재로 사라지면 어찌 비통하지 않겠냐마는 願與根荄連. 원컨대 뿌리와 이어지길 바랄 뿐이지.

이 시는 조비가 죽은 후인 태화 3년(229) 東阿로 봉지를 옮겨 魚山에서 불교에 심취할 때 지은 것으로, 봉지를 떠돌아다니며 건공입업의 기회가 요원해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탄식을 그렸다. 마지막 네 구에 등장 하는 “中林草”·“野火”·“”·“根荄” 등은 숲속의 풀이 들불에 의해 재가 되어 다시 뿌리와 이어지길 바라 는 뜻에서 나온 시어들로, 불교의 윤회사상에 기인하였다. 여기서 뿌리란 ‘같은 뿌리[同根]’의 의미를 지니며 즉, 형제간을 뜻한다.20) 당시까지 일곱 차례나 작위가 바뀌고 실제로 세 차례나 봉지를 옮겨 다닌 시인21)

16) 순임금이 巡狩하다 사망하여 묻힌 곳.

17) 洞庭湖와 湘水로 흘러드는 아홉 줄기 물길. 순임금이 죽자 그의 妃인 娥皇과 女英도 상강에 뛰어들어 상수의 女神이 되었다 고 한다.

18) “道不行, 乘桴浮於海.”

19) 이 시를 지은 시기는 태화 3(229) 東阿王 시절로 추정한다. 20) 이미 「칠보시」에 등장한 바 있다.

21) 그는 「遷都賦序」에서 余初封平原, 轉出臨淄, 中命鄄城, 遂徙雍丘, 改邑浚儀, 而末將適於東阿. 號則六易, 居實三遷, 連遇瘠 , 衣食不繼.”라고 직접 술회하였다. 이후 太和 6(232)에 다시 陳郡으로 봉해져 陳王이 되었다. 그리고 사망하였다. 시호

(8)

형제간의 간극에 대한 비애와 조비 부자에 대한 원망을 하면서도 죽어서라도 뿌리가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애절한 갈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북쑥[蓬]’ 외에 자신을 물위에 떠 있는 풀[浮萍草]로 비유하여 시의 興을 유발하고, 마음 떠난 남편이 다 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아내의 입장에서 쓴 시가 있다.

浮萍寄清水, 부평초는 맑은 물에 기생하며 隨風東西流. 바람 따라 사방으로 흘러 다닙니다. 結髮辭嚴來, 쪽을 찌고 부모님과 작별한 뒤 來爲君子仇. 이리로 와 당신의 아내가 되었지요.

…… ……

在昔蒙恩惠, 그래도 옛날에는 은혜를 입어 和樂如瑟琴. 금슬처럼 화목하고 즐거웠지만, 何意今摧頹, 어찌 지금 꺾이리라 생각이나 했을까요? 曠若商與参. 마치 상성과 삼성처럼 서로 멀어졌군요.

…… ……

悲風來入懷, 슬픈 바람이 마음속으로 불어드니 漏下如垂露. 눈물이 이슬처럼 흘러내리네요. 發箧造裳衣, 상자를 들추어 옷을 지으려고

裁縫纨與素. 흰 깁과 고운 비단으로 마르고 꿰맨답니다.

이 시는 「浮萍篇」으로, 화자는 나이가 들어 버림받은 불행한 한 여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전형적인 棄婦 詩이다. 이 작품도 위의 시들과 마찬가지로, 낭군님은 바로 임금이자 형인 조비를 의미한다. 자신에게서 이 미 마음이 떠나 버린 형을 향한 원망과 혹시나 하는 희망이 복합적으로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을 때론 가마솥 안의 콩으로, 때론 정의로운 소년의 형상으로, 때론 버 림받은 부인이나 짝을 찾지 못한 여인으로, 때론 정처 없이 떠도는 다북쑥이나 부평초로 묘사하며 탄식과 원 망을 피력하였다. 이런 종류의 시가 가장 많이 보인다.

2. 은총에 대한 맹목적 갈구

조식은 학술적으로 지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역사 인식에도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어 건안시기 가장 많은 영사시를 지었다,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통하여 교묘하게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곤 하였는데, 이러한 경우 ‘言外之意’를 잘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豫章行」 제 1수를 보면 아래와 같다.

陳思王이라 부른다.

(9)

窮達難預圖, 곤궁과 영달 미리 꾀하기도 어렵지만 禍福信亦然. 재앙과 행복 또한 확실히 그러하다. 虞舜不逢堯, 순임금이 요임금을 만나지 못했다면 耕耘處中田. 논밭을 갈고 김을 매며 살았을 테고, 太公未遭文, 강태공이 주 문왕을 만나지 못했다면 渔釣終渭川. 위수에서 낚시하며 삶을 마쳤으리라. 不見魯孔丘, 노나라의 공구를 보지 못했는가?

窮困陳蔡間.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궁에 빠졌었다. 周公下白屋, 주공은 빈천한 선비에게도 몸을 낮추어서 天下稱其賢. 천하 사람들은 그를 어질다 칭송하였다.

이 시는 곤궁과 영달 그리고 재앙과 행복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탄식하면서 네 가지 역사적 사 실을 열거하였다. 요임금과 순임금, 주 문왕과 강태공, 초나라 제후와 공자, 그리고 주공과 賢才 즉, 통치자 와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궁달과 화복의 필연적 관계를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이것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회재불우한 자신의 울분에서 시작하여 나아가 건공입업의 기회를 줄 것을 우회적으로 희 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제 2수를 보면 아래와 같다.

鴛鴦自朋親, 원앙은 저절로 짝지어 가까워도 不若比翼連. 눈과 날개를 연결한 비익조만 못하다. 他人雖同盟, 다른 사람들은 동맹을 맺을 뿐이지만 骨肉天性然. 뼈와 살을 나눈 형제는 천성이 그러하다. 周公穆康叔, 주공은 강숙과 화목하게 지냈지만 管蔡則流言. 관숙과 채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子臧讓千乘, 자장이 제후 자리를 양보하자 季札慕其賢. 계찰은 그를 어질다 흠모하였다.

이 시는 두 가지 점을 말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원앙과 비익조를 비교하여 주위의 신하들보다는 피를 나 눈 형제가 낫다는 것이며, 둘째는 주공과 형제들의 고사를 들어 형제간의 반목과 비난을 아쉬워하면서, 나아 가 자신은 자장과 계찰의 고사를 통하여 제위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시는 태화 연간(227~233)에 나온 것으로 조비가 죽은 후의 작품이다. 명제 즉위 후 그는 여러 차례 奏請을 올려 건공입업의 기회를 줄 것을 요망하였으나 명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도 이런 희망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惟漢行」에서는 하늘의 도[天道]와 군주의 어진 정치[仁政]를 내 세우며, 복희씨와 신농씨를 비롯해 요, 순, 우, 탕과 주나라의 성군 등은 천명을 깨달아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누렸음을 차례로 열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네 구에 아래와 같이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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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昔懷帝京, 옛적에 머물던 도읍 생각하니 日昃不敢寧. 해가 기울도록 마음 편치 않구나. 濟濟在公朝, 조정에 인재가 많아진다면 萬載馳其名. 만대에 그 이름 떨칠 수 있으리라.

봉지를 옮겨 다니던 그는 언제나 마음은 조정을 향했고, 조정에는 많은 인재를 두어야 임금의 명성이 후대 에 길이 전해지리라 강변하였다. 언뜻 통치자에 대한 충언인 것처럼 보이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자신에게 건공입업의 기회를 주는 은총을 내려줄 것을 기대하며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怨歌行」은 또 다른 입장에서 쓴 것인데 아래와 같다.

爲君既不易, 임금 노릇하기도 쉽지 않지만 爲臣良獨難. 신하 노릇하기도 실로 어렵도다. 忠信事不顯, 충성과 신뢰가 드러나지 않으면 乃有見疑患. 의심의 화를 입게 된다네. 周公佐成王, 주공이 성왕을 보좌하면서도 金縢功不刊. 금등의 공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推心輔王室, 마음으로 왕실을 보좌하는데

二叔反流言. 관숙과 채숙이 거꾸로 낭설을 퍼뜨렸다.

…… ……

素服開金縢, 소복을 입고 금등을 열어

感悟求其端. 느끼고 깨달아 그 까닭을 구했더니, 公旦事既顯, 주공 단의 일이 드러나면서

成王乃哀歎. 성왕은 비로소 슬퍼하고 탄식했도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다음 해에 무왕이 병을 앓았다. 이에 주공은 조상들인 太王·王季·文王께 빌면 서 자신이 대신 죽기를 소원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용을 冊書로 남겨 상자에 넣고 쇠줄로 단단히 봉했 다. “金縢”은 바로 이 상자를 일컫는다. 성왕이 등극한 뒤 형제인 관숙과 채숙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공을 중상모략하자 성왕은 주공 주변의 인물을 처단하였다. 이에 주공은 동쪽 지방으로 피신해 3년 동안 머물면서 울분에 북받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하늘이 주공의 억울함을 알고 큰 재난을 내려 천재지변을 알리자, 성왕은 그 원인을 찾다가 주공이 상자 안에 넣어두었던 책서를 발견하고는 그의 충성심을 다시 깨닫고 슬퍼 했다. 시인 자신과 명제가 바로 주공과 성왕 즉, 숙질 관계로 동일하다는 점에 착안해 주공이 당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태화(太和) 2年(228) 명제가 長安을 순행하는데, 낙양에서는 장안에서 황제가 죽어 수행원들이 조식을 옹립하려 한다는 풍설이 떠돌았다. 이에 명제는 조식을 의심하였고, 조식은 위험에 처해 이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22)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숙질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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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인 주공과 성왕의 역사적 사실을 빌려 자신의 고뇌를 밝히고 군주의 은총을 감성에 호소하였다. 이상의 시 는 모두 전고를 이용하여 우회적으로 군주의 은총을 바랐지만, 직설적인 賦의 기법과 논리적인 설득으로 적 극적인 구애를 펼친 시도 있다. 「當牆欲高行」이라는 시가 그러하다.

龍欲升天須浮雲, 용이 하늘로 오르려면 뜬구름이 필요하고 人之仕進待中人. 사람이 벼슬을 하려면 후견인이 필요하다. 衆口可以鑠金,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일 수 있으니 讒言三至, 비방하는 말이 세 번에 이르면 慈母不親. 어머니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憤憤俗間, 번민에 찬 속세 사람들은 不辯僞眞. 거짓과 참을 구별하지 못한다.

願欲披心自說陳, 나는 마음을 드러내어 스스로 털어놓고자 하지만 君門以九重, 궁궐 문은 아홉 겹이고

道遠河無津. 길은 먼데다 강에는 나루터조차 없구나.

이 시의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황초 2년(221)에 監國謁者인 관균(灌均)이 조식 을 무고해 중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앞의 시에서 이미 언급한 태화 2년(228)에 있었던 명제 사망설과 조식 옹립설에 대한 결백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동기야 어찌 되었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은총에 대한 적극적인 갈구를 시도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군주의 덕 목을 강조하며 은총을 우회적으로 갈구한 시도 있다.

良木不十圍, 좋은 나무란 열 아름이 되지 않으면 洪條無所因. 큰 가지가 의지할 데 없고, 長者能博愛, 윗사람도 두루 사랑을 베풀어야 天下寄其身. 세상 사람들이 그 몸을 맡긴다네. 大匠無棄材, 대목수는 버리는 대목 없고

船車用不均. 배와 수레에 쓰는 나무 또한 다르다네. 錐刀各異能, 송곳과 칼은 기능이 각기 다른데

何所獨却前. 어찌 하나만 물리치거나 내세울 수 있겠는가. 嘉善而矜愚, 능한 자는 칭찬하고 우둔한 자는 불쌍히 여기니 大聖亦同然. 위대한 성인 역시 이와 같으리라

이 시구는 「當欲遊南山行」이라는 악부시의 일부분으로 포용의 미덕과 적재적소의 인재 등용이 필요함을 밝힌 것이다. 이런 뜻은 󰡔논어󰡕 「자장편」에 등장하는 “군자는 어진 이를 존경하고 뭇 사람을 포용하며, 선한 22) 萧涤非·姚奠中·胡国瑞等著, 󰡔汉魏晋南北朝隋诗鉴赏词典󰡕, 山西人民出版社, 1989, 218.

(12)

사람을 훌륭하게 여기되 능력 없는 사람을 동정한다.”23)에서 나온 것으로, 군주의 은총을 바라는 우회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人生有所貴尚, 사람이 태어나면 숭상하는 바가 있지만 出门各異情. 집에서 떠나면 각자 생각이 달라진다오. 朱紫更相奪色, 빨강과 자주는 서로 빛깔이 정통이라 우기고 雅鄭異音聲. 아악과 정성도 서로 소리가 뛰어나다 하지요. 好惡隨所愛憎, 좋아하고 싫은 것도 애증에 따라 달라지고 追擧逐虚名. 찾아서 추천하는 것도 헛된 명성만 쫓는다오. 百心可事一君, 온갖 생각으로 어찌 한 임금을 섬기겠소 巧詐寧拙城. 교묘한 속임수보다는 졸렬한 정성이 낫지요.

이 시는 「當事君行」이라는 작품으로, 인간의 본성과 부정직한 처세태도 그리고 비정상적인 인재등용에 일 침을 가하면서 졸렬하나 성실한 자만이 임금을 모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는 앞의 시에 비해 훨씬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혼란스러운 인간사회 현상과 비정상적인 정치 풍토 속에서 벌어지는 당시의 사태가 임금에게는 모두 위태로운 것임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중용을 위해 은총을 내려 줄 것으로 염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때론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거나 군주의 덕목을 강조하며 군주의 은총을 우회 적으로 표현하였고, 또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당시 조정의 위태로운 상황을 지적하면서 적극적으로 은 총을 갈구하였다.

3. 건공입업에 대한 적극적 천명

공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죽어서도 이름을 떨치지 못할까 염려한다.(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論語󰡕 「衛 靈公篇」)라고 하였다. 공자 이후 仁人과 志士들은 이런 인생관을 따르지 않은 자가 없었다. 건안문인들도 건 공입업으로 후세에 이름을 떨쳐야 한다는 ‘揚名後世’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조식 또한 일찍이 국가를 위해 공을 세워야한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건안 21년(216)에 쓴 「與楊德祖書」24)에 이르기를 “내가 비록 덕이 부족하고 지위가 지방의 제후이지만, 그래도 국가를 위해 온 힘을 바치고 아래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며, 영원히 후세에 전해질 공을 세우고 불후의 공적을 남기기를 희망하는데, 어찌 단지 글 짓는 것으로 공훈과 업적으로 삼을 것이며 사부를 짓는 것으로 군자가 되겠습니까?”25)라고 하였다. 「잡시」 제 5수를 보

23) “君子尊賢而容衆, 嘉善而矜不能.”

24) 이 글은 楊修와 문학비평에 관련된 문제를 논한 편지이다(이치수·박세욱 옮김, 󰡔조자건집󰡕, 소명출판, 2010, 537).

25) “吾雖薄德, 位爲藩侯, 猶庶幾戮力上國, 流惠下民, 建永世之業, 流金石之功, 豈徒以翰墨爲勳績, 辭賦爲君子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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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이러한 뜻이 잘 나타나 있다.

僕夫早嚴駕, 마부가 일찍부터 수레를 준비하니 吾將遠行遊. 내가 곧 먼 길을 떠나기 때문이다. 遠遊欲何之, 멀리 떠나 어디로 가려는가? 吳國爲我仇. 우리의 원수인 오나라로 가리라. 將騁萬里途, 장차 만 리 길을 달려가야 하는데 東路安足由. 동쪽 길을 어찌 경유할 수 있을까. 江介多悲風, 장강 언덕에는 슬픈 바람이 잦고 淮泗馳急流. 회수와 사수는 급류가 치닫는다. 願欲一輕濟, 단번에 손쉽게 건너고 싶으나 惜哉無方舟. 안타깝게도 방주가 없도다. 閒居非吾志, 한가로이 지내는 건 내 뜻이 아니니 甘心赴國憂. 기꺼이 나라의 우환 있는 곳으로 가리라.

이 시는 태화 2년(228) 조휴(曹休)가 오나라와의 石亭[지금의 안후이성 수청(舒城)현] 전투26)에서 크게 패 하자 등에 독창이 생겨 병사하는 사건이 터진 후 지은 시이다. 여기서 “東路”는 「贈白馬王彪」에 등장하는 것 으로,27) 도읍인 낙양에서 그의 당시 봉지인 鄄城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 여섯째 구인 “동쪽 길을 어찌 경유 할 수 있을까.”는 만 리 길 너머 오나라로 가 원수와 전쟁을 해야지 어찌 봉지로 갈 수 있겠는가? 라며 스스 로 각오를 다진 것이다. 하지만 오나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장강 언덕에는 바람이 격하고, 淮水와 泗水는 물길이 드세다. 그래도 마음은 가볍게 건너기를 원하나, 안타깝게도 方舟마저 없다. 이 모두 는 상상으로 일종의 간절한 소망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장강 언덕의 격한 바람과 회수·사수의 드 센 물길은 자신의 건공입업을 꺾는 방해물이고, 방주는 그의 마지막 희망이다. 따라서 전자는 군주를 에워싸 고 있는 위정자들이며, 후자는 군주인 조예를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지막 두 구 “한가로이 지내는 건 내 뜻이 아니니, 기꺼이 나라의 우환 있는 곳으로 가리라.”가 등장한 것을 보면, 이런 비유가 합당해 보인 다. 따라서 이 시는 건공입업에 대한 열망과 현실정치 상황 하에서 핍박 받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감과 불평이 동시에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시 「잡시」 제 6수28)를 보기로 하자.

26) 태화 2(228)에 위나라와 오나라가 江淮지역을 빼앗기 위하여 벌인 격렬한 전투이다. 당시 鄱陽태수인 周魴이 曹休에게 투항하겠다는 거짓 서신을 보내어 군대를 파병하면 적극 협조하겠노라고 하였다. 이에 조휴는 속아 십 여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땅으로 깊이 들어갔는데, 이에 손권은 陸遜·朱桓·全琮 등에게 삼 만의 군사를 주어 石亭에서 싸우도록 하 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27) “泛舟越洪濤, 怨彼東路長

28) 이 시를 지은 시기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건안 19(214) 음력 7월에 조조가 오나라를 치러 간 후 조식이 도읍 을 지키고 있을 때 지은 것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태화 2(228) 겨울에 제갈량이 촉나라 군사를 이끌고 陳倉을 포위하자 명제가 張郃을 파견하면서 친히 河南城까지 배웅했을 때 지은 것이라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설을 따랐다. 그래서 太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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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觀百餘尺, 높은 망루는 백 자가 넘어서 臨牖御櫺軒. 창가로 다가가 난간에 기대노라. 遠望周千里, 멀리 주변 천 리 밖을 바라보는데 朝夕見平原. 아침저녁으론 평원이 한눈에 보이는구나. 烈士多悲心, 열사는 애통한 마음이 많지만

小人偷自閒. 소인은 스스로 한가하기만을 꾀하지. 國讎亮不塞, 나라의 원수 제대로 막지 못해 甘心思喪元. 기꺼이 목숨 바칠 생각뿐이로다. 拊劍西南望, 칼 어루만지며 서남쪽 바라보고 思欲赴太山. 태을산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일세. 絃急悲聲發, 악기 줄 급해지면 슬픈 소리 나니 聆我慷慨言. 비분강개하는 내 말 좀 들어 보소서.

이 시는 대체로 네 구씩 세 절로 나누어 해석한다. 첫 네 구는 높은 망루에서 바라보는 경물을 통해 시인 의 뛰어난 기상과 원대한 포부를 구현하였고, 다음 네 구는 ‘열사’와 ‘소인’을 비교하며 기꺼이 목숨 바쳐 조 국을 구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피력하였다. 마지막 네 구는 앞의 내용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하여, 당장이라도 태을산29)으로 달려가 격퇴시키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좀 알아나 달라고 하소연하였다. 건공입업에 대한 갈망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薤露行」을 보면 인생무상과 건공입업의 염원 불성취, 군주에 대한 여전한 충성과 숭배, 건공입업 의 새로운 방향 모색을 순차적으로 밝히고 있다.

天地無窮極, 하늘과 땅은 끝이 없고 陰陽轉相因. 해와 달은 번갈아 도는데, 人居一世間, 사람 사는 한 세상이란

忽若風吹塵. 바람 불면 사라지는 먼지 같도다. 願得展功勤, 원컨대 공업을 떨칠 기회 얻어 輸力於明君. 현명하신 군주께 역량 바치고 싶고, 懷此王佐才, 임금을 보좌할 재주 품고 있으나 慷慨獨不群. 홀로 강개하니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네. 鱗介尊神龍, 수중 동물은 신령스런 용을 우러르고 走獸宗麒麟. 길짐승들은 기린을 으뜸으로 치니, 蟲獸猶知德, 물고기와 짐승도 이런 덕을 아는데 何况於士人. 하물며 사인들에게 있으서랴.

太乙山으로 번역하였다.

29) 촉나라가 위나라를 치기 위한 최고 요충지로, 陝西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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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氏删詩書, 공자가 시경과 서경을 산정해 王業粲已分. 왕업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으니, 騁我徑寸翰, 나도 지름 한 치 붓을 맘껏 놀려서 流藻垂華芳. 아름다운 글을 전하여 명성을 떨치리라.

「薤露行」은 고대 악부의 곡조명으로 挽歌의 일종이다. ‘해로’는 사람의 목숨이란 부추 위에 서린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악부시에서는 굳이 곡조명과 내용이 같을 필요는 없지만, 이 시에서는 제목과 관 련지어, 처음 네 구는 인생무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충성과 재능늘 얘기하며 독야청청함을 밝히고, 군주에 대한 존경과 숭상은 자신과 같은 사인들에게는 오랜 덕목임을 천명한다. 하지만 구국의 기회가 주어 지지 않으니 방향을 틀어 시경을 정리하고 서경을 편찬하여 군주의 대업을 이룬 공자를 생각한다. 이에 자신 도 글로써 공덕을 쌓아 명성을 떨치는 유가의 立德·立功의 정신으로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그런데 이상의 세 수는 모두 명제의 등극 후에 지은 작품으로, 건안 21년(216) 즉, 청년시절에 쓴 「與楊德 祖書」와는 많은 시간적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황초 연간에는 건공입업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시를 통해 적극적으로 천명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4. 현실의 비애와 암묵적 비판

조식은 曹魏가 건국된 후 조비와 조예에 의해 봉지가 여러 번 바뀌면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경험했다. 그 곳에서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목격하였는데, 이를 「梁甫行」이라는 시에 담았다.

八方各異氣, 팔방은 기후가 제각각이고 千里殊風雨. 광활한 땅엔 비바람이 다르도다. 劇哉邊海民, 고달프구나, 변방 바닷가의 백성은 寄身於草墅. 풀로 엮은 농막에 몸을 맡기고, 妻子象禽獸, 처와 자식들은 짐승처럼 行止依林阻. 거친 숲속에 의지하며 살아가네. 柴門何蕭條, 사립문 안이 어찌나 적막한지 狐兔翔我宇. 여우와 토끼가 어슬렁거리는구나.

이 시는 白描의 수법으로 변방 바닷가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과 황량한 광경을 내세우는 동시에, 이를 통해 당시 위정자들의 실정을 암묵적으로 비판하는 효과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내용은 다르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는 백성들의 실상을 읊은 시가 또 한 수 있다. 바로 「門 有萬里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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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有萬里客, 문 앞에 만 리 길을 온 나그네 있어 問君何鄕人. 그에게 어느 고을 사람인지 물어본다. 褰裳起從之,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일어나 그를 쫓아가니 果得心所親. 마침내 마음이 통하는 자 얻게 되었다. 挽裳對我泣, 옷을 끌어당기며 나를 보고 울면서 太息前自陳. 탄식하며 앞에서 털어놓는다. 本是朔方士, “본시 북방의 선비였는데 今爲吳越民. 지금은 오월의 평민이라오. 行行將復行, 가고 가고 또 가고

去去適西秦. 떠나고 떠나 서진으로 가렵니다.”

삼국 시대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란의 와중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백성의 괴로운 삶을 “萬里客”을 통 해 표현했다. 그런데 시인은 객관적 사실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담시켜 ‘만리객’과의 심리적 동화 를 시도했다. 어느 고을 사람인지 묻는 분위기가 친근하고, 얼른 그를 쫓아 나설 만큼 호감을 느끼며, 마치 고향사람처럼 친근한 마음을 가진 것 등이 이런 시도에서 나온 결과다. 전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괴로운 삶은 위정자들의 책임이며, 만리객과의 심리적 동화를 시도한 것은 조비와 조예 부자의 핍박을 받아 몇 번이나 봉 지를 옮긴 자신의 비애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情詩」30)는 전란으로 멀리 부역을 떠난 남편을 오랜 세월 뒤 만나게 된 아내가 현실의 비애를 탄식한 시로, 이것 역시 전란을 통해 겪는 아내의 원 망과 슬픔을 통해 위정자들에 대한 암묵적 비판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전란으로 인한 현실의 비애 와 암묵적 비판을 시도한 것들이다.

또 다른 부류의 시로는, 자신을 나그네에 비유하여 현실의 비애를 탄식하면서 비유를 통해 군주의 주변 인 물들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시도 있다.

悠悠遠行客, 아득히 먼 길 가는 나그네 去家千餘里. 집 떠나 천여 리가 되었네. 出亦無所之, 나가면 갈 곳 없고 入亦無所止. 들어오면 쉴 곳 없도다. 浮雲翳日光, 뜬구름은 햇빛을 가리고

悲風動地起. 슬픈 바람은 땅을 흔들며 이는구나.

이 시는 「잡시」 2수 중의 제1수이다. 앞의 네 구는 아득히 먼 봉지로 쫓겨난 시인은 천 길 떠난 나그네처 럼 나가서나 들어와서나 마음 편히 쉴 곳이 없다는 것을 직설하였지만, 마지막 두 구에 ‘뜬구름’·‘햇빛’·‘슬 픈 바람’ 등이 차례대로 등장하여 언뜻 자신이 머무는 곳의 氣象을 묘사한 듯하나, 실은 모두 비유적으로 쓴 30) “眇眇客行士, 徭役不得歸. 始出嚴霜結, 今来白露晞. 遊者歎黍離, 處者歌式微. 慷慨對嘉賓, 凄愴内傷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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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이다.31) ‘뜬구름’은 ‘조정의 간신배’를, ‘햇빛’은 ‘임금’을, ‘슬픈 바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슬픈 감정’을 비유한 것이다.

조식은 사망 1년 전인 태화 5년(231)에 명제의 부름을 받고 입궁하여 호사스런 정원에서 여인네들과의 향 락을 즐기는 군주의 모습과 술과 안주 그리고 여색으로 점철된 집권층의 환락 행태를 「妾薄命行」 두 수에 담았다. 제 1수를 보면 아래와 같다.

攜玉手, 주옥같은 손을 잡고 喜同車, 즐겁게 수레 타고 가서는

比上雲閣飛除. 북쪽으로 구름 속 누각의 높은 계단을 오르네. 釣臺蹇産清虛, 낚시하는 누대는 높고 맑고 깨끗하며

池塘靈沼可娱. 연못에 고인 물을 보니 가히 즐길 만하도다. 仰泛龍舟綠波, 고개 들면 푸른 파도에 용주가 떠 있고 俯擢神草枝柯. 고개 숙여서는 가지에서 부용을 따노라. 想彼宓妃洛河, 저 낙수의 복비를 생각하면서

退詠漢女湘娥. 물러나서는 한수의 강비와 상수의 아황을 읊조린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전혀 거부감이 없다. 누가 봐도 주인공의 화려한 사랑 얘기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인을 洛水의 宓妃나 漢水의 江妃 그리고 湘水의 娥皇까지 동원하여 신녀 혹은 선녀로 미화하여 최 고의 연인으로 묘사하였다. 그래서 이 시는 조비의 정식 부인이자 조예의 생모인 甄夫人과의 銅雀臺의 로맨 스를 시인이 회상하며 지은 것이라 한다.32) 하지만 주인공이 조예라고 가정한다면 사정은 달라져 군주와 후 궁이 궁중에서 벌이는 유락 행태로 바뀐다. 물론 전자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리고 제 2수와 내용을 연결시켜 봐도 후자가 더 잘 어울린다. 제 2수는 아래와 같다.

日既逝矣西藏, 해가 이미 기울어 서쪽으로 숨으니 更會蘭室洞房. 난 향기 가득한 내실에서 다시 만나네. 華燈步障舒光, 화려한 등불이 병풍 안에서 빛나니 皎若日出扶桑. 부상에서 떠오르는 햇빛처럼 환하도다. 促樽合坐行觴, 술 단지 곁에서 함께 앉아 술을 따라 돌리니 主人起舞娑盤, 주인은 몸을 일으켜 빙빙 돌며 춤을 추고 能者穴觸别端. 춤에 능한 자는 닿았다 떨어졌다 잘도 춘다.

31) 「古詩十九首」 제 1수에 이미 浮雲蔽白日, 遊子不顧返라는 시구가 있다.

32) 󰡔昭明文選󰡕 「洛神賦」의 李善의 주해를 보면, 처음 甄妃와 결혼하고자 한 자는 조식인데 조비가 그녀를 가로채자 오매불망 잊지 못하다, 그녀가 죽은 후에 조비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조비가 견비의 베개를 보여주자 한바탕 크게 울었다고 한다. 에 조카인 조예가 조식에게 아예 베개를 건네주자, 조식은 가슴에 품고 봉지로 돌아오면서 낙수를 지날 때 견비를 만나 밀 회를 즐기는 꿈을 꾼 후 이 부를 지었다고 한다. 견비는 건안 9(204)에 조비의 후궁으로 들어와 건안 16(211)에 정식 부인이 되었다. 조식 나이 13~20세 때의 일이다. 견비에 대한 사모의 정은 성장기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18)

…… ……

進者何人齊姜, 시중드는 여인이 누구냐면 제나라 강씨 같은 미인이라 恩重愛深難忘. 은정도 많고 사랑도 깊어 잊기 힘들다네.

召延親好宴私, 친구들을 불러 잔치 벌여 놀면서

但歌杯來何遲. 단지 “술잔이 어찌 이리 더딘가?”라고 노래하네. 客賦既醉言歸, 손들은 이미 취해서 돌아가자고 하나

主人稱露未晞. 주인은 아직 이슬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네.

저녁이 되자 친구들을 내실로 불러 잔치를 벌이며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여색을 즐긴다. 손들은 이미 취 했다고 돌아가고자 해도 주인은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무슨 얘기냐며 계속 잡는다. 언뜻 보면 주인과 손들이 일체가 되어 밤새도록 잔치를 즐기는 모습을 그려놓은 듯하다. 전혀 분위기를 건드리지 않고 아무런 비분강개함도 없이 목도한 그대로 순수하면서도 정교하게 그렸다. 마치 상세히 기사를 쓰듯이 집권층의 주육 과 여색으로 점철된 철야 잔치와 주인의 황음무도한 행태를 상세하게 노출시켰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에 주 관적인 감정이 충분히 가미되었다. 시에 등장하는 물상이나 정황은 모두 시인의 감정에 의해 선택되고 그려 지기 때문이다. 조식이 죽기 몇 년 전부터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데, 독자들로 하여금 시인의 감정을 느끼며 좌절감을 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바닷가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의 삶을 통해 암묵 적으로 위정자들의 실정을 비판하였고, 또한 자신을 나그네에 비유하여 현실의 비애를 탄식하며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용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군주와 후궁의 유락행 태와 집권층의 호화잔치를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위정자들에 대한 암묵적 비판을 가하였다.

5. 신선세계를 향한 정신적 해탈

조식은 「辨道論」에서 도사나 방사들이 행하는 도가 황당하고 근거 없다는 것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논증 하였다. 「변도론」은 傅亞庶의 견해에 따르면 건안 24년(218)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황초 4년 (223)에 지은 「贈白馬王彪」 제 7수에는 ”여러 신선 구했으나 헛된 짓이고, 적송자는 오랫동안 나를 기만했 다. 변고가 순식간에 일어나는데, 백 년을 누가 보전할 수 있으리.”33)라는 시구가 등장하는데, 求仙은 헛된 짓으로 결코 인생에 안위를 가져다 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辨道論」은 조조를 도와 여론을 주도하 고 황건적의 난 같은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글이다.34) 그리고 「贈白馬王彪」는 백마왕인 조 표와 천자를 알현한 뒤 봉지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동행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받아 정권실세에 대한 불만과

33) “虛無求列仙, 松子久吾欺. 變故在斯須, 百年誰能持.”

34) 조조는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각 지역의 도사나 방사들을 불러 鄴城에 모아놓고 이단 잡설이 사방에 퍼지지 않도록 여론을 주도하려 하였다. 또한 당시 유행한 方術과 玄談에 현혹되어 黃巾賊의 난 같은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취지 였을 것이다(이치수·박세욱 옮김, 󰡔조자건집󰡕, 소명출판, 2010, 568).

(19)

미래에 닥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한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쓴 시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유선을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전란 중에 태어나 군영에서 자랐다고 하지만, 귀족 왕자로서의 화려한 생활35)과 가정에서의 유가 전 통사상 습득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교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영향은 필연적이며, 동한시기부터 성행한 불교의 사상관념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그의 유선시는 종교적인 敎義를 떠나 도교와 불교가 창작 배경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감금이나 다름없는 봉지 생활을 하면서도 건공입업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조비와 조예에 의해 그의 건공입업에 대한 희망이 철저히 무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압제로 돌아오자 회재불우한 자신의 사색과 고뇌는 혼자 삭일 수밖에는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속세로부터의 탈피와 정 신적 만족을 위하여 시공을 초월한 선인이나 선경을 노래하면서 상상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생명에 대한 소망을 담아 유선시를 지었다.

그의 유선시는 모두 11수로 「仙人篇」·「升天行」 2수·「遊仙」·「五遊詠」·「平陵東」·「苦思行」·「遠遊 篇」·「桂之樹行」·「飛龍篇」·「驅車篇」 등이 있다. 대부분 그의 정치적 사회적 이상과 파멸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또한 조식의 생존 상황과 정신 상태의 한 측면이 함축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먼저 「선인편」을 보기로 하자.

仙人攬六著, 신선들은 박저 여섯 개를 쥐고 對博太山隅. 태산 모퉁이에서 육박을 노네. 湘娥拊琴瑟. 상강의 여신은 금과 비파를 뜯고 秦女吹笙竽. 진나라 여인은 생황과 피리를 부네. 玉樽盈桂酒, 옥 술통에는 계화주가 가득하고 河伯獻神魚. 하백은 신령스런 물고기를 바치네. 四海一何局, 사해는 어찌 이리도 좁으며 九州安所知. 구주는 어디 갈 데가 있는가. 韓終與王喬, 한종과 왕자교는

要我於天衢. 넓고 푸른 하늘로 나를 오라하네. 萬里不足步, 만 리가 한 걸음이 채 안 되어 輕擧凌太虚. 가볍게 날아 하늘에 올랐도다. 飛騰踰景雲, 높이 날아 상서로운 구름 넘자 高風吹我軀. 천상의 바람이 내 몸에 불어오네. 回駕觀紫薇, 수레 돌려 자미궁 바라보고 與帝合靈符. 천제와 신령스런 부적을 맞추노라. 閶闔正嵯峨, 하늘문은 정중앙에 우뚝 솟았고

35) 「鬪鷄詩」가 좋은 예이다.

(20)

雙闕萬丈餘. 양쪽 망루는 만 길이 넘는구나. 玉樹扶道生, 옥수는 길을 따라 자라 있고 白虎夾門樞. 백호는 문지도리를 끼고 있네. 驅風遊四海, 바람을 몰아 사해에서 노닐고 東過王母廬. 동쪽으로 서왕모의 거처를 지나간다. 俯觀五嶽閒, 오악 사이를 굽어보니

人生如寄居. 인생이란 잠시 덧붙어 사는 것 같네. 潜光養羽翼, 숨어 살며 날개 길러서

進趨且徐徐. 서서히 하늘로 나아가리라. 不見軒轅氏, 보지 못했는가, 황제께서 乘龍出鼎湖. 용을 타고 정호에서 떠나는 것을. 徘徊九天上, 구천을 배회하며

與爾長相須. 오래오래 그대를 기다리노라.

이 시는 먼저 상상 속의 선계 모습을 그렸고, 이어서 선계를 찾는 이유와 선계 도착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선경의 아름다움과 광활함, 선인 생활의 자유스러움과 쾌락을 과장되게 묘사하여 협소하고 막막한 인 간세계와 턱없이 짧고 덧없이 지나가버리는 인생을 역으로 부각시켰다.36)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九 州”와 “中州”로 표현하여 선경과 대비하였고, “사해는 어찌 이리도 좁으며, 구주는 어디 갈 데가 있는가.”와

“오악 사이를 굽어보니, 인생이란 잠시 덧붙어 사는 것 같네.”라고 한 네 구는 천하에 발 둘 곳이 없다는 탄 식과 비애를 표현한 것이다.37) 이것이 바로 선경을 추구한 조식의 진정한 이유이며, 대부분 조비의 무정한 핍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선계에 대한 묘사는 처음 여섯 구(仙人攬六著~河伯獻 神魚)와 제 13~20구(飛騰踰景雲~白虎夾門樞)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열 구(驅風遊四海~與爾長相 須)는 선계를 노니면서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염원을 담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는 「桂之樹行」

이 있다.

위에 제시한 두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도 내용과 결구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크게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遊仙詩」는 짧은 인생, 근심과 괴로움 그리고 두려움이 더 많은 속세를 떠나 羽化升天하여 자유자재 로 하늘을 날며 사방 끝까지 유람을 떠나는 내용을 담았다. 「五遊詠」은 협소한 속세를 떠나 하늘세계에 이르 러 자유스럽고 안락한 선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묘사하고 장생불사의 염원을 담았다. 이와 거의 유사한 작 품으로 「遠遊篇」이 있다. 「平陵東行」은 비룡을 타고 선계에 올라 신선들과 영지를 캐서 먹고 동왕부처럼 장 생불사하기를 염원하였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는 「飛龍篇」이 있다. 「苦思行」은 마음은 선계를 향했으나 쫓아갈 방도가 없어 서악에 머무는 은사를 만나 “忘言”하라는 가르침을 받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망언’은 바

36) 이런 것을 反襯法이라 한다. 상반되는 사람이나 사물을 설정하여 역으로 돋보이게 하는 돋보이게 하는 수사 기법이다. 선시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37) 이와 같은 탄식과 비애는 「五遊詠」의 九州不足步, 願得陵雲翔”, 「遊仙詩」의 人生不滿百, 排霧陵紫虛등의 시구에도 나타 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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